13장 부름 : 재촉한 망나니
아르니아 대륙 중남부.
버려진 폐허.
반쯤 무너진 성 지하.
익숙한 원탁이 보인다.
모두가 알다시피 이곳은 황혼의 수뇌부가 정기적으로 회의하는 장소다.
작은 소년의 외형을 한 식탐.
키큰 거인의 외형을 한 분노.
금발 미인의 외형을 한 색욕.
해골 리치의 외형을 한 오만.
마지막으로 시온과 똑닮은 보라색 머리카락에 노출 심한 옷을 입은 나태와 회색 후드로 온몸을 꽁꽁 싸맨 황혼교주가 자리했다.
원래라면 교주를 포함해서 여덟 개의 의자가 모두 차있어야 했으나 왜인지 여섯 개의 의자에만 사람이 앉아있었다.
그래서일까.
회의장의 분위기는 이보다 안 좋을 수 없을 정도로 착 가라앉았다.
“그래서 탐욕은 어떻게 된 거야?”
오늘도 어김없이 게임기를 만지작대다가 교주에게 한소리 들은 식탐이 볼멘소리를 내뱉는다.
“나태, 너는 알겠지. 대륙의 모든 소식은 네 귀에 들어갈 테니 말이야.”
대륙 최고의 정보 길드인 ‘흑야’를 운영하는 나태에게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그녀의 고운 입술이 천천히 움직인다.
“예전에도 탐욕이 연락두절된 경우는 많았다.”
“그래도 이 정도로 오랫동안 잠적한 적은 없었잖아. 안 그래?”
“그래서 내가 좀 알아본 바로는···”
“바로는?”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나태가 내린 결론에 식탐이 입을 닫았다.
황혼교주가 이어서 물었다.
“정말로 죽었나?”
“시체는 나오지 않았지만 거의 확실합니다.”
“범인이 누군지는 알아냈고?”
“주변에 수소문한 결과 실종 즈음에 리앙에서 톰의 모습이 목격되었습니다. 정황상 녀석이 한 짓이 분명합니다.”
분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톰이라···처음 듣는 이름인데.”
“스스로 순례자라 칭하는 집시 놈.”
“혹시 잡동사니 들고 다니던 그놈인가?”
“맞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분노와 달리 황혼교주는 톰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톰이라면 세븐 스타 중 일인이군.”
“맞습니다. 탐욕도 과거 집시 출신이었으니 둘 사이에 앙금이 있었을 겁니다.”
“원한 관계를 청산했다는 건가.”
“일단은 그렇게 파악됩니다.”
손가락 끝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던 황혼 교주가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질투에 이어서 탐욕까지 허무하게 죽었다라···이것 참 실망이군.”
고오오오오
중력이 내리누르자 백 년 가뭄이 찾아온 황무지처럼 지반이 쩍쩍 갈라진다.
성 전체가 흔들리며 천장에서 돌 부스러기가 소나기처럼 쏟아진다.
질식할 것 같은 압박감에 낯빛이 창백해진 칠대 사도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겨우 버텨냈다.
얼마나 지났을까.
영겁과도 같던 순간이 지나고.
방금까지 전신을 옥죄었던 기운이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히 사라졌다.
“내가 너희 능력에 의문 가질 일이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군. 다음에도 비슷한 일어나면 사도를 교체하는 방안도 고려하겠다.”
“명심하겠습니다. 교주님.”
“교주니임~걱정하지 마세요. 탐욕과 질투는 멍청해서 당했을 뿐이에요. 호호호!”
오만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고 색욕은 콧소리로 아양을 떨며 애써 분위기를 환기했다.
나태와 분노, 식탐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지. 드루이드 수색과 황금가지 탐색은 어찌 돼가고 있나?”
황혼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20년 전 봉인된 마왕 바알의 부활.
이를 위해서 간부들은 황금가지가 봉인을 풀 열쇠라 여기고 전 대륙을 수색하고 있었다.
참고로 황금가지는 바알의 봉인이 아니라 천마의 봉인을 풀 열쇠다.
그리고 황금가지와 더불어 드루이드 수색도 병행했다.
이는 드루이드가 태어날 때부터 황금가지가 어디에 있는지 느낄 수 있다는 황혼교주의 설명 때문이었다.
이 또한 근거 없는 낭설이었는데, 어째서 황혼교주가 이런 명령을 내렸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교주의 말을 듣고 색욕이 나섰다.
“벨라누스 신성국을 이잡듯이 뒤졌는데 황금가지와 드루이드는 코빼기도 안 보였어요. 적어도 신성국에는 없는 것 같아요.”
이어서 나태의 차례.
“칼론 제국은 워낙 넓어서 전부 확인은 힘들지만 정보망을 총동원했습니다. 황제가 숨기고 있는 게 아닌 이상 수도엔 없는 게 확실하고 현재 수색 범위를 변방까지 확장 중입니다.”
오만과 식탐, 분노도 덧붙였다.
“제가 다스리는 자치령에도 없었습니다. 언데드가 활보하는 땅인데 황금가지가 있었다면 금세 눈에 띄었겠지요.”
“야수들을 풀어서 대륙 서남부 지역을 다 뒤지고 있는데 못 발견했대요.”
“나는 이곳을 지키는 문지기라 이동한 적이 없었다. 교주여.”
간부들의 보고를 받은 황혼교주가 턱 끝을 까딱였다.
“종말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 수색의 고삐를 늦추지 마라. 황금가지를 전부 모은 순간이 본교의 숙원이 이루어지는 날임을 명심하도록.”
“““예!!”””
우렁찬 기합이다.
황혼교주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건 그렇고. 누구였더라? 홍염의 카리나와 함께 질투를 잡는데 일조했다는 애송이 놈이 있지 않았더냐?”
회의장에 맴도는 침묵.
나태의 입이 떨어졌다.
“헤논입니다.”
“그래. 맞아. 그런 이름이었어. 놈은 어찌 되었나?”
“탐욕이 처리하기로 했습니다만, 바보같이 당했으니 임무를 맡을 사람이 없습니다.”
“흠, 그렇게 됐구먼.”
“영명하고 위대하신 교주님께서 관심을 주시기엔 과분한 미물입니다. 안 그래도 놈의 친부가 세븐 스타라 건드리기도 애매한데 나중에 처리하시지요.”
“싸이코 언니야, 그 건은 나한테 맡겨.”
갑자기 색욕이 끼어들었다.
혀로 입술을 핥으며 느끼한 포즈를 취하던 그녀가 피식대며 말했다.
“마침 우리 신성국에 재미있는 첩보가 들어왔거든. 그놈은 이번 기회에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아.”
나태가 잠시 뜸을 들인다.
그녀는 항상 무표정이다.
감정 따윈 일체 없는 얼굴.
무심하게 툭 던진다.
“어떤 일인지 알 수 있나?”
“비밀이야.”
“그러면 헤논 건은 색욕에게 일임하지.”
“네~교주님~맡겨만 주세요.”
회의가 종료되고.
간부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마지막 분노까지 쿵쿵거리며 퇴장하자 남은 건 황혼교주 혼자였다.
“흐흐흐, 진짜 금방이로구나. 느껴진다. 동북부에서 꿈틀대는 바알의 준동이.”
음산하게 웃던 황혼교주의 신체가 땅바닥과 착 달라붙더니 아래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마치 물에 빠진 듯 하반신부터 천천히 내려가더니 어느새 전신이 바닥과 합일되어 어디론가 사라졌다.
텅텅 빈 회의실에는 이내 싸늘한 바람 한줄기만이 휑하니 불었다.
* * *
엘프전을 마무리 짓고 개선장군이 되어 로이드 후작성으로 귀환했다.
이제는 내가 입성할 때마다 영지민들이 좌우로 늘어서서 나를 환영하는 게 연례행사다.
의심의 눈빛도 한두 번이지, 영지전부터 연달아 홈런을 날려서인지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에는 굳은 신뢰와 흠모가 담겨있었다.
후작가 내성 식구들도 환대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집사 세바스찬은 흐뭇한 표정으로 맞이해줬고 병사와 하인들은 선망의 표정으로, 일부 하녀는 몽롱한 눈빛으로 나를 하염없이 주시했다.
덕분에 내 전속 하녀인 시온도 연예인 대우를 받았다.
나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여인네 무리가 눈에 불을 켜고 시온을 우르르 따라다녔다.
물론 일과를 제외하고 모든 시간을 검술 수련에 투자하는 시온에게는 귀찮은 존재일 뿐이었다.
현재 내 위치는 집무실.
로이드 후작과 대면 중이다.
탁자에는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잔이 놓여있었다.
“이번에도 제대로 활약했더구나.”
로이드 후작이 운을 뗐다.
“별 것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네 능력이 워낙 출중하니 몰티성을 되찾을 줄은 알았다. 허나 거기서 더 나아갈 줄은 몰랐구나.”
“더 나아갔다 하시면 엘프의 본거지를 점령하고 리처드 대장로의 음모를 막은 걸 말씀하십니까?”
“그 활약도 경악스러운데 무엇보다 피엔토 자작을 위시한 다른 영주들까지 포섭한 게 더 대단하구나. 벽창호 같은 양반들이 많이 어려웠을 텐데.”
주먹을 꽉 쥐고 흔들어 보였다.
“신분이고 출신이고 혈통이고 나발이고 얼굴 앞에 이걸 갖다 대니 전부 평등해지더군요.”
“으핫하하하!!! 장하다! 그래야 내 아들이지.”
배꼽을 쥐고 박장대소하던 그가 진정이 되자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가락으로 걷어냈다.
“참으로 고맙구나. 이번 엘프족의 준동은 가문 전체의 위기였다. 로이드 가문의 후계 구도를 의심하는 내부의 적과 영지를 공격하는 외부의 적이 안팎에서 양동작전을 벌였으니 말이다.”
나 또한 후작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번 전쟁에서 어떤 성과를 거두었냐에 따라 향후 가문의 운명이 크게 바뀌었으리라.
50점을 땄으면 50점만한 결과가, 70점을 땄으면 70점만한 결과가 따라왔을 텐데, 나는 100점 만점 시험에서 200점 성적표를 들고 왔다.
좋다는 수준을 한참 넘어 비현실적인 수준이니 앞으로 산하가문 포함 후작령 전체에서 잡음이 발생할 여지를 원천차단한 셈이다.
“완벽한 성공을 거둔 너에게 무슨 상을 내릴지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후작령의 후계자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보상이라니요. 부끄럽습니다.”
당연히 겉치례였고 속으로는 어떤 선물이 올까 침을 질질 흘리는 상태다.
“네 말이 맞다. 어차피 너는 내 모든 걸 물려받을 테지. 보아하니 돈도 많은 것 같더구나. 그래서 고민이 길었다.”
소파에서 일어난 그가 책상 위에 놓여있던 서책을 하나 집더니 내 앞에 놓았다.
“이게 무엇입니까?”
“예전에 나와 했던 대련이 기억나느냐?”
“물론입니다.”
기억을 못하는 게 이상하다.
리앙에 떠나기 전에 로이드 후작과 몇 번 검을 나눠보았다.
당시 서로가 전력을 다한 상태에서 나는 검 한 번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고 패배했었다.
이유는 바로 로이드 후작이 생성한 ‘영역’ 때문이었다.
다리를 잃고 현역에서 은퇴했던 아버지는 단점을 극복하고자 검으로 영역을 구축했고 나는 대응방법을 찾지 못했다.
나중에 천마에게 해결책을 물어봤는데 똑같이 영역을 생성하면 되지 않느냐는 두루뭉술한 대답만이 돌아왔었다.
“최근에 세바스찬으로부터 네 검술 실력이 더욱 진일보했다는 소문은 들었다. 이제 검술으로는 세바스찬과 동률을 이룬다지.”
“집사장이 많이 봐줬습니다. 그는 언제나 겸손하고 타인을 높이는데 익숙하죠.”
“세바스찬과 지낸 세월이 몇 년인데 설마 예의나 차리려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겠느냐.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호흡을 고른 후작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나는 네가 본격적으로 새로운 경지를 엿보고 탐구할 때가 왔다 판단하고 그동안 영역에 대한 내 심득을 적어서 책으로 엮어냈다.”
세상에 맙소사.
설마 비급서란 말인가.
심지어 소드마스터의 정수가 들어갔단다.
저건 돈으로 환산이 불가능했다.
소드마스터쯤 되는 인물이 돈이 부족해서 자신이 평생동안 갈고 닦아온 검술 비법을 팔진 않을 테니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감사히 받으면 된다. 표정을 보니 조금은 도움이 된 듯하여 뿌듯하구나.”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로이드 후작을 보다가 불현듯 엘프의 안식처에서 있었던 일이 머릿속을 스쳤다.
“아버지, 리처드 대장로의 숙소를 뒤지다 의외의 편지를 발견했습니다.”
로이드 후작에게 리처드 대장로와 힐튼 백작 사이에 있었던 비열한 뒷거래를 이실직고했다.
덧붙여서 편지까지 증거로 제출했다.
유심히 편지를 읽던 로이드 후작의 얼굴이 시시각각 일그러졌다.
“데이빗 이놈이 기어코 선을 넘었어. 어쩐지 영지 경계에 군사를 배치하자마자 엘프가 공격하길래 타이밍이 기가 막힌다 싶었다.”
“아버지도 예상치 못하셨나 봅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다른 이유 때문에 힐튼 가문이 무력시위를 벌이는 줄 알았거든.”
“혹시 지난 겨울 알버스 성을 둘러싼 영지전에 대한 복수라 여기셨습니까?”
“그것도 있고···”
말꼬리를 흐린 후작이 갑자기 딴소리를 늘어놓았다.
“헤논, 먼 길 다녀오느라 많이 피곤하겠구나.”
힐튼 가문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화제를 돌려서 내 컨디션을 물어보는 이유가 뭘까.
“큰 일을 치르긴 했습니다만 쌩쌩합니다. 체력은 이미 다 회복했고요.”
“그것 참 다행이로군.”
“헌데 어떤 연유로 물어보시는지.”
“아비가 자식 상태를 물어볼 수도 있지.”
“맞습니다. 저는 끄떡 없습니다.”
“그래.”
잠시 흐르는 어색한 침묵.
주먹 쥔 손을 입에 대고 연신 헛기침을 하던 로이드 후작이 결국 본심을 꺼냈다.
“크흠흠, 사실은 네가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다.”
그럼 그렇지.
방금 임무에서 돌아왔는데 또 일하라고 해서 멋쩍었나 보다.
“괘념치 마시고 속 편히 말씀하시지요. 이러면 제가 더 불편합니다.”
몇 번 재촉하자 로이드 후작이 용건을 꺼냈다.
그 내용은 시온 라이크에 온 이후로 손에 꼽을 정도로 놀라웠다.
“왕도에 다녀오너라. 국왕 폐하께서 널 부르셨다. 겸사겸사 레베카 왕녀님도 만나뵙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