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101화 (101/200)

13장 부름 : 장담한 망나니

알폰소 드 아리안느 엘든 41세.

엘든 왕국 국왕의 정식 명칭이다.

뒤에 붙은 41은 건국 이래 41번째 왕이란 의미.

조선 시대가 500년 역사에 임금이 총 27명이었는데 여기는 그보다 14명이 많다.

실제 역사도 800년이 넘어간다고 하니 대륙 동부에 위치한 변방 왕국치고는 나름 유서가 깊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훌륭한 나라의 수장님께서 나를 보고 싶으시단다.

“당황스럽군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어째서죠?”

“너야 바빠서 잘 모르겠지만, 최근 수도에는 네 위명이 제법 많이 퍼진 상태다.”

“혹시 그쪽도 저더러 악마살해자랍니까?”

“악마살해자에 성파괴자에 엘프학살자에 재밌는 별명이 많이 생겼더구나.”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엘프전을 끝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수도에서 내 활약을 알음알음 파악하고 있다니 의외였다.

“알폰소가 너를 부른 이유는 또 있다.”

“국왕 이름을 함부로 불러도 됩니까?”

“전하께서 눈앞에 계신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더냐. 게다가 옛날에 그 형이랑 자주 놀았다.”

로이드 후작이 국왕 전하와 상상 이상으로 친했구나.

지구나 여기나 인맥 중요한 건 매한가지다.

“아무튼 간에, 현재 전하께서는 매우 편찮으시다.”

“저런. 그런데 저를 만나도 괜찮습니까?”

“그러니까 더더욱 만나야지. 전하께 주어진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사실상 시한부라는 말.

심심한 애도를 표했다.

“안타깝습니다. 다음 보위를 이어받을 왕자님께서 마음고생이 심하시겠군요.”

“왕자는 없다.”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네?”

“실질적으로 나라를 통치할 자가 없다. 현재 알폰소의 슬하에는 레베카 왕녀가 전부니까.”

“보통은 아버지처럼 서자라든가. 사생아라든가, 혼외자라든가 있지 않나요?”

“크흠흠!”

본의 아니게 디스를 해버렸네.

아무튼 맞는 말이잖아.

당장 사생아인 내가 바로 앞에 있는데.

“사소한 건 넘어가죠. 그래서 요점이 뭔가요? 설마 왕위를 둘러싸고 피비린내 나는 혈투가 일어날 예정이다. 그런 말씀인가요?”

“아니다. 왕국법에 따르면 이런 경우에는 레베카 왕녀님이 즉위하는 게 원칙이야.”

“그러면 깔끔하게 해결이네요. 즉위 문제는 걱정 안 해도 되겠습니다.”

“대신에 왕녀님과 결혼한 부마가 실질적으로 나라를 통치하게 되겠지. 여인네에게 나라 살림을 맡길 순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오늘 귀가 많이 안 좋은 것 같다.

드루이드 패시브 스킬이 망가졌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다. 여인이 어찌 나라의 대소사를 관장하겠느냐?”

“네? 정치하는데 성별이 무슨 상관입니까?”

“너야말로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오히려 나를 이해 못하는 눈빛.

이거 왠지 아버지께서 나와는 가치관이 많이 다른 것 같으신데.

이후 대화를 나눠보고 깨달았다.

엘든 왕국은 여자가 나랏일하는 걸 나쁘게 보지 않는다.

단지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인간이 태어나자마자 걷거나 동물이 갑자기 사람의 언어를 구사하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로 치부했다.

“북부에서는 카리나가 블랙캐슬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건 나랏일 아닙니까?”

“단순히 무력으로 지키는 것과 머리를 쓰며 행정 업무를 맡는 건 다르지. 몬스터의 외침으로부터 집을 돌보는 건 남녀 모두가 해야할 의무다.”

카리나도 다 할 줄 알던데.

아무튼 이건 후작 하나 설득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다.

백날 토론해도 평행선을 그릴 것 같으니 일단은 넘어가고 가장 궁금한 점을 질문했다.

“레베카 왕녀의 부마는 누구입니까?”

“미정이다. 하지만 곧 정해지겠지.”

이어지는 로이드 후작의 설명을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1. 부마는 왕녀의 열일곱 번째 생일날 정함.

2. 부마를 정하기 위해서 왕실에서는 성대한 생일파티와 함께 부마 간택식을 개최함.

3. 간택식에 지원한 후보 중 왕녀가 직접 선택한 후보가 부마로 임명됨.

4. 왕녀가 즉위하면 부마가 실질적으로 나라를 통치함.

5. 이후 여왕이 된 왕녀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왕자 아기씨를 생산하는데 집중함.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았습니다. 이제 저는 간택식에 참석해서 왕녀의 부마라도 되어야 하는 겁니까?”

“설마. 부마가 되는 순간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야 평생 왕궁에서 머물러야 한다. 장차 후작령을 통치해야 하는 너는 거기서부터 자격 미달이지.”

“그러면 정말 임금님만 뵙고 옵니까?”

“정확한 임무를 말하자면 힐튼 가의 장남 찰리 힐튼이 부마가 되지 못하게 막아라.”

이거 또 복잡해지네.

여기서도 힐튼 가가 등장하나.

“아까 의논했었지. 힐튼 가가 난데없이 대군을 일으켜 영지를 위협한 이유가 짐작된다고. 나는 엘프와의 동맹도 동맹이지만 이번에 다가오는 부마간택식 때문이라 여기고 있다.”

로이드 후작의 말에 따르면 힐튼 가는 현재 부마간택식에 총력을 기울인단다.

이미 왕국의 중요 대귀족들을 상당수 자기편으로 돌려놨다고.

“부마 자리가 좋기야 하겠지만 이렇게 부산 떨 정도로 영향력이 큰 자리입니까? 저희 왕국은 봉건제라 타국에 비해 왕실의 힘이 작은 편으로 알고 있습니다.”

“원래라면 그렇지. 하지만 엘든 왕국이 칼론 제국에 흡수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게 무슨 소리죠?”

“데이빗 힐튼이 백작 위를 물려받은 이래 십 년 넘게 줄기차게 해오던 주장이 왕실의 제국 편입이다.”

800년의 역사를 가진 왕국을 송두리째 제국에 갖다 바치겠다니.

이건 거의 대놓고 역적질 아닌가.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계속 들어보니 그럴싸한 부분이 있었다.

힐튼 백작의 제국 편입 주장의 근거는 이러했다.

현재 엘든 왕국은 식량 생산량은 우수하지만 그 외에는 모든 분야에서 낙후되어 있다.

사실상 남부의 자유도시 리앙과 제국 황실과의 직접 무역을 제외하고는 새로운 문물과 문화를 접할 기회가 전무한 셈이다.

만약 이 시점에서 왕실이 제국에 편입된다면 우선 밀과 감자, 콩과 귀리를 관세 없이 제국에 팔아 짭짤한 수입을 벌 수 있단다.

이 밖에도 제국과 왕국의 경계에는 오늘날 DMZ 같은 비무장 지대가 있었는데, 이곳의 면적이 생각보다 넓고 심지어 노른자 땅이라고.

황무지 같은 이곳을 개간지로 일구어 식량 생산량을 늘릴 수 있으며 근처에 있는 광산 소유권을 받아온다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제국 중심부와 직접 교역로가 생기면 공무역뿐만 아니라 사무역도 활발해짐과 동시에 사회, 문화, 경제, 종교 다방면으로 발전할 수 있으니 안 하는 게 바보란다.

“듣기에는 굉장히 달콤한 조항이군요.”

“그래서 귀족 다수가 힐튼 백작에게 동조하는 분위기다. 우리는 그들을 친제국파라고 부르지.”

“아버지는 당연히 반대파시겠죠.”

“맞다. 난 반제국파다.”

“저렇게 솔깃한 조건 중에는 분명히 독소 조항도 존재할 테고요.”

“역시 명석하구나.”

지구에서 역사를 많이 배워서 안다.

국가 간의 관계가 단순히 어느 한쪽만 일방적으로 이득 보는 관계로 기울 리 없다는 것을.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법이고, 보통은 덩치가 큰 나라보다 작은 나라가 손해 보는 경우가 보편적이었다.

“우선 제국의 기본 제도는 우리와 같은 봉건제지만 황실의 입김이 굉장히 강하다. 심지어 따로 관리관을 파견할 정도지.”

관리관이란 단어에서 싸함이 느껴진다.

한마디로 내정간섭인데.

이러면 처음 잠깐은 좋을지 몰라도 결국엔 이득 본 걸 다 토해내게 되어있다.

예를 들어 제국 측에서 매해 세율을 1%씩 올린다고 가정해보자.

초기에는 대수롭지 않은 정도.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 어찌 될까.

십 년이 지나면 10%.

백 년이 지나면 100%.

중간에 더 급격하게 올릴 수도 있고.

동네 슈퍼에서 파는 과자값처럼 오르긴 해도 내릴 일은 절대 없다.

이런 흐름이 지속되면 단기적으로는 엘든 왕국이 이득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칼론 제국이 더 큰 이득을 보고 왕국은 식민지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때쯤 되면 왕국의 군대는 해산하거나 제국의 통제를 받을 테니 저항조차 힘들어진다.

800년의 역사의 자존심은 차치하고서라도 수지타산조차 비합리적이라는 게 반제국파의 주장이었다.

나는 이 소리를 듣자마자 힐튼 백작이 제법 똑똑한 데다가 타고난 사업가라는 생각이 딱 들었다.

제국이 왕국에 편입되면 초창기의 이득은 둘 사이를 연결시키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힐튼 백작과 그의 지지자가 다 가져갈 것이다.

하지만 나중 가서 제국의 횡포에 수탈당하고 고통받는 사람은 힘없는 농노와 영지민이 되겠지.

그때쯤 되면 단물만 쪽 빤 힐튼 백작은 남일이라며 나 몰라라 할 게 뻔했다.

한마디로 이건 나라 전체를 팔아먹고 자기를 포함한 소수의 지지자만 배를 불리겠다는 속셈이었다.

“누구를 빙다리핫바지로 보나. 어디서 그런 뻔한 수작질을.”

“안타까운 건 백작에게 동조하는 친제국파 귀족들은 나날이 늘어가고 반제국파 귀족은 구닥다리라며 점점 줄고 있다.”

“정말입니까?”

“그렇다. 특히나 이번 부마 간택식에서 찰리 힐튼이 부마가 되고 알폰소가 세상을 떠나면 왕실은 더이상 저항할 힘이 없을 게다.”

“국왕 전하께서는 그 부분이 걱정되어 앞으로 반제국파의 차기 후계자인 저를 보고 싶어하시는군요.”

“그러하다.”

깊게 한숨을 쉰 로이드 후작이 뒷짐을 진 채 창문 너머 풍경을 주시했다.

날씨가 좋은 날이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커튼을 뚫고 바닥에 드리웠다.

“최종 간택은 왕녀님이 한다지만 그녀도 대세를 무시하고 아무나 간택할 순 없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중립 귀족들을 최대한 포섭하고 될 수 있으면 친제국파 귀족들까지 회유하거라. 너에게 무거운 임무를 맡겨서 미안하구나.”

대충 어떤 일인지 파악 완료했다.

상당히 난이도가 높았다.

지금까지 헤쳐나갔던 역경과는 결이 달랐다.

그전에도 머리를 쓰긴 해야 했지만 불리할 때마다 압도적인 힘으로 밀면 대부분 해결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런 무대포가 통하기 힘들었고 정치적으로 신경 쓸 요소가 많았다.

어쨌든 내 편으로 사람을 끌어들여 최대한 지지자를 늘린 다음 여론을 이끌며 세 치 혀로 맞서 싸워야 한다.

과연 이 부분에서 여태껏 익혀온 천마검술이나 드루이드 스킬이 활용될 여지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믿고 맡겨만 주시지요. 늘 그랬듯 좋은 소식 들고 오겠습니다.”

미래가 붙투명해도 기세 좋게 호언장담했다.

대륙의 종말을 막아야 할 처지에 이 정도 퀘스트도 해결 못하면 거기서 이미 게임 오버니까.

아무리 어려운 임무나 높아 보이는 벽이어도 정면으로 부딪쳐 깨부숴야 하는 게 내 운명이었다.

* * *

엘든왕국 서남부.

힐튼 백작성.

쳐다보기만 해도 뒷목이 뻐근한 높디높은 첨탑이 수없이 솟아있다.

성 곳곳에 굴러다니는 값비싸고 화려한 보물만 해도 수백 개가 넘으니 직간접적으로 백작 가의 위세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현재 백작성의 안마당에서는 고급진 주변과는 어울리지 않는 천박한 함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죽여라! 죽여!”

“들고 있는 칼은 장식이냐?”

“답답하군. 내가 대신 뛰고 싶을 지경이야.”

우르르 몰린 사람들은 원형의 링을 형성한 채 고함을 쳐댔고, 그 안에는 갈비뼈만 앙상한 두 사내가 양손으로 단검을 잡고 벌벌 떨고 있었다.

“겨우 그것밖에 안 돼?”

가장 상석에는 사치스러운 드레스를 입은 장년 여인이 부채를 천천히 흔들며 두 사내가 목숨 걸고 싸우길 종용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백작 부인!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맞습니다. 저희는 형제입니다. 감히 친형을 찌를 수 없습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렇다.

여인은 힐튼 백작 부인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던 피 튀기는 혈전이 나오지 않자 볼멘소리로 투덜댔다.

“재미없네. 찰리, 이만 끝내렴.”

“예, 어머니.”

그게 신호였다.

백작 부인 옆에 앉아있던 젊은 사내가 칼을 빼 들고 걸어갔다.

그리고는 단칼에 두 형제를 베어버렸다.

서걱!!

“컥!”

“커허억!!”

폭포수처럼 흐르는 피가 잔디밭에 스며든다.

노예 출신 형제들은 어찌나 원통했는지 눈조차 감지 못하고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

비정한 광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짓을 하는데 익숙한 그녀의 얼굴에는 한줄기 죄책감조차 보이지 않았다.

“요새 쓸만한 노예 없나?”

“리앙에서의 노예 수급이 막히지 않았습니까? 보름달 시장도 노예 공급이 완전히 끊겼다는군요.”

리앙이란 단어가 나오자 백작 부인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내가 볼 땐 리앙도 한물갔어. 도대체 VIP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건지 원. 얼마 전에도 웬 근본 없는 놈팽이가 나한테 무례하게 굴었는데 중재도 안 해주지 뭐니?”

“어머니께서 상심이 크셨겠습니다.”

“아무튼 재수 없는 사내놈하고 보라머리 여자는 추적 중이야. 어디 신원이 나오기만 해봐. 저 노예들처럼 서로 죽이게 만들 거야.”

이를 박박 가는 힐튼 부인.

그런 어머니를 말리는 찰리 힐튼.

두 모자의 귀에 목청 좋은 하인이 새로운 소식을 알린다.

“힐튼 백작님 드십니다!!”

광활한 백작령의 주인.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권력자.

고든 로이드 후작과 함께 엘든 왕국을 이끄는 쌍두마차.

본신의 무력도 마스터의 경지를 눈앞에 둔 최상급 소드 익스퍼트인 데이빗 힐튼 백작이 천천히 내성으로 입장했다.

가주의 등장에 찰리 공자와 힐튼 부인은 화들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셨어요?”

부인의 말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힐튼 백작이 잔디밭에 참혹하게 죽어있는 노예 둘과 아직까지 광기가 남아있는 내성의 하인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도 노예로 유치한 짓을 하고 있소?”

“그게···”

“부마간택식이 얼마 안 남았소. 혹시라도 책 잡힐 일은 자중하시오. 간택식이 끝나고 나면 이깟 장난감 얼마나 가지고 놀든 신경 꺼줄 테니까.”

“알겠어요.”

“나가보시오. 찰리와 할 말이 있으니.”

후다닥 퇴장하는 힐튼 부인.

하인과 하녀들이 모두 사라지자 남은 건 찰리와 힐튼 백작뿐이었다.

“네 임무는 잘 알고 있겠지.”

“예. 간택식에서 왕녀의 선택을 받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 포크를 드는 것보다 쉬운 일이지. 이미 과반 이상의 귀족이 우리 편을 들기로 했고 가장 중요한 아놀드 공작도 우리 쪽에 손을 들어주셨으니까.”

만족스러운 표정을 띄우던 힐튼 백작이 불현듯 어떤 생각이 떠오른듯 미간을 모았다.

“깜빡 잊고 이 말을 안 했구나. 이번 간택식에 주의해야 할 인물이 있다.”

“누구입니까?”

“헤논 로이드 자작. 서출 주제에 자작위까지 받은 건방진 놈이다. 이번에 수도로 올라온다는구나.”

“최근에 악마살해자인지 성파괴자인지 뭔지 하는 거창한 허명을 가진 평민 놈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찰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해가 안 가는군요. 그깟 서출내기를 경계해야 합니까?”

“엘프족이 진압당했다.”

잠시 내려앉는 정적.

백작이 말을 이었다.

“물론 야만스러운 이종족 따위에게 큰 기대 따윈 안 했다. 그런데 놈은 내 예상보다 일찍 반란을 진압하고 가문을 하나로 엮더군.”

‘적어도 간택식 전까지는 시간을 끌어줄 줄 알았는데 말이야···’ – 라고 중얼거린 힐튼 백작.

“헤논 놈이 더러운 혈통에 비해선 제법 출중한 모양이다. 녀석이 수도로 올라오는 건 누가 봐도 간택식에 영향을 끼치기 위해서니 이에 대비하거라.”

“맡겨만 주시지요. 그래 봐야 사생아입니다. 악마를 살해했다느니 하루 만에 성을 무너트렸다느니 하는 헛소문은 믿지 않습니다.”

자신감 넘치는 찰리의 모습에 힐튼 백작이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어려운 일 있으면 연락하거라. 비장의 무기가 있으니 말이다.”

“아버지께서 그 정도로 말씀하시면 확실하겠지요. 믿고 편하게 상경하겠습니다.”

“흐흐흐···기대되는구나. 네가 부마가 되고 왕국이 제국에 편입되는 순간 힐튼 가문은 별 볼 일 없는 변방 귀족에서 중앙제국의 대귀족 반열에 오를 테니 말이다. 으하하하핫!!!”

광소를 터트리는 힐튼 백작.

어느새 날이 어두워졌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두 노예의 시체는 딱딱히 굳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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