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109화 (109/200)

14장 간택 : 예상한 망나니

내가 찰리 힐튼과 검을 겨루겠다고 한 이유는 별 게 아니었다.

부마 후보 간에 벌어진 대련에서 승리한다면 친제국파 귀족들도 헤논 로이드란 인간에 대해서 다시 고려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겸사겸사 폰타노에서 만난 이래로 내내 빈정대는 찰리의 콧대도 콱 눌러주고 말이다.

“원한다면 올라와 보시죠. 자신 있으시다면 말입니다.”

제대로 속을 긁고 도발했다.

사내라면 자존심 때문이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오냐···”

당연히 머리끝까지 약이 오른 찰리는 검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나로서는 바라는 바였다.

천마가 짐작한 찰리의 경지는 이제 겨우 익스퍼트를 돌파한 무인이다.

어느 정도 노력이야 했겠지만 그보다도 귀한 영약을 어릴 때부터 많이 먹어서 소위 내공빨로 올라온 고수였다.

나처럼 북부에서 목숨 걸고 싸워본 적도 없고 실제 전쟁을 경험한 적도 없는 그야말로 온실 속 화초가 분명해 보였다.

한마디로 둘이 대련했을 때 내가 찰리 힐튼에게 질 확률은 놈이 갑자기 일만 년 회귀라도 하지 않는 이상 제로였다.

“잠시만.”

하지만 여기서 훼방꾼이 나타났다.

흥분해서 나서려는 찰리를 아놀드 공작이 제지했다.

공작이 찰리에게 귓속말로 뭐라고 속삭이자 벌게졌던 찰리의 안색이 평소대로 돌아왔다.

평정심을 되찾은 그가 특유의 빈정거리는 미소를 띠며 손사래를 친다.

“그것도 괜찮은 방법입니다만, 부마 자리를 놓고 검으로 겨룬다는 건 너무도 투박한 사고방식 아닙니까? 우리는 배운 사람들이고 특권층입니다. 너무 몰아세우지 마시죠. 당황스럽습니다. 핫하하하!!”

아깝다.

거의 걸려들 뻔했는데.

아놀드 공작이 정신줄을 붙잡게 도와줬다.

하지만 이 정도도 충분한 수확이다.

어쨌든 내가 먼저 도전을 했는데 꽁무니를 뺀 건 찰리 공자다.

친제국파든 반제국파든 모두가 이 장면을 봤으니 느끼는 바가 있겠지.

“저야말로 섣불렀군요. 이만 내려가 보겠습니다.”

“수고했네. 로이드 자작.”

호넷의 인사를 받으며 제자리로 왔다.

이로써 부마 후보들의 어필이 모두 끝이 났다.

안드레의 말에 따르면 오늘 어필한 내용에 따라 왕실에서 협의를 거친 후 일주일 안에 부마를 발표한단다.

국왕이 일어서서 연회의 끝을 알렸다.

“오늘 오신 왕국의 별들에게 감사함을 표하는 바이니. 다음에도 또 볼 수 있길 바라네.”

국왕이 들어가고 이어서 레베카 왕녀도 퇴장하자 귀족들도 하나둘씩 빠져나갔다.

나와 안드레도 저택으로 돌아와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시온과 캠벨에게 전했다.

캠벨이 팔짱을 끼며 툴툴댄다.

“아깝구먼. 만약 빵맛 귀족놈과 부단장이 겨뤘으면 실수인 척하고 목을 따버리면 끝이었는데.”

“그게 가능하겠냐.”

“뭐가 어때서? 부단장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잖아.”

“힘이 문제가 아니다. 대놓고 죽여버리면 뒷수습이 힘들어져.”

“하여간 귀족들 생태계는 알면 알수록 골치 아프다니깐.”

시온이 준비해준 다과를 먹으며 잡담을 나누었다.

안드레가 물었다.

“앞으로 어찌하실 계획입니까? 오늘 자작께서 보여주신 행동은 반전이라고 부를 정도로 좋았습니다만, 여전히 찰리 힐튼은 귀족 반수 이상을 휘어잡고 있고 왕실은 이를 무시하지 못할 겁니다.”

나 또한 안드레와 똑같은 생각이다.

하지만 나는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만약 오늘 연회장에서 내가 전한 메시지가 전달되었다면 반드시 찾아와야 할 인물이었다.

똑똑!!

양반은 아닌 모양이다.

누군가 집 밖에서 노크했다.

저번에도 느꼈던 익숙한 인기척.

“나에게 용건이 있는 손님이니 직접 나가마. 다들 편히 쉬도록.”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니 예상대로 황금 갑주를 두른 호넷 백작이 서 있었다.

“자주 오시는군요.”

“귀찮게 해서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어서 가시죠.”

내가 당연하듯이 앞으로 나서자 호넷 백작이 황당하다는 기색이다.

“너는 내가 여기에 온 연유를 아는가?”

“물론이지요. 레베카 왕녀님이 호출하셔서 아닙니까?”

왕실의 호출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누가 불렀는지까지 정확히 맞추자 호넷 백작이 얼빠진 표정을 짓는다.

“안 가십니까? 바람이 제법 찹니다.”

“어···어, 그래.”

마차에 몸을 싣고 출발했다.

레베카 왕녀와의 첫 독대.

무슨 대화를 나눠야 할지는 명백했다.

* * *

‘나는 저주받았다.’

태어난 지 고작 다섯살 만에 레베카 왕녀가 떠올린 생각이었다.

저주란 다른 게 아니었다.

자신이 여자란 사실.

남자와는 다르다는 사실이 자신에게는 참을 수 없는 약점이었다.

“왕국이 흔들리고 있어요. 전하께서는 병치레가 잦아지시고 있고요.”

“후계가 불안정하니 이것 참···”

“레베카 왕녀가 계시지 않습니까?”

“어쨌든 왕녀는 왕녀입니다. 여인의 몸으로는 한계가 있지요.”

“맞는 말씀입니다. 의미 없는 가정이지만 왕녀님이 왕자였으면 어땠을까요?”

“그러게요. 참으로 아쉽습니다.”

그녀라고 해서 ‘그녀’로 태어나고 싶었겠는가.

마음 같아서는 금단의 흑마법이라도 익혀서 성별을 바꾸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야망 있는 여자였다.

그녀의 몸속에는 수백년 간 나라를 다스려온 엘든 왕가의 피가 흘렀고 누구보다 훌륭하고 현명한 군주가 되고자 했다.

‘불합리해. 어째서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배제되어야만 하는 거지?’

힘이 부족하면 지식이라도 많아야 했다.

노력으로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여기며 닥치는 대로 공부했다.

모르는 게 있다면 똑똑하다고 알려진 대신들을 찾아서 물어보았다.

그때가 그녀의 나이 고작 아홉 살이었다.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주변에서도 언젠가는 인정해줄 거야.’

하지만 그녀의 바람은 무참하게 깨졌다.

어려운 개념을 물어보고자 학자를 찾아가자 그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오히려 역으로 그녀에게 질문했다.

“왕녀님이 아실 필요 없는 지식입니다. 괜히 이쪽으로 파고들어 시간을 낭비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저는 그저···”

“세상에는 왕녀님 생각보다 더 재밌는 것들이 많습니다. 아직 어리셔서 모르시는 것 같으니 시녀들에게 물어보세요.”

낙담했다.

그 와중에 혹시 몰라서 시녀들과 대화를 나눠보았다.

정말로 재미있을까 궁금해서.

“이거 한 번 써볼래요? 요새 잘 나가는 화장품이래요.”

“왕성 앞 골목에 새로 생긴 케이크집이···”

“제국에서 유행하는 헤어스타일이···”

“세상에 그 소식 들었어요? 메리랑 올란 남작가 자제하고 글쎄···”

하나도 재미없다.

그때부터였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다.

다행히 도서관만큼은 왕녀인 자신에게 무한정 개방되어 있었고 사서 월터는 입이 무거운 사내였다.

시녀 몰래 책을 가져와서 독학으로 읽고 쓰고 공부했다.

무려 칠 년을.

그녀의 행동을 목격한 시녀들이 주변에 소문이라도 퍼트렸다가 책을 읽는 것까지 금지될까봐 철저히 비밀로 했다.

그녀는 사춘기 내내 방 안에 콕 박혀있었고 그 와중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때가 되면 내가 얼마나 유능한 인재인지 모두에게 보여주겠어.’

잘때마다 꿈속에서 왕관을 쓰고 나라를 통치하는 자신의 모습이 나왔다.

정말로 가능하다고 여겼다.

아버지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데.’

벌써 열일곱 번째 생일이 다가오고 부마 간택식이 코앞이었다.

나이도 들만큼 들었다.

그제야 그녀는 깨달았다.

세상에는 넘지 못할 벽이 있다는 것을.

“부마는 찰리 힐튼 공자가 되겠지요?”

“당연하죠.”

“왕국의 역사도 곧 저물겠군요.”

“더 좋은 방향의 발전일 수도 있습니다.”

그 좋은 머리로 파악한 왕실의 미래는 바람 앞의 촛불보다도 못한 신세였다.

사내였어도 장담하기 힘든 마당에 즉위 직후 부마에게 모든 대소사를 맡겨야 하는 여인의 몸이다.

기분이 나락으로 떨어졌고 마음속에는 먹구름이 짙게 꼈다.

그녀는 자신의 미래가 훤히 그려졌다.

왕관과 지휘봉을 든 군주의 모습이 아닌 왕국에서 공국으로 격하된 엘든 공국의 평범한 공작가 정실부인.

자신을 도구로만 여기는 부마에게 사랑받지도 못하고 안방 한켠에서 외롭게 시들다 죽을 운명.

차라리 무식하면 정면으로 부딪치기라도 할 텐데, 하필 머릿속에 든 건 많아서 쉽게 움직이지도 못하고 속만 터진다.

그러던 차에 간택식 당일이 되었다.

기대가 전혀 안 됐다.

자신도 눈이 있고 귀가 있다.

이미 모든 귀족은 찰리 힐튼에게 붙어버린 상황.

반제국파는 어떻게 되었는지 소식조차 없다.

“레베카 왕녀님 입장하십니다!!”

간택식이 시작되었고.

부마 후보들이 차례로 나와서 등록했다.

지루했다.

어차피 결과는 정해졌는데 왜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해야 하는가.

권력 없는 허수아비 왕실에 대한 자괴감과 결정권조차 없는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동시에 들었다.

콰아앙!!

그때였다.

문이 거칠게 열렸고.

처음 보는 사내가 들어왔다.

모든 귀족과 왕족이 보는 앞에서 지각했음에도 당당하게 고개를 드는 남자.

수려한 외모와 요요한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누구지?’

신원을 궁금해하던 차에 사내는 호넷 삼촌에게 다가가더니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부마 후보에 등록한다.

“헤논 로이드 자작. 후보에 등록합니다.”

누군지 기억났다.

반제국파의 수장인 로이드 후작가의 새로운 후계자.

아버지가 로이드 후작을 워낙 신임하셔서 그녀도 그쪽 가문에는 나름 호의가 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후계구도로 가문이 어지럽고 새롭게 후계자가 된 사람은 사생아 출신이라던데.

첫만남이라서 확실한 평가는 못하겠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행동으로는 상당히 독특한 인물인 듯했다.

‘어째서 후보로 등록했을까? 어차피 후작가를 물려받게 되면 부마가 될 수 없을 텐데.’

의아한 마음과 함께 마음 한쪽 구석에서 호기심이 빼꼼 고개를 들었다.

후보들의 어필이 시작되었고.

또다시 지루한 시간이 지났다.

솔직히 졸지 않으려고 허벅지를 꼬집으며 노력해야만 했다.

그 와중에 찰리 힐튼의 차례가 되었다.

사실상 부마로 낙점된 내정자.

앞으로 평생 함께해야 할 남자가 자신에게 다가와서 한쪽 무릎을 꿇는다.

“제 꽃을 받아주시지요.”

꽃을 받는 순간 왕실은 끝장날 거란 예감이 든다.

한편으로는 앞으로 남편 될 사람한테 괜히 미운털을 박히는 행동이 과연 옳은 걸까.

여러 상념이 충돌하여 의식 속에 거친 회오리바람을 만들고 있을 때, 눈에 들어오는 한 사내가 있다.

헤논 로이드 자작.

반제국파의 수장이자 괴짜 귀족.

그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꽃을 향하던 그녀의 손이 멈칫했다.

그것은 마치 본능이었다.

그녀조차도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깜짝 놀랐다.

“부마가 되면 받을게요.”

완곡하면서도 점잖은 거절.

어쨌든 거절은 거절이다.

“물론이지요.”

귀족과 왕족은 이런 사소한 결과 하나하나에 자존심 상하고 계속 묵혀두는 족속들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선택했고 결과는 돌이킬 수 없다.

찰리 힐튼에 이어서 화제의 로이드 자작이 나섰다.

아까 특이한 행동을 한 사내라서인지 레베카는 아주 약간이지만 설렜다.

내심 다른 참가자처럼 입에 발린 칭찬과 뻔하디뻔한 멘트를 안 치길 바라며 그를 응시했다.

“레베카는 놀라울 정도로 비상하고 똑똑합니다. 게다가 목표를 향해 피나게 정진하는 노력가지요. 그녀는 사람들이 정해놓은 한계를 부수고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려는 탐험가입니다. 저는 부마 자리를 다 떠나서 그저 한 인간으로서 순수하게 왕녀님을 응원하고 싶군요.”

그녀는 놀라 뒤집어졌다.

저도 모르게 와인잔을 떨어트렸다.

어떻게 저 사내는 그동안 자신이 해왔던 노력을 알고 있을까.

아니면 단순한 지레짐작일까.

로이드 자작의 기행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나라를 어떻게 통치할 거냐고요? 통치할 생각 없는데요? 저보다 레베카 왕녀님이 더 잘할 텐데 제가 왜 건드립니까? 왕녀님이 알아서 하게 두려고요.”

두 번째 경악.

이쯤 되면 자신의 방에 들어와서 몰래 지켜본 게 아닐까 싶었다.

말도 안 되는 의심이지만 말이다.

그만큼 그녀는 놀라서 혼이 쏙 빠졌다.

연회 마지막에 행해진 로이드 자작의 무력시위는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후작가의 후계자로 우뚝 설 수 있었는지 많은 사람 앞에서 증명했다.

저 젊은 나이에 얼마나 노력을 했으면 저렇게 강해질 수 있는지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오히려 여태껏 자신이 했던 노력은 저 사내가 들인 노력에 비하면 초라하단 생각까지 들자 얼굴이 화끈해지며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이상입니다.”

연회가 파하고 간택식이 마무리되었다.

이제 왕가는 일주일 안에 부마 후보 중에서 최종 간택자를 발표해야 한다.

보통은 왕실 종친들과 국왕이 합의하여 부마를 정하고 당사자인 왕녀의 의견은 거의 효력이 없지만 지금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머릿속은 온통 연회장에서 충격적인 모습을 보여준 녹색 눈동자 사내뿐이다.

마치 자신의 머리 꼭대기에 앉은 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읽는 듯한 독심술 사내.

일초라도 빨리 그를 만나지 않고서는 안달이 날 것 같았다.

“호넷 삼촌. 부탁이 있어요.”

원래 간택식 즈음에 부마 후보를 따로 만나는 행위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기에 호넷 삼촌은 난감해했다.

어떻게든 애교로 비비며 간청하자 넘어갈 수 있었다.

결국 레베카는 원하는 바를 달성했다.

현재 그녀 앞에는 헤논 로이드 자작이 서 있었다.

두근대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로이드 자작은 아까 봤을 때와 똑같이 여유만만한 미소와 요요한 눈빛을 뿌리고 있었다.

단둘만 있는 공간에서 로이드 자작이 그녀에게 건넨 첫마디는 바로 이거였다.

“부르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왕녀님.”

이 말을 듣고서야 알았다.

자신이 올바른 선택을 했음을.

그 또한 이 순간을 기다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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