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모함 : 속삭인 망나니
동료들과 회의한 직후.
성기사 요한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세븐 스타에게 연락을 돌렸다.
우선 북부에 있는 카리나와는 따로 연락망이 없어서 사람을 시켜 편지를 보냈다.
파발로 띄웠고 급한 사안이니 별일이 없다면 카리나도 금세 답장을 보내오리라.
톰에게도 마찬가지로 편지를 썼는데 대륙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그의 특성상 직접 찾아내려면 오래 걸리니 순례자 네트워크를 사용했다.
여기서 순례자 네트워크란 신체 일부분에 아슬란 제국의 문신을 새기거나 브로치를 가진 사람, 혹은 간판에 고대 제국 문양을 단 점포에 방문해서 편지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순례자 집단은 전대륙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다행히 엘든 왕국의 수도에도 두 군데의 접선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삼일 내로 톰님이 보실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아버지 로이드 후작.
후작에게는 따로 편지를 날릴 필요 없이 연락용 수정구로 화상통화를 했다.
연락신호를 보내자 칼 같이 받은 후작이 나를 보자마자 호통을 쳤다.
-야 이놈아! 왜 이렇게 연락을 안 하는 것이야! 아들이 일국의 부마가 됐다는 소식을 남의 입을 통해서 들어야겠느냐!
사과하는 시간부터 가졌다.
아버지의 속을 풀어주기를 한 시간.
조금 진정된 분위기에서 본론을 꺼냈다.
힐튼 가문에 포섭된 대주교와 집행자로 세븐 스타 출신 요한이 온다는 소리에 후작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기억난다. 요한은 최후의 전투에서 같이 싸운 동지였지.
“그러면 제법 친하시겠군요. 직접 왕래하셔서 요한을 설득할 순 없겠습니까?”
수정구 너머로 보이는 로이드 후작이 이마에 손을 짚으며 한숨을 쉰다.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면 얼마나 좋겠느냐? 내가 알기로 요한이란 놈은 악마에 관련된 사안에는 타협이 없었다. 게다가 주변 사람을 맹목적으로 믿는 경향이 강했지.
로이드 후작이 묘사한 요한은 그야말로 꽉 막히고 융통성도 없는 옹고집쟁이였다.
물론 그런 완고한 성정이었기에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수많은 악마를 처단했으며 결국 최후의 전투 당시에는 마왕군에게 공포의 성기사로 불렸다고.
-같은 편일 때는 한없이 든든하지만 다른 편일 때는 이만한 골칫덩이가 없지. 이야기를 들어보니 대주교 쪽에서 너와 협상할 여지는 없는 듯한데.
“그렇습니다.”
-요한이 힐튼 가의 돈에 매수되진 않았을 거다. 매수될 녀석이 아니야. 분명 대주교의 말에 놀아나고 있겠지. 원래부터 그렇게 단순한 놈이었고.
마음 같아서는 대주교를 죽이고 싶지만 그러면 상황은 더 악화될 뿐이다.
-아무래도 카리나의 도움을 받아야겠구나.
부마 간택식을 둘러싸고 로이드 가문과 힐튼 가문의 기싸움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후작령과 백작령 경계에서 두 세력이 대치 중이라 로이드 후작은 엉덩이를 못 떼는 상황.
따라서 아버지는 내가 카리나를 호출해서 그녀가 올 때까지 버티보라고 조언한 것이다.
“알겠습니다.”
-원래도 잘하는 놈이니 이번에도 믿겠다. 건투를 비마. 여차하면 후작령으로 돌아오거라.
연락이 종료됐다.
요한이 대충 어떤 성격인지 파악했다.
그리고 로이드 후작의 이야기에서 유추해보자면 아버지는 요한과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닌 듯했다.
며칠 후.
북부에 띄웠던 파발이 답장을 가져왔다.
동시에 순례자도 안드레의 저택에 찾아와서 소포를 전달했다.
편지도 아니고 소포라니.
호기심이 들어 톰의 메시지부터 확인해보았다.
[이야기는 들었다. 골치 아픈 일에 휘말렸구나. 부마가 되어서 축하해주고 싶어도 우선 이쪽 일이 급하니 본론부터 꺼내겠다.
사실 그놈은 우리 순례자식 용어로 말하자면 벽창호다. 귀 막고 앞만 보고 알려가는 경주마도 그것보단 덜할 거야. 나도 요한과 자주 어울리긴 했지만 카리나가 중간에 없었다면 싸워도 진작에 싸웠을 거다.
그나마 한 가지 희망적인 사안을 이야기하자면, 녀석도 무인이다 보니 강한 자의 말은 어느 정도 귀담아듣는다. 따라서 네가 요한과 최소한의 대화라도 나누려면 힘을 보여주는 수밖에 없겠구나.
제일 좋은 방법은 그 당시 제일 친했던 카리나를 불러오는 것이다. 그 벽창호는 카리나의 말이라면 껌뻑 죽었거든. 하여간 옆엣놈 말에 항상 휘둘리는 놈이었어.
혹시 모르니 유물 하나를 보내마. 이걸 사용할 일이 없길 바라며. 시간 날 때 계속 연락해라.]
톰이 보내준 유물은 마치 예전 세계에서 가끔 보던 거짓말 탐지기 같았다.
한손에 들어오는 반구형의 유물을 보자마자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고대의 유믈]
[중력장 생성기]
[일정 시간 동안 특정 영역에 자신에게 유리한 중력지대를 만든다.]
[남은사용횟수 2/5]
[충전요망]
역시나 아슬란 제국 유물답게 신기한 능력을 지닌 물건이었다.
‘이런 유용한 무기가 있었으면 탐욕과 전투할 때 진작 써주지.’
그때는 가지고 있지 않았겠지만 괜히 한번 툴툴대고 싶었다.
어쨌든 톰의 메시지를 통해 요한이 꽉 막힌 인물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카리나와 가장 친했다는 점을 추가로 알아냈다.
그러고 보니 로이드 후작도 카리나의 도움을 받으라고 했지.
마지막으로 카리나의 편지를 열어보았다. 그녀의 편지는 간단했다.
[하···그 곰탱이가 기어이 사고를 치러 오는구나? 그래도 내 말은 잘 듣는 곰탱이였는데 고새 다른 년한테 홀라당 넘어갔나 보네.]
카리나는 안부 인사도 없이 자기 말부터 쏟아냈다.
왠지 그녀다워서 피식 실소가 나왔다.
편지를 계속 읽었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직접 가서 오랜만에 곰탱이 좀 패주고 싶은데 북부가 계속 불안하네. 후견인이라고 해놓고 정작 필요할 때 못 가줘서 미안.
대신에 묵주 하나를 보낼게. 이 묵주는 최후의 전투 당시에 요한의 목숨을 구해주고 그에게서 받은 선물이야. 그때 묵주를 주면서 요한이 이렇게 말했어.
‘앞으로 어떤 일이든 간에 내 능력이 되는 한에서 네 부탁을 무조건 하나 들어주겠다. 그 증표로 이 묵주를 선물하마.’
말투가 느끼하긴 했는데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냉큼 챙겼지. 요한에게 보여주면 자기가 선물한 묵주니까 바보가 아니라면 알아볼 거야.
p.s 진짜 바보일 수도 있으니 개인적인 편지까지 따로 동봉했어. 이것도 요한에게 보여주렴. 건강하게 잘 지내. 시간되면 캠벨이랑 시온이랑 같이 북부로 놀러와!]
카리나가 보낸 봉투에는 밀봉된 또다른 편지 하나와 손때가 가득 묻은 묵주가 있었다.
‘됐다!’
이 정도면 요한도 두 눈과 두 귀가 달린 사람인 이상 내 말을 들어주겠지.
매수된 대주교가 뭐라 하든 간에 요한이 집행을 안 하면 소용없는 일이다.
오히려 요한이 내 결백을 증명해줄 수도 있고 말이다.
대비는 끝났다.
힐튼 가문의 공격은 제법 날카로웠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마음을 가다듬으며 신성국 사절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 * *
뿌우우우!!!
뿔피리 소리가 폰타노 전역에 울렸다.
외국 사절이 방문할 때마다 환영한다는 의미로 행하는 왕국만의 예식이다.
소년소녀들이 길가에 꽃잎을 뿌려주며 새로운 얼굴을 환영했다.
신성국에서 온 프란시스 대주교는 말에 타고 있었는데, 새하얀 법복과 태양 문양이 그려진 기다란 지팡이, 그리고 주교들이 흔히 쓰는 비숍 모자를 썼다.
옆에서 걸어가는 남자는 집행자 요한으로 가로세로가 모두 두꺼운 엄청난 거구였다.
성기사답게 하얀색으로 도색한 풀 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한 그는 태양 문양이 새겨진 카이트 실드와 등에는 보기만 해도 살벌한 메이스를 메고 있었다.
변방에 소왕국에서는 상당히 이색적이라 할만한 복장.
남녀노소 누구 할 것 없이 평민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프란시스와 요한을 주시했다.
이들에게 오늘은 국왕 서거 이래로 침체되었던 도시의 분위기가 조금이나마 해소되는 날이었다.
그러나 왕궁은 달랐다.
일하는 시종들부터 시작해서 모든 대신들이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신성국에서 온 대주교가 어떤 말과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서 친제국파와 반제국파의 희비가 갈릴 테니 말이다.
오늘은 악마에 씌였는지 판별 받는 자리였으므로 나는 회의장 한가운데 놓인 의자에 앉아있었다.
원래 레베카는 나더러 상석에 같이 앉자고 했다.
하지만 친제국파 대신들이 아우성칠 게 뻔했고 나도 따로 염두에 둔 바가 있어서 가운데에 앉았다.
그런 나를 둘러싸고 귀족들이 숨죽였다.
찰리와 필립을 힐끗 보니 여유로운 기색이 넘쳐 보였고 반대로 왕좌에 앉은 레베카 왕녀는 초조한 표정으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나는 무표정을 유지한 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내 바깥에서 환호성이 들리더니 대문이 활짝 열리고 화제의 인물들이 모습을 보였다.
“허허, 이것 참 과분한 환대로군요.”
대주교 프란시스가 인자한 미소를 띠며 대회의장에 들어섰다.
맞이한 사람은 레베카 왕녀였다.
“반가워요. 프란시스 대주교.”
말은 반갑다고 해도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
아직 즉위식도 올리지 않은 새내기 왕이니 표정 관리는 좀 더 연습할 필요가 있어보인다.
“레베카 왕녀님을 뵙습니다. 엘든 왕국에 벨라누스님의 밝은 빛과 은총이 함께하시길.”
“감사해요.”
“오늘 전하를 직접 알현하니 언어로는 전하의 아름다움을 전부 담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신성국에 자자했던 전하의 미모에 관한 소문이 과장이 아니라 오히려 축소되었군요.”
혀에 기름칠을 했나.
다른 건 몰라도 사회생활 잘하고 술 잘 마시게 생긴 대주교였다.
지금 내 머릿속에는 프란시스 대주교가 힐튼 가문에게서 얼마를 약속받았을지가 궁금했다.
그리고 정말로 저 대주교가 머리일지, 아니면 대주교는 꼬리일 뿐이고 그 위로 또 다른 머리가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여기까지 귀한 걸음해주셔서 왕국의 지도자로서 감사드립니다. 조금 휴식을 취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좋은 일로 온 것도 아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불쌍한 어린양들이 벨라누스님의 따뜻한 손길을 바라고 있습니다.”
바로 시작하겠다는 뜻.
레베카 왕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세요.”
프란시스 대주교가 내 앞에 섰다.
여전히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으나 그 속에 숨겨진 뱀 같은 사특함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프란시스 대주교입니다. 악마에 씌이셨다는 신고가 신성국에 접수되어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
잔뜩 예의를 차린 대답이었으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선을 그 뒤에 선 요한에게만 고정했다.
내가 뚫어지게 요한만 쳐다보자 요한도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한편, 무시당한 느낌이 들었는지 프란시스 대주교의 이마에 핏대가 솟으며 목소리 톤이 낮아졌다.
“제가 인사를 했습니다만.”
“헤논 로이드 자작이다.”
단답.
내 무례함에 왕궁의 모든 귀족이 경악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앞으로 내 운명은 프란시스 대주교의 말 한마디에 천당과 지옥을 왔다갔다할 텐데.
그 와중에 이리 배짱을 부려대니 놀란 것이다.
“로이드 자작! 멀리서 오신 손님입니다. 예의를 지켜주세요.”
오죽하면 레베카가 날 말렸을까.
“유념하지요.”
누가 봐도 건성인 대답.
심지어 대주교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여전히 내 시선은 요한에게 꽂혀있었다.
“하하···로이드 자작님은 참으로 개성 넘치는 분이군요. 아니면 신을 모시는 사제에게 거부감이라도 느끼시는 걸까요?”
“프란시스 대주교, 잡소리는 됐으니 판별법부터 말하도록. 설마 육안으로만 판별이 가능하다는 건 아니겠지.”
거듭되는 내 안하무인 태도에 대주교는 화를 꾹꾹 눌러담으며 애써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하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대주교는 품속에서 태양 문양이 새겨진 자그마한 구체 하나를 꺼냈다.
“이것은 ‘태양의 기쁨’이라는 성물입니다. 순간적으로 뿜어내는 신성력이 굉장히 강력한 편이죠. 자작께서는 성물을 쥐고 버튼을 누르시면 됩니다.”
“그게 끝인가?”
“그렇습니다. 자작께서 정녕 악마에 씌이셨다면 신성력을 버티시지 못하고 고통에 휩싸이실 겁니다.”
한마디로 태양의 기쁨이란 성물을 들고 아픈 기색을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악마에 씌인 자고 아니라면 결백하다는 말이다.
“간단해서 좋군. 바로 가지.”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이다.”
성물을 건네는 프란시스 대주교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마치 네가 절대 고통을 참을 리 없다는 생각이 얼굴에 훤히 드러나 있었다.
성물을 손에 쥐고 툭 튀어나온 버튼 부분을 꾹 눌렀다.
그러자 성물에서 하얀빛이 파앗! 퍼지며 내 주변을 감쌌다.
“오오오!!!”
레베카 왕녀를 포함한 장내의 모든 귀족이 장탄성을 터트렸다.
그만큼 성물이 뿜어내는 빛은 찬란했고 아름다웠으며 포근한 맛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오감을 현혹하는 화려함보다는 당장 눈앞에 떠오르는 시스템창에 집중했다.
[고통의 저주가 발현됩니다]
[시전자가 고통 상태에 빠집니다.]
어쭈?
인제 보니 성물이 아니었다.
겉보기에만 신성하지, 사실은 버튼을 누른 자에게 저주를 내리는 물건이었다.
‘유치해서 웃음도 안 나오는군.’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런 식이면 악마에 씌였든 안 씌였든 모든 대상자가 아파할 것이다.
그러면 대주교는 악마에 씌였다고 판단하고 요한을 시켜 처벌했겠지.
그동안 얼마나 많은 무고한 자들이 이 수법에 억울하게 희생되었을까.
‘저놈은 성직자라 부르기에도 아까운 벌레 놈이다.’
속으로 프란시스 대주교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웠다.
고통의 저주가 전신을 감쌌다.
하지만 나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하프엘프이고 드루이드며 소드마스터를 목전에 둔 고수다.
[스킬 자정작용 발동]
[완전 면역 상태]
[저주를 파훼합니다]
고통의 저주 따윈 우습다.
저주가 소멸되었고.
하얀 빛만이 유유히 흘렀다.
“···응?”
저주를 받은 자가 너무나도 태연하다.
프란시스 대주교에게서 당혹한 기색이 드러났고.
반대로 레베카 왕녀의 얼굴은 환해졌다.
“역시! 헤논이 악마에 씌였을 리가 없지!”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시간이 좀 더 필요합니다.”
프란시스 대주교가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어떻게든 아파하는 기색을 찾으려 했으나 절대 틈을 내줄 리 없다.
건치가 드러나는 미소로 응답해줬다.
동시에 고개를 숙이며 프란시스 대주교에게만 들릴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줬다.
“볼 일 다 봤으면 내 나라에서 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