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모함 : 발검한 망나니
폰타노.
엘든 왕궁.
레베카 국왕의 집무실에는 늘 모였던 멤버들이 모여있었다.
나, 시온, 캠벨, 레베카, 안드레.
그리고 코코까지.
“뀨우!!”
혼인식을 올린 이후 레베카와 안드레에게 아기용 코코를 보여주었다.
당연히 레베카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어머! 귀여워!”
코코도 뱀파이어인 레베카가 신기한지 연신 코를 대고 킁킁대다가 아예 무릎 위에 돗자리를 펴고 벌러덩 드러누웠다.
헤츨링의 깨물어주고 싶은 애교에도 불구하고 회의실 분위기는 축 내려앉았다.
내가 힐튼 가문이 꾸미고 있는 음모를 날 것 그대로 전달했기 때문이다.
“정말 슬프군요. 왕실의 권위가 바닥까지 추락했다는 게 실감납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감히 국왕 전하를 납치하고 협박해서 자기편으로 삼겠다니. 힐튼 놈들이 완전히 돌아버린 게 틀림없습니다.”
안드레가 콧김을 씩씩 뿜으며 분개했고, 시온과 캠벨도 상상조차 못한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도련님, 순수하게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말해라.”
“아무리 힐튼이 대가문이라 해도 한 나라의 왕궁을 대놓고 침입해서 전하를 데려간다는 게 가능한 일입니까?”
“이건 내가 대답해줄게.”
레베카가 나섰다.
“안타깝게도 현재 왕실의 무력은 처참해요. 양적으로는 그럴싸하지만 질적으로 따져보면 숙부님을 제외하고 속 빈 강정이죠.”
익스퍼트 최상급에 이른 호넷 백작을 제외한다면 나머지는 쭉정이라는 뜻.
왕실기사단과 수비병력 레벨이 이 모양이니 힐튼 가문에서도 저런 무모한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었겠지.
봉건제의 왕실이란 이리 서글프다.
쓸만한 인재는 훨씬 좋은 급여과 봉토로 대우해주는 지방 대가문에게 빼앗긴다.
왕실에서 근무하는 기사와 병사들은 왕가를 수호한다는 명예 하나로 박봉과 야근을 견딘다고 했다.
“제기랄, 힐튼의 대군이 밀려올 경우 우리로서는 막을 방법이 없다는 소리구먼.”
“대군을 동원하진 않을 거다. 현재 힐튼의 주력군은 로이드군과 영지 경계에서 대치 중이니까.”
“헤논 말이 맞아요. 그리고 수도에 군사를 풀면 이목이 많이 끌리니 소수 정예로 움직일 가능성이 높지요.”
그마저도 부담된다.
힐튼 가문이 세븐 스타가 가주로 있는 로이드 가문과 양강구도를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가문 내 고수들이 많아서다.
나를 제외하면 로이드 후작과 세바스찬 정도만 익스퍼트인 우리 가문과 달리 힐튼 가문은 우리보다 익스퍼트 고수가 많아서 밸런스가 좋다는 평을 받는다.
“이걸 어쩌죠? 국왕이 왕궁을 버리고 도망갈 수도 없고 참으로 난감하네요.”
풀 죽은 강아지처럼 고개를 숙인 레베카를 본 캠벨이 벌떡 일어나서 고릴라처럼 가슴을 쾅쾅 쳤다.
“국왕 전하, 걱정하지 마시지요. 저희가 있지 않습니까? 그깟 더러운 힐튼 놈들 열 명이 오든 백 명이 오든 부단장과 제가 다 해치울 겁니다. 으핫하하!!”
현실주의자인 시온이 캠벨을 타박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죠. 아무리 저희가 강해도 익스퍼트 고수들이 떼로 달려들면 별 수 없는 법입니다. 심지어 힐튼 백작은 호넷 백작님에 준하는 실력자라 하지 않았습니까?”
캠벨과 시온이 눈싸움을 벌인다.
예민한 하녀와 바보 돼지라는 욕설이 난무하는 가운데 안드레는 땀을 뻘뻘 흘리며 둘을 중재한다.
이제는 둘 간의 티격태격이 익숙해진 코코는 레베카의 허벅지가 따뜻한지 크게 하품하고 꾸벅꾸벅 졸았다.
내가 나설 차례인가.
손을 들자 난장판이 되려던 실내에 침묵이 감돌고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시온과 캠벨 둘 다 옳다. 힐튼 가문이 걸어오는 싸움을 정면에서 부숴야 하는 것도 맞고 그와중에 전력이 다소 열세인 것도 맞지.”
“허면 어찌하실 계획입니까?”
“그래서 우리 쪽도 지원군을 불렀다. 저쪽이 소수 정예라면 우리도 소수 정예로 상대한다. 마침 올 시간이 되었는데···”
쐐액! 탁!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창문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멀쩡한 입구를 내버려두고 굳이 창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괴상한 침입자들을 본 시온과 캠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헉!”
“이게 누구야!”
라칸, 에이든, 아멜리아.
반가운 얼굴들이다.
아멜리아도 뭐···나름 반갑다.
“주군을 뵙습니다.”
“총사령관을 뵙습니다.”
아멜리아는 고개만 까딱.
이 정도면 충분하다.
세븐 스타를 추가로 섭외하면 좋았겠으나 다들 바쁘신 몸이니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여기 있는 전력만으로 웬만한 소공국은 박살낼만한 수준이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레베카에게 넌지시 일러주었다.
“힐튼 놈들에게 똑똑히 보여주자. 그들이 만만하게 여긴 왕궁이 실제로는 사자굴이었다는 것을.”
* * *
야심한 시각.
폰타노.
힐튼 가문 저택.
마차 두 대가 나란히 대저택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찰리 힐튼과 필립 로이드는 이미 한 시간 전부터 나와 마중할 생각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흑색의 마차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고 깔끔한 정장을 입고 지팡이를 쥔 콧수염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버지! 오셨습니까!!”
“백작님! 안녕하십니까!”
찰리와 필립의 허리가 폴더로 접혔다.
장신의 데이비드 힐튼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찰리와 필립을 내려다보았다.
“결국 나를 여기까지 행차하게 했느냐.”
“면목없습니다. 아버지.”
“가주님이라 불러라.”
“네, 가주님.”
찰리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사실 이번에 헤논에게 부마 자리를 뺏기면서 찰리의 입지도 상당히 위태로워졌다.
애초에 레베카 왕녀의 옆자리는 장남인 찰리가, 백작령은 차남이 다스리기로 했는데 계획이 어긋나면서 그의 거취가 붕 떠버린 것이다.
“사실 이런 무모한 계획따윈 참여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왕실 따윈 무너질 테니까.”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감사할 필요 없다. 너 때문에 이 작전을 수락한 게 아니니까.”
힐튼 백작 뒤로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후드로 전신을 감싼 흑의인이 등장했다.
어딘지 모를 음산한 기운을 풍기는 흑의인은 찰리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킬킬댔다.
“흘흘흘···철부지 도련님이군요. 그래도 젊은 나이에 상당한 성취를 이루셨으니 검술 쪽 재능은 백작님을 빼다 박았습니다그려.”
“검술 실력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호적을 파버렸겠지.”
당사자를 앞에 두고 하는 언사라기엔 지나치다.
이게 힐튼 가문의 분위기였다.
철저한 능력우선주의.
능력이 떨어진다면 가족이기 이전에 사람대접도 안 해준다.
“우르카님 덕분에 네 작전을 실행하는 거니 고마워해라. 제국에서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먼걸음하신 분이다.”
“감사인사 올립니다!!”
“흘흘흘, 서로 좋자고 하는 일에 민망하군요. 그보다 힐튼이 자랑하는 다섯 손가락을 보고 싶습니다.”
힐튼 가의 다섯 손가락.
가주와 직계를 제외하고 가문을 수호하는 5인의 강력한 익스퍼트 고수의 별명이었다.
뒤에 따라왔던 마차문이 열리면서 심상찮은 기운을 풍기는 네 명의 인원이 나타났다.
찰리의 입이 함지박하게 벌어졌다.
“잘 왔네! 잘 왔어!!”
찰리가 네 명의 인원과 일일이 악수하며 격하게 반겼다.
콧대 높은 손가락들은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일단은 가주의 아들이니 악수를 받아주었다.
반면에 우르카는 고개를 갸웃하며 의문을 드러냈다.
“다섯 손가락이라더니 어째 한 명이 안 보입니다?”
다섯 손가락의 리더이자 엄지로 불리는 덩치 좋은 사내가 인상을 콱 구겼다.
“젠장 맞을. 새끼이자 소지였던 호르만이 헤논에게 뒈졌수다. 오늘 우리는 그 복수를 하러 온 것이기도 하오.”
네 손가락이 일제히 헤논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웠다.
“기세는 좋군. 길게 시간 끌 것 없으니 바로 출발하지. 두 시간 안에 끝낸다.”
* * *
힐튼 백작을 위시한 소수 정예 부대는 왕궁으로 침입했다.
그 면면은 무척이나 화려했다.
무려 익스퍼트 고수만 여섯 명이었다.
익스퍼트 상급인 데이비드와 엄지.
익스퍼트 중급인 검지, 중지, 약지.
익스퍼트 초급인 찰리.
그리고 의문의 흑의인 우르카까지.
어딜 가도 가문의 최고수를 맡을만한 인재가 여섯이나 모였으니 무능력한 왕실 병사나 겨우 유저나 되는 기사들이 막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휑하니 빈 왕궁 정문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왜 수비 병력이 없지?”
우르카가 철문에 살짝 손을 대자 대문이 힘없이 열렸다.
데이비드가 찰리를 보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는 무언의 신호였다.
“저도 어찌된 영문인지 잘···”
“설마 정보가 새나갔나?”
“그럴 리가 없습니다. 통제는 철저히 했습니다!”
턱을 괴고 고심하는 힐튼 백작에게 우르카가 넌지시 말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정보가 새나갔다 해도 저들은 우리를 상대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이 맞다.
혹여나 세븐 스타 로이드 후작이 온다 해도 지금 전력은 못 막는다.
특히나 부실한 외다리로는 말이다.
헤논과 호넷 백작이 조금 신경 쓰이긴 해도 그래 봐야 수적 우위로 찍어누르면 그만이다.
“그나저나 아쉽군요. 병사가 많아야 제가 활약할 여지가 있을 텐데 말입니다.”
우르카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안쪽으로 이동했다.
여전히 사람은 코빼기도 안 보였다.
데이비드를 포함한 침입조는 왕좌가 있는 내부까지 들어와 버렸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고.
들어온 인원들은 크게 놀랐다.
검은 드레스를 입은 레베카 왕녀가 왕좌에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귀기 서린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어서오십시오.”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그들의 침입을 몰랐을 리가 없다.
데이비드가 미간에 주름을 모으며 찰리를 타박했다.
“도대체 정보 관리를 어떻게 했느냐?”
“면목없습니다. 아마 필립이 누설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돌아가서 그놈도 처리해야겠구나. 어차피 왕실이 무너지면 쓸모없는 팻감이 될 테니.”
손바닥을 비빈 힐튼 백작이 이번에는 왕좌에 앉아있는 레베카를 보며 입을 뗐다.
“보아하니 우리가 올 줄 알고 있었는데 자리를 지켰던 겁니까? 차라리 도망가셨어야죠. 아주 대책 없는 선택지를 고르셨군요.”
레베카가 그의 말에 침착하게 대답했다.
“힐튼 백작,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무릎을 꿇고 이번 일에 대해서 진심으로 사과한다면 단순한 해프닝으로 넘어가겠습니다.”
“크핫하하하하!!!”
양팔을 벌리고 광소하던 힐튼 백작이 웃음을 뚝 그쳤다.
동시에 숨막힐 듯한 압박감이 건물 전체에 내려앉았다.
“풋내가 나도 너무 심하게 나는군. 너 같이 어린년이 말하는 걸 어째서 들어줘야 할까?”
국왕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버렸다.
이미 힐튼 백작은 작정했다.
대화가 글렀음을 직감한 레베카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저희 쪽에서 인원을 보낼 테니 쓸데없는 저항은 마시고 편안히 따라오시면 됩니다.”
힐튼 백작이 손을 들자 찰리를 포함한 네 손가락이 일제히 움직여 왕좌를 학익진으로 포위했다.
이를 예상한 듯 왕좌 뒤편에서 숨어있던 호넷 백작이 튀어나와 검을 뽑아들고 레베카를 가렸다.
“감히 누구를 위협하느냐! 역적들은 왕가를 능멸한 대가를 치르리라!”
“호넷 백작, 왕실의 망령이여. 당신이 아니었다면 나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오늘이 자네의 마지막 근무일이네. 이만 저승에서 편히 쉬도록.”
두 세력 간의 갈등이 고조됐다.
1vs6의 누가 봐도 불리한 상황.
바로 그때였다.
짝! 짝! 짝! 짝! 짝!
규칙적이고 확실한 박수소리.
알현장의 음영이 드리운 곳에서 헤논이 나타났다.
걸을 때마다 망토가 펄럭이고 신록의 녹안은 짙푸른 빛을 흩뿌렸다.
“대단해. 정말 대단해. 왕국 팔백년 역사를 뒤져봐도 너희 가문만큼 막 나가는 놈들은 손에 꼽을 거다.”
헤논을 바라보는 힐튼 백작의 눈빛이 깊어졌다.
“헤논 로이드 자작.”
여태껏 힐튼 가문이 벌인 모든 사업을 망쳐버린 장본인이었다.
이 녀석만 아니었다면 진작에 로이드 가문은 무너지고 왕실은 제국에 넘어가고 힐튼 가문은 우뚝 비상했을 터.
힐튼 백작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은 헤논이 볼을 긁적인다.
“그렇게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보면 조금은 민망한걸.”
“네놈은 대체 뭐냐? 순수한 질문이다.”
난해하지만 한편으로는 직설적이다.
따라서 헤논도 질문에 걸맞은 대답을 돌려주었다.
“후작가의 망나니. 그게 다다.”
피식
힐튼 백작가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우문현답이다.
저놈이 악마살해자든 성파괴자든 상관없다.
근본은 결국 망나니였으니.
찍어누르면 그만이다.
“전원 발검.”
스르릉
엄지가 쌍도끼를 꺼냈고.
검지와 중지가 각각 대검과 레이피어를 들었으며.
약지가 비수 두 개를 손가락으로 빙빙 돌렸다.
찰리와 힐튼 백작도 검을 뽑았다.
우르카는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사태를 관망했다.
“콜록콜록!”
살벌한 기세가 장내를 뒤덮자 레베카가 저도 모르게 잔기침을 했다.
“이번에는 내가 제안할 차례군. 전하께서는 얌전히 저희를 따라오시죠. 헤논 너도 죽이기엔 아까운 인재니 항복하면 살려주겠다.”
데이비드의 헛소리에 주먹감자로 답해주었다.
“사생아답게 천박하기 그지없군.”
“그럼 이건 어때? 이것도 천박해?”
따악!!
손가락을 튕기자 알현장 곳곳에 숨어있던 매복조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시온, 캠벨, 라칸, 에이든, 아멜리아.
학익진으로 감싼 저들의 대형에 맞서 이쪽은 부채꼴 대형으로 섰다.
지원군의 면면을 본 데이비드 힐튼이 실소했다.
“뭘 믿고 그리 당당하나 했더니 겨우 이런 오합지졸이었는가? 우리는 전원이 익스퍼트급 고수다. 너희는 적어도 세븐스타를 불러왔어야 했다.”
우우우웅!!
힐튼 쪽 세력의 무기에서 눈부신 마나가 터져나왔다.
몸에 흐르는 기운이 형상화되어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그만큼 이들은 진짜배기 익스퍼트였다.
“어떠냐? 이제야 조금 실수했다는 생각이 드나?”
힐튼 백작의 도발에도 헤논의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당황할 거라 여겼던 헤논이 여전히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자 백작에게서 불쾌한 기색이 서렸다.
“허세만 가득하군. 애써 태연한 척해도 상황이 달라지진 않는···”
“전원 발검!!!”
우렁찬 목소리.
그와 동시에 우리 쪽에서도 마나가 터져나왔다.
시온의 단검.
캠벨의 바스타드 소드.
라칸의 쌍검.
에이든의 세검.
호넷의 롱소드.
아멜리아의 화살.
마지막으로 에메랄드빛 천마검까지.
너나 할 것 없이 각지각색의 선명한 마나가 휘몰아치며 진형 전체에 견고한 벨트를 형성했다.
설마 전원이 익스퍼트일 줄은 상상도 못했던 데이비드 쪽 인원이 경악으로 눈이 치떠졌고.
힐튼 백작의 얼굴도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데이비드 힐튼, 아직도 우리가 오합지졸로 보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