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123화 (123/200)

16장 위장 : 추적한 망나니

아르니아 중남부

버려진 폐허

황혼의 칠대사도는 오랜만에 교주의 소집을 받고 원탁회의장에 입장했다.

공석이 된 탐욕과 질투의 자리를 제외하고는 모든 인원이 자리에 착석했다.

게임기를 두드리는 어린 소년 식탐.

금발의 새하얀 법복을 입은 색욕.

무표정한 얼굴의 보라머리 나태.

거산과도 같은 덩치의 분노.

귀기 흐르는 해골리치 오만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후드를 뒤집어써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 황혼교주가 입을 뗐다.

“요새 통 좋은 소식이 들리지 않는군.”

회의는 교주의 질타로 시작된다.

“드루이드를 찾았다는 소문도, 황금가지를 찾았다는 소문도 들리지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 사도 둘이 결원인데 굳이 칠대사도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까?”

고오오오오

주변의 공기가 잘게 떨리고 천장에서는 돌 부스러기가 흘러내렸다.

정신이 혼미해질 것 같은 압박감이 대간부를 둘러쌌다.

칠대사도도 대륙 어디에서든 최강자로 대접받는 자들이지만 교주의 잠재력은 도무지 가늠하기가 힘들 정도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던 분노가 한쪽 무릎을 꿇고 부복한 채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교주님!”

“““죄송합니다.”””

분노를 필두로 사도 전원이 잘못을 인정했다.

그제야 조금 분이 풀리는지 황혼교주의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좋아. 드루이드나 황금가지는 못 찾았다고 쳐. 질투를 해치우는데 공조했던 헤논 로이드는 잡았는가?”

황혼교주의 시선이 색욕을 향했다.

얼굴이 있어야 할 후드 안쪽에는 시커먼 심연만이 존재했다.

사람의 영혼을 빨려들게 하는 미약한 소용돌이를 감지한 색욕이 애써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계획대로 잘 안 됐어요.”

“실패했다?”

“세븐 스타 요한을 구슬려서 대신 처리하도록 했는데 헤논 고놈이 무슨 사술을 부렸는지 오히려 요한을 포섭했지 뭐예요?”

교주는 대답이 없었다.

심기가 불편해진 건 확실했다.

“교주님, 건의할 사항이 있습니다.”

해골리치 오만이 앞으로 나섰다.

“무엇이지?”

“최근 저도 교의 숙원을 이루기 위해서 엘든 왕국을 삼키고자 했습니다만, 한 사람의 방해로 실패했습니다.”

“혹시 그 사람이 색욕이 목표한 놈과 동일인인가?”

“그렇습니다. 바로 헤논입니다. 놈은 제가 꼭두각시로 삼은 힐튼 가문을 무너트리고 수제자 우르카까지 죽였더군요.”

교주는 고목나무 같이 바싹 마른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건드렸다.

“헤논이라···요새 이름이 많이 들리는군.”

“맞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원이 모인 김에 정식으로 요청합니다. 교의 모든 수단을 사용해서 헤논을 처단하지요.”

오만이 제시한 건 헤논 척살령이었다.

나태가 즉시 반대했다.

“지나친 과투자다. 황혼교가 여기까지 클 수 있었던 이유는 음지에서 컸기 때문이지. 미꾸라지 잡자고 전체가 움직이면 손해가 너무 커.”

“언니, 그건 아니야.”

색욕이 오만의 편을 들었다.

“요한이 와서 이야기해주더라고. 헤논은 아직 젊고 미숙하지만 조금만 더 성장하면 영웅 카일의 후계자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장내에 침묵이 맴돌았다.

그만큼 영웅 카일이란 이름이 황혼교에 주는 무게감은 컸다.

무려 마왕 바알과 동귀어진하고 봉인진에 가두었으니 말이다.

“성기사는 최후의 전투에 참여했었고 카일과 바알님을 직접 봤었지. 그런 요한이 높은 점수를 줬다면 그만한 잠재력이 있다는 뜻 아닐까?”

색욕의 주장은 논리적이었다.

식탐과 분노도 고개를 끄덕인다.

황혼교주도 솔깃한 낌새다.

여기서 나태가 다시 나섰다.

“헤논의 친부는 세븐스타 로이드 후작이다. 그는 다른 세븐스타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지. 대놓고 쳤다가는 교의 정체가 표면에 노출되어 사방에서 공세를 받을 거다.”

“언니, 웃긴다. 도대체 누구 편이야? 헤논이 본교의 프로젝트를 사사건건 훼방 놓는데 가만히 있자는 얘기가 나와?”

“너야말로 작전 실패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싶어서 오만과 손을 잡고 무모한 계획을 제시하는 게 아닌지?”

“참 내 어이가 없어서. 언니라고 꼬박꼬박 예의 바르게 대해줬더니 싸이코년이 주제파악 못하고 기어오르네?”

“내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실과는 별개로 내 주장이 너의 주장보다 합리적이고 근거우선적이다. 또한 나를 인격적으로 모독해봐야 무쓸모하다.”

색욕이 사정없이 살기를 내뿜지만 나태는 지극히 태연했고 얼굴에는 일말의 감정조차 드러나지 않았다.

그야말로 무표정의 정석이었고 그 모습이 색욕의 분노를 더욱 부추겼다.

본격적으로 힘을 쓰기 시작하려는 찰나,

“그만.”

교주의 짧은 한마디가 모두를 휘어잡았다.

“색욕과 오만의 이야기 잘 들었다. 확실히 헤논이 본교에 위협까지는 아니더라도 귀찮은 존재임은 확실하군. 심지어 용사 카일의 후계자라는 말까지 나왔으면 무슨 수를 써서든 제거해야 한다.”

“맞죠!”

교주가 자기편을 들어주자 색욕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직 내 말 안 끝났다. 반대로 나태의 말도 이해가 간다. 현재 우리는 강하다. 그렇다고 해서 불필요하게 정체를 드러낼 필요는 없다. 마왕님이 봉인에서 나오지 못한 지금 시점에서는 특히나 말이다.”

모두가 교주의 다음 말을 주의 깊게 경청했다.

“따라서 절충안을 제시하겠다. 반대의견을 제시한 나태는 개인적으로 헤논을 척살하라. 만약 너까지 실패한다면 색욕과 오만의 말대로 본교의 전력으로 다해서 헤논과 로이드 가문을 부수겠다.”

교주의 명령이 떨어졌다.

이는 반대가 불가한 최종명령이었다.

대간부 전원이 절도있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명을 받듭니다!!”””

하나둘씩 퇴장하는 간부들.

나태가 나가려 할 때 뒤에서 색욕이 빈정거린다.

“어디 한 번 잘해보셔. 헤논한테 칼침 맞고 콱 죽어버려라.”

나태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표정을 유지한 채 사라졌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오만이 킬킬댔다.

“나태는 재밌는 여자다. 귀한 표본이지.”

“저년 어디 건수 하나만 걸려봐. 내 장난감으로 삼아서 평생 굴려주겠어.”

“흐흐흐, 죽은 다음에는 나에게 양도하도록. 나 또한 그녀에게 흥미가 많으니까 말이야.”

* * *

수도에서의 일이 끝나고 오랜만에 후작성으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들은 건 아버지의 호통이었다.

“연락 좀 하고 살아라! 그런 큰일이 있었으면 진작 나에게 도움을 청했어야지. 모든 걸 혼자 해결하려는 것도 좋지 않은 습성이다.”

유구무언.

할 말이 없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로이드 후작이 영지를 지킨 덕에 후작령을 호시탐탐 노리던 힐튼 백작가의 대군이 넘어오지 못했다.

현재 그 대군은 힐튼 가가 몰락하면서 공중분해 되었고 일부는 로이드 가문으로 흡수되었다.

남은 병사들은 찰리 힐튼이 데려갔는데 어차피 찰리는 레베카의 권속이므로 그쪽은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너는 로이드 가문의 적법한 후계자다. 늘 그 사실을 상기하고 스스로를 소중히 하여라.”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로잘린과 필립이 그렇게 되고 나서 로이드 후작은 나에게 지극정성이었다.

아무래도 남은 가족이 나 하나밖에 없어서 그런 감이 없잖아 있다.

나로서는 세븐스타에다가 돈 많은 아버지가 물심양면으로 도와준다는데 든든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게다가 이번 왕도행을 나서기 전에 선물 받았던 도서관 열쇠는 레베카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무척이나 유용했다.

로잘린과 필립 이야기가 나와서 한마디 하자면, 가문을 배신하고 힐튼 쪽에 붙었던 필립은 행방불명되었다.

이 미꾸라지 같은 놈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끼자마자 종적을 감추었단다.

뱀파이어가 된 찰리를 시켜 필립을 잡으라고 했을 때 이미 그는 자리에 없었다.

아마 엘든 왕국을 빠져나가 타국으로 달아나지 않았을까 싶다.

힐튼과 로이드, 왕가까지 배신한 필립이 더는 엘든 왕국에 머무를 수 없으니 말이다.

“잡히기만 해봐라.”

필립은 엘프의 침공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면서 외할아버지였던 몰티 자작과 몰티령 주민들을 수없이 죽게한 죄가 있다.

나중에 온 대륙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반드시 찾아내서 죗값을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한편, 레베카는 나와 헤어질 때 바닥이 축축해질 정도로 눈물을 쏟았다.

내가 아니었으면 그녀는 자신의 꿈조차 펼치지 못하고 왕국의 멸망하는 꼴을 눈 뜨고 구경할 뻔했다.

심지어 왕국의 미래를 위해 황혼교와 싸우겠다는 나에게 무한한 감사의 마음과 물심양면의 원조를 약속했다.

솔직히 레베카는 그리 큰 걱정이 안 되었다.

가장 반대파였던 힐튼 가의 가주인 찰리도 그녀의 권속이고 종친들의 수장인 아놀드 공작도 그녀만을 바라본다.

여기에 더해서 일전에 목숨을 구해줬던 안드레가 그녀를 도와서 잡다한 정무를 보조하기로 했다.

어차피 레베카를 따라 뱀파이어가 되었기도 했고 의외로 안드레는 머리 회전이 빠르고 일 처리가 깔끔했다.

“자주 놀러 오세요.”

“시간 날 때마다 찾아올게.”

로이드 후작성과 왕궁을 연결해놓은 텔레포트 웜홀은 작동 이상무.

앞으로 시간 날 때마다 정기적으로 왕궁에 들러 레베카의 얼굴을 보기로 약조하고 후작성으로 돌아온 참이다.

돌아오고 나니 개인수련할 시간이 많아졌다.

가부좌를 틀고 최근 왕궁에서 벌어진 전투에 대해서 관조하고 명상해보았다.

안타깝게도 힐튼 백작을 비롯한 다섯손가락의 싸움에서는 딱히 얻을 만한 정보가 없었다.

그나마 우르카에게서 리치가 어떤 식으로 전투하는지 데이터를 쌓은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반면에 성기사 요한과의 전투에서는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요한과의 전투는 마스터급 초고수와 처음으로 벌인 일대일 대결이었다.

비록 요한은 완전 방심상태였고 기습을 통해 승리했다지만 그것만으로도 마스터가 대충 어떤 느낌인지 체감했다.

‘전투 템포와 압박감이 차원이 달랐다.’

소드마스터를 목전에 둔 세바스찬과 여러번 대련을 했을 때와는 천지차이었다.

같은 소드마스터인 로이드 후작이 대련 당시에 나를 얼마나 봐줬는지도 절절히 느꼈다.

앞으로 마스터급 고수를 넘어서려면 나 또한 그들과 비슷한 경지에 올라야 한다.

현재 이원마나와 영역수련을 부단히 이어나가고 있지만 아직은 깜깜한 안갯속을 헤쳐나가는 기분.

조급해하지 말고 드루이드 스킬과 함께 차근차근 향상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암~!”

아직 꼭두새벽이다.

저 멀리 하품을 하며 수련장으로 들어오는 캠벨이 보였다.

“역시 부단장은 부지런해. 도대체 잠은 언제 자는 거야? 자기는 자?”

“때가 될 때 틈틈이 잔다.”

“하여간 대단하다니까.”

바스타드 소드를 꺼내든 캠벨이 허공에 검을 휘두르려다가 멈칫한다.

“뭔가 허전한데···”

“나도다.”

평상시와는 무언가가 다르다.

나도 캠벨도 원래대로 나왔고 수련장이 딱히 바뀐 게 없는데.

마치 있어야 할 사람이 없는 그런 느낌···

“하녀는 어디 있지?”

그러고보니 시온이 없다.

근면성실의 화신인 그녀는 캠벨보다 항상 10분은 일찍 나왔는데.

저번처럼 또 늦잠이라도 자는 걸까.

“피곤한가 보다. 오랜만에 좀 쉬게 내버려두자.”

“그러지 뭐.”

다시 수련에 집중하기를 1분.

도저히 집중이 안 돼서 캠벨을 바라봤는데 마침 캠벨도 나를 쳐다보고 있다.

“역시···아니지?”

“맞아. 그 깐깐한 하녀가 절대 그냥 늦을 리가 없지.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해.”

천마검을 검집에 넣고 캠벨과 함께 시온의 숙소로 달려갔다.

문을 똑똑 두드렸다.

안에서 응답이 없다.

손잡이를 잡고 돌려보니 저항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없는데?”

방은 텅 비어있었다.

대신에 시온의 침대 위에는 메모지 한 장이 놓여있었다.

손으로 집어서 내용을 확인했다.

-도련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끝까지 곁을 지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뭐지? 이게?

머릿속에 종이 뎅 울린다.

실제로 뒤통수를 맞지도 않았는데 뒤통수가 얼얼하다.

캠벨도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다.

“하녀가 뭘 잘못 먹었나?”

당황스럽지만 해야할 일은 확실했다.

도망간 하녀를 잡아야 한다.

시온은 <시온라이크>의 주인공.

실력부터 시작해서 인성까지 완벽하게 조형된 인물이다.

그런 여자를 허무하게 놓칠 순 없지.

“바로 추적한다.”

“좋아. 꽤 재밌는 술래잡기가 되겠군.”

후작성을 나섰다.

새벽이라 통행량 자체가 없다.

그러다보니 미세하지만 시온의 지나간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나름 추격을 뿌리치려 했는데, 어림도 없지.”

시온도 암살자 출신에 북부에서 근무했으니 흔적 지우는 솜씨가 일품이다.

하지만 이걸 어쩌나.

나랑 캠벨 또한 북부에서 매일같이 몬스터 추적하는데 이골이 났는데.

오죽하면 몬스터 똥까지 찍어 먹었을까.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있는 나뭇가지 하나도 매의 눈으로 잡아내는 북부 레인져가 우리였다.

그녀가 남긴 흔적을 바탕으로 계속해서 추노했다.

힌즈 호수에서 서북쪽으로 달리기를 한참, 이쯤에서 드루이드 스킬을 한 번 쓰기로 했다.

“잠시 기다려.”

[라이프 컨트롤]

[시야 공유]

[테이밍]

토끼 한 마리를 테이밍해서 멀리 보냈고 근처에 나무를 이용해서 시온이 있나 훑어보았다.

정찰 가능한 한계선에 위치한 나무에 들어가서 시야를 살폈을 때, 마침 멀리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음을 포착했다.

“찾았다.”

[윈드 컨트롤]

[헤이스트]

속도를 내야할 때다.

발목에 바람을 감았다.

단체 이속 버프를 받으며 소란이 벌어진 곳까지 날듯이 이동했다.

금세 목적지에 도착했다.

평탄한 대지에 시온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입가에 피를 흘린 채로.

“시온!!”

다급한 마음에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더니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도련님···죄송합니다.”

시온이 정신을 잃었다.

그녀의 앞에는 생전 처음 보는 여자가 있었는데, 기절한 시온의 멱살을 붙잡고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주시했다.

나와 맞먹을 정도로 키가 크고 신체비율이 좋은 여자였다.

무엇보다 시온과 똑같은 보라색 머리카락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네가 헤논이구나.”

한눈에 봐도 범상찮아 보이는 여인.

드루이드의 직감이 경종을 울린다.

천마마저도 나에게 경고했다.

-애송아, 있는 힘껏 도망쳐라. 네 상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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