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 위장 : 죽게된 망나니
“네가 헤논이구나.”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저 여자가 진심으로 노리는 사냥감은 나라는 것을.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태.”
짧막한 대답이지만 파장은 컸다.
옆에 있던 캠벨이 펄쩍 뛰었다.
“나태? 우리가 아는 그 나태 맞아? 황혼의 대간부 나태?”
“맞다.”
보통이라면 거짓말로 치부했겠지.
평범한 사람은 자기 스스로 황혼교의 간부라 떠벌리지 않을 테니까.
허나 담담한 태도와 평온한 어조, 살벌한 기세가 그녀가 진짜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유야 어찌 됐건, 이곳에 직접 온 건 당신의 실수입니다. 우리 가문의 전력은 막강하고 가주는 무려 세븐스타의 로이드 후작님이십니다.”
캠벨에게 눈짓하자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은 그가 땅을 박차고 후작성으로 되돌아갔다.
이제 그는 로이드 후작과 세바스찬을 데려올 터.
나태는 조금 있으면 강력한 적에게 포위당할 텐데도 일말의 동요 없이 침착했다.
지원을 요청하러 자리를 뜨는 캠벨마저 내버려둔다.
“로이드 영지에는 왜 오셨습니까?”
“널 죽이러.”
역시나 목적은 나였는가.
“그렇다면 절 죽이면 되지, 어째서 시온을 건드렸습니까?”
“시온에게 널 버리라고 권유했더니 끝까지 네 곁을 지키겠다고 하더군. 그래서 손 좀 봐줬어.”
다른 건 몰라도 시온을 다치게 한 건 용서가 안 된다.
천마검을 뽑고 기세를 방출했다.
-애송아, 너보다 확실히 윗줄이다. 그래도 하겠느냐?
“도망치면 저 여자가 절 순순히 보내줄까요?”
-하긴 그도 그렇군. 최대한 발버둥쳐라. 나도 도와주마.
나태는 투지를 불태우는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입을 뗀다.
“넌 내가 와서 다행이라 생각해라.”
“어떻게 된 사고방식이면 황혼의 대간부가 직접 행차한 걸 다행으로 여깁니까?”
“그러지 않았다면, 황혼교 전체가 달려들어 너와 로이드 가문을 찢었을 테니까.”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황혼교 간부회의에서 결정난 사안이다. 본교의 정체가 드러날 걸 감수하고 로이드 가문을 지도에서 지우기로 했다.”
소름이 돋았다.
저 여자의 말이 사실일까.
왠지 진짜 같다.
“그랬던 사안을 내가 단독으로 널 죽여서 마무리 짓기로 했다.”
“우와! 정말 잘됐군요! 그래서요? 무엇을 바라는 겁니까? 날 죽이겠다는 사람한테 고마워라도 해야 합니까?”
“······안 되겠군. 시온 때문에 널 죽일까 말까 오래 고민했다. 아무래도 네가 사라져야 모든 상황이 정리될 것 같다. 이만 끝내자.”
나태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동시에 천마의 다급한 목소리.
-아무 쪽으로나 굴러!!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옷이 더러워지는 건 개의치 않고 바로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내가 있던 자리에 빗살 같은 검격이 그어졌다.
‘단 1초, 아니다, 0.1초라도 늦었다면···’
심장에 바람구멍이 났겠지.
그만큼 나태의 공격은 빠르고 정확하고 치명적이었다.
반면에 나태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떻게 피했지? 계산대로면 넌 방금 공격에 심장이 뚫렸어야 했다.”
“최근 들어 계산을 맹신하는 적을 많이 만나네. 얼마 전에 오만의 수제자 놈도 그렇게 뻗대다가 훅 갔지.”
“뭐···계속하다 보면 알겠지. 단순히 운이 좋았는지 실력이었는지 말이야.”
나태가 재차 공격했다.
솔직히 공격이 안 보였다.
천마게이션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왼쪽!!
-오른쪽이다 이눔아!
-씨밤바야. 더 빨리 움직이라고!!
오랜만에 천마의 고함과 걸쭉한 욕설을 들으며 이리 구르고 저리 굴렸다.
내 판단과 직감으로 피하는 건 진작에 포기했다.
오로지 천마의 명대로 로봇처럼 회피했고 그 결과 5분간 이어진 나태의 공세를 버텨냈다.
“실력이 맞긴 맞군. 뭔가 꺼림칙하지만 말이야.”
나태가 감탄했다.
나 또한 나태를 인정했다.
그녀 정도면 마스터 중에서도 수위에 드는 실력임이 틀림없었다.
적어도 현역으로 뛰는 카리나 정도는 와야지 상대가 될 것 같았다.
공격 속도와 순간 가속력만큼은 여태껏 만난 누구보다도 빨랐다.
“하지만 이것도 견딜 수 있을까?”
나태가 양팔을 벌리자 사방으로 비수가 쏟아져 나왔다.
미세한 실로 연결된 여덟 개의 비수는 그녀의 신체를 몸통 삼은 거미가 다리를 활짝 펼친 모양새였다.
하나하나가 살벌한 오러를 품은 비수가 각기 의지를 가진 것처럼 나를 향해 쇄도했다.
“제기랄.”
몸을 재빠르게 움직인다고 피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 팔방위를 모두 점하고 들어오는 공격이니 방어해야만 한다.
[우드 골렘 소환]
[스톤 골렘 소환]
쿠콰콰콰콰!!!
지면이 뒤집어지며 거대한 골렘 열 기가 위풍당당하게 등장했다.
맞은편에 있던 나태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열 기의 골렘 전부가 보디가드처럼 자신의 몸을 던져서 나를 감쌌다.
서로 몸을 겹쳐서 이글루 형태의 튼튼한 방어라인을 형성했다.
바리케이드를 형성한 골렘들을 오러 섞인 단검들이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콱! 콰콱! 콰콰콰콱!!!
나무와 돌로 이루어진 골렘들은 오러소드 앞에서 종잇장처럼 찢겨나갔다.
그래도 골렘의 거체와 부딪히는 바람에 단검의 속도가 살짝 느려졌고 잠깐의 틈새에 방어할 시간을 벌었다.
이원마나를 극성으로 끌어올린 채 천마검을 이리저리 휘둘러서 단검을 막아냈다.
쾅! 쾅! 콰쾅! 콰콰쾅!
-어이구! 내 허리야! 애송이가 허약한 늙은이 잡는구먼!
오러소드와 부딪친 마나소드는 실시간으로 마나가 훅훅 깎여나갔다.
다행히도 천마검 자체가 워낙 고급검인 데다가 천마의 영혼이 어느 정도 오러를 견뎌주었다.
따라서 나는 내 몸을 지키는 데만 전념했다.
오러소드에 부서진 골렘들도 핵이 파괴된 건 아니라서 금세 본체를 복구하더니 다시 몸을 겹쳐 나를 막아주었다.
[우드 스피어]
[스톤 스피어]
여기에 더해서 우드와 스톤 스피어를 시전했다.
공격용으로 쓰려고 시전하진 않았다.
어차피 이런 허접한 공격은 맞히지도 못하고 맞혀봐야 소용도 없다.
대신에 나는 돌창과 나무창을 서로 부딪치게 했다.
콰직! 콰직! 콰지직!
충돌한 나무와 돌이 가루가 되어 비산했다.
마침 바람이 옅게 부는 날이다.
먼지는 나를 중심으로 회오리치며 연막이 되어주었다.
그러자 중거리에서 단검 조종으로 날 공격하는 나태의 시야가 가려졌다.
물론 나태 정도의 초고수라면 시야가 없어도 느낌으로 날 공격하겠지만, 그래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사소한 변수 하나하나가 큰 영향을 미쳤다.
“드루이드는 스킬 활용력이 무궁무진하군. 어디로 튈지 도무지 모르겠어.”
나태가 내가 드루이드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의외였으나 급박한 상황에서 놀랄 여유조차 없다.
곧바로 고대의 유물을 투입했다.
[고대의 유물]
[중력장 생성기]
[일정 시간 동안 특정 영역에 자신에게 유리한 중력지대를 만든다.]
[남은사용횟수 0/5]
[충전요망]
중력장 생성기를 작동시켰다.
마지막 사용 횟수다.
일대에 중력장이 펼쳐지며 나태의 몸이 무거워졌다.
그 틈을 활용하여 속박스킬 연계.
[바인드]
가시가 가득한 굵은 나무뿌리가 나태를 꽁꽁 묶었다.
중력장을 펼친 상태로 시전한 스킬이었기에 다행히 그녀를 속박할 수 있었다.
[스톤 랜스]
[스톤 실드]
돌창과 돌방패로 나태를 짓누르거나 관통하려 했으나 오러로 전신을 둘러싼 그녀에게는 어림없는 일.
나도 이게 진짜는 아니었다.
항상 마무리는 오러불렛이다.
리볼버를 꺼내서 꽁꽁 묶인 나태를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오러불렛 장탄수]
[1/6]
타아아앙!!
일전에 성기사 요한은 방심하다가 방금과 똑같은 스킬 연계에 크게 다칠 뻔했다.
과연 나태는 어떠할까.
요한처럼 데미지를 입었을까.
아니면 멀쩡할까.
그도 아니면 심각한 상처를 입었을까.
자욱한 먼지 구름이 걷히자 시야가 선명해졌다.
나태는 별다른 부상 없이 태연하게 서 있었다.
‘제기랄.’
아까운 고대유물까지 모조리 퍼부었는데 상처 하나 없는 나태를 보고 속으로 쌍욕을 날리기도 잠시,
주르르륵
나태의 이마에서 한줄기 선혈이 흘러내린다.
처음에는 핏방울이 송골송골 맺히는 수준이었다면 이내 가랑비가 되더니 나중에는 소나기가 되었다.
오러불렛이 이마를 스치면서 살갗을 제대로 찢어버린 것이다.
얼굴 반쪽이 시뻘겋게 물든 나태가 혀로 자신의 피를 핥고는 중얼거렸다.
“아직 마스터도 아닌데 매서운 전투감각과 센스. 고수를 앞에 두고서도 밀리지 않는 투지. 예측을 불허하는 다양한 스킬에 훌륭한 검술까지. 네가 용사 카일의 후계자라 불리는 이유가 있구나.”
나태는 철저히 사실에만 근거하여 나를 평가했다.
나 또한 싸우면서 나태에게 궁금한 점이 생겼다.
“질문이 있습니다.”
“말해라.”
“물도마뱀 발걸음을 썼습니까?”
천마게이션을 쓰지 않았다면 회피가 불가능했던 그녀의 예리한 공격.
분명 시작은 물도마뱀 발걸음이었다.
시온이 훈련 때마다 쓰던 보법인데 못 알아볼 리가 없다.
비록 위력과 속도는 차원이 달랐지만 말이다.
“맞다. 물도마뱀 발걸음. 용케 알아봤구나.”
“어째서 당신이 시온과 집사장님이 쓰는 기술을···”
“멈춰어어!!!”
공력 가득한 사자후와 함께 세바스찬이 등장했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 그는 가쁜 호흡을 진정시키고는 쓰러져 있는 시온부터 확인했다.
그녀의 맥박이 뛰고 있음을 확인한 집사장은 이번엔 내 상태를 확인했다.
“도련님은 괜찮으십니까?”
“아직은요. 아버지는 오시는 중입니까?”
“아뇨. 저만 왔습니다.”
“네?”
세바스찬의 대답을 듣자 황당했다.
나태의 전투력을 직접 경험해보니 나와 세바스찬만으로는 부족했다.
이쪽도 같은 경지의 마스터가 있어줘야 했다.
“조금만 시간을 끌어주세요. 제가 직접 아버지를 데려오겠습니다.”
“아닙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세바스찬은 묘하게 침착했다.
나태도 어느새 검을 납검하고 팔짱을 끼고 있다.
갑자기 소강상태.
영문 모를 나에게 세바스찬이 충격적인 사실을 전했다.
“나태는 제 아내입니다. 정확히는 전처가 올바른 표현이겠군요. 시온의 친모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놀라면 몸이 굳는다 했던가.
지금 내 상태가 딱 그러했다.
인제 보니 이상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내가 왜 이걸 몰랐지?’
칠대사도가 단신으로 적진 한가운데에 들어온 것부터 비정상이다.
뿐만 아니라 전투 도중에 시온과 세바스찬의 전매특허 이동기인 물도마뱀 발걸음을 사용했고.
심지어 시온과 완전히 똑같은 보라색 머리카락이지 않던가.
세바스찬은 굳은 얼굴로 나태와 마주했다.
드디어 부부 간의 상봉이다.
이혼 부부지만 말이다.
“여긴 어쩐 일이냐?”
“헤논을 죽이러 왔어.”
“약속을 잊었나?”
“시온과 너를 살리는 게 약속이지. 거기에 헤논은 포함되지 않아.”
“나와 시온에게는 도련님을 지킬 의무가 있다. 그를 죽이려면 우리부터 죽여라.”
내내 무표정해서 인간미라고는 느껴지지 않던 나태의 얼굴 근육이 처음으로 꿈틀거렸다.
“당신이 가르쳐줬잖아. 가족 간의 약속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고.”
“맞다. 그러니 약속을 지켜라.”
“그러면 더더욱 헤논을 죽여야 해.”
“어째서지?”
“본교에서 헤논을 찍었어. 이번에 내가 소득 없이 물러가면 다음번에는 전부 몰려와서 후작령을 황무지로 만들 거야. 그러면 당신과 시온도 죽겠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했다.
그동안 내가 벌려놓은 일이 꽤 된다.
카리나를 도와서 질투를 잡았고 탐욕을 잡은 리앙도 후작령에서 가깝다.
게다가 오만의 수제자인 우르카까지 죽였으니 벌써 황혼의 절반은 내가 무너트린 것과 마찬가지.
결국 교 전체에서 척살령이 내렸는데 나태가 직접 수습하겠다고 나선 모양이다.
“알아들었지? 이제 비켜. 당신과 시온이 살려면 헤논은 죽어야 해.”
“그럴 순 없다.”
“상관없어. 당신을 제압해두고 헤논을 죽이면 될 일이야.”
세바스찬과 나태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히며 불꽃을 튀겼다.
두 부부가 서서히 기운을 끌어올릴 때, 머릿속에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스쳤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좋은 생각은 떠올렸을 때 즉시 실천하는 게 제격.
황급히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둘 다 멈추시지요.”
일촉즉발의 순간이 잠시나마 누그러졌다.
“무슨 속셈이지?”
“도련님, 위험합니다. 제 뒤로 오십시오.”
상반된 입장에 처한 둘을 보면서 한가지 제안을 던졌다.
“오늘부터 나는 죽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당신은 황혼교에 돌아가 헤논이 죽었다 보고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