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 위장 : 원숭이 망나니
예전부터 갈라나흐 지방에는 넓고 울창한 숲이 있었다. 이 숲은 공기가 맑고 경관이 좋아서 휴가철마다 귀족들이 자주 방문하는 피서지였다.
그랬던 숲이 마왕 바알이 봉인된 이후 마수의 숲으로 변모해버렸다. 오크와 고블린부터 시작해서 온갖 종류의 몬스터가 창궐했고, 이를 막기 위해서 갈라나흐에는 모험가 길드가 설치되었다.
길드가 설치되고 나서 대규모 몬스터 소탕이 이루어졌다. 모험가 길드는 제국군의 도움까지 받아 마수의 숲 심처까지 들어갔다.
진격은 승승장구였다. 물밀 듯이 밀고 들어가는 군대에 몬스터들은 혼비백산했다. 오우거와 트롤조차 개떼처럼 달려드는 연합군에게 무력하게 사냥당했다.
이때만 해도 연합군은 꿈을 꾸었다. 몬스터에 잠식된 숲을 원래 자신이 알던 아름다운 숲으로 되돌려놓는 행복한 꿈을 말이다.
적어도 마수의 숲지기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의 능력은 괴랄했고 강력했다. 평균을 아득히 상회했다. 기세등등했던 대군은 허무하게 격파되었고 행복했던 꿈은 순식간에 악몽으로 돌변했다.
숲지기의 전투력은 측정 불가. 무슨 능력을 쓰는지도 불명. 엄청난 손해를 본 연합군은 마수의 숲 토벌에 손을 뗐다.
대참사 이후 길드의 움직임은 수동적으로 변했다. 의뢰를 걸어 마수의 숲에서 튀어나오는 소수 몬스터만 해치우거나 가끔씩 숲의 초입새만 정리했다.
골칫거리가 된 마수의 숲을 두고 갈라나흐 거주민들은 세븐스타급 초고수 파견을 희망했으나 엉덩이 무거운 고수들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렇게 마수의 숲은 영원히 방치되는 듯 하였으나.
숲지기 토벌 의뢰가 오늘 수락되었단다.
“뭐라고! 그게 사실인가? 앗 뜨거!”
갈라나흐 모험가 길드 지부장 데클렌은 벌떡 일어나다가 바지에 뜨거운 차를 쏟고 말았다.
“누가 의뢰를 수락했어?”
“모험가 칸입니다.”
모험가 칸.
요새 많이 들리는 이름이다.
푸른매 용병단 출신으로 켐밸과 함께 돌풍을 일으키는 주역.
지부장도 예의주시하던 인물 중에 하나였다.
“칸? 칸이 왜?”
“듣기로는 새롭게 파티원이 된 실버 등급 모험가를 단번에 골드로 올리겠다고 의뢰를 수락한 것 같습니다.”
데클렌은 어이가 없었다.
고작 파티원을 승급시켜주겠다고 목숨이 백 개여도 부족한 의뢰를 받아?
애초에 숲지기 토벌에 등급 제한이 없던 이유는 단체 레이드만이 답이라고 판단해서다.
결코 단신이나 일개 파티로 잡으라고 올려놓은 의뢰가 아니었다.
“당장 칸을 잡아와! 그 실버 등급 모험가 누군지는 몰라도 조작을 해서라도 골드로 만들어 줄 테니 목숨 버리지 말고 돌아오라고 해!”
“그게···”
대답하던 직원이 난색을 표했다.
“이미 늦었습니다. 칸은 마수의 숲으로 들어가버렸거든요.”
“오, 신이시여.”
이마에 손을 짚은 데클렌이 소파에 털썩 몸을 묻었다.
“오랜만에 갈라나흐에 인재가 나오나 했더니 이렇게 끝나버리나.”
“혹시 모르죠. 칸이라면 가능할지도요.”
“하하하···그래···그래야지.”
데클렌은 간절히 빌었다.
의뢰 성공은 기대도 하지 않으니 그가 몸 성히 돌아오기만을.
“혹시라도 칸이 숲지기를 토벌한다면 그에게 어떤 보상을 내려야 할까요?”
“세븐스타조차 거절한 의뢰다. 그런 의뢰를 해결한다면 칸은 세븐스타와 동급이란 얘기겠지.”
데클렌은 자신이 말하고도 웃겼는지 헛웃음을 지었다.
“에라이! 어차피 우리 손을 떠난 일이야. 저녁이나 먹자고.”
* * *
마수의 숲.
희뿌연 안개가 시야를 가린다.
눅눅한 공기는 들이마실수록 페부를 옥죄었다.
비정상적으로 자란 나무와 풀뿌리가 낯선 방문객을 노려보는 듯했다.
끼이이이이이
멀리서 들려오는 정체불명 존재의 울음소리.
브랜 아재가 결국 털썩 주저앉았다.
“우린 이제 끝났어. 끝났다고···”
“안 끝났습니다. 일어나시죠.”
“저희 그냥 돌아가면 안 될까요?”
“괜찮아. 그냥 와.”
메리안도 겁을 먹었는지 연신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두리번거렸다.
유일하게 태연한 사람은 나와 캠벨뿐이었다.
하얀 눈이 지겹게 쌓여있고 몬스터가 지천에 널려있던 북부 숲과 비교하면 마수의 숲은 양반이었다.
“이쯤 되니 너무 궁금하네. 자네는 어떻게 그리 멀쩡한가? 마치 숲이 주는 압박감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듯하군.”
브랜의 질문에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선천적으로 겁이 없습니다.”
가볍게 말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여기까지 오면서 얼마나 많은 강자와 사투를 벌였는가. 목숨을 거는 것은 일상이었으며 죽을 고비 또한 수없이 넘겼다.
그때마다 얻었던 귀중한 경험이 나를 성장시켰고, 세븐스타나 황혼의 대간부와 마주하면서도 당당할 수 있는 자신감을 배양해줬다.
이런 배경을 모르는 브랜과 메리안에게는 그저 내가 신기해 보일 수밖에.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단 말이야. 푸른매 용병단은 다 자네 같은가?”
“전부 그렇진 않습니다.”
“역시 자네들이 별종이었어.”
고개를 끄덕이는 브랜과 메리안을 보며 피식 웃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내가 갑자기 서는 바람에 뒤에서 아무 생각 없이 따라오던 메리안이 내 등짝에 이마를 콩 박았다.
“아얏!”
“왜 멈췄나? 드디어 제정신이 들었어?”
“마침 저희와 동행할 일행이 와서요.”
“일행? 어떤 미친놈이 마수의 숲을 동행하겠다고 따라와?”
“저기 오네요.”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십수명의 사내가 우리를 둥글게 둘러쌌다. 선두에 선 우두머리의 얼굴이 낯익었다. 길드에서 시비가 걸렸던 골목대장 아쉘이었다.
“흐흐흐, 어디까지 들어가나 했는데 말 그대로 거침없이 진격하는군. 정말 숲지기라도 잡을 생각이었나?”
아쉘을 본 브랜 아재가 기절초풍한다.
“히익!!!”
“멍청이 브랜, 내가 분명 기회를 줬는데 걷어찼지. 별명과 딱 어울려.”
“여긴 어쩐 일이지?”
내가 앞으로 나서자 아쉘의 미소가 진해졌다.
“굳이 물을 필요 있나? 천지분간 못하고 날뛰는 망아지 한마리 도축하는 날이다.”
“혹시 그 망아지가 나는 아니겠지. 내 얼굴은 망아지처럼 위아래가 길쭉하진 않아.”
“크핫하하하!! 이 상황에서도 여유 부리는 배짱만큼은 칭찬해주마. 하지만 너는 선을 넘었다.”
아쉘이 손을 들자 뒤따라온 부하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무기를 들었다.
전부 골드 등급으로 내뿜는 기세가 만만찮았다.
브랜 아재와 메리안의 낯빛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솔직히 고맙다. 너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고 있었거든. 대놓고 해치우기엔 눈치가 보였는데 제 발로 숲으로 들어가 주다니. 깔끔하게 죽여서 시체는 마수의 밥으로 던져주마.”
아쉘 패거리가 포위망을 좁혔다.
나는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있었다.
“왜 검을 안 들지?”
“검을 뽑을 만한 상대여야 뽑지. 너희에겐 사치다.”
“······다 끝난 마당이지만 충고해주지. 무모한 용기는 그 자체로 만용이다. 이만 죽어라!”
아쉘 패거리가 달려든다.
캠벨에게 눈짓을 했다.
브론과 메리안을 지키라는 무언의 명령이었다.
신호를 알아들은 캠벨이 슬쩍 뒤로 물러나서 덩치 큰 몸통으로 브론과 메리안을 가렸다.
[윈드 컨트롤]
[헤이스트]
꿉꿉하게 내려앉은 마수의 숲에 한줄기 청량한 바람이 불었다.
동시에 흐릿해지는 신형.
스팟!!
헤이스트로 이동속도 버프를 받은 내 스피드는 그야말로 전광석화였다.
눈을 감았다 뜨면 어느새 상대의 등 뒤로 와 있었다.
“느려.”
골드 등급 모험가 한 놈의 뒤통수를 가볍게 어루만져주자 녀석이 펄쩍 뛰며 까무러쳤다.
“!!!”
상식을 넘어서는 속도에 적이 주춤했다.
아쉘 또한 당황한 모습.
“동요하지 마라! 누구나 필살기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법. 저놈이 저 속도를 계속 유지할 수는 없을 거다.”
아쉘의 말이 맞다.
느려터진 속도를 계속 유지할 필요는 없지.
지금보다 더 빨리, 더 신속하게 움직인다.
[윈드 컨트롤]
[헤이스트]
[순보]
파앙! 파아아앙!!
헤이스트에 순보까지 추가했다.
귓청을 찢을 듯한 파공성이 천둥소리를 연상케 했고 그 자체로 내면의 두려움을 자극했다.
이젠 눈으로도 잡기 힘든 움직임이었다.
마하를 돌파한 신형이 주르륵 늘어나며 갈라나흐의 양아치를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퍽! 퍼억! 퍽! 퍽! 퍼억!
일부러 치명타를 먹이지 않았다.
딱 죽을 만큼 아플 수준으로만 급소를 골라 때렸다.
명치를 얻어맞은 놈들은 하나같이 배를 움켜쥐고 숲에 오기 전 무엇을 먹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그조차도 부족하다.
구토하는 놈의 머리를 지그시 눌렀다.
김치전에 얼굴을 담근 녀석들은 뱉어낸 음식을 코로 다시 흡입하는 신개념 되새김질을 해야만 했다.
“커헉!”
“크허억!”
“괴물이다···”
“이런 미친!”
아쉘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벙 찐 표정이 돌아오질 않았다.
이 정도로 수준 차이가 심하다니.
단순히 불리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상대조차 안 된다.
“그만 때려···”
“잘못했습니다!”
“끄아아악!!”
도대체 뭐하는 놈이란 말인가.
푸른매 용병단 출신이라길래 이쪽도 패거리를 전원 끌고 왔다.
‘그래봐야 용병 나부랭이고 머릿수로 밀어붙이면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제대로 착각했다.
칸이 날뛰는 모습은 맹수의 왕 사자와도 같았다.
아쉘은 칸이 푸른매 용병단장 본인이 아닌지 의심될 지경이었다.
아니, 용병단장이라 해도 저 정도 무위를 보일지 모르겠다.
‘괜찮아. 아직 괜찮아.’
자신에게는 비장의 카드가 있으니까.
친형 아론이 나서지 않았다.
그리고 아론은 무려 다이아 등급의 모험가다.
형과 내가 동시에 합공한다면 아무리 강해보여도 충분히 물리칠 수···
“이놈은 뭐냐? 몰래 뒤에 있는 사람을 노려? 치사한 녀석이네.”
철썩! 철썩!
고개를 돌리니 덩치 큰 캠벨이 아론의 뒷목을 붙잡고 뺨다구를 후려갈기고 있다.
솥뚜껑 같은 손바닥이 휘둘러질 때마다 누런 옥수수가 튀어나오고 면상이 곤죽이 되었다.
“살려줘···잘못···커헉!!”
믿었던 아론마저 칸도 아니고 그 옆에 있던 캠벨에게 당하는 꼴을 본 아쉘은 다리에 힘이 탁 풀렸다.
어느새 주변을 모조리 정리한 칸이 나타나서 씩 웃고 있다.
아쉘은 저도 모르게 자동으로 무릎을 꿇고 손을 들었다.
“죄송합니다.”
“크크크크크···”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아쉘을 내려다보는 칸. 악마가 미소를 지으면 딱 저런 표정이 아닐까 싶다.
멱살을 잡힌 채 허공에 떠오른 아쉘의 바짓가랑이가 축축하게 젖었다. 머릿속에는 칸을 괜히 건드렸단 생각뿐이었다.
“이 꽉 깨물어. 안 그러면 이 나간다.”
퍼어어억!!!! 콰직!!
“으으읍!!”
분명 말해준대로 있는 힘껏 깨물었는데.
앞니가 우수수 털린다.
피를 줄줄 흘리는 아쉘을 본 칸이 씩 웃는다.
“생각해보니 이 꽉 깨물어도 빠지는 건 마찬가지네. 네 마음대로 해라.”
“제은자앙!!
줄줄 새는 발음과 함께 아쉘의 눈에서도 물이 줄줄 샜고 가랑이에서도 물이 줄줄 샜다.
이후로 아쉘은 더는 물을 흘리지 않을 때까지 먼지나게 처맞았다.
* * *
잠시 소동이 있었지만 마수의 숲 진입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아쉘 패거리는 우드 컨트롤로 소환한 나무뿌리를 밧줄 삼아 꽁꽁 묶어버리고 앞장세웠다.
브랜 아재와 메리안은 나와 캠벨이 상식을 초월한 강자임을 인식하고 한결 안심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마수의 숲은 위험했다.
특히 심처로 갈수록 마기가 짙어지고 상급 몬스터가 나왔다.
“쿠워어어어!!!”
“으악! 트롤이다!”
“살려줘!”
갑자기 등장한 트롤에 선두에 있던 아쉘 패거리가 혼비백산했다.
이들은 도망가고 싶었지만 한놈이 다리가 풀려 주저앉자 같이 연결된 밧줄 때문에 다같이 우르르 넘어졌다.
“오, 신이시여.”
평상시엔 신 대신 술을 찾을 것 같은 털복숭이 사내들이 애타게 부르짖을 때 나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서걱!!
에메랄드 빛이 번쩍하는 순간 트롤의 목이 떨어졌다.
무려 4m에 달하는 트롤이 단칼에 절명하는 모습을 본 메리안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어···?”
“역시 믿기지가 않아.”
저번에 트롤 사냥을 함께했던 브론 아재는 또 봐도 감탄스러운지 혀를 내둘렀다.
“으어, 으어어어···”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 아쉘은 백치가 되어버린 듯하다. 아니면 이가 몽땅 빠져서 언어를 잃어버린 걸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트롤은 이후에도 계속 만났고 오우거까지 나왔다. 오우거부터는 지능적이고 민첩해서 드루이드 스킬도 써주었다.
[스톤 랜스]
[스톤 실드]
땅에서 튀어나온 거대 암석이 오우거의 시야를 가리고 뒤편에 솟아오른 돌 송곳이 발목을 찌른다.
쿠워어어!!
중심이 휘청거리는 순간 끝난 게임이다.
윈드 컨트롤로 완벽하게 뒤를 잡고 천마검을 내리긋자 오우거도 별수 없었다.
천천히 무너지는 거체를 목격한 일행은 더는 생각하기를 포기한 듯 그저 나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거의 다 왔군.”
목적지 부근이란 느낌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브랜 아재를 비롯한 아쉘 패거리의 호흡이 급격하게 불안해졌다.
이제는 안개에 섞인 흑색 기운이 시각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자정작용]
[완전 면역 상태]
나야 아무런 상관 없었고.
캠벨도 마나로 몸을 보호해서 나름 괜찮은 상태였다.
메리안은···
‘대단하군.’
성녀라는 이름값답게 숲의 마기가 오히려 그녀에게서 도망가고 있었다.
마치 여기 있으면 안 될 것이 있다는 듯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사방으로 흩어지는 마기.
그녀는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들오들 떨면서 주위를 불안하게 둘러보았다.
걷다보니 두 갈래 길이 나왔다.
이곳만 지나면 목표했던 숲의 중심부였다.
한쪽은 평탄한 길이었고 다른 한쪽은 누가 봐도 마기가 짙은 음침한 길이었다.
길이 나뉘자 자연스럽게 멈췄다.
“칸, 어디로 가야해?
“잠시만.”
[라이프 컨트롤]
[시야 공유]
라이프 컨트롤로 나무에 빙의해서 길에 뭐가 있는지 확인하려 했다.
[스킬 시전 실패]
[마기에 침식된 나무]
확실히 마수의 숲은 마수의 숲이다.
마기에 물든 나무 때문에 시야가 통제되었다.
테이밍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곳에 동물도 없을뿐더러 있어도 마기를 잔뜩 머금어서 도움이 안 되었다.
‘하는 수 없지.’
큰 문제는 아니다.
나에게는 드루이드의 직감이 있으니까.
북부 레인져 시절부터 내게 쭉 도움이 되어왔던 직감이었다.
위험을 예고하면 항상 그곳에 위험이 있었다.
그런 내 직감이 음침한 길은 함정이고 평탄한 길이 진짜 길이라 말해주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인해보자.
“아론.”
“예···옛!”
아까와 달리 무척이나 공손한 태도.
“저기 평탄한 길 들어가 봐.”
“네?”
“귀먹었어? 저쪽 길로 들어가 보라고.”
저 아론이란 놈은 자기 패거리가 싸울 동안에 메리안과 브론을 노렸던 비겁한 녀석이었다.
심지어 본인은 다이아 등급이면서.
시험하기엔 이 녀석이 제격이다.
“하지만···”
“싫어? 저쪽 길로 갈래?”
음침한 길은 누가봐도 죽음의 길이었다.
그에 비해 평탄한 길은 옅은 햇빛까지 비쳐서 그나마 나아보였다.
“그래도···”
“싫으면 어쩔 수 없지. 유언이나 남겨라. 아프지 않게 보내줄게.”
“아닙니다! 가겠습니다!”
결국 아론이 울며 겨자 먹기로 평탄한 길로 향했다.
그가 어느 정도 걸었는데도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살았다고 생각한 아론의 얼굴이 환해졌다.
“여긴 괜찮습니다. 오셔도 될 것 같습니···끄아아악!!!”
땅이 무너지며 회색빛의 몬스터가 솟아올랐다.
웜 종류 중에서도 샌드웜과 함께 흉포하기로 소문난 그레이웜이었다.
거대지렁이가 입을 벌리자 수천 개의 뾰족한 이빨이 드러났고, 그 끔찍한 입으로 허우적대는 아론을 한입에 삼켜버렸다.
우적우적우적
뼈째 씹어먹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간만에 포식을 즐긴 그레이 웜은 배가 부른지 트름을 꺽 하더니 집으로 돌아갔다.
뒤집어졌던 흙바닥이 언제 그랬냐는 듯 평평하게 다져지고 처음 봤던 평탄한 길이 되었다.
“아하! 저쪽은 길이 아니었구나? 옆길로 가자.”
목소리가 너무 해맑았나.
뭐,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법.
어쨌든 음침한 길이 진짜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