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 위장 : 토벌한 망나니
2차전은 싱거웠다.
축복의 악마는 비장의 무기였던 축복이 먹히지 않자 이전에 만난 단탈레온급의 악마나 다름없었다.
-커헉!! 어떻게 마나를 버리고도 계속해서 마나를 사용할 수 있지? 몸속에 여러 종류의 기운을 넣고 다니기라도 한단 말이냐?
“잘 파악했네. 맞아. 바로 그거야.”
-미친놈···너 같은 인간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지금 봤네. 좋은 경험 했다고 생각해. 마지막 경험이 되겠지만 말이야.”
초록마나를 버린 상태에서 전투하다 보니 새로운 감각이 생겼다.
이전까지는 세 종류의 마나를 항상 뭉쳐서 사용했는데, 상황이 이렇다 보니 푸른마나와 용혈을 각각 따로 사용할 기회가 생겼다.
그랬더니···
츠파아앗!!
검기의 색깔이 다채로워졌다.
푸른 마나만 쓸때는 푸른 빛의 검기가.
용혈을 사용할 때는 은빛의 검기가 허공을 수놓았다.
단순히 색깔만 다양해진 건 아니다.
예전부터 종류는 다르지만 결국 마나는 똑같은 마나라고 여기면서 똑같이 사용해왔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아주 멍청한 짓이었어.’
성격과 신체 조건이 천차만별인 아이 셋을 동일한 커리큘럼으로 육성했달까.
세 아이를 분리해서 맞춤 과외를 해줄 생각조차 못했던 과거의 내가 부끄러웠다.
아이디어가 떠오른 김에 숲지기를 샌드백 삼아 시험해보았다.
그랬더니 눈앞에 처음 보는 시스템창이 생겼다.
[마나 각성을 깨우쳤습니다.]
[초록마나 각성도 50%] [↑0.0%]
[푸른마나 각성도 38%] [↑1.5%]
[용혈 각성도 42%] [↑0.5%]
[혼합률 22%] [↓3.5%]
역시나.
마나별로 각성치가 달랐구나.
성질이 완전히 다른 마나를 언제나 단체행동 시키려 했으니 각성 불균형이 올 수밖에.
천마가 이전에 경고한 기운의 충돌, 혹은 주화입마도 이 수치의 불균형이 초래할 결과였겠지.
이번에 마나에도 각성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앞으로 마나 수련을 어떻게 해야할 지 대강의 청사진이 그려졌다.
한편, 내가 여러 마나를 돌려가며 각성도를 높이자 본인이 연습 상대임을 눈치챈 비프론스가 버럭 화를 냈다.
-감히! 누굴 상대로 여유를 부리고 있느냐! 으아아아아아!!!!
콰콰콰콰!!!
마지막 발악인가.
악마의 몸에서 마기가 폭사된다.
그러자 숲 전체에서 마기가 요동쳤다.
구워어어어어!!!
몬스터의 포효가 마수의 숲 전역에서 들렸다.
“무슨 짓을 한 거냐?”
-크흐흐흐,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그때를 위한 대비책이지.
쿠구구구구!!
땅이 울리며 지축이 좌우로 흔들렸다.
바인드로 나무줄기를 소환해서 지면에서 살짝 발을 뗐다.
마치 들소떼가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마수의 숲 몬스터는 마기를 먹고 사는 존재. 그 마기를 흩어버렸으니 혼란에 빠진 녀석들이 이곳으로 몰려올 거다. 크하하하핫!!
숲지기의 호언장담대로 온갖 종류의 몬스터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고블린, 코볼트, 오크, 랫맨, 샤벨타이거, 트롤, 오우거까지.
별의별 몬스터들이 떼로 몰려와 이빨을 내미는데 그 기세가 사뭇 살벌했다.
“크아아아!!!”
“으아악!!”
가장 먼저 달려왔던 오우거가 휘두른 방망이에 아쉘 패거리 중 한 명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이를 시작으로 다른 놈들도 몬스터의 공격에 줄줄이 죽어나갔다.
브론과 메리안은 캠벨이 지켜줘서 다치지 않았다.
“젠장! 이 빌어먹을 숲에 들어오는 게 아니었는데!!”
무슨 수를 썼는지 몸을 속박하던 나무뿌리를 풀어버린 아쉘이 바락바락 악을 쓰며 브론과 메리안이 있는 쪽으로 몸을 던졌다.
덕분에 아쉘 혼자 살아남았다.
-칸이라고 했나? 네놈이 강하다는 건 인정하마. 단순히 강하기만 한 게 아니라 별종 중의 별종. 하지만 아무리 너라도 수많은 몬스터를 검 하나로 상대할 순 없다. 순순히 최후를 받아들여라.
비프론스가 전세가 역전된 줄 착각하고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하긴, 나 같아도 저만한 몬스터 대군이 뒤에 있으면 기가 살겠다.
하지만 그는 모르고 있다.
아직 나는 전력의 절반도 꺼내지 않았다는 것을.
비프론스와 싸우며 이동기를 제외하고는 드루이드 스킬을 꺼내지도 않았다.
그리고 다수의 집단을 상대하는데 드루이드 스킬은 탁월한 효과를 보인다.
구구구구구···
아까보다 훨씬 큰 진동이 찾아왔다.
흡사 지진이 일어난 듯했다.
웅장하게 드러난 열 기의 거체.
돌과 나무로 이루어진 골렘에게서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뭐, 뭐냐? 어디서 갑자기 골렘이 나타났지?
비프론스가 당황할 동안 이미 상황은 벌어졌다.
열 기의 골렘은 몬스터 무리로 돌진하더니 양 떼 속에 들어간 늑대처럼 사정없이 안쪽을 휘저었다.
일부 몬스터들이 화살을 날리거나 이빨로 물어뜯었지만 핵을 공략할 지능이 없는 그들로써는 무용지물인 공격이었다.
[우드 컨트롤]
[스톤 컨트롤]
[스피어 발동]
이뿐만이 아니다.
성기사 요한이나 대간부 나태급 초고수를 상대할 때야 시야 가리개용이지, 이런 몬스터 상대로 뾰족한 돌과 나무창은 제대로 먹힌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나무와 돌 세례는 자연의 분노와 같았고, 이를 정면으로 마주한 놈들은 새된 비명을 질렀다.
“끼에에엑!”
“쿠워어어어!”
“크헉! 크헉!”
그야말로 학살이었다.
중간에 바인드 스킬과 스톤 랜스 스킬로 가까이 다가오는 놈들을 나무뿌리로 묶어버리고 심장과 머리통을 돌송곳으로 찔렀다.
그제야 압도적 강함을 마주한 몬스터 몇이 등 돌려 달아나려 했으나 어림도 없는 일이다.
[스톤 실드 발동]
거대한 비석이 연달아 땅에서 솟아오르며 퇴로를 막아버리는 바리케이드를 형성했다.
의도치 않게 숲 속 콜로세움에 갇히게 된 몬스터의 종착역은 오로지 죽음뿐이었다.
“세상에···”
“이게 인간 하나의 힘이라고?”
오죽하면 같은 파티원인 브랜 아재와 메리안마저 넋이 나가서 나를 멍하니 쳐다본다.
캠벨만이 이 상황이 익숙한 듯 남은 몬스터 잔당을 해치우며 씩 웃었다.
“역시 부단장이라니까.”
“칸이다. 칸.”
“그, 그렇지! 역시 칸!”
다시 홀로 남은 비프론스.
최후의 수까지 허무하게 막힌 그는 다리가 풀렸는지 엉덩방아를 찧었다.
-네놈은 괴물이다. 이미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어···혹시 마계의 존재냐? 악마가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다.
비대칭적인 강함을 목격한 자들이 나를 악마라 하는 건 인간이나 악마나 다들 똑같다.
하지만 나는 인간이다.
정확히 말하면 인간과 엘프의 피가 반반 섞인 하프엘프고 아르니아 대륙 출신이다.
[자이언트 우드]
[자이언트 스톤]
양팔에 거대한 손이 생성된다.
“제법 재밌었다. 그래도 약간은 아쉬웠어. 조금 더 강했으면 도토리나 고대의 유물까지 썼을 텐데 말이야.”
숲지기는 어이가 없었다.
무려 근 삼백 년을 살아온 자신이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종류의 기운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검술 실력까지 뛰어난 검사는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상대의 최고전력이 아니었다.
기천에 달하는 몬스터 대군을 손가락 하나 까딱해서 해치우는 이 녀석은 그야말로 아르니아 대륙의 수호신이었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아직도 남은 무기가 있다고.
인간을 하등 종족으로 여기고 무시해왔던 비프론스에게는 평생 처음 겪는 대굴욕이었다.
-마수의 숲을 나에게 유리한 무대로 꾸미기 위해 이십 년을 노력했다. 하지만 숲에서 너와 싸우는 건 참으로 바보 같은 일이었구나.
“이제야 깨달았군. 이미 늦었지만 말이야.”
쩌—억!!
거대해진 양팔로 손뼉을 쳤다.
방금 마기를 폭사하며 모든 힘이 빠진 숲지기는 손바닥 사이에 눌려 죽음을 맞이했다.
이십 년간 갈라나흐 주민에게 공포를 안긴 것치곤 초라한 마무리였다.
“끝났군.”
“끝났다.”
모두가 털썩 주저앉았다.
브론 아재가 혼이 빠진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인제 와서 묻기도 민망하다만, 자네 진짜 정체가 무엇인가?”
“평범한 모험가 칸입니다.”
아무도 믿는 눈치가 아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헤논 로이드 자작은 힘을 키울 때까지 죽은 사람으로 있어야 하니까.
“그나저나 수천에 달하는 몬스터 시체라니. 이걸 들고 길드에 돌아가면 떼부자가 될 수 있겠어.”
브랜 아재의 말이 맞다.
몬스터 사체는 엄청난 가치를 지닌다.
내재된 마기의 양도 어마어마하고 말이다.
그리고 내 동료 중에는 마기를 아주 좋아하는 녀석이 하나 있다.
“뀨우!!”
냄새를 맡은 아기용이 호리병에서 튀어나왔다.
메리안과 브론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저 아이는 누구지?”
“드래곤입니다.”
“······잠시 자겠네. 헛것이 보이는구먼.”
결국 브론 아재는 스스로 머릿속 퓨즈를 끊어버렸다.
기절한 브론 옆에 메리안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코코를 바라보았다.
역시 이맘 때 소녀에게 귀여운 건 무적이다.
“뀨뀨!!”
하지만 지금 코코는 메리안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눈앞에 진수성찬이 펼쳐져 있었으니.
기천에 달하는 몬스터와 악마 비프론스의 시체에 달려들어 마기를 마음껏 섭취한다.
우적우적
“그래. 많이 먹어라.”
아마도 코코가 저걸 다 먹으려면 꽤 장시간이 걸릴 테니 그동안 잠깐 눈을 붙이기로 했다.
눈을 감는 내 의식 속으로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코코 — 헤츨링 Ⅰ]
[진화율 — 100%] [↑98%]
[진화가 시작됩니다]
[헤츨링 Ⅱ가 되었습니다]
[뇌전 스킬을 배웁니다]
* * *
번쩍!
눈을 떴다.
정신적 피로가 말끔히 풀렸다.
옆에서 캠벨이 졸고 있다.
불침번을 서는 줄 알았건만.
“뀨!”
정신을 차린 나를 보고 코코가 날아와서 안겼다.
“잘 먹었어? 왜 이렇게 무거워졌지?”
“뀨우우우!!”
애가 갑자기 10kg은 늘었다.
묵직하면서도 포동포동해졌다.
역시 아이는 많이 먹이는 게 답인가.
또 하나 달라진 점은 이마에 달려있는 뿔 길이가 조금 길어졌다.
단순히 몸집만 커진 게 아닌 셈이다.
좌우로 나있는 뿔에서는 파지직 하며 전류가 생성되었다.
아직은 전기충격기 수준이지만 성장하면 얼마나 강력한 스킬로 변모할지 기대되었다.
“뀨!”
파지직
“끄아악!!”
코코가 전기 뿜는 뿔로 캠벨의 엉덩이를 찔렀더니 고개를 꾸벅대던 그가 펄쩍 뛰었다.
“아니! 이 빌어먹을 도마뱀이!”
“뀨뀨뀨!”
붕 날아오르는 코코의 얼굴에는 캠밸에게 엿을 먹였다는 만족감이 가득했다.
어째 코코가 성장할수록 캠벨의 앞날이 험난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앗! 칸님!”
나 말고도 다른 파티원도 자고 있었나 보다.
퉁퉁 부은 눈으로 다가온 메리안이 다급하게 말했다.
“아쉘이 사라졌어요!”
“어라? 내가 졸기 전까지는 분명 있었는데?”
캠벨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 무력에 두려움을 느끼고 도망갔나.
귀찮게 되었다.
이번 숲지기 토벌에서 아쉘은 너무 많은 비밀을 알게되었다.
메리안이 성녀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내가 상식 이상의 힘을 갖췄다는 것까지.
브랜 아재야 같은 편이라 입단속을 시키면 되지만 아쉘은 그럴 수 없으니 가서 잡아야 했다.
“움직이자.”
[윈드 컨트롤]
[헤이스트]
단체 이속 버프를 걸어줬다.
메리안은 발목을 부드럽게 휘감는 산들바람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몸이 날아갈 것 같아요.”
바람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달렸다.
다행히 아쉘은 멀리 못 갔다.
이전에 아론이 죽었던 두 갈래 길 반대편에서 그를 발견했다.
“아쉘.”
“지긋지긋한 놈들! 그렇게 치열하게 싸우고 어떻게 한 시간도 안 쉬고 왔지?”
[끈질긴 생명력]
[체력 회복량 증가]
육체적 피로야 금방 회복되니 정신적 피로만 회복하면 곧바로 움직일 수 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아쉘로서는 내가 괴물처럼 보일 만했다.
“어딜 도망가? 넌 필요 이상으로 많은 걸 알아버렸어. 이제 죽으나 사나 우리와 함께 있어야 한다.”
“거절한다. 갈라나흐에 도착하는 대로 네 정체를 모두에게 까발릴 테다. 메리안이 성녀라는 사실도 말하겠어. 벨라누스 신성국에서 좋아라하겠군.”
아쉘은 이전에 학습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양지바른 길을 놔두고 음침한 길로 달렸다.
캠벨이 나를 슬쩍 본다.
“어떻게 할까? 가서 잡을까?”
“잠시.”
손을 들어서 캠벨을 만류했다.
드루이드의 직감이 발동했다.
왠지는 모르겠으나 음침한 길을 위험하다.
저번 아론 때와는 다른 진짜 ‘직감’이었다.
그리고···
쿠워어어어어!!
땅이 뒤집어지며 그레이웜이 재등장했다.
수천 개의 이빨이 아쉘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땅에 못 박힌 듯 선 아쉘이 자조적으로 읊조린다.
“재수가 없으려니···”
그게 아쉘의 유언이었다.
아쉘을 삼킨 그레이웜은 언제 그랬냐는 듯 집으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아까 몬스터 대소동이 일어나면서 그레이웜도 양지 길에서 음침한 길로 사냥터를 바꿨나 보다.
어쨌든 아쉘이든 아론이든 고마운 형제다.
매번 우리에게 올바른 길을 알려줬으니 말이다.
“이번엔 햇빛 좋은 길로 가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