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 가짜 : 주입한 망나니
홀로니움 대신전.
한 달 전만 해도 이곳에 어떻게 들어올지 걱정했는데.
지금은 다르다.
나는 성기사의 인도에 따라 신전 최심부로 향하고 있었다.
‘모두 계획대로다.’
메리안을 그림자 성녀로 활동시킨 후, 신전에 편지를 한 통 꽂아넣었다.
그녀의 배후 세력에 대해 알고 있다는 메시지.
안 그래도 그림자 성녀를 잡지 못해서 안달이 나있던 신전 측은 내가 내민 미끼를 냉큼 물었다.
“성녀님 앞에서는 몸가짐을 각별히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분은 신성국의 미래이며 대륙의 희망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까부터 안내하는 기사가 왜 이리 쫑알쫑알 말이 많은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끄쇼.”
“네?”
“신경 끄라고. 두 번 말해야 알아듣는 타입인가?”
성기사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이유.
천마의 속삭임 때문이다.
-성기사에게서 구린 냄새가 난다. 아무래도 성녀가 황혼교 대간부임을 알고 있음이 틀림없어. 저놈 또한 황혼교도일 가능성이 크다.
천마가 색을 밝히는 늙은이이긴 해도 묘하게 촉이 좋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아까부터 색욕을 찬양하라는 정신 나간 소리를 해서 거슬렸다.
“크흠흠, 칸님께서 유명한 모험가임은 알지만, 이곳은 신성국입니다. 부디 자중해주시길.”
밉상들은 꼭 한마디씩 덧붙이더라.
그런 놈을 위해서 특별 선물을 주기로 했다.
[우드 컨트롤]
[바인드]
땅바닥에서 솟은 나무뿌리가 성기사의 발목을 슬쩍 휘감았다.
신전 안이라 완전히 방심하고 있던 성기사는 발목이 제대로 걸려버렸다.
콰당!!!
“커헉!”
어이쿠.
내가 봐도 꼴사납게 넘어졌다.
길거리에서 저렇게 넘어지면 창피해서 얼굴 가리고 뛴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이곳은 신전이라 도망칠 곳도 없다.
“신전에 헌금이 부족한가 보군. 바닥공사가 영 부실해.”
시뻘개진 얼굴로 일어선 성기사가 얼른 무릎을 털더니 몸을 홱 돌린다.
“따라오시지요.”
진작에 닥치고 길 안내만 할 것이지.
결국 당하고 나서야 얌전해졌다.
도착한 곳은 예배실이었다.
신성한 분위기가 가득한 공간.
바닥에는 태양 문양이 새겨진 카펫이 깔려있었고 벽면에는 각종 성물과 석상이 가득 늘어섰다.
황혼의 대간부라는 작자가 이런 곳에서 생활하다니, 그동안 만났던 대간부 중에서 가장 위선적이고 가증스러운 자다.
“어서오세요. 저는 레플리입니다. 벨라누스님의 대리자를 맡고 있죠.”
레플리 성녀는 금발벽안의 미녀였다.
상상 속 성녀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래서일까.
위화감이 짙게 느껴졌다.
수수하지만 사람 냄새 진하던 메리안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성녀는 높은 단상 위에서 나를 맞이했다. 마치 자기가 위고 너는 아래라는 것처럼.
“모험가 칸입니다.”
*
말투는 공손하나 고개는 뻣뻣하다.
신에 대한 찬양이나 눈부신 미모에 대한 칭찬은 일언반구 없다.
레플리의 눈썹이 꿈틀했다.
‘건방진 놈.’
여태껏 만난 사람 중에 이토록 오만한 자가 있었던가.
제국의 대귀족조차 자신을 만나면 한 수 접고 들어가는데, 이놈은 뭘 믿고 근거 없는 자신감만 보이는지.
당장이라도 무릎 꿇리고 발등에 키스시키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았다.
칸에게는 자신이 원하던 정보가 있었기에.
‘필요할 만큼 단물을 빨아먹고 죽여주마.’
레플리의 눈빛이 스산하게 빛났다.
*
‘역시나 불편해하는군.’
짧은 시간이었으나 색욕에 대한 분석은 끝났다.
그녀는 성녀로써 모든 사람에게 추앙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여자였다.
허영심 덩어리에 뒤틀린 인성.
새하얀 성녀복과 진한 화장으로 가리려 해도 추악한 본질은 여전했다.
“형제님께서 보낸 편지는 잘 읽었습니다. 정말 그 내용이 사실인가요?”
“맞습니다. 그림자 성녀의 배후세력을 알고 있습니다.”
“그 사기꾼 여자는 신성국의 큰 골칫거리지요. 벨라누스님께서도 우려하시는 중입니다.”
“안타까운 이야기군요.”
“실례가 안 된다면, 형제님께서 언급하신 흑막의 정체가 누구인지 알려주시지요.”
드디어 본론이다.
바로 알려주는 것도 좋지만.
여기서는 튕겨주자.
“글쎄요. 배후세력이라기엔 조금 애매해서 말이지요.”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성녀의 기세가 돌변한다.
“설마 거짓 정보를 가져오신 겁니까?”
숨막히는 압박감.
같이 따라온 성기사가 주춤댄다.
반면에 나에게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자정 작용]
[상태이상 완전 면역]
드루이드의 스킬도 작용했거니와 그동안 쌓아온 마나 경지도 상당한 수준이다.
성녀는 내 평온한 표정을 보고 조금은 놀란 표정이다.
‘과연 오리하르콘 모험가인가.’ 작게 중얼대는 소리를 예민한 내 귀가 잡아냈다.
“정보는 정확합니다. 그저···하하! 이것 참 곤란하군요.”
뒤통수를 연신 긁적이자 그제야 말뜻을 알아들은 성녀가 말을 바꿨다.
“제 불찰이군요. 형제님의 가져온 정보는 뜻깊게 쓰일 것이며 벨라누스님도 이에 합당한 축복과 은혜를 내려주실 겁니다.”
드디어 보상 이야기가 나왔군.
본론이다.
“저는 오리하르콘 모험가입니다. 돈도 벌 만큼 벌었고 명성도 얻을 만큼 얻었지요. 그래서인지 항상 색다른 무언가를 원하게 되더군요.”
“형제님, 편하게 말씀하세요. 제 귀는 열려있습니다.”
“귀족 작위도 사고 파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종교 국가의 작위도 살 수 있는지는 의문이 들더군요.”
“형제님께서는 지금 신성국의 명예 주교라도 되고 싶단 말씀이신가요?”
“겨우 주교라니요. 대주교 자리를 원합니다.”
내 말을 듣던 성기사가 격분한다.
“어딜 감히! 적당히 해야지!”
“크림슨 형제, 가만히 있으세요.”
기사를 진정시킨 성녀가 말을 이었다.
“대주교는 신성국에서도 몇 없는 자리입니다. 그만한 책임과 의무가 따르는 지위지요. 무엇보다 신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년도 아니고 황혼의 대간부가 신에 대한 믿음을 운운하길래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게다가 대주교는 차기 교황 후보를 겸하는 자리라서요. 아무래도 형제님의 요구는 무리인 듯 싶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즐거운 자리였습니다.”
미련 없이 몸을 홱 돌렸다.
물론 미련이 엄청 남는다.
황금가지를 수색해야 하니까.
허나 급한 마음을 숨기는 기술도 실력의 일환이다.
‘어차피 아쉬운 건 저쪽이야. 내가 갑이다. 저쪽은 을이고.’
레플리 쪽은 그림자 성녀를 잡기 위해 정보가 다급하다.
저쪽에서 먼저 나를 잡을 거라 예상했고, 그런 내 예측은 정확히 맞아들어갔다.
“어딜 나가려는 건가?”
크림슨이라 불린 성기사가 칼자루에 손을 올려놓은 채로 앞길을 가로막았다.
“나갈 때 나가더라도 아는 건 다 토해내고 나가라. 감히 성녀님 앞에서 배짱을 부린 죗값도 치르고 말이야.”
슬쩍 뒤로 돌아 레플리를 바라보았다.
“성녀님, 요새 양아치들도 이런 식으로는 거래 안 합니다. 보내주시죠.”
질문을 들은 성녀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모든 건 벨라누스님의 뜻대로입니다. 벨라누스님은 형제님께 듣고 싶은 게 많으시다는군요.”
오호라, 방관하겠다라.
성녀의 암묵적인 허락이 떨어졌다.
기세등등해진 크림슨이 검을 뽑아들고 다가왔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네 죄를 뉘우쳐라. 그렇다면 팔 하나 자르는 걸로 봐주···”
[윈드 컨트롤]
[헤이스트]
[순보]
실내에 때아닌 바람이 불었다.
내 신형이 주르륵 늘어났다.
예상범위를 벗어나는 속도에 크림슨의 동공이 확대된다.
“이게 무슨!!”
섣불리 검을 휘둘러보려 했으나 이미 나는 지척이었다.
“이런 좁은 실내에서 롱소드라고? 넌 싸움의 기본조차 안 됐어.”
라이트훅 갈기고 복부에 어퍼컷.
골이 흔들리고 토사물이 올라온다.
털썩 무릎을 꿇은 놈의 턱에 니킥을 갈겨주자 크림슨이 눈이 회까닥 뒤집어지며 흰자를 보였다.
그가 무력화되는데 소요된 시간은 정확히 5초였다.
“혹시 크림슨이 쓰러진 것도 벨라누스님의 뜻이었습니까?”
*
‘뭐야? 왜 이렇게 세?’
레플리는 깜짝 놀랐다.
오리하르콘 등급패라고 듣긴 들었으나 진짜 실력은 의문에 휩싸인 모험가였다.
사전 조사에 따르면, 칸은 다른 일반적인 모험가처럼 차근차근 점수를 쌓지 않았다.
마수의 숲지기를 토벌해서 단숨에 승급한 모험가였다.
그런 만큼 분명 실력에 거품이 끼어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게 웬걸.
칸의 실력은 소문 이상이었다.
‘그래도 크림슨이 만만한 놈은 아닌데.’
일처리가 엉성하긴 해도 나름 익스퍼트에 오른 상당한 고수였다.
그런 고수를 단번에 제압할 정도면 상대는 전력의 절반조차 안 썼을 가능성이 높았다.
‘신성군을 불러서 머릿수로 찍어누를까?’
레플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누가 봐도 악수였다.
어디서 이런 놈이 떨어졌는지.
그녀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
레플리 성녀의 동공이 흔들린다.
크림슨이 허무하게 당할지 몰랐겠지.
“대단하시군요.”
“방금의 무례는 기억에서 지우겠습니다. 이만 가보지요.”
예배실의 문고리를 잡았다.
방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
“형제님, 그대로 나가시면 저도 형제님을 보호해 드릴 수 없습니다.”
끝까지 협박으로 일관하는 성녀.
이쯤 되면 감탄이 나온다.
그러나 성기사까지 때려눕히고 약한 모습을 보일 이유가 없다.
똑같이 맞불작전으로 대응했다.
“마음대로 하시지요. 다만 절 건드린 대가는 매우 비쌀 겁니다.”
마지막 방지턱까지 넘었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진짜로 퇴장하려 했다.
여전히 급한 건 상대편이었으니.
“잠시만요. 멈추세요.”
결국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성녀 쪽에서 백기를 들어올렸다.
“좋습니다. 당신이 이겼어요. 대주교 자리를 드리지요.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정보가 마음에 들어야 준다는 이야깁니까?”
“···네, 맞아요.”
“걱정은 붙들어 매시죠. 제 정보를 들으면 성녀님께서도 놀라실 테니까요.”
거짓말 보따리를 그럴싸하게 풀어볼 시간인가.
“그림자 성녀의 배후세력, 그는 바로······”
잠시 뜸을 들이자 기다리던 레플리 성녀가 안달이 나버렸다.
내가 오리할콘에 실력 넘치는 모험가만 아니었으면 당장 고문해서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빼내고 싶다는 표정.
너무 기다리게 해도 역효과가 나니까 슬슬 본론을 꺼내볼까.
“······헤논 로이드 자작입니다.”
* * *
이후 내가 레플리에게 고발한 내용은 이러했다.
헤논 로이드 자작은 황혼의 대간부 나태에게 치명적인 기습을 당하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이후 그는 잠적을 감췄고 세간에는 행방불명 되었다 알려졌다.
실종 기간 동안 헤논은 나태의 정체를 알아냈다.
그녀의 정체는 무려 제국의 밤을 좌지우지하는 정보 길드 <밤거미>의 마스터였다.
어마무시한 거물임을 확인한 헤논은 자신 또한 지지세력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신성국을 휘하에 두고자 음모를 꾸몄다.
“그러니까···형제님은 헤논 로이드가 신성국 어딘가에 숨은 채 그림자 성녀 행세를 하고 있단 말인가요?”
“아니죠. 헤논이 무슨 신성력이 있다고 그러겠습니까? 그림자 성녀는 따로 있습니다. 헤논은 그녀를 뒤에서 조종해서 성녀로 만들려는 거죠.”
“기존의 성녀인 저를 실각시키고 새로운 성녀를 내세워서 신성국을 통째로 집어삼킨다?”
“정확하십니다.”
레플리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린다.
“형제님의 말씀이 맞다고 칩시다. 그러면 이런 의문이 남네요. 어떻게 이 모든 걸 알고 있습니까? 칸 형제께서 헤논 본인이 아니고서야 알지 못할 비밀인데요.”
과연 황혼의 칠대사도라 이건가.
색욕은 그 이름값답게 예리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해당 질문에 대답은 미리 준비해두었다.
“성녀께서는 제가 모험가를 하기 전에 어디서 근무했는지 아십니까?”
“푸른매 용병단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맞죠. 그리고 푸른매 용병단은 헤논 로이드의 사설 용병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헤논 로이드와 푸른매 용병단장의 관계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했다.
이건 내가 헤논 본인이니 더욱 실감 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당시 저는 힘을 숨긴 채 평범한 용병 행세를 하고 있었습니다만, 우연히 단장의 사무실을 청소하다가 헤논의 편지를 발견했습니다. 모든 비밀을 알게 된 비결이죠.”
“그러면 신성국에 오신 이유가···”
“네. 헤논은 나태에게 뺨을 맞고 성녀님께 화풀이하고 있습니다. 자기 세력이 필요하다는 건 알겠으나, 그렇다고 죄 없는 레플리님을 실각시킨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너무나 이기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최대한 화난 척을 했다.
네가 너의 아군이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주입했다.
그녀의 방심을 살 수 있도록.
“솔직히 말하면 헤논이 어딨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신성국 어딘가에 있는 건 확실하죠. 저는 로이드 자작이 반드시 대가를 치르길 바랍니다. 레플리님을 도와드리고 싶으니 허락해주십시오.”
레플리는 솔깃한 표정이다.
거의 다 넘어왔다.
“무력이 뛰어난 대주교 하나쯤은 있어도 괜찮지 않습니까? 적어도 주먹 한 방에 나가떨어진 성기사보다야 든든할 것 같은데요.”
여기에 마지막 결정타를 더한다.
“여차하면 그림자 성녀 건을 해결하는데 전폭적으로 도움을 드리지요. 오리하르콘 모험가를 마음대로 부릴 기회는 그리 쉽게 오지 않습니다.”
결국, 레플리가 완전히 설득되었다.
“좋습니다. 형제님을 한 번 믿어보지요. 지금부터 당신은 칸 대주교입니다. 벨라누스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벨라누스님께 영광을.”
“벨라누스님께 영광을.”
신성국 대주교로 파격 임명되었다.
이로써 홀로니움 대신전을 마음대로 드나들게 되었고.
황금가지 획득 또한 목전에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