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 가짜 : 얄미운 망나니
벨라누스교의 대주교가 되었다.
홀로시움 대신전 안에 전용 예배실도 생겼다.
한 달 간은 이곳에서 기거하며 분위기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레플리 성녀의 권력이 상상 이상이로군.’
벨라누스교의 크고 굵직한 사안은 모두 그녀의 입김이 들어갔다.
모두가 성녀를 추앙하고 받들었다.
이쯤 되자 궁금한 점이 생겼다.
도대체 교황은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곧바로 수색에 착수했다.
겸사겸사 황금가지 수색도 진행했다.
“칸 대주교님,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벨라누스님의 축복이 깃들기를.”
“벨라누스님께 찬양을!”
인사를 받아가며 의식 속으로는 천마와 대화를 나누었다.
-황금가지의 기운이 저쪽에서 강하게 느껴지는구나.
천마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얼마나 들어갔을까.
거대한 대문이 나타났다.
자물쇠가 단단히 걸려있었는데, 앞을 지키고 있는 건 놀랍게도 성기사 요한이었다.
“너는···이번에 대주교가 되었다던 칸이로군. 이곳은 교황 성하께서 기도를 올리는 곳이니 이만 돌아가도록.”
-황금가지는 안쪽에 있다. 확실하다.
황금가지가 교황이 기거하는 곳에 있다니, 대주교가 되면 금세 황금가지를 찾을 줄 알았는데 골치 아파졌다.
“대주교가 되었으니 교황 성하께 인사를 올리고 싶습니다. 부디 허락하여 주십시오.”
“안타깝지만 교황 성하께서는 벨라누스님과 소통하기 위해 삼천일 간 누구와의 만나지 않기로 하셨다.”
삼천일이면 무려 십 년에 육박하는 긴 세월.
한 종교의 수장이란 교황이 밖에서 벌어지는 일에 손 놓고 신만 붙잡고 있어도 되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무슨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을까.
왠지 꾸리꾸리한 냄새가 났다.
“성하를 직접 뵙고 대화를 나누신 겁니까?”
“그건 아니다. 성녀께서 교황님과 이야기를 끝내놓으셨더군. 나는 그저 성녀님의 명에 따라 이곳을 지킬 뿐이다.”
역시나군.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더라.
황혼의 대간부 색욕이 교황과 밀담을 나눈 직후, 교황이 십 년 칩거에 들어갔다.
누가 봐도 무슨 사달이 생긴 게 분명하다.
미련퉁이 요한은 색욕에게 완전히 놀아나고 있었고.
‘문제가 심각하군.’
최근 내가 아무리 강해졌어도 성기사 요한을 힘으로 제압하고 밀고 들어가긴 힘들다.
애초에 그런 소동을 일으키면 위장 잠입한 보람이 없다.
테이밍을 활용해서 내부를 정탐하려 했으나, 교황의 예배실인 만큼 쥐구멍 하나조차 없어서 진입이 불가능했다.
일단은 물러나서 다른 쪽을 살펴보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차후에 인사 올리지요.”
“벨라누스님께 찬양을.”
다음에 수색한 곳은 대신전 지하에 숨겨진 공간이었다.
이곳을 찾는데 무려 삼 일이 걸렸다.
아는 사람이 없어서였다.
“대신전에 지하공간이 있다고요? 처음 들어보는군요.”
“금시초문입니다.”
“가끔 바닥에서 처녀귀신 소리가 들린다는 괴담은 있어요. 우리끼리 하는 우스갯소리죠.”
사제나 주교들은 농담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나는 이곳을 탈출한 여인의 증언을 들었기에 인내심을 갖고 차분히 탐색에 전념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번엔 탐색 스킬이 제대로 먹혔다.
[라이프 컨트롤]
[시야 공유]
[테이밍]
쥐를 사방에 펼쳐놓고 거미줄 수사를 벌이다가 이상한 사람을 발견했다.
주기적으로 창고를 정리하는 사제였는데, 일하러 들어가서는 내내 술만 마셔댔다.
‘뭐하는 놈이지?’
혹시 몰라서 예의주시했다.
술은 전부 마신 놈은 갑자기 구석으로 향하더니 벨라누스 조각상을 시계방향으로 돌렸다.
그러자 석상이 이동하면서 바닥면에 지하실로 통하는 계단이 보였다.
‘저기였군.’
생쥐를 사제의 옷 주머니에 숨게 했다.
머리만 빼꼼 내민 생쥐는 CCTV처럼 모든 장면을 생중계했다.
지하실에는 수많은 여인이 갇혀있었다.
그녀들은 인권이 무시된 채 무자비하게 취급되고 있었다.
메리안의 언니 로로의 말 그대로였다.
“절 내보내 주세요!”
“저는 성녀가 아니에요!”
“가족을 보고 싶어요. 흐흑···”
차라리 리앙의 노예시장이 나았다 여겨질 만큼 참혹한 광경이었다.
사제가 여인들을 윽박지른다.
“닥쳐라, 성녀 사칭범들아! 신성국에 진정한 성녀는 오로지 레플리님 뿐. 너희는 나라를 도탄에 빠트리고 세상을 혼란케 할 사악한 종자들이다.”
이후 사제는 쇠창살에 갇힌 여인의 팔을 억지로 잡아끌더니 품속에서 꺼낸 반지를 손가락에 끼웠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여인의 몸속에 있던 신성력이 반지에 박힌 보석으로 흘러들어가는 게 아닌가!
사제는 이후로도 다른 여인의 손가락에도 반지를 번갈아 끼워서 신성력을 가득 담았다.
‘저 마도구로 신성력을 착취했구나.’
이후 저 반지는 레플리에게 전달될 터.
한마디로 색욕은 다른 여인의 신성력으로 성녀 행세를 하고 있었다.
추악한 진실을 마주하자 진절머리가 나고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지금 당장 지하실로 가서 여인들을 해방할까.’
충동이 일었으나 간신히 참았다.
물론 지하실 여인들만 풀려나도 신성국은 발칵 뒤집힐 것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이후로는 레플리가 그동안 쌓아온 두터운 신뢰의 벽에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높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상대의 약점은 분위기가 넘어왔을 때 터트리는 게 가장 효과적이다.
과거 힐튼 가문 때처럼 말이다.
어차피 메리안은 진짜 성녀로서 점점 유명해지고 있다.
그만큼 영향력도 커지는 중.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으니, 조만간 대중은 메리안과 레플리를 비교하겠지.
이때 맞춰서 풀어줘야 제대로다.
‘그 전에 사제 놈은 손 봐주자.’
[시야공유 해제]
[테이밍 해제]
예배실을 나가서 창고로 향했다.
술에 취해서 코끝이 빨간 사제는 신성력을 채운 반지를 품에 안고 반대편에서 걸어왔다.
그렇게 좁은 복도에서 서로 교차하려던 찰나,
“잠깐 멈추게.”
사제를 불러세운다.
“대주교님을 뵙습니다. 벨라수스님께 찬양을. 무슨 일이십니까?”
“자네, 술 마셨나?”
시야공유를 통해 모든 장면을 생생히 목격했으니 당연히 술을 마신 것도 안다.
게다가 빨간 코는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
그런데도 가증스러운 사제는 오리발을 내밀었다.
“저는 벨라누스님의 종복입니다. 설마 신전 안에서 술을 마셨겠습니까?”
“너에게서 술 냄새가 난다.”
“불경한 소리십니다!”
놈이 펄쩍 뛰며 강하게 부정한다.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 했거늘.
“절대 아닙니다. 저는 술을 싫어합니다. 한 잔만 마셔도 온몸에 두드러기가 올라오지요.”
“그러기엔 코가 너무 빨간데.”
“태어날 때부터 이랬습니다.”
“벨라누스님께 맹세하고 마시지 않았나?”
“물론입니다. 신께 맹세합니다.”
성직자가 신을 걸고 거짓말을 일삼다니, 이쯤 되면 저놈도 황혼교도라 봐야겠지.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방금까지 뭘 하고 있었지?”
“창고 정리 중이었습니다. 저는 물품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창고로 들어가도 되나?”
창고에는 저 녀석이 마시다 만 술병이 그대로 있다.
이미 생쥐를 통해 확인한 사항이다.
부패한 사제 놈도 이를 떠올렸는지 안색이 창백해진다.
“아, 안 됩니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당장 가자.”
“아무리 대주교님이라도 이렇게 강제로···으악!”
뒷목을 붙잡고 질질 끌었다.
비실비실한 사제는 내 힘에 끌려서 창고까지 되돌아갔다.
창고에는 자물쇠가 걸려있었다.
“열쇠를 내놔라.”
“그럴 수 없습니다. 오로지 허락된 분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성녀님께 허락을 받고 오시지요.”
“거참 귀찮게 하네.”
콰앙!!
힘으로 자물쇠를 우그러트렸다.
몬스터를 방불케 하는 근력에 창고지기의 입이 떡 벌어졌다.
문을 발로 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고 광경은 예상대로 개판이었다.
뚜껑이 열린 채 바닥에 굴러다니는 술병.
심지어 구석에서 담뱃잎도 발견되었다.
텅 빈 술병을 그의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방금 창고 정리했다며? 술병은 안 보였나? 이렇게 대놓고 앞에 있었는데?”
“그게···”
“대답해라. 넌 분명 신을 걸고 나에게 맹세했다.”
대답을 못 한다.
“사제라는 놈이 신을 걸고 거짓말을 했다라···심지어 아직도 술 냄새가 나는군.”
“정말 죄송합니다. 성녀님께 직접 죄를 청하고 심판받겠습니다.”
이놈이 불리하니까 자꾸 성녀를 들먹이네.
“아냐. 귀찮게 뭘 그렇게까지 해? 내가 직접 벌해줄게.”
주먹을 들어올리자 상황을 파악한 놈의 눈빛에 공포감이 스며들었다.
“어떻게 성직자에게 폭력을 행사합니까!”
“거짓말이 들통 난 시점부터 너는 더 이상 성직자가 아니다. 그러니 심판을 달게 받아라.”
“이럴 순 없습···커헉!”
“엄살이 심하네. 지금부터 시작이야.”
“으아아악!!”
쉴 새 없이 주먹 난사.
무고한 여인들을 학대한 죄까지 톡톡히 치르게 해줬다.
* * *
최근 크림슨은 속이 불편했다.
이유는 바로 칸 때문.
갑자기 신성국에 찾아온 오리할콘 모험가는 그의 기분을 바닥으로 떨궜다.
‘빌어먹을 놈.’
프란시스 대주교가 죽고 나서 크림슨은 대간부 색욕의 오른팔이 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지위에 만족했다.
양지에서는 신성국의 성기사로써 존중받았고, 음지에서는 색욕의 심복으로써 권력을 휘둘렀으니까.
그의 지위가 위태로워진 건 그림자 성녀의 난데없는 등장부터였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전에도 신성력을 발휘하는 여자를 수도 없이 잡아왔으니, 이번에도 비슷하리라 여겼다.
하지만 완전한 오판이었다.
그림자 성녀는 신출귀몰한 귀신이 따로 없었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색욕은 날마다 자신에게 짜증을 냈다.
마침 등장한 칸은 여기에 방점을 찍었다.
좋은 정보를 물고 오더니 덥석 대주교 자리를 차지했고, 이도 모자라 사사건건 자신을 귀찮게 굴었다.
‘놈에게 감춰야 할 비밀이 너무 많다.’
레플리 성녀가 색욕이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황혼교도라는 사실, 그리고 지하실의 존재까지.
이 중 하나라도 칸의 귀에 들어가면 어떤 참사가 날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그래서 크림슨은 믿을만한 부하를 시켜 칸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었는데···
“뭐? 칸이 창고로 향했다고?”
“그렇습니다. 창고지기와 시비가 붙었답니다.”
하필 다른 놈도 아니고 창고지기라니.
지하실을 관리하던 놈 아닌가.
크림슨의 골이 지끈거렸다.
“일단 알았다.”
전력으로 달려서 사건 현장으로 향했다.
창고는 이미 난장판이었다.
부러진 치아가 굴러다녔고, 창고지기의 얼굴은 이목구비를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크림슨이 걸을 때마다 창고지기가 흘린 피가 질퍽하게 밟혔다.
“오, 왔나?”
그리고 이 재앙을 불러온 칸은 자신에게 천연덕스럽게 인사한다.
자기가 저지른 짓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그 광경이 크림슨을 더욱 화나게 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단을 심판하고 있었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십시오. 어째서 창고지기가 이단입니까?”
“이단이고 말고. 신을 걸고 거짓말을 했으니 말이다.”
이어지는 사정 설명을 듣자 기가 막혔다.
음주 사실을 부정하다 창고에 술병이 발견됐다니.
할 수만 있다면 자기가 저 멍청한 놈을 쥐어패고 싶었다.
‘그래도 지하실의 존재는 안 들킨 건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크림슨의 심장이 철렁했다.
칸의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져 있었기에.
색욕이 신성력을 보충하던 중요한 마도구였다.
“그 반지는···”
“아! 이것 말인가? 이단 놈이 가지기엔 과분한 물건 같길래 압수했네.”
“반지를 돌려주십시오. 그건 성녀님의 개인 물품입니다.”
“성녀님의 개인 물품을 일개 창고지기 사제가 가지고 있다고? 말이 안 되는데?”
크림슨은 말하고도 아차 싶었다.
“그게···이단 놈이 훔쳤나 봅니다.”
결국 크림슨도 창고지기를 외면했다.
창고지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크림슨님!”
“감히 성녀님의 물건을 훔쳐? 즉결처형만이 답이군. 죽인 다음에 성녀님께 직접 반지를 전달해 드리겠네.”
“젠장! 이렇게 된 이상 저도 폭로할 일급비밀이 있습니다. 사실 성녀님의 진짜 정체는 황···”
서걱!!
크림슨이 휘두른 칼에 창고지기의 목이 날아갔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칸을 보니까 특유의 능글대는 웃음을 짓고 있다.
“칼이 제법 빠른걸? 나에게 덤빌 때도 그렇게 휘둘렀으면 허무하게 패배하진 않았을 텐데 말이야.”
저 얄미운 놈.
크림슨의 속이 끓어올랐다.
“반지를 주십시오. 그리고 창고에서 나가시지요.”
“여깄네.”
칸이 엄지로 반지를 통 튕기고 미련 없이 나간다.
볼일은 다 봤다는 태도다.
묘하게 여유로운 태도가 자신이 이곳을 찾아오리란 것도 예상한 듯했다.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지.
그의 등을 보는 크림슨의 시선이 복잡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