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141화 (141/200)

17장 가짜 : 혐오한 망나니

레플리가 메리안과 만나기 전.

나는 요한에게 마도구를 보여주었다.

“레플리는 이 반지를 이용해서 신성력을 착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진짜 성녀를 연기했죠.”

“믿을 수 없다.”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직접 보여드리는 수밖에 없겠군요.”

내가 설명한 계획은 이러했다.

“저는 매일 아침마다 신성력이 담긴 반지를 레플리에게 갖다 줍니다. 오늘은 평소와 달리 신성력을 아주 조금만 담아서 갖다 줄 예정입니다.”

요한은 바로 알아들었다.

“반지 없이 신성력을 발휘하는지 보라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만약에 마도구와 무관하게 신성력을 발하면 제가 레플리님을 오해한 거겠죠. 죄를 달게 받겠습니다. 대신에 신성력을 발하지 못한다면, 요한님도 그만 인정하십시오.”

“으음···”

침음을 흘리던 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또 하나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말해라.”

“만약 그녀가 가짜임이 밝혀진다면, 지하실을 개방해서 여인들을 풀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 * *

다시 돌아와서.

홀로니움 대신전 앞.

레플리와 메리안이 대치하고 있다.

분위기는 완전히 메리안에게 넘어왔다.

레플리는 당황스러울 것이다.

그녀는 반지 안에 담긴 신성력으로 성녀 행세를 해왔다.

하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마도구 안에 담긴 신성력이 부족했다.

신성력이 없으니 절름발이를 치료하지 못한 건 당연한 일.

반면에 메리안은 눈부신 신성력을 뿜어내 절름발이를 단번에 정상인으로 만들었다.

극명히 대비되는 광경을 신성국 모든 국민이 지켜보았고, 레플리로서는 이래저래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어지는 메리안의 발언은 레플리의 처지를 최악으로 치닫게 했다.

“이만 자리에서 내려오세요. 황혼의 대간부 색욕이여.”

메리안의 말을 들은 군중들은 귀를 의심했다.

레플리가 가짜 성녀라 해도 놀랄 판에 진짜 정체는 황혼교의 대간부라니.

벨라누스의 화신이며 신성국의 상징을 모독하는 말에 처음 그들이 보인 반응은 강한 부정과 이에 따른 격렬한 분노였다.

“불경하다! 신성 모독이야!”

“레플리님이 황혼의 대간부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군.”

“그림자 성녀는 선을 넘었다. 즉시 처단하라!”

이에 맞서 메리안의 지지자들도 목소리를 높인다.

“레플리는 황혼교도가 맞다.”

“그녀가 저지른 만행을 알면 너희도 절대 그녀를 감싸지 못 해!”

“저년은 악마보다 더한 년이다.”

“성녀는 오직 메리안님 뿐.”

신성국이 두 집단으로 쪼개져서 충돌할 위기에 처했다.

모두 내가 의도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 대립의 결말은 뻔했다.

한쪽은 신성력을 쓸 수 있고, 다른 한쪽은 그렇지 못하니까.

“레플리님, 제가 몸이 아파서···”

“아들이 열병을 앓고 있습니다. 제발 치료해주세요.”

“손목이 부러졌습니다. 축복을 내려주신다면 평생 벨라누스님을 찬양하겠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안 보였습니다. 빛을 보고 싶습니다. 도와주세요.”

레플리는 아무것도 못했다.

그저 손가락만 쪽쪽 빨았다.

하지만 메리안은 달랐다.

막대한 신성력으로 모두를 고쳐줬다.

“감사합니다!!”

“메리안님 만세!”

“진정한 성녀님이시군요.”

메리안이 점수를 올리고 레플리가 가만히 있을 때마다 사람들의 의혹 또한 짙어졌다.

“설마···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어?”

“나는 저번에 레플리님에게 치료받았는데, 오늘은 왜 이러실까?”

“몸이 편찮으시겠지.”

“신성력이 컨디션에 영향을 받는다고?”

레플리는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다가 고개를 홱 돌려 나를 노려보았다.

반지에 신성력이 담겨있지 않다.

반지를 관리하는 사람은 나다.

한마디로 내가 그녀의 뒤통수를 쳤다는 결론이 나온다.

“칸, 네놈이 감히 나를 배신해?”

눈에 핏발을 세우던 그녀가 간신히 화를 억누르더니 대신전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일단 불리한 상황을 피할 속셈이다.

겸사겸사 마도구 반지에 신성력을 채우고 올 테고 말이다.

물론 레플리의 모든 행동은 예상범위 안이었다.

‘지금쯤이면 요한이 움직일 때가 됐는데.’

요한은 대신전 꼭대기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구경하고 있었다.

레플리가 신성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성기사인 그가 제일 잘 알고 있다.

결국 요한은 결단을 내렸다.

내 부탁대로 그는 지하실을 열었다.

벌컥!!

레플리가 대신전에 도착하기도 전에 대신전 쪽에서 먼저 문이 열렸다.

그곳에는 지하실에서 고초를 겪었던 수많은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들은 하늘에서 내리쬐는 태양 빛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무릎을 꿇으며 땅에 키스했다.

몇몇은 통곡하고 오열하다 실신하기도 했다.

“아아···흐흐흑···”

“드디어 탈출했다.”

“살았어. 살았다고!”

홀로니움 대신전을 둘러싼 군중들은 어리둥절했다.

신전문이 열리고 웬 거지꼴을 한 여인들이 우르르 나왔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한쪽에서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터져나왔다.

“리사! 내 딸 리사 맞느냐!”

부모가 여인 중 한 명을 알아본 것이다.

아버지로 보이는 그는 깡말라서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딸의 몸을 보고 망연자실했다.

“아빠! 저 리사예요. 흐흑···”

그녀가 시작이었다.

다른 희생자를 알아보는 지인들도 하나둘씩 늘어났다.

때로는 친구가. 때로는 형제자매가.

지하실 여인들이 하나둘씩 제자리를 찾을 때마다 대신전 앞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레플리가 벌인 만행의 추악한 민낯이 서슴없이 드러났다.

증인이 한두 명이 아니다.

굶어죽기 직전 상처투성이 몸이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였다.

놀람이 기쁨이 되고 기쁨이 환희가 되고 환희가 슬픔이 되고 슬픔이 애환이 되고 애환이 분노로 변하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그동안 성스럽게만 보였던 성녀가 희대의 사기꾼이었다니!”

“마녀다! 당장 마녀를 불태워라!”

“신성국 수뇌부는 당장 해명하라!”

“교황 성하께선 어디 계십니까? 당장 나오십시오!!”

들끓던 분노가 산불처럼 번졌다.

집단의 광기가 하늘을 찔렀다.

상황이 걷잡을 수 없어지자 레플리가 일단은 신전 안으로 피신하려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막혔다.

“어디 가려고 하십니까?”

두꺼운 메이스를 들고 백색의 풀 플레이트 아머로 완전무장한 요한이 레플리의 정면을 가로막았다. 그의 표정은 괴로움 그 자체였다.

“레플리, 다 끝났다. 네가 황혼의 대간부 색욕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참이다. 간덩이가 부었구나. 다른 곳도 아니고 신성국에서 성녀 행세를 하다니.”

앞쪽은 요한과 성기사단이 가로막고.

뒤쪽은 성난 군중들이 몰려온다.

이래저래 도주로가 완벽히 막혀버렸다.

내 계획대로 모든 상황이 진행되었다.

레플리는 제대로 외통수였다.

“하, 하하···아하하하하하하!!!!!!”

소름끼치는 웃음소리.

레플리가 배를 움켜쥐고 낄낄댔다.

몰려오던 사람들이 움찔하고 걸음을 멈췄다.

요한 또한 눈썹을 꿈틀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플리는 한참을 배를 움켜쥐고 폭소를 터트렸다.

눈을 희번덕 뜨고 웃어서 눈물을 줄줄 흘리는 모습은 미친년 그 자체였다.

한참을 웃던 그녀는 별안간 웃음소리를 뚝 그쳤다.

그리고는 내 얼굴을 주시했다.

눈동자에는 광기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칸···처음부터 내가 목표였구나? 교황이 되고 싶다느니, 나를 가지고 싶다느니 하던 말은 전부 거짓이었고. 크림슨도 네가 해치웠니?”

“그렇다.”

담담하게 긍정해주자 그녀의 입꼬리가 비틀린다.

“이 정도로 나를 궁지에 몰아넣다니. 제법이야. 인정해줄게. 내가 황혼의 대간부 색욕이다! 이 멍청한 연놈들아. 너희는 전부 나한테 속은 거야. 아핰핰핰핰!!!”

레플리의 고백에 끝까지 그녀를 믿던 마지막 지지자마저 무너졌다.

당당하게 정체를 밝힌 그녀는 별안간 옆에 있던 황혼 출신 주교의 가슴에 손을 박아넣었다.

푹! 우드드득!!!

“커허억!!”

바닥에 피가 흘렀다.

산 채로 심장을 뜯어낸 것이다.

급발진한 그녀는 콩닥대는 심장을 사과 베어물듯이 아그작 씹었다.

“바로 이 맛이지. 그동안 참느라고 혼났네.”

피가 번들거리는 입술로 혀로 할짝대는 레플리는 요녀 그 자체였다.

이제 그녀가 황혼의 대간부 색욕임은 너무나 분명해졌다.

요한이 기운을 줄기줄기 뿜으며 레플리의 앞을 가로막았다.

“황혼의 대간부 색욕이여. 오늘 이 자리에서 네년을 죽이고 신성국의 위엄을 회복하겠노라.”

“이게 누구실까? 나를 좋아해주던 호구잖어? 갑자기 이렇게 말을 안 들으면 어떡해?”

“감히! 더러운 입 그만 놀려라. 네년의 사지를 찢어버린 후 벨라누스님께 죄를 청하겠다.”

마스터급 고수 요한의 기세가 홀로니움 대신전 앞을 가득 채웠다.

그럼에도 색욕은 태연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의 적의를 마주하고도 자신감이 넘치다니.

무언가 대비책이라도 있는 걸까.

“사실 하나만 알려줄까? 요한 네가 칸의 반의 반 정도만 똑똑했으면 신성국이 이 지경이 될 일도 없었어. 멍청한 새끼야. 아핰핰핰!”

“그 입 닥쳐라!”

“너야말로 닥쳐!”

고오오오오

음습한 혈기가 레플리를 중심으로 폭사되었다.

어찌나 끈적한지 옆에 있기만 해도 혼란과 공포를 유발하는 기운이었다.

레플리가 진면목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우드득! 우드득!

레플리의 뼈가 뒤틀렸다.

그녀의 크기가 점점 커졌다.

본래 평균이었던 그녀의 신장이 무려 3m 가까이 커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등에서 흑색 깃털 날개가 돋아나더니 좌우로 펼쳐졌다.

기이한 문양이 새겨진 갑옷을 착용하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양손에는 붉은 오러를 뿜어내는 쌍도를 움켜쥔 채였다.

3m에 달하는 신장.

여인의 형체.

등 뒤에 달린 날개.

무슨 종족인지 알아버렸다.

“너···발키리였구나?”

<시온라이크>의 종족사전에서 본 적이 있다.

사전에는 고대에 사라진 종족이라 적혀있었는데, 아직 남아있는 개체가 있었나 보다.

원래는 신의 좌우를 지키는 호위무사 역할을 하는 종족이건만, 피를 탐하는 꼬라지를 보아하니 타락한지 오래다.

“우리 종족을 알고 있나?”

“조금?”

“알면 알수록 신기한 놈이네? 일천 년 전에 멸족한 우리 종족을 알고 있다니.”

크림슨이 말한 상위의 존재가 발키리를 말한 거였나.

역시 황혼의 대간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네놈은 생포한 다음에 천천히 교육해주지. 일단 여기 있는 벌레들을 모조리 죽여야겠어.”

“마음대로 하게 놔둘 쏘냐!”

대로한 요한이 망치를 휘두르며 색욕에게 달려들었다.

메이스에 담긴 오러가 살벌했다.

그러나 색욕은 지루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을 까딱했다.

“꿇어라.”

쿠웅!!

요한의 거체가 무너졌다.

뭘 해보지도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일까.

“전원 나에게 경배하라.”

대신전 앞에 모여있던 수많은 인파가 하나둘씩 무릎을 꿇었다.

일그러진 표정을 보아하니 원해서 무릎을 꿇는 건 아닌 듯하다.

심지어 나 또한 알 수 없는 힘에 저절로 무릎이 땅에 닿았다.

옆에 있던 시온과 캠벨도 마찬가지.

동시에 상태창이 떴다.

[특수능력-언령에 속박됩니다]

[자정작용 발동]

[저주 계열이 아닙니다]

언령이라니.

말에 힘을 담아 현실화하는 능력.

그야말로 개사기 능력이다.

심지어 세븐 스타인 요한도 힘을 못 쓰고 있다.

이 정도로 색욕이 강자였나.

“이것참 장관이네. 역시 벌레는 엎드린 자세가 어울린다니깐? 기대하렴. 하나하나 공들여서 사지를 분해해줄게.”

“크흐으윽!”

요한이 온몸을 뒤틀며 저항했다.

그가 무릎 꿇은 곳을 중심으로 지면이 갈라지며 거미줄 균열이 생겼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아나콘다가 그의 몸을 꽉 묶기라도 한 듯 요한은 옴짝달싹 못했다.

“호호호, 소용없어. 내 언령은 나를 향한 긍정적인 감정이 축적되면서 효과가 진해지거든. 애정이든 사랑이든 존경이든 간에 말이지. 심지어 잠깐이라도 나에게 욕정을 느꼈다면 이미 끝이야.”

그동안 요한은 레플리를 진짜 성녀로 생각하며 추앙해왔다.

요한만큼 레플리를 좋아했던 사람도 없었을 거다.

그런 만큼 더욱 언령에 속박될 수밖에 없었다.

요한은 물론이고 다른 신성국 국민도 똑같았다.

이들 또한 수 년 동안 레플리를 성녀로 인정하고 사랑해왔다.

그 감정이 거듭 쌓여서 언령의 효과를 극대화했다.

레플리가 왜 느긋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애초에 상성 자체가 최악이었다.

벨라누스를 찬양하는 신성국에서 성녀를 연기하며 긍정적인 감정을 농축해온다.

만약 잘못되더라도 상관없다.

신성국의 모든 국민은 이미 그녀의 포로가 된 셈이니까.

그러나 여기서 무릎을 꿇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그림자 성녀 메리안이었다.

“맞다. 네년이 있었지.”

씹어뱉듯 말한 레플리의 몸에서 살기가 폭사됐다.

“생각해보면 네년 때문에 모든 일이 어그러졌어. 죽여주마. 아주 고통스럽게, 최대한 천천히 보내줄게.”

시퍼런 예기를 발하는 쌍도가 메리안을 향해 휘둘러졌다.

아무런 무력이 없는 메리안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머리 위에 칼날이 떨어지려는 찰나,

쩌어어엉!!!

에메랄드빛 검기가 솟구치며 떨어지는 칼날을 정통으로 막아섰다.

언령을 주해한 내가 천마검을 뽑아 맞받아친 것이다.

크게 놀란 레플리의 동공이 흔들렸다.

“어떻게 언령을 풀었지?”

많이 궁금해하는 것 같길래 답을 알려줬다.

“단 한순간도···너를 좋아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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