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 가짜 : 겸손한 망나니
처음 레플리를 접하게 된 건 부마간택식부터였다.
레베카 왕녀의 옆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다투던 중, 그녀는 세븐스타의 검을 빌려 나를 처형시키려 했다.
그때부터 레플리는 비호감이었다.
이후 갈라나흐에서 레플리의 이름이 또 들렸다.
진짜 성녀 메리안을 통해서였다.
본능적으로 뭔가 싸함을 느꼈다.
레플리가 일반적인 성녀가 아닐 수도 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신성국에 들어와서 그녀가 저지른 모든 만행을 마주했다.
사람이라면 해서는 안 되는 짓이었다.
이미 나에게 레플리는 괴물이었다.
사람 껍데기를 뒤집어쓴 악마였다.
따라서 홀로니움 대신전에서 색욕과 직접 마주했을 때도, 그녀에게 일말의 온정조차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비호감을 넘어서 혐오감이 증폭되어 솟아오르는 구역질을 참아야 했다.
그래서였을까.
언령으로 속박되긴 했으나 잠깐이었다.
강화되지 못한 언령은 몸에 마나를 돌리니 금세 풀려버렸다.
언령을 주해하자마자 메리안을 향해 휘둘러지는 칼을 맞받아쳤다.
레플리는 심히 당황한 기색이었다.
“단 한순간도···날 좋아하지 않았다? 사내라면 전부 내 아름다운 외모를 보고 감탄했을 텐데?”
“아무리 외면이 그럴싸해도, 내면에서 풍기는 악취를 막진 못하더군. 솔직히 얼굴도 화장빨이잖아.”
“하! 어이가 없네?”
색욕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서늘한 살기가 온몸을 옥죄었다.
“그깟 언령 좀 풀었다고 의기양양한 꼬라지라니. 진짜는 지금부터 시작이야.”
스팟!!
발키리가 검을 수직으로 내리쳤다.
상하로 내리꽃는 일격.
원래라면 피하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뒤에는 메리안을 포함해서 언령에 속박된 사람들이 있었다.
이 악랄한 년은 주변을 인질 삼아 회피각을 없애고 방어롤 종용했다.
“천마님!”
-알았다!”
이원마나를 극대화했다.
에메랄드 검기가 솟구쳤다.
허릿심을 믿고 아래에서 위로 검을 쳐올렸다.
곧이어 맞부딪치는 두 개의 검.
귓청이 찢어질 듯한 굉음이 공간을 울렸다.
쩌어어어엉!!!
콰아앙!!
충돌지점을 중심으로 원형의 기파가 확산됐다.
이대로라면 사람들이 다칠 텐데.
“벨라누스님! 도와주세요!”
비명과도 같은 메리안의 외침.
뒤쪽에서 엄청난 신성력이 터져나왔다.
스파앗!!!
메리안을 만난 이래로 가장 강력한 신성력의 방출이었다.
그녀가 이를 악물고 뿜어냈음이 느껴졌다.
동시에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일대가 성역으로 선포됩니다]
[시전자 ― 성녀 메리안]
[성역에서 아군의 모든 스텟이 일시적으로 상승합니다.]
성역선포.
처음 보는 기술이다.
그래도 효과는 확실했다.
조금 전 나와 레플리의 싸움으로 인한 충격파가 성역 바깥으로 나가지 못했다.
메리안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무형의 바리케이드를 형성한 것이다.
“좋았다. 메리안.”
그녀를 칭찬해주고 색욕과의 싸움에 집중했다.
스텟이 상승해서인지 몸이 가벼웠다.
“어차피 상관없어. 너를 죽이고 성녀년도 죽이면 자연스레 성역도 깨지겠지. 나머지는 그때 손봐줄게.”
색욕의 무차별적 공격이 퍼부어졌다.
각각 오러가 담긴 매서운 일격이었다.
그동안 마스터급 고수를 자주 경험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진작 당할 뻔했다.
“마나소드로 내 오러를 막아내다니, 제법이군. 검날도 멀쩡하고. 도대체 어떻게 된 검이야?”
이원마나는 보통의 익스퍼트가 사용하는 마나보다 훨씬 고효율의 마나였다.
천마가 계속해서 허리가 아프다고 툴툴대긴 했으나, 지금까지는 잘 버텨줬다.
하지만 딱 버티기까지였다.
상황을 반전시킬만한 방법이 애매하다.
이를 눈치챈 색욕도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어디까지 막나 해보자.”
쾅! 콰앙! 콰아아앙!!
눈에 보이지도 않는 공격이 쇄도했다.
드루이드의 직감을 최대로 활성화해서 반사적으로 검을 갖다 댔다.
천마게이션도 끊임없이 보조했다.
-오른쪽부터 막아라.
-연계공격이다. 정신 바짝 차려!
-애송아, 정면 찌르기를 조심해라.
-가끔 발도 쓴다. 염두에 두어라.
천마의 지시에 따라 모든 공격을 막아냈다.
그동안 치열하게 훈련한 성과가 나타난 셈이다.
색욕은 원하는 대로 공격이 안 풀리자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어떻게 된 놈이 공격이 도착하기도 전에 미리 방어해? 독심술이라도 쓰냐?”
“운이 좋았다.”
“얼마나 버티나 볼게. 언젠가는 무너지겠지. 이대로 흐르면 내 승리다.”
레플리는 체력전으로 가면 자기가 이길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발키리였고, 발키리의 기본 스텟은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크나큰 착각이다.
나에게는 사기급 드루이드 스킬이 있다.
[끈질긴 생명력 발동]
[체력회복량이 크게 증가합니다.]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멀쩡하다.
심지어 성역에서 싸워서인지 평소보다 컨디션이 좋았다.
반면에 색욕은 눈에 띄게 검이 느려졌다.
호흡까지 무너진다.
아까의 예리한 공격은 어디 갔는지 공격 루트가 훤히 보였다.
싸움의 기세가 바뀌었다.
이를 느낀 레플리가 이를 악물었다.
그렇다고 없던 체력이 생기진 않는다.
일천 살의 발키리.
그녀는 너무 늙고 녹슬었다.
“대체 뭐야? 넌 왜 안 지쳐?”
대답할 시간도 아깝다.
이대로 끝낸다.
[윈드 컨트롤]
[헤이스트]
[순보]
파앙!
공기를 박차면서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색욕의 얼굴이 순식간에 확대됐다.
천마검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쩌엉!!
처음으로 내가 공격하고 색욕이 방어했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무지막지한 대공세가 시작되었다.
광! 콰앙! 콰콰콰쾅!!
천마는 의식 속으로 계속 약점을 알려줬고 그대로 검을 찔러넣었다.
“젠장!”
레플리는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마스터급도 아닌 애송이가 오러블레이드를 손쉽게 막아낸다.
그가 들고 있는 검은 무슨 보검인지 여전히 시퍼런 예기를 발한다.
심지어 체력은 무한인지 안 지친다.
공격 하나하나가 날카로워서 까딱 방심하다간 큰 상처를 입게 생겼다.
“너, 정체가 뭐야?”
“죽을 때쯤 알려주마.”
대화로 시간을 벌려 했는데 약삭빠른 녀석은 숨 돌릴 타이밍조차 주지 않는다.
싸울 줄 아는 녀석이다.
전투의 흐름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유리한 기세를 이어서 매듭지으려 한다.
마치 옆에서 엄청난 고수가 그에게 일일이 조언해주는 것 같았다.
‘침착해. 아무리 강력한 상대도 빈틈은 있어.’
그녀는 일천 살이 넘은 발키리였다.
과거 정체불명의 초고수에게 겁 없이 덤볐다가 멸족하는 와중에도 그녀만큼은 살아남았다.
생에 대한 집착 하나만큼은 누구보다 강하다고 자부했다.
촉각을 곤두세우자 안 보이던 요소가 보였다. 구석에서 성역을 유지하려 애쓰던 메리안이었다. 빈틈은 바로 그녀였다.
“귀찮은 년부터 해치워주마!”
날개를 활짝 핀 레플리가 천마검을 슬쩍 피하더니 메리안 쪽으로 쏘아졌다.
‘아차! 메리안을 지켜야 하는데!’
공격에 온 신경을 집중했더니 정작 제일 중요한 걸 놓쳤다.
여기서 메리안이 죽으면 성역이 해제되고, 언령에 속박된 수많은 신성국민이 무방비하게 노출된다.
색욕이 그들을 인질 삼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다니면 전투에서 승리하더라도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다.
“죽어라! 빌어먹을 성녀야!”
메리안은 우뚝 멈춰섰다.
다가오는 트럭을 본 고라니 같았다.
온몸이 굳어서 꼼짝을 못했다.
애초에 방어능력이 없는 소녀다.
어떻게든 지켜줘야 했다.
‘무슨 수로? 이미 한참 뒤처졌는데?’
헤이스트+순보 콤보.
여태까지 이 기술로 마스터급 고수인 색욕과 대등한 속도로 싸워왔다.
다른 의미로는 이 정도 속도가 아니면 그녀와 비빌 수도 없다는 소리.
‘도토리를 먹고 속력 증강? 늦었어. 이빨로 깨무는 순간 색욕은 이미 도착해있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사고가 느려졌다.
짧은 순간에 오만가지 해결책이 떠올랐다.
‘골렘 소환? 느려터졌지. 바인드로 속박? 식물 뿌리가 따라가질 못한다. 스톤 실드로 경로 차단? 우습게 부수고 메리안을 유린할 터.’
떠오르는 족족 휴지통으로 향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수련하고 단련해왔는데.
고작 죄 없는 소녀 하나 지키지 못한다고?
내면에서 분노가 치솟았다.
‘뭐라도 좀 해봐!’
아우성이 형상화되어 몸부림친다.
답답함에 속이 터져나갈 것 같다.
눈을 부릅 떠서 현실을 직시했다.
‘해결방법이 없다.’
내면이 텅 비어버렸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의식의 흐름.
찾아오는 공허감과 허무함.
끝없는 무저갱과 심연이 보였다.
나는 그곳에서 안주하고 있었다.
‘그냥 이대로 있을까?’
포기라는 단어가 아른거릴 때쯤.
문득 이상한 사실이 떠올랐다.
아직도 메리안은 죽지 않았다.
색욕은 그녀에게 도달하지 못했다.
“도대체 이게···”
세상이 멈추었다.
정확히 말하면 느려졌다.
색욕이 메리안의 정수리에 칼날을 내리치는 모습이 한 컷씩 분리되어 보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유일하게 원래 속도로 움직이는 건 바로 전신을 회전하는 마나들.
푸른마나+초록마나+용혈.
이원마나로 태극을 이루던 마나들만이 정상적으로 신체 구석구석 회전했다.
‘아니야. 원래 속도가 아니다. 엄청나게 빠르게 회전하고 있어서 주변이 오히려 느리게 보이고 있어.’
내 자신에 대한 분노가 촉매였을까.
거친 채찍질에 이원마나가 폭주족으로 돌변하여 한계를 뚫고 미친 듯이 달렸다.
[마나 각성도가 증가합니다.]
[혼합률이 폭증합니다.]
[초록마나 각성도 50%] [↑0.0%]
[푸른마나 각성도 48%] [↑37%]
[용혈 각성도 48%] [↑7.0%]
[혼합률 44%] [↑100%]
훈련 내내 제자리걸음이었던 푸른마나와 용혈의 각성도가 이때다 싶어 크게 올랐고, 점진적으로 감소하던 혼합률이 역으로 떡상해서 천장을 뚫어버렸다.
에메랄드 빛이 천마검을 수놓았다.
평소처럼 단순히 검신을 감싸는 게 아니라 은은하게 맴돌았다.
마치 스스로 의지를 가진 것처럼.
천마의 경악한 음성이 들렸다.
-네놈 설마···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책 하나가 떠올랐다.
로이드 후작이 넘겨줬던 비급서.
촤르르륵 소리와 함께 페이지가 넘어간다.
적힌 글귀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검은 신체의 연장선이다. 마나소드로 사거리를 확장한다 가정해보자. 무한대까지 늘려보면 어찌 될까.]
[점은 곧 선이 되고 선은 곧 면이 된다. 면이 중첩되면 그건 곧 공간, 즉 영역이 된다.]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갈 때, 비로소 진정한 여행자가 된다.]
딸깍딸깍 딸깍딸깍
규칙적인 심장박동 소리가 곧 톱니바퀴 소리가 된다. 맥동하는 펌프질과 함께 전신 구석구석 기력이 돈다.
어째서일까.
색욕은 나와의 거리는 이미 한참 벌어졌는데.
마치 코앞에 있는 느낌이다.
무척이나 가깝다.
서걱!
천마검을 수평으로 휘저었다.
에메랄드 빛이 초승달을 그렸다.
동시에 섬뜩한 절삭음이 들렸다.
서―걱!
그녀의 흑색 날개가 잘려버렸다.
분명 나보다 한참 멀리 있었는데도 말이다.
“아아아아악!!!”
레플리는 등 쪽에 느껴지는 통증에 정신이 흐트러졌다.
덩달아 비행능력까지 사라져버리자 중심을 잃고 몸이 기우뚱했다.
그 바람에 메리안의 정수리를 쪼개려던 검이 아슬아슬하게 허공을 갈랐다.
우당탕탕!
바닥을 몇 바퀴나 굴렀다.
몸을 벌떡 일으킨 색욕이 나를 노려보았다.
-애송이. 드디어 영역이 뭔지 조금은 깨달았구나. 진정한 검의 세계에 첫발을 내디딘 걸 축하한다.
아, 이게 영역의 시작이구나.
그 전에 읽었던 비급서의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가 대충 이해되었다.
또한 앞으로 가야할 길이 얼마나 험난하고 까마득한지 느꼈다.
절로 겸손해지고 내 자신이 작아졌다.
책에 적힌 로이드 후작의 글귀 그대로였다.
“감히! 벌레 놈이 내 날개를 잘라?”
분통을 터트리는 발키리가 보인다.
이미 이성을 잃고 평정심이 흐트러졌다.
메리안을 노린 게 그녀의 마지막 기회였다.
나는 이제 절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죽어라.”
짧게 말하고 검을 휘둘렀다.
공중에 떠 있고 거리를 벌린 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에서 발사된 검기가 초승달을 그리며 레플리에게 쏘아졌다.
“크흑!!”
검으로 원거리 공격이 가능해지는 순간, 거리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넘치는 이원마나로 융단폭격을 가했다.
지쳐버린 색욕은 희미해진 오러로 공격을 막기에 급급해졌다.
슬슬 마무리를 지을 때다.
[바인드]
허리춤을 속박한 단단한 가시나무 줄기.
[우드 스피어]
[스톤 스피어]
쏟아져 내리는 돌과 나무 고드름.
[우드 골렘]
[스톤 골렘]
자연이 낳은 거인이 레플리의 팔다리를 잡고 늘어졌다.
여태까지 검만 쓰던 내가 색다른 공격을 가하자 색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연을 이용한 공격···들어본 적 있어. 설마···”
그녀는 내가 누군지 깨달은 듯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체력도 없고 온몸이 구속된 그녀는 모든 저항 수단을 잃어버렸기에.
푸욱!!
천마검이 심장을 관통했다.
입가에 피를 흘리던 그녀가 일그러진 표정을 짓는다.
“네놈···헤논 로이드였구나···”
“맞다. 잘 가라.”
“이럴 수가···나는 마지막 발키리···이렇게 사라질 수는···”
색욕의 맥박이 멈추었다.
황혼교 세 번째 대간부의 최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