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인어 : 달달한 망나니
제국에는 두 명의 세븐 스타가 있다.
한 명은 황가를 지키는 검 한스 기사단장, 다른 한 명이 지금 눈앞에 있는 오르네오 현자다.
“인상적인 젊은이군. 어디 출신 누구인지 알려주게나.”
“모험가 칸입니다. 신성국에서 왔습니다.”
현자의 흰눈썹이 꿈틀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현재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모험가다.
가장 단기간에 오리하르콘으로 승급했고, 마수의 숲지기를 토벌했으며, 신성국에 잠입해 황혼의 대간부를 척결했다.
해낸 의뢰가 전부 입이 떡 벌어질 만한 업적이었으니, 현자가 저리 반응하는 것도 당연했다.
“유명인사였군.”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지막 시험을 생략하진 않겠네.”
“물론입니다.”
“시험 종목은 간단하네.”
오르네오가 들고 온 지팡이로 땅바닥에 크게 동심원을 그렸다. 지름 약 3m가량의 원.
“이 원에서 나를 내보내면 힘의 문 통과일세. 꼭 무력이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내보내면 합격일세.”
시험 규칙이 간단해서 좋다.
바로 시험을 치기로 했다.
천마검을 뽑고 오르네오에게 겨누었다.
시온에게 전해 듣기로 오르네오 현자는 물을 다루는 원소술사라 들었다.
얼음을 다루는 색욕, 불을 다루는 카리나, 전기를 다루는 코코에 이어 네 번째 만나는 원소술사인 셈.
일단은 탐색전을 벌이며 그의 전력을 측정한다.
[윈드 컨트롤]
[헤이스트]
[순보]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그러자 오르네오 현자의 몸에서 즉시 물의 벽이 치솟으며 휘몰아쳤다.
‘접근하기 까다롭군.’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물의 기세는 매서웠다.
질식할 만한 수압은 당연하거니와 회전률과 압축률까지 대단해서 그 자체로 두꺼운 질량을 지니고 있었다.
일반인이라면 스치는 순간 몸이 갈려나갈 수준이었다.
천마검이 수벽과 부딪치는 순간 으드득 소리가 들렸다.
마치 강력회전모터에 날붙이를 갖다 댄 느낌이었다.
-애송이 녀석! 저런 무지막지한 방어벽과 정면으로 부딪치라고 가르쳤더냐?
졸지에 물벼락을 맞은 천마검이 머릿속을 시끄럽게 한다.
아무래도 이 방법은 아니다.
뒤로 물러나서 간격을 두었다.
그 사이에 현자가 다루는 물은 빠르게 회전하며 구체 보호막을 형성했다.
상하좌우 모든 방위를 막아서 들어갈 틈새가 없었다.
“공격 끝났는가? 이제는 내 차례네.”
슈화아악!!!
수구체에서 비롯된 물줄기가 회오리를 형성하더니만 나를 향해 쇄도했다.
이원마나를 극성으로 끌어올려 마나소드를 만들었다.
사방에서 덮쳐오는 공격을 천마검으로 살짝 경로만 비틀어서 치명타를 피했다.
“훌륭한 검솜씨로다! 허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듯 싶은데.”
물줄기는 점점 다양해지고 거세졌다.
그에 맞춰 내 손발도 점점 어지러워졌다.
이대로 가면 필패.
결국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드루이드 스킬을 쓰자.’
[크리스탈 컨트롤]
[크리스탈 실드]
쿠콰콰콱!
한층 단단해진 수정벽이 땅에서 치솟았다.
물줄기가 강하긴 했지만 수정벽을 뚫을 수준은 아니고 표면이 조금 깎여나갔다.
만약 돌벽이었으면 그대로 관통되었을지도.
새삼스레 상급 드루이드가 되고 이곳에 와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뭣이!”
세상에서 가장 견문이 넓다는 오르네오도 이런 무지막지한 방어법은 처음인가 보다
목소리에 놀란 기색이 고스란히 담겼다.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우드 컨트롤]
[크리스탈 컨트롤]
[골렘 소환]
드드드드드
거대한 골렘이 등장했다.
크리스탈 골렘 하나와 우드 골렘 셋.
더 소환할 수도 있으나 시험장이 터져나갈까봐 세 기만 소환했다.
동서남북을 점하고 쿵쿵대며 접근하는 골렘들은 그 자체로 공포였다.
“세상에···”
싸워보니까 슬슬 알 것 같았다.
오르네오 현자와 나는 상성면에서 내가 우위였다.
근접전에서는 궁수가 검사에게 불리하고, 원거리전에서는 궁수가 검사에게 유리한 것처럼, 고수끼리의 싸움에도 엄연히 상성이 있다.
오르네오는 모든 싸움을 물을 이용해서 하는데, 드루이드 스킬은 돌과 나무를 위주로 하기 때문에 물에 강한 내성을 지니고 있었다.
여태껏 손쉽게 부서졌던 우드 골렘들이 오르네오 현자의 물대포에는 꾸역꾸역 버티는 모습을 보여줬다.
“허허···자연과 함께하는 힘이라니.”
오르네오 현자를 둘러싼 수구체 방어막을 골렘들이 사정없이 두드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완벽히 부수는 걸 기대하지 않는다.
조금의 균열만 일으키면 된다.
그리고 기다렸던 빈틈이 곧 발생했다.
투쾅!
크리스탈 골렘이 내리치는 주먹에 수구체에 살짝 구멍이 생겼다.
아주 작은 약점이지만 나에게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초승달 베기]
신성국에서 새롭게 익힌 원거리 검술 스킬을 사용했다.
횡으로 그어진 검격에서 터져 나온 검풍이 살짝 드러난 틈 사이를 지나갔다.
당황한 오르네오가 지팡이를 들어 내 일격을 막았다.
콰앙!!
지팡이와 검기 섞인 바람이 부딪치는 찰나 고막이 찢어질 듯한 굉음이 울렸다.
이후 결과는 놀라웠다.
엄청난 위력을 견디지 못하고 오르네오가 무려 다섯 발자국을 물러난 것이다.
발뒤꿈치가 원 바깥으로 나가 있었다.
내 승리였다.
“합격일세. 현자의 탑이 세워진 이래로 처음으로 시험을 통과했구먼.”
시험 내용을 보니 어째서 합격자가 없었는지 알 것 같았다.
앞선 시험도 난이도가 괴랄했는데 마지막 시험이 제일 압권이었다.
보통의 검사였으면 색다른 오르네오의 전투법에 정신을 못 차리다 패배했겠지.
내가 이긴 이유는 특이한 오르네오보다 훨씬 더 특이해서였다.
“황혼의 대간부를 잡았다는 게 허명이 아니었군. 이 힘은···아무래도 드루이드 같은데. 맞는가?”
과연 현자라는 건가.
어디서 기록을 봤는지 내가 드루이드라는 걸 한눈에 알아봤다.
“그렇습니다.”
“모험가 칸이 드루이드였다니. 정말 놀라워. 시험은 합격일세. 들어오게나.”
오르네오는 나를 자신의 연구실로 초대했다.
실내는 지구에서 보던 대학 교수님 연구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두꺼운 서적이 온 바닥에 널려있었고, 방금까지 작업한 듯 책상 위에는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종이에 글씨가 가득 적혀있었다.
전체적으로 퀴퀴한 골방 냄새가 났다.
“따뜻한 차 한잔하게나.”
“감사합니다.”
차를 목에 넘기자마자 목구멍부터 올라오는 쓴맛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설마 독을 탔나?
상태창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이게 뭡니까?”
“고삼차라네. 몸에 좋은 차야.”
오르네오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일부러 고삼차를 내고 반응을 보려고 한 게 분명하다.
그러면서 본인은 고삼차 대신 달달한 꿀차를 마신다.
왠지 모르게 오르네오 공작에게서 천마 영감님의 향기가 난다.
“그래서, 우리 영웅님께서는 무슨 일로 미천한 노부를 찾아오셨는가?”
오르네오에게 사정을 말했다.
내가 드루이드라는 걸 알아챘기에 설명하기가 더 쉬웠다.
세계수의 파편인 황금가지를 찾기 위해 모험을 하고 있으며 이와 관련된 신탁을 받았다 고백했다.
신탁 내용도 공개했다.
‘원하는 물건은 가장 낮은 곳에 있다. 가장 큰 나라에서 가장 목마른 자를 찾아라.’
“···그래서 가장 큰 나라인 칼론 제국에 왔습니다. 다만 가장 낮은 곳과 가장 목마른 자를 도저히 모르겠어서 현자님을 찾았습니다.”
“흥미로워. 아주 흥미롭구먼.”
어느새 동그란 안경을 쓴 오르네오 대현자가 눈을 반짝였다.
그는 책장에서 책을 하나 꺼냈다.
상당한 고서적인 듯 윗면에는 먼지가 가득 쌓여있었다.
입김을 불어 먼지를 털어낸 그가 페이지를 넘기면서 운을 뗐다.
“자네 인과율이란 개념을 아나?”
“잘 모르겠습니다.”
“세상을 지탱하는 법칙이 곧 인과율이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아침에 일어나면 해가 떠있고, 이런 요소가 전부 인과율에 포함되는 게야.”
현자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재밌는 점은 신 또한 인과율에서 자유롭지 못하단 사실이지. 그래서인지 신탁은 항상 두루뭉술한 면이 있네. 따라서 벨라누스는 인과율이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자네를 이끌었을 거야.”
오르네오 현자는 벨라누스가 나를 칼론 제국으로 인도하고 싶어서 신탁에 언급했다고 말했다.
“이런 관점으로 분석하면 가장 낮은 곳과 가장 목마른 자도 찾을 수 있네. 벨라누스가 어째서 자네를 칼론 제국으로 이끌었을까?”
“글쎄요.”
“내 추측으로는 이렇네. 자네를 나와 만나게 하기 위해서일세. 어쨌든 이런 방면에선 내가 제일 전문가니까 말이야.”
오르네오 현자의 조언은 사람을 솔깃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따라서 가장 목마른 자는 나일 가능성이 높네.”
“현자님은 목이 마르십니까?”
“물은 많이 마시는 편이다만.”
“······”
잠시 정적이 흐르자 민망했는지 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말 그대로 물을 못 마셔서 목마른 자라 표현하진 않았겠지. 나 자신을 돌아보자면···아무래도 지식에 목마른 자가 아닐까 싶네.”
“지식 말입니까?”
“그렇지. 나는 벌써 백 년 가까이 살았어. 칼론 제국에서 나보다 더 지식에 목마른 자는 없을 걸세.”
오르네오가 계속해서 책 페이지를 넘기며 말을 이었다.
“내가 가장 목마른 자라고 가정한다면···내가 가장 낮은 곳을 안다는 의미겠지.”
책 페이지를 넘기던 그가 갑자기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책의 어느 부분을 짚었다.
“내가 생각하는 세상의 가장 낮은 곳은 바로 여기일세.”
서적에 적힌 글자는 몇백 년 전 사용된 고대어라서 알아보기 힘들었다.
반면에 꼬부랑 글씨체 옆에 그려진 그림은 한눈에 들어왔다.
바다 아래 건설된 집과 건물들.
어딘가 낯익었다.
“신탁에서 언급한 가장 낮은 곳은 이 서적에 적힌 해저도시가 분명하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다.
저 도시는 분명 본 적이 있다.
황금가지 시험을 칠 당시에 멀린이 방문했던 도시였다.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황금가지는 세계수의 파편.
멀린의 영혼도 일부 봉인되어 있다.
천마를 가둔 멀린은 황금가지를 어디에 퍼트려놨을까.
내가 멀린이라도 과거에 간 적 있는 곳에 배치했을 것이다.
일천 년이란 긴 세월에 몇몇 황금가지는 사람 손을 타고 움직였겠지.
설령 그랬더라도 해저도시에 배치된 가지는 그대로 보존되었던 것이다.
‘이 당연한 걸 떠올리지 못했다니.’
이제야 신탁의 내용이 이해 갔다.
그리고 단숨에 진실에 접근한 오르네오 공작의 지혜에도 탄복했다.
그는 현자로 대우받을 만한 사람이었다.
“답은 모두 알려줬네만, 안타깝게 되었군.”
“어째서입니까?”
“존재하는지조차 불확실한 도시일세. 게다가 어떻게 가야 할지도 오리무중이지. 미안하지만 내 도움은 여기까지일세.”
어깨를 으쓱이는 오르네오를 보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가는 방법은 제가 압니다만.”
“농담하지 말게.”
“정말입니다.”
가만히 나를 살펴보던 오르네오 공작.
내 진지한 표정을 한참 동안 마주한 그의 얼굴이 점점 경악으로 물들었다.
“거짓말이 아니군. 자네는 진짜 그곳에 가는 방법을 알고 있어.”
“말했지 않습니까? 이런 걸로 장난칠 사람 아닙니다.”
“오! 신이시여! 오오!! 신이시여!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현자도 감정이 격해질 땐 신을 찾는다.
메모.
한참 신을 부르짖던 오르네오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그 방법이 무엇인가! 제발 알려주게.”
지식에 가장 목마른 자가 맞긴 맞구나.
단전에서 푸른마나를 끌어올렸다.
그러자 손바닥 위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물방울을 만들었다.
“바다의 마나!! 어떻게 이걸 몸속에 품고 있지?”
“예전에 운이 좋아서 입수했습니다.”
“세상에···이쯤 되니 내가 현자인지 자네가 현자인지 헷갈리는군.”
오르네오 현자에게 가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멀린의 기억 속 장면 그대로 말했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과 야자수.
해안선 끝에 위치한 눈물모양 바위.
바위에 푸른마나를 주입하면 생성되는 바닷속 소용돌이.
그곳을 입구 삼아 몸을 던지면 해저도시가 나타난다고.
턱을 괴고 경청하던 현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책장을 뒤졌다.
그리고는 지리책 하나를 꺼냈다.
책에는 아르니아 대륙 전체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오르네오는 잉크펜으로 몇몇 지점에 동그라미를 쳤다.
“방금 표시한 부분은 긴 해안선과 야자수의 식생지가 겹친 장소네. 이곳 위주로 돌아보면 자네의 기억 속 그곳을 찾을 수 있겠지.”
수색 장소를 좁혔으니 큰 수확이다.
지도를 소중하게 품에 넣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현자님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닐세. 나야말로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었으니 생일을 찾아온 기분이야.”
손을 내저은 오르네오가 찻잔을 들고 미지근하게 식은 차를 꿀꺽 원샷했다.
이어서 목구멍에서 올라온 쓴맛을 견디지 못하고 호되게 기침을 했다.
“콜록! 콜록! 뭐야? 왜 고삼차가 앞에 있어?”
“글쎄요? 찻잔이 서로 바뀌었나 봅니다.”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복수할 건 복수해야지.
바꿔치기한 찻잔을 들고 입속에 털어 넣었다.
꿀차가 제법 달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