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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153화 (153/200)

18장 인어 : 반칙한 망나니

“비가 올 날씨였는데, 조심했어야지.”

참고로 오늘 날씨는 맑았다.

바다로 된 하늘에 가로막혀 햇빛이 약한 해저도시에 오래간만에 제대로 된 화창한 날이다.

구름한 점 없는 이런 날씨에 비가 온다니. 그야말로 어불성설, 상대를 조롱하기 위한 말에 지나지 않았다.

블레이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눈앞의 인간이 낯설지 않아서다.

어디서 봤더라?

곰곰히 생각하다 문득 머릿속에 한 장면이 스쳤다.

한 달 전쯤에 지상에서 인간 무리가 떨어졌길래 사로잡아서 사육장에 넣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놈들이 어찌나 날쌘지 예기치 않게 부족 전사 절반 이상이 동원되었다.

블레이크도 그때 당시 추격조였는데, 인간 놈들은 기어이 포위망을 뚫고 날쌘바람 부족 영역으로 가서 추격에 실패했었다.

현재 눈앞에서 깐족대는 저 인간은 자신이 놓쳤던 놈이 분명했다.

“그때 봤던 인간 찌끄레기군. 진작 잡아서 사육장에 넣었어야 했는데, 명줄이 길어.”

빈정대는 말투에 듣고 있던 테오도르가 발끈하며 나섰다.

“헤논은 우리 부족의 대은인이다. 감히 모욕하지 마라!!”

“인간을 은인이라 표현한다고? 죽을 때가 되니까 정신이 이상해진 듯하군. 어쨌든 무도대회에 인간족이 웬 말이냐. 당장 쫓아내라.”

“그럴 순 없다. 저들은 나를 도와 무도대회에 참가할 선수다.”

블레이크는 잠시 옆사람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리고는 못 참겠는지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풉! 푸하! 푸하하하하!!”

웃음을 터트린 건 블레이크 뿐만이 아니었다. 강철심장 전사 전원이 눈물까지 흘려대며 낄낄댔다.

저들이 보기에 우리는 연약하디 연약한 인간일 뿐인데, 어인족 최강자들이 겨루는 무도대회에 나간다는 사실에 그만 헛웃음을 터트리고 만 것이다.

“테오도르, 어디까지 추락하느냐? 그래도 전사로서 너의 기개는 인정했다만, 이젠 그것조차 의문이 드는구나.”

“네가 뭐라 지껄이든 상관없다. 나는 오늘 무도대회에서 인간과 함께 날쌘바람을 구해낼 테니까.”

두 부족 대표의 눈빛이 허공에서 불꽃을 튀겼다.

테오도르는 비장한 표정이었고, 그에 반해 블레이크는 훨씬 여유가 넘쳤다.

“네놈이 어떻게 발악하나 지켜보려 했는데 재미가 없어졌다. 시합장에서 똑똑히 지켜보거라. 네놈이 은인이라 칭하는 인간이 얼마나 허무하게 죽는지를.”

블레이크가 몸을 돌려 나가려고 했다.

저렇게 편하게 보낼 수는 없지.

드루이드 스킬을 살짝 시전했다.

[스톤 컨트롤]

뾰족한 돌부리가 땅에서 솟았다. 정확히 블레이크가 발을 들어올리는 위치였다.

지 잘난 맛에 사는 놈일수록 땅바닥은 보지 않는다. 블레이크도 마찬가지였고, 그대로 발끝을 돌부리에 콱 채였다.

“끄헉!”

저 아픔을 뭐라 표현하면 좋을까. 자려고 누우려다 침대 모서리에 발가락을 찧은 느낌일까. 밥 먹으려고 식탁에 앉다가 의자 다리에 발가락이 찍힌 느낌일까.

뭐가 되었든 엄청나게 아픈 건 확실했다.

“정말 재수 더럽게 없군! 다시는 오나 봐라!”

욕설을 퍼부으며 깽깽이 발로 퇴장하는 블레이크가 왜 이리 볼품없는지. 단순히 그가 적이라서가 아니라 정말로 없어 보였다.

* * *

무도대회가 시작되었다.

참여 부족은 총 64개 부족.

64강부터 토너먼트로 진행되었다.

날쌘바람 부족의 첫 상대는 하얀늪 부족이었다. 북부 중에서도 가장 북쪽에 위치한 소규모 부족으로 마지막 우승자는 12년 전에 배출된 경력이 있다.

아직 8년의 기한이 남아있는 만큼 날쌘바람보다는 널널한 편이다만, 그렇다고 사정을 봐줄 수는 없는 법. 날랜 전사 네 명이 살벌한 기세를 뿌리며 맞은편을 노려보았다.

이에 맞서 우리는 테오도르와 나, 캠벨, 시온이 앞으로 나섰다.

어인족과는 극명히 대비대는 외모 때문에 금세 주목을 받았다.

“응? 심판! 어떻게 된 거야? 상대가 인간인데? 착오가 있는 게 아닌가?”

심판이 품속에서 메모지를 꺼내 글씨를 읽더니 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다. 문제가 없다는 뜻이었다.

심판의 수신호를 확인한 하얀늪 전사들의 입꼬리에 미소가 걸렸다. 저들이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인간은 약하니까 제대로 된 전력은 테오도르 한 명 뿐이다. 아무리 그가 강해도 넷이서 차륜전으로 체력을 빼놓으면 우리 쪽도 승산이 있다.

···뭐 이런 생각이겠지.

“나중에 다 이겼는데 인간이 껴서 무효판이라 하면 안 된다? 선수로 출전시킨 건 너희야?”

“어차피 질 녀석들이 쓸데없는 걱정만 줄창 하는군. 후딱 끝내게 올라와라.”

테오도르의 도발에 하얀늪 전사들이 분개하며 시합장에 올라왔다.

그렇게 시작된 첫 번째 시합.

테오도르가 스텝을 밟고 쇄도했다. 한층 발전된 마나를 발목에 감아서 움직임이 깔끔하고 매끄러웠다.

상대는 덩치만 컸지, 둔하고 감각도 부족했다. 아예 테오도르의 움직임을 따라잡지도 못했다.

퍼억!!

“끄억!”

창대로 아래턱을 후려갈기자 상대가 단번에 기절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퍽! 퍽! 퍽!

뒤에 올라온 선수들 또한 비엔나소시지처럼 줄줄이 당했다. 다섯합 이상을 버티는 선수가 없었다.

테오도르는 원래도 강했는데, 나와의 대련으로 경험치를 먹고 생명수로 인해 강화되기까지 했으니 단연코 군계일학이었다.

오죽하면 다른 시합을 구경하고 있던 구경꾼들도 이쪽을 주목하며 다가올 정도.

“와, 저 전사 정말 강한데?”

“저 어인이 그 어인이잖나. 날쌘바람의 마지막 희망이라는 그 사람.”

“아하. 과연 이름값은 하는군.”

결국 테오도르의 올킬로 64강전이 마무리되었다.

바로 진행된 32강전.

이번에 맞닥뜨린 부족은 검은날개 부족이었다. 검은 날개 부족은 과거부터 날쌘바람 부족과 우호 관계였다. 그래서인지 일부러 봐주려고 애썼다.

“날쌘바람의 사정이 급하니 체력 안배를 위해 기권해주겠네. 우리는 아직 18년이나 남았으니까.”

“무척 감사한 제안이나, 마음만 받겠습니다.”

“허허···알겠네. 건투를 비네.”

정정당당하게 붙었다. 결과는 역시나 테오도르 올킬. 검은날개 전사들은 그에게 엄지를 치켜세우면서도 안타까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예상보다 훨씬 강하군. 그래도 이번 대회는 힘들 듯허이.”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강철심장 부족 때문이네. 저쪽을 보게나.”

시선을 돌렸다.

정중앙에 있는 시합장.

그곳에는 엄청난 덩치의 어인 하나가 도끼로 상대 선수를 난자하고 있었다.

퍽! 퍽! 퍽!

피가 튀고 살이 잘렸다.

이미 상대는 숨이 멎은 지 오래였다.

무도대회에서 상대를 죽이면 안 된다는 규칙은 없지만 되도록이면 살생을 자제하는 편이었다.

전사들 또한 이를 암묵적인 룰로 여겨왔다. 괜히 죽였다가 사망한 전사가 속한 부족과 감정이 상해버리면 이만저만 손해가 아니기 때문.

앞으로도 같은 구역에서 얼굴 볼 사이기에 서로가 조심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강철심장 대표 전사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시체를 해체하며 광기 어린 표정을 지었다.

참혹한 광경에 구경하는 관객도 질린 기색이었다. 특히나 시체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는 어인족에게 저런 만행은 전사의 명예를 모욕하는 짓이었다.

삐—익! 삑!

심판이 호루라기를 불며 중재를 시도하려 했다.

그러자 손가락 사이에 묻은 찐득한 피를 쪽쪽 빨아먹던 뚱뚱보가 심판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앙? 너도 이렇게 되고 싶어?”

“아, 아닙니다.”

심판조차 어쩌지 못한다. 그야말로 독불장군. 워낙 눈에 띄는 행동이었기에 어인들은 금세 전사의 신원을 알아냈다.

“도살자 형제다!”

“정말이군. 저 잔인무도한 놈들이 대회에 어쩐 일이지?”

“강철심장 부족에서 섭외했나봐.”

“세상에, 우승은 이미 정해졌군.”

“강철심장에 올인하기 잘했다.”

술렁대는 분위기. 날쌘바람 부족원의 얼굴에 불안감이 서렸다. 테오도르도 잔뜩 긴장한 기색이다.

“붕어빵, 하던 대로만 해. 저런 보여주기식 장면에 동요하지 말고.”

“너는 시체를 난도질하는 거한을 보고도 어찌 그리 침착한가?”

침착할 수밖에 없다. 다들 도살자 형제니 뭐니 이름값만 보며 치켜세웠지만, 내가 보기엔 너무나 약했다.

아까 전에 놈의 결투 장면을 슬쩍 봤다.

온몸에서 뿜어내는 폭발적인 기세 자체는 제법 위협적이었으나,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이라기보다는, 통제하는 법을 몰라 마구잡이식으로 발산하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기운이 많아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물이 줄줄 새는 장독대와 다를 바 없다.

저 녀석은 테오도르보다도 기운을 못 다루는 녀석이다. 그 단점을 상당한 양의 마나와 어마어마한 피지컬로 상쇄하며 싸우는 스타일.

한마디로 나에게 있어서 저런 놈은 조금 똑똑한 트롤이나 다를 바 없었다.

트롤이 떼거리로 달려들어도 이길 판에, 정해진 링 안에서 일대일로 싸운다? 이건 그냥 떠먹여 주는 밥상이다.

32강을 통과하고 16강에 도착했다.

테오도르는 거침없이 올킬행진을 이어나갔다.

테오도르가 예상보다 선방하자 도살자 형제를 보고 불안감에 휩싸였던 날쌘바람 부족원은 희망을 가졌고, 강철심장 부족원에 베팅한 관객들은 일제히 야유를 보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테오도르는 8강도 뚫고 4강까지 승리를 이어나갔다.

올킬행진은 강철심장도 마찬가지였다. 도살자 형제 중 막내가 네 명을 모조리 해치우며 올라왔다.

또한 패배한 상대를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참수했다. 전사의 명예를 지켜달라는 어떤 선수에게는 일부러 살려둔 채로 극심한 고문을 가했다.

결국 상대의 입에서 잘못했다는 소리가 나오자마자 목을 자르고 히죽 웃었다.

그래서일까. 내기판과 관련 없는 관중은 너도나도 테오도르에게 몰려들었다. 그들은 내심 테오도르가 내심 저 악마 같은 도살자 형제를 잡아주길 원했다.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결승전을 시작~하겠습니다!!!”

우뢰와 같은 함성소리와 함께 결승전이 시작되었다.

“먼저 청코너! 북부 구역 명실상부 챔피언, 강철심장 부족입니다! 외부에서 고수를 초빙해와서 스쿼드가 한층 단단해졌죠. 작년에 이어 이번에도 우승자 타이틀을 거머쥘 것인가!”

해설자의 설명에 흥분한 군중들이 손을 마구 휘두른다.

“이겨라! 도살자들 믿는다.”

“너희한테 전 재산 걸었다. 지기만 해봐.”

“포세이돈에서 왔으면 이름값을 해!”

이어서 우리팀 설명이었다.

“이에 맞서는 홍코너! 떠오르는 다크호스, 날쌘바람 부족입니다! 특히나 날쌘바람 부족은 올해 우승에 실패하면 부족이 해체될 위기에 처하는데요. 빈말로라도 사이가 좋지 않은 강철심장이 이를 내버려둘지 궁금합니다. 모두 소리 질러~~”

역시나 우렁찬 함성이 들렸다.

강철심장 부족에 원한이 있거나, 역베팅에 걸거나, 언더독을 응원하거나, 아니면 날쌘바람 부족 측에서 터진 응원이었다.

“야만적인 강철심장 놈들 이번에 침몰시키자! 테오도르 가랏!”

“이거 터지면 아홉 배야. 제발···”

“믿습니다. 테오도르님.”

뜨거워진 열기.

더 이상 과열될 수 없다.

“우웩! 웩!”

옆을 봤더니 테오도르가 지나친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어깨에 부족의 명운이 걸렸으니 이해가 간다.

“테오도르.”

“왜 그러나.”

“멍청한 붕어빵 새끼.”

갑자기 욕을 먹은 그가 벙찐 표정을 지었다.

“방심은 금물이다만, 도를 넘은 긴장 또한 독이 되긴 매한가지다. 너 자신을 믿어라. 그동안 해온 게 있잖나?”

“그런가···”

“당연하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나와 싸우다가 죽을 뻔했으면서 그보다 약한 도살자 나부랭이에게 긴장한다라? 너답지 않다.”

내 말에 자신감을 얻었을까.

그의 표정이 조금 안심된다.

“맞군. 금방 다녀오겠다.”

“지면 내 손에 죽는다. 아참, 어차피 죽겠구나.”

“격려 고맙다.”

격려가 아니고 진짜 죽인다는 말이었는데.

어쨌든 기운을 차렸으니 좋은 일이다.

두 부족의 선발 대표가 대치했다. 햇빛이 잠시 물러가며 싸늘한 바람이 그 자리를 채웠다. 동시에 폭풍전야를 연상케 하는 무거운 정적이 내리앉았다.

테오도르는 비장한 표정으로 할버드를 들어올렸다.

도살자 형제의 막내는 한쪽 눈에 안대를 쓴 애꾸눈이었다. 도끼자루를 손바닥으로 탁탁 치던 그가 피식 웃었다. 상당히 여유 넘치는 태도였다.

“네놈 이야기 질리도록 들었다. 북부에서 제법 잘 나간다지? 그래봐야 우물 안 개구리겠지. 너 같은 놈은 포세이돈 시티에 널렸다.”

애꾸눈에 대한 테오도르의 대답.

“그래, 맞다.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어.”

당연히 맞받아치며 분개할 줄 알았던 테오도르가 순순히 인정하자 애꾸눈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재미없게. 자존심도 없는 놈인가?”

“사실 그대로를 말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우물에서 벗어났고 승리를 쟁취할 테다.”

“이상한 놈이군. 뭐, 상관없어. 도끼에 베일 때는 모두가 똑같은 비명을 내지르니까.”

타앗!

두 사내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이어서 대련장 중앙에서 귓청이 찢어질 듯한 굉음이 울려퍼졌다.

콰아아앙!!!

테오도르는 자신이 창을 든 이점을 철저히 이용할 줄 아는 전사였다. 나도 붕어빵 놈과 싸울 때 꽤나 인상적이라 느꼈던 장점이었다.

이번에도 그는 긴 사거리를 이용해서 일방적인 공세를 퍼부었다. 그에 비해 날이 짧은 도끼를 든 애꾸눈은 막기에 급급했다.

그래서인지 겉으로 보기에는 테오도르가 앞서 가는 느낌이었다. 양측 군중이 일제히 환호와 성토를 반복하며 분위기를 달궜다.

“테오도르, 잘한다! 그대로 밀어붙여!”

“이렇게 날쌘바람 부족이 이겼으면 좋겠다.”

“제기랄! 도살자라 했더니 겨우 저 정도인가. 고수 만나니까 꼼짝도 못하네. 딱 초보자 전용이야.”

여기까지가 싸움을 전혀 볼 줄 모르는 일반인 시선.

반면에 시온을 비롯한 동료들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도련님.”

“그래. 유효타가 전혀 없다.”

“상대 수비가 제법 단단하군그려.”

“테오도르의 체력이 소진되면 치고 나올 계획 같은데.”

캠벨의 말대로였다.

애꾸눈은 등딱지에 들어간 거북이처럼 움츠리고 있다가 테오도르의 숨소리가 거칠어지자 점점 과감하게 행동했다.

“딱 5분 정도 봐줄 만했다.”

이제 전세는 역전되었다. 애꾸눈이 거친 공세를 펼쳤다. 흉흉한 기세가 폭주하며 추가 공격력을 더했다.

테오도르가 입술을 질끈 씹으며 창을 휘둘렀다. 나름 유연한 몸과 재빠른 반사신경으로 치명타를 피하고 있지만 전신에 상처가 늘어갔다.

‘생명수를 먹이고 대련 경험치를 먹여서 다행이군.’

만약 예전의 테오도르였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딱 이쯤에서 체력이 모두 소진되고 애꾸눈에게 결정타를 얻어맞고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특훈을 받고 한 단계 올라선 테오도르는 달라졌다. 쓰러질 듯하면서도 아슬아슬하게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이쯤 되자 다시 초조해진 건 애꾸눈이었다. 그는 폭주하는 기운을 다스리는 법을 몰랐다.

“좀 죽으란 말이다!!”

애꾸눈의 기세는 산불과 같았다. 타오를 때는 거침없다가 불씨가 다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허무하게 꺼진다.

이와 대조적으로 심법을 익히고 기운을 다룰 줄 알게된 테오도르는 마나를 훨씬 절약했다. 초반 급발진으로 올라온 피로도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제기랄!”

도살자 막내가 육두문자를 내뱉었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대로 가면 자신이 진다. 결국 그는 꼼수를 생각해냈다.

챙! 챙!

창과 도끼가 부딪칠 때, 애꾸눈이 중심을 잃은 척 일부러 몸을 휘청였다.

물론 속임수였다. 만약 들어오기만 한다면 먹잇감을 노리는 뱀처럼 바로 낚아챌 계획이었다.

‘걸려라. 제발 걸려들어라.’

기도하는 그에게 신이 응답한 걸까. 장기전에 판단이 흐려진 테오도르가 드러난 빈틈에 창을 찔러넣었다.

‘걸려들었다!’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제 몸을 돌려서 창을 피하고 큰 동작 후 드러난 테오도르의 옆구리에 도끼를 먹이면 시합 끝이었다.

그렇게 피하기만 하면 됐는데···

‘어라?’

몸이 안 움직인다. 무언가에 발목이 꽁꽁 묶인 느낌. 아래를 슬쩍 보았다. 어디선가 나타난 나무뿌리가 자신의 발등을 구속하고 있었다.

“뭐야?”

재빨리 발을 풀었다. 금세 풀려났다. 하지만 대등한 상대와의 싸움에서 잠깐의 틈은 치명적이었다. 심지어 자신은 약점을 드러낸 상태 아니었던가.

푸욱!!

날카로운 할버드의 끝날이 애꾸눈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운이 없다고? 이럴 리가 없는데···

그때였다.

마침 대기 선수 자리에 앉아있는 인간족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여태껏 신경조차 쓰지 않던 선수. 어째서인지 놈이 자신을 보고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다.

“?”

그와 동시에 방금 전까지 승패를 나누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나무뿌리가 땅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지는 게 아닌가!

그야말로 완벽한 증거인멸.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저 인간이 벌인 짓이라는 것을.

“!!!”

나무를 멋대로 조종하는 인간이라니.

듣도 보도 못했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분명했다.

저놈 때문에 내가 졌다.

“이건···반···ㅊ”

뎅겅!!

가슴에서 창을 뽑은 테오도르가 재차 휘둘러 애꾸눈 막내의 목을 날렸다. 그의 마지막 말이 들릴 일은 없었다. 진실은 영원히 해저 속에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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