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장 유적 : 출장갈 망나니
해저도시 중부.
포세이돈 시티 내 왕궁.
색색이 다채로운 빛을 발하는 발광석이 왕궁을 환하게 비춘다.
곳곳에 어인족 동상이 늘어섰고, 신기한 모양의 조개껍데기로 꾸며진 바닥, 거대 랍스터와 상어의 머리통이 박제된 채로 장식되어 있었다.
왕궁의 천장에는 해저도시의 하늘처럼 물이 가득 들어차 있었는데, 인력을 동원해서 만든 인공 어항이자 수조였다.
어항에는 수천가지 종류의 물고기가 무리지어 다니며 눈을 즐겁게 했다.
이밖에도 촉수를 살랑거리며 요염하게 헤엄치는 해파리나 수중에서도 화려함을 뽐내는 바다꽃이 조형미를 더해주었다.
하루만 지내도 아름다움에 취할 만한 공간. 이곳의 왕좌에 인어왕이 앉아있었다.
인어왕의 어인족 기준으로 매우 독특했다. 지느러미와 꼬리가 있으리라 예상했지만, 어인족을 연상할만한 어떠한 신체 부위도 없었다.
오히려 평범한 인간족과 흡사했다.
열살배기 아이의 외형을 한 그는 토실토실하게 살이 오른 생선을 뼈째 씹어먹었다. 그가 입을 벌릴 때마다 안쪽에 돋아난 날카로운 이빨이 언뜻 보였다.
현재 그는 총리의 보고를 듣는 중이었다. 총리는 왕궁의 2인자로, 인어왕을 대신해서 대소사를 관장하는 자였다. 또랑또랑하고 낭랑한 목소리가 실내를 울렸다.
“현재 4개 구역 무도대회가 모두 끝났습니다. 대회에서 가장 특출난 활약을 보인 MVP는 왕궁으로 소환 명령을 내렸습니다.”
총리가 보고를 올리는 와중에도 인어왕은 식사에 여념이 없었다. 쩝쩝대는 소리에 총리의 말이 묻힐 정도였다. 주변은 인어왕이 흘린 음식 찌꺼기로 가득했다.
“배고파. 더 가져와.”
“전하, 제 얘기를 듣고 계십니까?”
“아앙?”
인어왕의 서늘한 눈빛이 총리를 향했다. 죽음의 위기를 느낀 총리가 흠칫하며 고개를 숙였다.
“일리나.”
“예.”
“네가 살아있는 이유는 너 정도로 강하면서도 똑똑한 인재가 없기 때문이야. 대체자가 있었으면 진작 바꿨어.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명심하겠습니다.”
“그래서, 무도대회 우승자들이 오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여기 명단입니다.”
신상명세서를 읽던 인어왕이 눈을 빛냈다.
“뭐야? 북부 구역은 지상인이 mvp네?
“그렇습니다. 저도 이 부분이 독특해서 여러 번 확인했습니다만, 상당히 강한 인간이라더군요.”
“인간이라···정말 강한 게 맞아? 적당히 강한 게 아니고?”
총리가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인어왕이 이렇게 묻는 저의를 알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을 잡아먹고 싶어한다.
“상당한 고수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잡아서 올리겠습니다.”
“아니야. 그 정도 녀석이면 한 끼 식사로 만들기는 애매하지. 놈이 아무리 맛있어도 인어왕의 보주에는 못 미칠 테니 말이야.”
고민하는 와중에도 게의 등딱지를 파먹던 인어왕이 박수를 쳤다.
“좋았어! 전부 데려와봐. 직접 보고 결정해야겠다.”
* * *
수도로 가는 길.
지상에는 마차가 있다면 여기는 해마차가 있다. 사족 보행을 하는 해마가 차를 이끌었고 나와 일행은 여기에 탑승하여 편하게 이동 중이었다.
현재 나는 가부좌를 튼 채 내면을 관조하고 있었다. 단전에 똬리를 튼 이원마나의 각성도 상태는 이러했다.
[초록마나 각성도 50%] [↑0.0%]
[푸른마나 각성도 48%] [↑0.0%]
[용혈 각성도 48%] [↑0.0%]
[혼합률 44%] [↑0.0%]
벨라누스 신성국에서 순간적으로 깨달음을 얻고 각성도가 크게 증가한 이후로 두드러진 변화 없이 그대로였다.
초록마나는 예전부터 절반 수치에서 더 못 올라가고 있었고, 나머지도 50%을 코앞에 두고 무언가에 막힌 듯 제자리걸음이었다.
이를 극복하려면 색욕을 처치할 때처럼 무언가 계기가 있어야겠는데, 어떠한 계기가 필요할지는 좀체 감이 안 왔다.
‘코코에게 먹일 악마 시체도 필요하다.’
코코는 현재 3단계 헤츨링. 진화율 75퍼다. 25퍼만 더 올리면 성룡으로 진화할 수 있다는 이야기.
악마의 사체를 더 먹이면 금세 오르겠지. 그러나 색욕과 비슷한 등급의 악마는 매우 드물다. 무엇보다 해치우는 일부터가 난관이니 기회를 기다려야 했다.
“도련님.”
옆에서 시온이 말을 거는 바람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무슨 일이지? 벌써 도착했나?”
“네. 포세이돈 시티입니다.”
해저도시의 수도답게 규모나 면적이 상당했다. 가지각색 개성이 뚜렷한 어인이 돌아다녔다. 새삼스레 북쪽 구역이 얼마나 시골인지 체감되었다.
물론 칼론 제국의 수도 오스딘 시티도 경험한 마당에 포세이돈 시티의 규모에 놀랄 일은 없었으나, 어인 도시만의 강한 특색이 자리잡은 곳이었다.
단단한 갑각으로 만든 주택단지부터 시작해서 강아지나 고양이 대신 거북이나 대왕 개구리를 산책시키는 시민들. 진주를 주고받으며 거래하는 상인들. 바닷물을 퍼와서 바닥을 청소하는 환경미화원까지.
해마차는 거침없이 왕궁으로 들어갔다.
응접실에 도착하니 엄청난 미인이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반가워요. 저는 총리대신 일리나입니다. 총리님이라 불러주시면 감사하겠어요.”
푸른 머리카락에 파란 진주를 박아놓은 것 같은 눈동자. 어인족 특유의 시원하게 뻗은 팔다리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나는 그녀의 미모보다도 풍기는 기운에 주목했다. 기세를 감추고 있지만 단련된 자 특유의 날카로움이 배어나왔다.
총리라길래 배불뚝이 아저씨나 바싹 마른 흰수염 노인을 연상했는데, 예상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났다.
“포세이돈 시티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북부구역 무도대회 우승팀 소속이신가요?”
“예, 총리님. 최우수자 칸이라고 합니다.”
총리는 시온을 비롯한 일행을 대기시켜두고 나만 데리고 다른 공간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다른 대기자들이 앉아있었다. 꽤 강한 놈들이었다.
“모두 인사하세요. 북부구역 최우수자이십니다. 칸님, 이쪽은 동, 서, 남부 구역 최우수자세요.”
“칸이라고 한다. 잘 부탁한다.”
다들 시큰둥한 기색으로 고개만 살짝 끄덕인다. 서로에게 크게 관심 없는 분위기. 마치 면접장을 연상케 했다.
“전하를 알현할 시간입니다.”
일리나의 인도에 따라 커다란 홀에 입장했다.
인어왕은 왕좌에 앉아있었다.
그의 앞에는 기다란 식탁이 놓여있었는데, 식탁 위에 놓인 산해진미를 정신없이 흡입 중이었다.
손님이 왔는데 식사를 하고 있다니. 아무리 왕이라지만 저래도 되는 걸까.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구역 최우수자들도 의아한 기색이었다. 일리나 총리만 창피했는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전하, 각 구역 최우수자들이 왔습니다.”
그제야 잠시 식사를 멈춘 인어왕이 최우수자를 스윽 둘러보았다.
앞선 세 명을 대충 넘기고 가장 끝에 있는 나에게 시선을 고정하더니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한다.
노골적인 시선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인어왕과 눈을 마주쳤다.
‘눈빛이···익숙하다.’
이건 본능이자 직감이었다. 인어왕과 나는 오늘 처음 본 사이가 확실하다. 그런데 어째서 낯익은 느낌이 들까.
그때였다.
파지직!!!
머릿속에 번개가 내리치며 기억이 하나 재생되었다.
가장 최근에 봤던 황금가지의 시험에 나왔던 크라켄이 갑자기 나타났다. 연신 배고픔을 부르짖으며 멀린에게 달려들었던 거대문어. 그 문어의 눈빛과 저 소년의 눈빛이 똑 닮았다.
‘아니야. 닮은 정도가 아니다. 아예 똑같아.’
확신한다.
멀린의 몸에 빙의한 후 목숨 걸고 싸웠는데 모를 수가 없다.
일천 년 전 멀린과 싸웠던 문어와 저 소년은 동일한 존재였다. 어떻게 천 년을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인어왕과 본의 아니게 길게 눈 맞춤을 이어가자 일리나가 헛기침으로 주위를 환기했다.
“크흠흠!”
정신차리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인어왕의 정체가 크라켄임을 깨닫자 나를 유심히 보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나를 음식으로 보고 있다.’
멀린의 기억에서 봤던 그 문어대가리는 먹을 수 있다면 돌도 씹어먹을 성격이었다.
저런 놈일수록 평소에 못 먹는 음식에 환장하는 법이다.
어인만 가득 넘쳐나는 곳에서 인간, 그것도 강하고 독특한 인간이니 저 문어대가리가 못 참고 군침을 뚝뚝 흘릴만하다.
여기서 의문은 이렇다.
어째서 식욕을 애써 참을까.
천년 동안 인내심을 길렀나.
아니면 아껴먹으려는 걸까.
“총리, 최우수자들을 시험해라. 내 직속전사가 될 자격이 있는지 확인해.”
인어왕의 말에 모두가 의문을 표했다. 각자 구역에서 우승까지 했는데 또다시 자격을 확인한다 해서다. 어리둥절한 우리에게 일리나가 나서며 설명했다.
“지방에서 두각을 조금 보였다고 해서 포세이돈 시티에서까지 강하다는 보장은 없죠. 저와 간단한 대련을 진행하시고 탈락자를 뽑겠습니다.”
서부 구역 최우수자가 손을 들었다.
“싸우는 건 상관없습니다. 문제는 총리님이 다칠 경우입니다. 신경 쓰여서 제대로 싸울 수나 있겠습니까?”
“미안하지만, 그런 걱정은 하지도 마세요. 제가 볼 때 여러분은 전부 촌뜨기에 우물 안 개구리니까요.”
힘들게 우승을 거머쥐고 올라온 대표들이다. 일리나 총리의 도발에 순간 후끈 달아올랐다.
나만 빼고.
나는 쉽게 이기고 와서인지 딱히 미련이 없었다. 그보다는 문어대가리가 왜 인어왕 행세를 하고 있는지가 더 궁금했다.
순식간에 대련장이 만들어졌다. 인어왕은 그 와중에도 식사를 멈추지 않았다. 생선을 뜯어 먹으면서 시험을 구경했다.
일리나와 서부대표가 맞닥뜨렸다.
그녀는 양팔에 각각 다섯 개씩 열 개의 둥근 쇠고리를 팔찌처럼 두르고 있었는데, 표면이 제법 날카로웠다. 제법 흥미로운 무기였다.
“총리님이라 해서 봐 드리지 않습니다.”
“떨어지고 싶지 않으면 최선을 다하세요.”
“바로 끝내주겠습니다!!”
잔뜩 약이 오른 서부대표가 검을 뽑고 달려들었다. 그런 녀석을 향해 일리나 총리가 열 개의 원환(圓環)를 출수했다.
“호오라?”
감탄이 나왔다.
고리 안쪽에는 물이 채워져 있었다. 일리나 총리는 그 물을 조종해서 환을 조종했다.
단순히 물을 조종하는 능력뿐만이 아니었다. 환에 각각 푸른마나가 담겨서 위력과 절삭력이 살벌했다.
열 개 방향으로 짓쳐들어오는 칼날 바람을 연상해보라. 심지어 회전력도 좋아서 스치면 최소 중상이다. 일리나의 무기는 그만큼 파괴적이었다.
“크윽!!”
서부대표는 색다른 전투방식에 고전하다가 3분도 못 버티고 항복했다.
“왼쪽 문으로 가시길 바랍니다.”
어깨를 축 늘어트린 서부대표가 그녀가 가리킨 방향으로 퇴장했다.
두 번째는 남부대표였다.
건장한 체격의 남부대표는 전 경기에서 나름 교훈을 얻었는지 처음부터 쇄도해서 근접전을 벌이려 했다. 원거리에서 날아오는 환을 다분히 의식한 전략이었다.
제법 똑똑했으나 딱 거기까지.
일리나 총리는 원거리전만 능한 게 아니었다.
원환을 전부 소환해서 팔에 찬 다음 격투를 벌였다. 긴 팔다리를 이용한 급소 찌르기와 제대로 배운 권각법. 방어가 필요할 때는 양팔을 교차에서 팔에 찬 쇠고리로 상대의 칼날을 막는다.
여러모로 남부대표를 압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항복합니다.”
“왼쪽 문으로 가세요.”
다음 동부대표.
근접도 안 되고 원거리도 안 된다.
결국 그가 내린 결정은 죽자고 버티기였다. 방패를 바짝 들고 거북이가 등딱지에 숨은 것처럼 사방에서 퍼부어지는 폭격을 견뎠다.
여기서 느낀 건 일리나가 어인족답지 않게 심법에도 뛰어나단 사실이다. 딱 필요한 지점에 필요한 만큼만 마나를 사용했다. 그 모습이 숙련된 아르니아 대륙 고수와 다를 바가 없었다.
“끄억!!”
방어하다가 체력이 다한 동부대표가 엉덩이에 환을 얻어맞고 탈락했다.
“왼쪽 문으로 가세요.”
남은 건 나뿐이었다.
“인간족을 상대하기는 처음이군요.”
일리나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모양이었다. 특히나 인간인 나에게는 전혀 기대도 하지 않는 기색. 기계적으로 나를 해치우고자 환을 출수했다.
‘드루이드 스킬을 쓸까?’
고민했다가 선택지를 지웠다. 과거 기억에 따르면 인어왕은 멀린에게 호되게 당했다. 그런 인어왕에게 드루이드 스킬을 보여주면 경기를 일으킬지도 몰랐다.
하는 수 없이 검술로만 상대하기로 했다.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일리나가 꽤 강해 보이긴 했으나, 그래봐야 시온과 비슷하거나 조금 윗줄이었다. 소드마스터를 밥 먹듯이 상대했던 나와는 경험치부터 달랐다.
-제법 재밌는 무기를 가진 처자구나.
-왼쪽, 오른쪽, 오른쪽, 왼쪽.
-가운데 집중했다가 뒤를 막아라.
천마게이션은 정상작동. 사방에서 정신없이 날아오는 환을 천마검을 휘둘러 모조리 쳐냈다.
동부대표처럼 간신히 막아내는 수준이 아니라 완벽히 막아내고 오히려 손이 남아서 전진하기까지 했다.
이쯤 되자 당황한 사람은 일리나였다. 이런 상대를 경험해본 적 없는지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의 손이 더 빨라졌다.
“어림없지.”
내 손은 더 빨라졌다.
이미 그녀의 지척이었다.
원거리전은 안 된다고 생각한 걸까. 일리나가 출수했던 환을 모두 불러내고 근접전을 시도했다.
“오랜만에 손맛이 좋은 상대가 왔군요.”
나를 아래로 보는 말투와는 다르게 그녀의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있었다.
반면에 나는 쌩쌩했다. 이제 일리나 수준의 상대에게 끈질긴 생명력이 발동할 정도로 체력이 후달리지도 않는다.
결국 나는 그녀에게 굴욕감을 심어주었다. 왼손은 뒷짐을 진 채 오른손으로만 칼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익! 제대로 하세요!”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그 순간이었다.
천마의 벼락 같은 호통.
-애송아! 피해라!
이를 악문 일리나가 근거리에서 모든 환을 출수했다. 숨겨두고 있던 비장의 기술이었다. 반면에 실패할 경우 뒤가 없는 전략이기도 했다.
“필살기를 쓸 때는 상대의 방심을 노려야지요. 대놓고 쓰겠다고 신호를 주는데 어찌 맞겠습니까?”
겉으로는 여유로운 척했으나 속으로는 살짝 놀랐다. 마지막에 천마의 경고가 아니었다면 크게 베였을지도 몰랐다.
“졌습니다.”
허탈한 표정의 일리나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시험관이 합격자가 나왔다고 울다니. 이해가 안 가는 광경이다.
“와우! 너 생각보다 강한데? 일리나가 지는 건 처음 봤어.”
시험 내내 계속 처먹던 인어왕이 나를 보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 와중에도 다른 손으로는 오동통한 새우를 뜯었다.
“시험에 합격했으니 넌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라.”
“이제 저는 어찌되는 겁니까? 전하의 직속 무사로서 호위 임무를 맡으면 되겠습니까?”
“응? 아니.”
손가락에 묻은 양념을 입으로 쪽쪽 빨던 인어왕이 말했다.
“이제부터 너는 유적지로 간다. 인어왕의 보주라는 보물이 거기에 있어. 일리나와 함께 찾아와라.”
첫 임무부터 출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