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158화 (158/200)

19장 유적 : 환영한 망나니

일리나는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를 좋아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자애롭고 다정했으며 용감하기까지 했다.

사춘기가 찾아오고 알 것 다 아는 나이가 되었을 때도 어머니를 곧잘 따라다녔다.

그녀를 동경했고 그녀처럼 되고자 했다. 어머니가 사용했던 무기를 피가 나도록 연습했고 그녀가 했던 훈련방식을 똑같이 적용했다.

그 결과, 일리나는 미모와 재색을 겸비한 강한 여인이 될 수 있었다.

청출어람(靑出於藍).

마침내 목표로 했던 대상을 넘어섰으니 원래라면 뿌듯하고 벅차올라야 하건만, 그녀는 스스로를 저주할 수밖에 없었다.

“딸년이 어미보다 강해졌으니 어미는 이제 쓸모가 없어졌군.”

우적우적

어머니는 산 채로 잡아먹혔다.

그것도 일리나가 보는 앞에서.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눈앞에 한끼 식사로 전락하는 참담한 광경을 보면서도 일리나는 저항할 수 없었다. 피가 나도록 주먹을 꽉 쥐며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감정을 다스렸다.

그녀가 덤벼들지 않았던 이유는 딱 하나, 어머니의 유언 때문이었다.

‘일리나, 나를 대신해서 어인족을 돌봐주렴. 너까지 가버리면 아무도 저 악마가 폭주하는 걸 막을 수 없어.’

‘우리는 왕족으로서 고귀한 사명을 지녔어. 선조께서는 대대로 이를 지켜오셨고 나도 뒤따랐을 뿐이야. 이제는 네 차례란다.’

“식사가 맛있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이후로 총리직을 인수인계 받은 일리나는 인어왕의 비서역을 자청하며 기계처럼 일해왔다.

겉으로는 최대한 사무적인 태도를 유지해왔으나 사실은 탈모가 올 정도로 극심한 불안감과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특히 무도대회 시즌에는 그 스트레스가 최고조에 달했다.

강한 어인이거나 강한 에너지원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문어 놈이 해저도시 최고의 보물이라는 인어왕의 보주를 가만히 내버려둘 리가 없다.

초대 시조님의 주술은 약이자 독이 되어버렸다. 주술 덕분에 괴물 놈이 침입하지 못했고, 주술 때문에 무도대회가 만들어져서 애꿏은 희생자가 매년 발생했다.

보물을 지키기 위해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우승자를 꺾었다. 패배한 우승자는 그대로 문어 입으로 들어갔다. 저들의 망연자실한 표정이 매일 꿈에 나타나 일리나를 괴롭혔다.

이번 무도대회도 비슷할 거라 생각했다. 예년처럼 상대를 이기고 악몽에 시달리겠지. 우울한 심정으로 테스트를 봤는데···

“어라?”

북부에서 온 우승자가 제법 특이했다. 인간족이 여기까지 온 것도 신기했는데 검을 다루는 솜씨가 심상치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리나는 자신이 이길 거라고 생각했다. 인간족이 뒷짐 지고 한 손으로 자기를 상대할 때까지는.

“이익!”

평생 무술을 단련했고 크라켄을 제외하고 해저도시에서 최고수라 생각했건만. 그런 자신을 가지고 놀 정도의 실력이라니.

마음 속에서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들었다. 첫 번째는 ‘그래봐야 저 식인괴물에게는 안 되겠지.’ 하는 절망, 두번째는 ‘혹시 이 사람이라면 크라켄의 상대가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었다.

복잡한 상념에 잠겨있던 일리나에게 인간이 먼저 다가왔다. 그리고는 제안했다. 같이 손을 잡고 문어를 제거하자고.

이미 일리나는 잔뜩 지친 상태였다. 조금만 더 크라켄 주변에 있다가는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무엇에 홀린 듯 인간과 계약을 맺었다.

‘정신이 나갔던 거야.’

계약하고 다음날 크라켄의 얼굴을 마주하자 바로 후회가 몰려왔다. 요리보고 저리봐도 인간이 문어를 해치울 각은 안 나왔다.

결국 해저도시 전체가 크라켄의 노예이자 식량창고가 되는 걸까. 상실감에 잠겨있을 때, 칸이란 인간의 진면목이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뒤에 꼬리가 붙었습니다. 외뿔 도살자입니다. 수는 대략 일백 명.”

옛날부터 감각이 타고났다고 어머니께 칭찬받았던 일리나였다. 그런 그녀도 전혀 몰랐는데 이 인간족은 한참 멀리 떨어진 적을 감지하고 파악했다.

그뿐이랴.

상대가 무슨 무기를 들고 있는지, 숫자가 몇 명인지, 우두머리의 정체가 누구인지까지 완벽히 파악했다. 마치 사방에 그의 눈과 귀가 있다는 느낌이었다.

‘이 인간 도대체 정체가 뭘까.’

놀랄 일은 계속되었다.

사실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유적지에 들어오자마자 막막한 마음이었다. 이 넓은 미로에서 어떻게 출구를 찾을지 감도 안 왔다.

선택지는 오로지 두 가지 뿐이라 여겼다. 유적지에서 죽거나, 아니면 빈손으로 돌아가서 크라켄의 먹잇감이 되거나.

그러나 칸은 세 번째 선택지를 제시했다. 바로 ‘유적지를 돌파하거나.’ 였다.

난데없이 박쥐개구리를 날리던 그가 십 분 만에 유적지를 파악했다고 말한다. 그때만 해도 착각이라고 여겼다. 그 짧은 새에 고작 박쥐개구리로 출구를 발견할 리가 없잖는가.

하지만 착각한 사람은 일리나였다. 칸은 손쉽게 유적지를 돌파해나갔다. 머릿속에 지도라도 그려진 것처럼 거침없었다.

“이곳은 바닥이 꺼지는 함정입니다. 모서리 부분만 밟고 이동하죠.”

“몬스터가 나오는 구간입니다. 처리합시다.”

“벽에서 화살촉이 튀어나올 겁니다. 조심하세요.”

이 정도면 칸이 유적지를 설계한 게 아닐까 헷갈릴 정도였다. 도무지 어떤 방식으로 길을 찾고 함정을 파훼하는지 짐작조차 안 갔다.

심지어 실력조차 베일에 가려져 있다. 몬스터를 처리할 때나 장애물을 피할 때나 항시 여유가 넘쳐흘렀다. 기를 쓰고 최선을 다하는 자신과 달리, 그는 전력의 절반 혹은 그 이하로 쓰는 듯했다.

심지어 데리고 온 동료조차 강했다. 허허실실 웃는 노인, 무표정하지만 마음은 따뜻한 여인, 호탕한 웃음이 매력인 사내. 노인은 확실히 자기보다 강하고 여인과 사내도 만만찮다는 느낌이었다.

‘이 사람들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이러면 안 되는데. 괜한 희망은 더 큰 절망으로 되돌아오기 마련인데.

일리나는 알면서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솜사탕처럼 부푸는 설렘을 느꼈다. 이미 심장은 미칠 듯이 콩닥대고 있었다.

* * *

유적지 돌파는 순조로웠다.

이번에 라이프 스킬 덕을 톡톡히 보았다.

[라이프 컨트롤]

[테이밍]

[시야공유]

박쥐개구리를 이용해서 발견한 최단루트로 달려갔다. 각 방의 함정은 이미 정찰이 끝난 상태. 혹시 모르니 두번 확인하자는 마음으로 석벽에 손을 집고 기억회상을 시전했다.

[라이프 컨트롤]

[기억회상]

일천년의 기억을 단숨에 훑는 거라 피로감이 느껴졌지만 부담될 정도는 아니었다. 늘 제자리를 지켰던 돌에 빙의해서 무슨 장치가 숨겨져 있는지 단숨에 파악했다.

과연 별의별 함정이 다 있었다. 그때마다 사전에 파악하고 최대한 피하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무기로 쳐내거나 방어구로 막으면서 이동했다.

몬스터가 있는 곳은 차라리 쉬웠다. 천마검을 휘둘러 단숨에 해치웠다. 캠벨과 시온도 각각 무력을 뽐냈고, 오르네오 영감님도 강력한 물대포로 적을 침묵시켰다.

“정말 놀랍군요.”

옆에서 지켜보던 일리나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가 생각해도 놀랄 만했다. 우리 정도 전력의 파티는 아르니아 대륙에서도 희귀하다.

“거의 다 왔습니다. 앞으로 다섯 개 방만 더 통과하면 되겠군요.”

내 말대로 정확히 다섯 개 스테이지를 돌파하고 출구를 맞이할 수 있었다.

“으아아아!! 살았다! 지긋지긋한 미로 다시는 오나봐라!”

“돌아갈 때 또 통과해야 합니다. 멍청이 캠벨.”

캠벨이 기지개를 키며 기쁨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시온도 핀잔을 던지긴 했으나 은근슬쩍 좋아하는 게 눈에 보였다. 반면에 오르네오 영감님은 현자라서 그런지 색다른 반응이었다.

“나중에 다시 돌아와서 유적지를 자세히 살펴야겠네. 굉장히 고등한 레벨의 건축물이야. 이와 관련해서 논문을 쓰면 적어도 일천편 이상은 나오겠군.”

어쨌든 미로구간을 클리어했다.

일리나가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남아있는 기록이 없습니다. 사실 미로구간을 통과한 것도 우리가 처음일 겁니다.”

“맨땅에 헤딩해야 한다는 소린가.”

“그렇습니다.”

일단 눈앞에 보이는 건 절벽이었다. 아래에는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문제는 저 호수의 수심이 어느 정도인지 추측이 불가능하다는 점. 빛이 들지 않아 새카맣게만 보이는 호숫물이 불길하게 출렁였다.

-애송아, 물속에 뭔가 있다. 상당히 커다랗고 강한 놈이다.

마침 천마가 경고를 해줬다. 그의 기감은 나보다 정확하니 안쪽에 뭔가가 있긴 한 모양이었다.

“그동안 달리느라 피곤했는데 잠시 쉬고 가시죠.”

일행들이 쉬는 사이에 테이밍한 박쥐개구리 한 마리를 호숫물에 풀었다. 개구리의 몸체를 가진 녀석은 수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박쥐개구리가 가진 야광안을 통해 호수를 샅샅이 뒤졌다. 수면 속에서 내가 느낀 건 섬뜩한 침묵이었다.

‘호수가 이렇게 고요할 수가 있나?’

보통은 자그마한 물고기가 무리지어 돌아다니거나 못생긴 심해어 한 마리가 나타나거나 미역 줄기라도 허리를 흔들어야 하건만.

그저 물 뿐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깨끗한 물. 완전한 무(無)에서 오는 부자연스러움과 서늘한 감각.

‘조금 더 내려가보자.’

아래로 더욱 침전했다. 마치 심해를 탐사하는 잠수함이 된 기분. 그렇게 얼마를 내려갔을까. 바닥에 착지했다.

바닥 재질이 특이했다. 흙도 아니고 바위도 아니고 모래도 아니고. 마치 고무 타이어를 연속해서 깔아놓은 느낌.

파앗!!

갑자기 노란빛 두 개가 심연의 호수를 밝혔다. 보름달 두 개가 둥실 떠오른 모양새였다. 빛 때문에 주변이 확실히 보였다. 그리고는 깨달았다.

‘바닥이 아니었구나. 녀석의 몸체였어.’

게임 세상에 떨어지고 만났던 생물 중에 에인션트 드래곤 카일 다음으로 커다란 생물체였다.

파충류의 눈을 지닌 뱀 대가리가 박쥐개구리를 노려보았다. 그 아래로는 엄청난 두께와 길이를 가진 몸통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놈의 진짜 정체는 이무기였다.

‘아······’

박쥐개구리를 본 이무기가 입을 벌리지 않고 전언을 사용해서 말했다.

[킁킁, 위쪽에서 저주스러운 인어놈의 냄새가 나는구나.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아마 후손이겠지. 너희는 절대 이곳을 통과하지 못하리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입을 쫙 벌린 이무기가 박쥐개구리를 단숨에 삼켰다. 시야공유는 거기까지였다.

“으음···”

“도련님, 무슨 일 있습니까?”

침음을 흘리는 내게 시온이 물었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일행에게 공유했더니 다들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수천년 묵은 이무기라니, 사실상 날지 못하는 드래곤과 다를 바 없는 괴수로군.”

오르네오의 말에 옆에 가만히 있던 일리나가 나섰다.

“그 괴물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요.”

“정말인가?”

“네. 어인족이라면 누구나 아는 전설이죠. 옛날옛적에~ 바다하늘을 찢고~ 대홍수를 몰고 오려던~ 괴물을 봉인했다네~ 아아~ 위대하신 시조님~”

“왜 갑자기 노래를···”

“죄송합니다. 동요라서요. 어머님이 자기 전에 늘 불러주셨던 자장가였습니다.”

살짝 민망했는지 일리나가 얼굴을 붉혔다.

어쨌든 간에 호수 밑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았다. 인어왕과 철천지원수라니까 결국 저놈을 해치워야 보주를 얻을 수 있다.

“휴식을 더 취하고 기력이 회복되면 사냥합시다.”

내 말에 동료들도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놀란 건 오직 일리나 뿐이었다.

“정말로 괴물을 처치하겠다고요? 저 호수 밑에 있는 건 수천년도 넘게 산 전설의 존재예요. 어쩌면 크라켄보다 강할지 모른다고요.”

일리나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어렸을 적부터 공포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존재는 커서도 그 효력을 발휘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마냥 두려워해서는 절대 발전할 수 없다. 공포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진면목을 발견하고 실체를 확정해야만 비로소 한 단계 나아가는 것이다.

“일리나, 당신에게는 전설이나 두려움의 상징이겠지만, 저희에게는 그저 덩치 큰 뱀일 뿐입니다.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도전해야죠. 빈손으로 돌아가면 허무하지 않겠습니까?”

내 말을 들은 일리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칸님 말이 맞아요. 다 같이 전설을 사냥해봅시다.”

의기투합은 끝났고.

레이드만 시작하면 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무기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없는 게 아쉽다.

어떤 식으로 싸우는지, 주무기가 무엇인지, 약점은 없는지, 필살기가 있는지 정도는 알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이런 내 고민을 신께서 들어주신 걸까.

때마침 미로의 출구 부분에서 소란이 일며 피투성이 어인들이 우당탕 굴러 나왔다.

“다시는 이곳에 오나봐라!”

“거지 같은 유적! 앞으로 이쪽 방향으로는 오줌도 안 싼다.”

“보물 얻겠다고 이게 무슨 개고생이냐.”

모습을 드러낸 놈들은 우리의 뒤를 밟던 외뿔 도살자와 양아치 부하들이었다.

오늘따라 저 못생긴 얼굴들이 어찌나 반가운지.

“환영합니다. 형제님들. 어서오십시오.”

두 팔 벌려 열렬히 맞이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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