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159화 (159/200)

19장 유적 : 도핑한 망나니

‘한 번만 더 신중할걸.’

외뿔 도살자의 생각이었다.

유적지에 들어올 때만 하더라도 그는 여유로웠다.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어인족에서 힘깨나 쓰는 일백 명의 고수라면 해볼 만하다 여겼다.

그들은 일리나 총리와 인간족이 지나친 경로를 그대로 뒤따라서 보물을 발견한 후, 쓸모없어진 인간족을 죽이고 일리나를 사로잡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유적지는 그가 상상했던 그림과는 전혀 다른 아주 지독한 곳이었다.

미로 형태라서 앞선 사람이 어디로 갔는지 쉬이 짐작이 안 갔고, 심지어 각 스테이지마다 아주 엿 같은 함정과 몬스터가 즐비했다.

외뿔과 그의 부하들은 스테이지를 통과할 때마다 최소 두셋은 죽어야 했다.

“두목, 저기는 또 무슨 지옥일까?”

“네가 직접 확인해봐라.”

“뭐? 싫어.”

“싫으면 억지로라도 보내주지.”

“이 망할 놈아!!!”

그나마 이들이 통과할 수 있었던 이유는 외뿔이 부하를 여러 번 내던져서였고, 또 하나는 앞서 가던 인간족의 소리를 듣고 최대한 비슷한 경로를 택했기 때문이었다.

그와중에 잘못된 길에 빠져서 죽은 부하가 한둘이 아니다. 이쯤 되자 외뿔은 인간족과 일리나 총리가 이상할 지경이었다.

“어떻게 이런 곳을 거침없이 돌파하는 거지? 설계도라도 가지고 있나?”

차라리 설계도라면 다행이다. 만약 실력으로 돌파했다면 예상 이상의 초고수라는 의미인데...외뿔은 등골이 살짝 서늘했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 * *

“형제님들, 환영합니다.”

과한 환영인사를 했지만 돌아오는 응답은 없었다. 정확히는 받아줄 정신이 없었다. 저들은 창백한 낯빛으로 구역질하며 지옥에 살아 돌아온 것에 안도했다.

처음 시야공유로 봤을 때는 일백 명가량이었는데 지금은 언뜻 봐도 겨우 삼십 명이다. 무려 칠십이 죽은 것이다. 그것도 우리 소리를 듣고 쫓아오지 않았더라면 무조건 전멸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었다. 나오고 나서도 저들 사이에서 이상한 기류가 흘렀다. 특히나 다른 어인들이 외뿔을 보는 시선에는 불신과 의심이 가득했다.

“왜 그따위 눈길로 보는 것이냐? 눈깔을 확 뽑아주랴?”

“네가 무리하게 이곳에 오자고 해서 형제들이 많이 죽었다.”

“맞다. 너는 우리를 미끼처럼 내던져서 함정을 작동시켰지.”

“인제 와서 무슨 딴소리야! 너희도 암묵적으로 동의했잖아!”

“애초에 네가 우리를 모으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외뿔이가 화제를 돌려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서둘러 우리 쪽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저기 놈들이 있다! 나한테 화를 낼 게 아니라 저놈들을 처단해라! 갈기갈기 찢어서 속을 풀면 되지 않느냐?”

우리를 향해 적의 어린 시선이 무수히 쏟아졌다. 해치우는 건 어렵지 않으나, 지금은 더 좋은 방법이 있다. 어깨를 으쓱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공격하는 건 좋은데, 정말 괜찮겠어? 우리는 너희가 수십 명씩 죽은 함정을 단 한 명도 죽지 않고 돌파했다. 과연 운으로 돌파했을까?”

아무리 돌대가리라도 이 말을 이해 못 할 리가 없다. 숫자도 서른 명으로 줄어버린 어인족 건달들이 주춤댔다.

“멍청한 놈들아! 당장 죽이라고!”

“그럼 두목이 먼저 해보든가.”

“뭐?”

“미로에서 우리를 미끼로 던져댔잖아. 이번엔 두목이 먼저 확인해봐.”

“안 가면 죽여···”

한 명을 족쳐서 본보기를 보이려던 외뿔이 싸늘한 살기를 느끼고서는 멈칫했다. 그의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여기서 칼을 드는 순간 서른 명 전체가 자신을 난도질할 것이다.

그렇다고 혼자 덤비기도 곤란했다. 나는 무도대회에서 혹부리를 상대로 압도적인 무위를 증명했다. 저놈도 나와 일대일은 무리수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두목 뭐해? 움직여야지.”

“크윽!”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다. 여기서 모두가 흥미로워할 법한 소스를 투척해보자.

“너희에게 좋은 소식을 알려주마. 호수 아래에 보물이 가라앉아있다.”

사람이나 어인이나 욕심은 언제나 눈이 멀게 한다. 저 너머에 보물이 있다는 소리를 듣자 녀석들의 눈빛이 번쩍였다.

“뭐야? 그게 사실이냐?”

“그게 아니었으면 이 고생을 하면서까지 여기까지 왔을까. 진짜다.”

“정말이에요. 기록대로 이곳에는 보물이 있습니다.”

일리나까지 말해주자 어인들이 슬슬 믿기 시작한다.

“너희가 먼저 가서 보물을 확인해라. 어차피 양이 많아서 다 못 가져간다. 우리는 이미 챙길 만큼 챙겼어. 이러면 굳이 피를 안 봐도 되잖나?”

내 말을 믿지 못한 어인들이 가자미눈을 떴다.

“증명해라. 보물이 어딨지? 너희는 전부 빈손인데.”

아공간 호리병을 열었다. 안쪽에 있던 보물산 중에 아주 작은 한 덩이만 떼어서 땅바닥에 쏟았다. 그 정도만 해도 엄청난 양이라 순간 내 키를 넘을 정도의 보물이 쏟아졌다.

“뭐, 뭐야!”

“진짜 보물이잖아!”

“저 밑에 더 있다고?”

당연하게도 어인들은 눈이 뒤집혔다. 보여준 보물을 다시 아공간에 넣었다.

“보다시피 보물은 많다. 아래에 더 묻혀있어. 직접 들어가서 건져내라.”

“저 거짓말을 믿나! 차라리 저들을 공격해서 저 호리병을 뺏어라.”

“너희가 얌전히 보물만 가져가겠다면 가만히 있겠지만, 우리 것마저 탐하겠다면 전쟁이다. 선택은 너희의 몫이야.”

잠시 갈등하던 놈들이 결정을 내렸다.

“몇 명은 여기서 인간족을 지켜라. 내가 내려가서 보고 오마.”

“뭐? 싫어. 내가 내려갈게. 네가 지키고 있어.”

“무슨 소리야. 함정을 돌파하는데 내 공이 컸잖아. 그러니 보물 우선권도 나에게 있어야지.”

“똥 싸고 자빠졌네. 두목 옆에서 알랑방귀나 뀌던 놈이 뭘 했다고 나서?”

“뭐? 너 지금 말 다했어?”

티격태격 싸우기 시작하는 어인들.

모두 내가 예상했던 그림대로였다.

“저런 멍청한 놈들!!”

외뿔만이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환장의 똥꼬쇼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부하를 미끼로 쓸 때부터 통솔력을 상실했다.

“몰라! 난 먼저 갈래.”

“저 치사한 녀석!”

“같이 가!”

갑자기 어인 한 명이 돌발 행동을 보였다. 멋대로 호수에 뛰어든 것이다.

이 행동이 기폭제가 되었을까. 다른 녀석들도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서 너도나도 호수에 몸을 담갔다.

외뿔이를 제외하고 어인족 전원이 호수로 뛰어들었다. 나는 테이밍한 박쥐개구리를 풀어 안쪽에서 무슨 상황이 발생하는지 실시간으로 살폈다.

과연 호수의 불청객에게 전설의 괴수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수면 깊은 곳에서부터 파충류의 눈알 두 개가 떠올랐다.

“뭐야? 왜 보물이 없···으아아악!!!”

“끄억! 살려줘! 여기 뭐가 있다!!”

“도망쳐! 인간이 우리를 속였다.”

그들은 어인족답게 빠른 헤엄으로 수면 위로 올라가려 했으나 그래봐야 이무기 손바닥 안이었다.

커다란 입이 열댓 명을 단숨에 삼켰다. 날카로운 이빨에 그들의 근육질 몸이 허무하게 잘렸다.

저들의 비명이 절벽을 타고 메아리가 되어 울렸다. 반면에 나는 박쥐개구리에게서 얻은 정보로 빠르게 분석에 들어갔다.

‘물속에서도 상당히 빠른 속력. 비늘도 단단해 보인다. 한 번에 삼키는 저 스킬을 조심해야겠군.’

한바탕 피의 파티를 벌인 이무기가 중얼거렸다.

[제일 맛있어 보이는 놈들이 안 내려오는군. 어서와라. 기다리고 있겠다···]

이로써 우리를 따라온 어인족 건달들은 외뿔이를 제외하고 모조리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호수 바닥에 보물이 있다는 건 거짓말이었군. 간악한 놈.”

“당연히 거짓이지. 너도 눈치챘잖아?”

“설마 그 많은 보물을 항시 휴대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원래라면 살려줄 수도 있으나, 그러기에는 외뿔이 저지른 악행이 너무 많았다.

무의미한 발악을 하는 녀석을 제압한 후 밧줄로 묶어 호수로 던졌다. 밑에 있던 이무기가 이때다 싶어 냉큼 삼켰다.

[감질나게 하는군. 계속 거기에 있겠다면 내가 가겠다.]

촤아아아!!!

거대한 덩치의 이무기가 수면 위로 솟구치면서 어두컴컴한 동굴에 때아닌 소나기가 내렸다.

[여기 있었구나. 메인 디쉬.]

“뭐야? 물 바깥으로 나올 수 있는 거였어? 난 물뱀인 줄 알았는데.”

캠벨이 투덜대며 전위로 나섰다. 시온이 보호색을 사용해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오르네오가 후방에서 지팡이를 휘둘러 호숫물을 위로 끌어올렸다.

나는 가운데에서 드루이드 스킬을 쓸 준비를 했다. 일련의 모든 과정이 일사불란하고 매끄럽자 지켜보던 일리나가 감탄을 터트렸다.

“대단하시군요.”

“뭘 이 정도로 그러십니까? 일리나님도 자리를 잡으세요. 무기 특성상 후방에서 영감님을 지켜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예.”

진형을 갖춘 우리를 보는 이무기가 눈을 빛냈다.

[수천 년만의 작은 유희로구나. 최대한 버텨보거라. 그래야 재밌으니까.]

이무기의 꼬리가 우리를 향해 직선으로 쇄도했다. 오르네오 영감님이 지팡이를 크게 휘저었다.

“워터 실드!”

격렬하게 회전하는 물의 방패가 꼬리를 튕겨냈다. 이후로도 뱀의 꼬리는 오르네오 영감님에게 번번이 막혔다.

“영감님 나이스!”

캠벨이 바스타드 소드를 들고 정면으로 돌진했다.

“조심해라!”

아까 봤듯이 이무기의 한입 삼키기는 꽤 위협적이었다. 달려오는 캠벨을 보는 이무기의 노란 눈이 반달을 그렸다.

[일단 첫번째 놈부터 맛보겠다.]

덩치 큰 녀석이 입을 위아래로 찢어버리자 캠벨이 피할 공간이 사라졌다.

“어라?”

당황하는 캠벨. 하지만 괜찮다. 아직 내가 참전하지 않았으니.

[크리스탈 컨트롤]

[골렘 소환]

크리스탈 골렘을 연달아 다섯개를 꺼냈다. 인간 고수를 상대로는 효율이 떨어지지만 이런 몬스터 레이드에 골렘만큼 든든한 녀석이 없다.

골렘 소환 스킬의 숙련도가 올라가면서 자연스럽게 골렘의 크기도 커졌다. 다섯 개의 골렘이 이무기에게 붙으니 얼추 성인 남성 하나를 아이 다섯이 붙잡고 늘어진 모양새가 나왔다.

[읏! 기괴한 돌덩이로고!]

당황한 이무기가 몸부림치는 틈을 타 숨어있던 시온이 검을 들고 놈의 비늘 틈을 찔렀다.

[캬오오오!!]

비늘이 단단한 거지, 비늘 틈은 연약한 속살이었다. 심지어 수천 년이 지나 노화된 이무기는 비늘이 너덜너덜해져서 맨살이 훤히 드러난 곳도 있었다.

시온은 암살자답게 약점만 찔러서 이무기가 정신을 못 차리게 해줬다.

[감히! 감히!!]

이게 끝이 아니다. 일리나의 환이 날아다니며 이무기의 노란 눈을 집요하게 노렸다. 역시 싸울 줄 아는 여자였다.

[크리스탈 컨트롤]

[자이언트 크리스탈]

마지막은 내 차례. 번쩍 뛰어서 자이언트 스킬을 사용하자 오른손에 거대한 수정 주먹이 생겨났다.

“한 방 먹어라.”

퍼어어억!!!

[크아아악!!]

그냥 주먹도 아니고 마나가 실린 거대 수정주먹이다. 그대로 라이트 훅을 맞은 이무기의 전신이 휘청였다.

상황이 불리하다고 판단했을까. 결국 이무기가 호수 아래로 줄행랑쳤다.

놈은 확실히 물속에서 더 강한 위력을 보였다. 중량이 많이 나가는 크리스탈 골렘은 수중에서 몸이 둔해졌고 이무기에게 모조리 파괴되었다.

[하나 같이 거슬리는구나. 그래도 이곳은 통과하지 못한다. 물속에서는 내가 최강자다!]

궁지에 몰려서 짖어대는 이무기를 보았다. 확실히 물속에서는 처치하기 힘들긴 한다.

이럴 땐 확실한 한 방이 필요한 법.

도핑을 하기로 결심했다.

[도토리를 섭취하셨습니다]

[패시브 스킬이 강화됩니다]

[스태미나가 대폭 상승합니다]

[마나 재생량이 큰 폭으로 증가합니다]

[드루이드에게만 적용되는 효과입니다]

[제한시간 10시간]

[어인화 단약을 섭취하셨습니다]

[스테미나가 소폭 상승합니다]

[수중에서 자유로운 활동이 가능합니다]

[제한시간 1시간]

마지막으로 아공간에서 코코까지 꺼냈다. 일리나가 웬 헤츨링이 옆에서 나타나자 입을 떡 벌렸다.

“세상에, 저 귀여운 생물체는 뭔가요?”

“지금은 급하니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눈치 빠른 코코는 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뀨!! 뀨뀨!”

“네 능력을 이용하자고? 나도 너와 같은 생각이다.”

손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내가 드루이드가 되고 나서 맨 처음 얻은 스킬, 바인드를 사용했다.

[우드 컨트롤]

[강화된 바인드]

상급 드루이드가 되고 도토리까지 먹을 상태에서의 바인드. 효과는 정말이지 엄청났다.

쿠콰콰콰콰!!!

땅이 갈라지며 수없이 많은 나무뿌리가 치솟았다. 나무뿌리끼리 몸을 꼬아 더 강한 결속력을 다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굵은 뿌리가 이무기의 전신을 뒤덮었다. 마치 개미떼처럼 꿈틀대며 옥죄었다. 그 모습이 마치 하나의 군단 같았다.

“!!!”

일리나를 포함한 동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간 내 스킬을 봐온 시온과 캠벨도 마찬가지였다. 그 정도로 바인드 스킬의 규모는 거대했고, 또한 강력했다.

[크아아아!! 놔라! 놓으란 말이다!!]

이무기가 몸부림칠수록 나무뿌리가 놈을 더 속박했다. 점점 움직임이 둔해지는 녀석에게 코코가 자신의 뿔을 들이받았다.

콰직!

살을 파고드는 헤츨링의 뿔. 그 끄트머리에서 푸른 전류가 타닥거린다.

“가랏! 코코!”

“피카···뀨우우우!!”

파지지지직!!!!!

참고로 이곳은 호수.

사방이 물이다.

성룡을 코앞에 둔 코코의 치명적인 전류가 어두웠던 호수를 눈부시게 밝혔다.

[키에에에에엑!!!]

완전 속박된 상태에서 온몸에 흐르는 전류. 고통은 물론이거니와 옴짝달싹 못할 정도의 경직이 온다.

“끝이다.”

천마검을 높게 쳐들었다.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린 이원마나가 검신을 감쌌다.

푸른빛이 가득한 호수에 유일한 에메랄드 빛. 마침내 마나소드가 수직으로 번쩍였다.

뎅—겅!!!

이무기의 목에 혈선이 그려졌다. 처음에는 실금과 같던 균열이 점점 커지더니 이내 몸과 목이 분리되었다.

[인간···강하구나···]

유언을 마지막으로 이무기가 침묵했다.

전설 속 존재의 최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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