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161화 (161/200)

19장 유적 : 트름한 망나니

푸른마나, 초록마나, 그리고 용혈.

세 개의 기운이 하나가 되어 격하게 몸을 회전했다. 이미 단전의 구분은 필요 없었다. 몸 전체가 하나의 동력원이 되어 날뛰고 있으니.

일련의 모든 과정은 화산 폭발과 흡사했다. 터지기 직전에 기를 모으는 듯하다. 배출구는 바로 백회혈, 즉 정수리다.

쿠콰콰콰콰콰!!!

아까와는 다르다. 견고한 세 개의 지지대가 절묘한 균형을 잡아주었고, 무게중심을 잡아주는 정확한 지점을 향해 한줄기 에메랄드 빛이 돌파한다.

마지막으로 살짝 저항이 있긴 했으나 이 순간만을 고대한 나는 끝까지 밀어올렸다. 결국 정수리의 천공이 뚫리는 듯한 느낌과 함께 신세계가 펼쳐졌다.

“아아···!!!”

광활한 우주였다.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은하수가 나를 반겼다. 쏜살같이 옆을 지나치는 유성우. 고고하게 각자의 자리에서 빛을 내뿜는 별.

로이드 후작이 전해줬던 책에 고독한 모험가란 표현이 있었다. 다시 한 번 절절히 느꼈다. 자연을 넘은 드넓은 우주에서 그저 겸손한 순례자가 되어야만 했다.

‘이대로 우주와 하나가 되고 싶다.’

두근 두근

우주의 태동이 느껴졌다. 세상에서 제일 큰 심장이었다. 이를 구성하는 인과율의 사슬이 나이테가 되어 손에 잡힐 듯 아슬한 거리에서 흔들렸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조금 부족했다. 새로운 세상을 견식했건만. 절반 정도 각성한 삼원마나로는 힘이 부족했다. 점점 아래로 침전하고 가라앉는다.

‘다음에야말로 기필코···!’

이제 겨우 새로운 모험에 발을 들였을 뿐. 다시 시작하고 경험을 쌓는다. 그 과정까지 거친 실력자가 되어야 우리는 신화, 즉 그랜드 마스터라 부른다.

오늘은 세상의 이면과 본질을 본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하늘로 뻗어나가던 기운이 다시 단전으로 들어왔다. 호수 전체를 넘어 유적지 전체를 물들였던 에메랄드 빛 또한 갈무리되었다.

번쩍!

살며시 눈을 떴다. 세상이 달리 보였다. 거리 감각이 애매모호해졌다. 일전에 색욕과의 전투에서 느꼈던 시공간의 오류.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칼을 뻗으면 한참 멀리 있는 곳이 닿을 듯했다. 내가 숨 쉬는 이곳이 전부 나의 피부와 맞닿아있고, 어쩌면 신체 일부로 착각할 정도로 동질감이 들었다.

이것이 마스터의 느낌인가. 주먹을 오므렸다 펴기를 반복할 때, 의식 속에서 천마가 말을 걸어왔다.

-애송아, 드디어 진정한 검의 길을 걷게 되었구나.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천마님.”

-건방 떨지 마라. 너도 잘 알겠지만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물론입니다.”

-아직 나를 따라잡기는 멀었다. 애송이. 음하하하하하!!!!

새삼스레 색마 영감님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푼수 같긴 해도 저 넓은 광야를 나보다 훨씬 앞서 걷고 있는 사람이 있단 이야기니까. 적어도 외롭고 고독한 항해는 아니었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동료들이 우르르 동굴로 들어왔다. 다급하게 묻는 시온에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다들 믿지 못하면서도 내 일처럼 기뻐해준다.

“부단장이 해낼 줄 알았어. 서른도 안 되어서 소드마스터라니.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안 그래도 강했던 칸님이 한 단계 더 올라섰군요.”

“제 진짜 이름은 헤논 로이드입니다. 헤논으로 불러주십시오.”

일리나에게 진짜 이름을 알려주고 나서 오르네오 영감님과 대면했다.

사실 인어왕의 보주는 현자님이 평생을 찾아다녔던 보물인데 예기치 않게 내가 꿀꺽해버렸다.

미안한 마음에 사과하려고 했으나 현자님이 먼저 선수를 쳤다.

“아무 말도 하지 말게.”

“예?”

“어차피 자네 아니었으면 손가락만 빨다 포기했을 보물이네. 나도 눈이 있으니 봤어. 자네가 보주를 먹은 게 아니라 보주가 자네를 선택한 모습을. 스스로 제 주인을 찾아간 게야.”

오르네오 현자님이 내 어깨를 두드려줬다.

“나는 개인의 지식욕으로 인어왕의 보주를 탐했지만, 자네에게는 더 큰 사명이 있잖는가. 어찌보면 더 잘된 일일세. 새로운 세대에게 희망을 맡긴 셈이야.”

과연 현자님인가. 외뿔 도살자 같은 양아치였으면 내 보물 뺏었다고 거품 물면서 칼질했을 게 눈에 선한데 역시 다르시다.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던 일리나가 오르네오를 격려하며 말했다.

“너무 실망하지 마시지요. 만약 이번 일이 잘 풀리면 현자님에게도 감사의 의미로 왕가의 보물을 하나 전해드리겠습니다.”

“정말인가?”

“예, 유적지에서 같이 고생해보니 알겠습니다. 아무리 크라켄이 강하다 해도 여러분이 이길 것 같습니다. 특히나 헤논님이 계시다면요.”

‘드디어 오랜 숙원이 풀리는군요.’ ― 울먹이는 일리나를 위로해줬다.

보주도 얻었고 전설의 괴수였던 이무기의 사체도 얻었다. 내내 우리를 따라다녔던 어인족 깡패까지 해결했으니 볼 일은 얼추 끝난 셈이다.

“돌아가죠. 포세이돈 시티로.”

마지막은 왕궁에서 버티고 있는 먹보 문어대가리를 타코야끼로 만들어버릴 차례. 투지를 불태우는 내게서 마스터 특유의 오러가 일렁거렸다.

* * *

크라켄은 항상 배가 고팠다. 질리도록 어인족을 먹었으나 허기는 여전했다. 유일하게 포만감을 느낄 때는 농축된 에너지를 섭취할 때였다.

농축된 에너지는 구하기 어려웠다. 일정 레벨 이상의 고수나 깊은 곳에 묻힌 영초나 영약에게서만 보였다.

그런 그에게 인어왕의 보주에 대한 소문이 들렸다. 해저도시 최고의 보물이며, 강력한 주술사였던 인어의 시조가 남긴 에너지라고.

최고의 별미를 발견했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법. 직접 몸을 움직였지만 마기를 차단하는 강력한 보호막에 막혀 들어가지 못했다.

그래서였을까.

인어왕의 보주에 대한 크라켄의 환상과 집착은 더욱 심해졌다. 각지에서 무도대회를 개최해서 고수를 모았고, 인어왕의 후손도 일부러 살려두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실망은 더해졌다. 애써 꾸린 공략대는 번번히 실패했다. 인내심은 이미 한계치에 다다른 상황이었다.

“일리나까지가 끝이다. 그 여자까지 실패한다면, 해저도시의 모든 어인을 잡아먹고 지상으로 진출한다.”

크라켄은 바다 위에 훨씬 맛좋은 인간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해저도시에 머무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괴물이 득시글하지.’

사원에서 자신을 깨웠던 드루이드부터 시작해서 별의별 고수가 다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무서운 자는 검사 노인네.

일천년 전 만났던 그 노인만 생각하면 아직도 오금이 저렸다. 검을 한 번 휘둘렀을 뿐인데 하늘이 갈라지고 땅이 치솟았다.

노인네는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의 탈을 쓴 다른 무언가였다. 그 이후로 크라켄은 해저도시에 꼭꼭 숨었고, 필요할 때만 지상에 방문했다.

그러나 천년을 참았으면 많이 참았다. 지금까지 인간 노인네가 살아있을 리가 없다. 무엇보다 비린내 나는 어인 대신 쫀득하고 신선한 인간을 맘껏 포식하고 싶었다.

보나마나 일리나는 임무에 실패할 것이다. 유적지에서 생을 마감하겠지. 슬슬 움직일 때가 되었다. 우선 왕궁에 있는 어인부터 잡아먹자.

본색을 보이며 피의 축제를 벌이려 할 때,

“전하!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총리님께서 보주를 가지고 돌아오신답니다.”

놀라운 일이었다. 기대도 하지 않았건만 일리나가 정말로 성공하다니.

‘지상에 올라가기 전에 보주를 먹고 쓸모 없어진 일리나까지 먹으면 깔끔하겠어.’

인어왕의 보주 때문에 살려뒀지, 그게 아니었다면 진작 먹어치웠을 여자였다. 곧 다가올 산해진미에 크라켄이 입에서 군침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 * *

포세이돈 시티에 들어오자마자 왕궁에서 해마차를 보내주었다.

궁의 정문에는 좌우로 도열한 인어왕의 직할 무사들이 질서정렬하게 창을 세워 우리를 환영했다.

“개선장군이 된 기분인걸?”

들뜬 캠벨에게 일리나가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죽기 전에 기분 좋으라고 해주는 행동입니다. 제가 아는 크라켄이라면 보주를 냉큼 삼키고 더는 이용가치가 없는 저 또한 음식으로 만들어버릴 겁니다.”

어느새 알현실에 도착했다.

매번 상다리가 휘어지게 음식상을 펴놓고 처먹기만 하던 크라켄이 평소와 달리 얌전하게 우리를 맞이했다. 마치 뷔페에 가기 전 밥을 굶는 모양새였다.

“전하를 뵙습니다.”

“오오! 잘했다! 보주는 어디에 있나?”

“그 전에 전하께 소개해줄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 있는 인간은 저희를 도와 유적지를 돌파한···”

“아, 됐고. 그래서 보주는 어디에 있느냐니까?”

크라켄은 눈이 벌게져서 일리나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한다.

이제 내가 나설 때가 왔다.

“전하, 절 기억하십니까?”

“기억 안 나. 참을성이 점점 없어지고 있으니 당장 보주를 눈앞에 대령해.”

“지금 전하의 눈에 떡하니 있습니다만. 보주가 보이지 않으십니까?”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눈을 가늘게 뜬 크라켄이 우리를 샅샅이 훑었다. 하지만 보주가 있을 리 없다. 내가 꿀꺽했으니까.

“보주 여기 있지 않습니까?”

“투명색 아이템인가?”

“아뇨.”

배를 한껏 내밀고 손으로 통통 두드려준다. 트름도 한 번 해주자.

“꺼어억~잘 먹었습니다.~”

“···뭔 짓거리냐?”

“잘 먹었다고요. 인어왕의 보주. 맛있던데요?”

크라켄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천년 동안 공포의 상징으로 군림하던 그였다. 여태껏 이런 식으로 건방지게 군 미친놈은 단연코 없었다.

손등으로 눈알을 비비며 현실을 부정했다.

“일리나, 설명해라. 이해가 안 간다. 내가 가져오라고 한 보물을 저 인간이 먹었다는 소리가 설마 진짜냐?”

“사실입니다.”

“···정말로?”

“예.”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길래 일부러 트림을 한 번 더해줬다.

“꺼억~앙 맛있당.”

“그만하게. 나한테도 데미지가 오니까.”

“죄송합니다. 현자님.”

본의 아니게 광역도발을 걸어버렸다. 아무튼 충분히 속을 긁었고, 결국 놈에게서 반응이 왔다.

“큭! 크하하하하! 크하하하!!”

배를 잡고 폭소를 터트리는 크라켄. 왕좌에서 내려와 떼굴떼굴 구르더니 이내 벌떡 일어났다. 다시 일어선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천년 만에 제법 재밌는 장난이었다. 오히려 잘 되었다. 너희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어차피 삼켜버리려 했으니. 보주를 먹은 너를 먹으면 결국 보주를 먹는 셈이겠지.”

쿠구구구구!!!

왕궁 전체가 떨렸다. 벽이 갈라지고 천장에서 부스러기가 비처럼 쏟아졌다. 드디어 크라켄이 본체를 드러낸 것이다.

쿠워어어어!!

결국 크라켄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 문어의 두툼한 여덟 개 다리가 건물 기둥을 수수깡처럼 부러트렸다. 인어 도시의 가장 크고 아름다운 건축물이 폭삭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꺄아아악!!”

“도망쳐!”

“살려줘! 대체 무슨 일이야?”

왕궁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우왕좌왕 도망치는데 큰 인명피해가 날 것 같았다.

“시온, 캠벨, 현자님과 일리나님까지, 지금 당장 사람들을 왕궁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트려 주세요.”

내 말을 들은 일리나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뭐라고요? 당신 설마 혼자 싸우겠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뭐라 더 말하려는 일리나의 어깨에 주름진 손이 올라왔다. 뒤를 돌아본 그녀에게 오르네오가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괜한 걱정 말고 저 사내를 믿게나. 그는 이미 지상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초고수라네.”

시온과 캠벨은 이미 내 명령을 따라 어인들을 대피시키러 떠났다. 나에 대한 신뢰도가 돋보이는 행동이었다.

“그럼···부탁할게요.”

일리나와 오르네오까지 사라지자 천장이 무너진 알현실에 남은 건 나와 크라켄 뿐이었다.

“크크크크, 오늘 놀랄 일이 여러 번 일어나는구나. 다같이 합심해서 공격해도 모자랄 판에 혼자서 객기를 부려?”

마음껏 떠들도록 내버려두자.

이미 견적은 나왔으니.

일천년 전 멀린의 기억 속에서 크라켄과 싸워봤다. 그때의 멀린보다 드루이드로서는 다소 부족할지 몰라도 신체능력만큼은 압도적이다.

결국 저 문어가 천년 동안 아무리 강해져 봐야 소용없었다. 맨날 처먹기만 해서 강해지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죽어라!”

머리 위로 음영이 드리웠다.

통째로 뭉개려는 의도다.

콰콰콰콱!!

왕궁 한쪽 면이 우르르 무너졌다.

그만큼 크라켄의 덩치는 엄청났고 움직임 하나하나의 파괴력도 컸다.

“끝났군. 싱거워.”

크라켄은 순간 후회했다. 오랜만이라 힘 조절을 못했다. 만약 시체조차 못 찾을 정도로 눌려버렸으면 인어왕의 보주도 함께 날아가는 셈이다.

“조금 살살할 걸 그랬나?”

투덜거리던 크라켄이 황급히 다리를 걷어내려고 했다.

결과적으로 그럴 필요는 없었다. 에메랄드 섬광이 번쩍이며 놈의 다리가 통째로 잘려버렸으니.

서걱!!

“크아아아!!!”

보는 사람이 장탄성을 터트릴 정도로 깔끔하게 단절된 문어다리. 그 가운데에는 인간 하나가 홀로 고고히 오러소드를 들고 서 있었다.

삼원마나가 온몸을 휘돌며 펄펄 끓어올랐다. 자신감은 이미 최대치. 놈은 내 상대가 아니었다.

“타꼬야끼, 요리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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