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장 유적 : 유능한 망나니
크라켄이 본체를 드러냈다.
건물이 두부처럼 으깨졌고, 기겁한 어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친다. 바퀴벌레나 다름없는 모습.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전능감이 치솟았다.
“경배하라. 그리고 두려워하라. 너희의 운명은 정해져 있을지니.”
해저도시가 바다에 막힌 답답한 공간이라는 사실에 처음으로 만족감을 느꼈다. 아무리 도망쳐도 결국 지상으로는 못 가니까. 결국 저들은 자신의 위장에서 소화될 영양분이었다.
“아 참, 네가 있었지.”
그런 자신에게 유일하게 대드는 자는 나약한 인간 놈 하나였다. 그토록 바라던 인어왕의 보주를 꿀꺽했다고 당당하게 고백한 나사 빠진 놈.
심지어 다른 인간과 일리나 총리는 그를 남겨두고 어인들을 대피시키러 떠났다. 도와줘도 모자랄 판에 말이다.
“매우 불쾌해.”
마치 자신과 일대일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저 자신감이 너무나 괘씸했다. 단숨에 뭉개버릴 생각에 다리를 내리친 찰나,
서걱!!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어떤 병장기로도 막지 못하던 자신의 다리가 너무나도 쉽게 분해되었다.
뒤이어 몰려오는 극렬한 고통.
“크아아아아!!!”
꿈틀대며 잘린 부위를 수복했다.
그는 먹은 만큼 체내에 에너지를 축적하는데, 폭발적으로 힘을 낼 때나 절단된 부위를 회복할 때 이 에너지가 사용되었다.
크라켄은 무려 일천년 동안이나 어인과 음식을 섭취하며 에너지를 모았다.
한마디로 저 무례한 인간 놈이 천년치 에너지를 전부 소진시키지 않는 이상, 자신을 이기기는 불가능하단 의미였다.
그 사이에 저놈이 먼저 지쳐나가 떨어지든, 약점이 발견되든,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유리한 상황이 펼쳐질 것이다.
“가소롭구나. 어디 마음껏 발악해 보아라.”
더는 참을 것도 없다. 크라켄은 다리를 풍차처럼 휘둘러서 거침없이 공세를 퍼부었다.
콰콰콰쾅!
그의 다리가 휩쓰는 곳마다 모든 곳이 초토화되었다.
파괴력은 물론이거니와 자유자재로 길이를 조종하는 유연함, 여기에 더해 재빠른 움직임은 일천 년이 지나도 자신이 녹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인간 놈은 미꾸라지처럼 잘만 도망갔다. 소리는 요란한데 유효타는 하나도 없었다. 마치 자신의 공격을 미리 읽고 움직이는 듯한 모양새였다.
“네놈···대체 뭐냐?”
모든 수를 읽히고 싸우는 듯한 느낌에 크라켄이 더욱 격정적으로 몰아붙였다. 그러나 인간 놈의 회피율 100% 기록은 깨지지 않았다.
그래도 인간이라면 언젠간 체력이 다하는 법. 그 기회를 노리며 꾸준하게 물량공세를 벌였으나 이게 웬걸. 인간 놈은 처음과 끝까지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몸이 풀렸는지 더 방방 날아다녔다.
벌써 일천 년 중에 오백 년 치의 에너지를 써버렸다. 절반 이상이 날아간 셈이다. 초조한 마음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비장의 수까지는 안 쓰려 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크라켄에게는 숨겨둔 필살기가 있었다. 바로 먹물포. 콧속 비강에 저장된 끈적한 점액질을 물대포처럼 쏟아낼 수 있다.
여태까지 본인보다 대등하거나 손위의 상대로는 어김없이 이 먹물을 쏘아서 생존 혹은 승리를 거머쥐었다.
겨우 벌레 하나에게 보여주기엔 과분한 스킬이고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나 이대로 더 상황이 흘러가면 자존심이 아니라 목숨이 왔다갔다할 수 있다. 결국 그는 결단을 내렸다.
“건방진 놈! 도망치지 말고 가까이 오란 말이다!”
일부러 흥분한 척하면서 인간 놈의 방심을 유도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조준점을 쟀다. 먹물포를 이전에 경험했으면 모를까. 자신과 처음 싸우는 상대는 꼼짝 없이 당해야 하는 스킬이다.
“요놈! 걸렸구나!!”
느낌이 오자마자 전력을 다해 먹물포를 발사했다. 시커먼 구름이 그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퍼져 나갔다.
‘됐다!’
크라켄이 쾌재를 불렀다. 그간 직선적이고 단순한 다리 공격과 달리 이건 전방위 공격이었다. 팔다리 어디든 끄트머리에 조금이라도 맞으면 끝이었다. 아까처럼 날랜 움직임은 못 보일 테니.
자욱했던 안개가 서서히 걷혔다. 이제 곧 먹물에 침식된 인간이 당황한 표정으로 허우적댈 터. 그 표정을 보고 싶어 눈알에 힘을 가득 줬다.
먹물이 완전히 걷히고 시야가 들어왔다. 인간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몇 번이나 눈을 씻고 봐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찾나.”
서늘한 목소리가 정수리부터 등골을 타고 내려왔다. 연체동물임에도 불구하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인간 녀석은···그의 머리 위에 있었다.
* * *
-애송아, 왼쪽이다.
-오른···이제 말 안 해줘도 잘 피하는구나.
마스터에 오르면서 기감을 느끼는 정도가 차원이 다르게 발전했다. 주변 공간이 나와 호흡하는 느낌이 들었다.
공격이 다가오기 전에 몸이 먼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게다가 멀린의 기억에서 본 움직임 그대로 공격을 하는데 못 피할 수가 없었다.
크라켄은 황금가지 시험에서 봤을 때와 똑같았다. 천년이나 지났는데 그대로라니, 어떤 의미로는 대단했다.
어쨌든 상대하기 수월했다. 문어 놈은 계속 고개를 갸웃했다. 공격이 모조리 빗나가는 데다가 자그마한 습관까지 캐치해서 카운터를 먹여버리니 대처방법이 전무해진 것이다.
무엇보다 기존의 마나소드와 오러소드는 절삭력의 수준이 달랐다. 원래라면 몇번이나 휘둘러야 잘렸던 크라켄의 다리가 스치면 사라졌다.
[끈질긴 생명력 발동]
[체력 재생량 증가]
화룡점정으로 패시브 스킬까지 작동하자 오러블레이드를 휘두르는 체력무한 사기캐가 되었다.
‘내가 봐도 너무 심한걸.’
내 유지력이 천장을 뚫었는데 크라켄은 서서히 지쳐가고 있다. 이대로라면 무난한 낙승이었다.
하지만 크라켄이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다. 갑자기 흥분한 척을 하며 빈틈을 내보였다. 어설펐지만 캠벨이라면 속아 넘어갔을지도 모를 연기력.
‘먹물을 쏘려는구나!’
저 문어에게서 유일하게 조심해야 할 스킬이다. 기억에 따르면 크라켄을 토벌하려던 어인족 전사 다수가 먹물을 먹고 단번에 황천길을 건넜다.
모르면 모를까. 아는데 당해줄 리가 없다. 녀석이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자 공기를 박차고 하늘로 쏘아졌다.
[윈드컨트롤]
[헤이스트]
[순보]
소드마스터가 되어서 그런가. 바람 스킬의 숙련도가 올라간 것 같다. 잔상도 안 남을 정도로 빠르게 위로 솟구쳤다. 크라켄은 내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감지하지 못했다.
문어의 매끈한 대머리 위로 올라가니 제법 경치가 좋다. 포세이돈 시티의 전역이 훤히 보였다.
저 멀리 아직도 울부짖으며 도망치는 어인들이 있다. 저들을 위해서라도 이제 끝낼 타이밍이었다.
“업보의 대가를 달게 받거라.”
번쩍!!
일도양단(一刀兩斷)
에메랄드 빛이 수직으로 그어졌다.
아무리 회복력이 좋은 크라켄이라도 머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절반으로 갈렸는데 회복할 수는 없다.
다만 아직까지 기능하는 반쪽짜리 뇌는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크라켄은 경악에 휩싸인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떻게···내 공격을 알았지? 나와 전에 싸워본 적이 있나?”
“운이 좋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네 정체는 대체 뭐냐?”
흠, 죽기 전이니까 알려줄까.
“내 진짜 정체는 바로···”
말꼬리를 흐리자 녀석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는 게 느껴진다.
“···안알랴줌.”
“?”
“안 알려준다고.”
“미친 돌아이 놈을 보았나!!”
화를 내는 문어가 다리에 힘이 떨어졌는지 철퍼덕거린다. 이제 그는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먹을 것을 줘. 그러면 살 수 있다.”
“내가 왜? 일천 년간 어인과 인간을 그렇게 처먹고도 모자라?”
“무엇을 원하나? 나는 해저도시의 왕이다. 네가 원하는 바라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줄 수 있다.”
“글쎄, 나는 지상인이라 해저도시에 미련이 없는걸?”
검을 들고 마무리하려 했더니 크라켄이 다급하게 말한다.
“지상도 괜찮다. 그곳에도 연줄이 있으니. 나를 지상에 데리고 간다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단체의 간부로 삼아주겠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단체라니. 제국의 황제라도 알고 있는 걸까. 아무리 봐도 문어대가리와 황제는 안 어울리는데.
허풍을 치는 것 같아 검에 오러를 불어넣었다. 다급해진 크라켄이 횡설수설했다.
“황혼! 너는 황혼이란 단체를 아는가? 나는 그곳에서 식탐이라 불린다. 너라면 충분히 그곳에 간부가 될만하다. 질투나 색욕의 자리에 너를 추천하겠다.”
크라켄이 칠대사도 식탐이라···이놈의 단체는 왜 심심할 만하면 여지없이 등장하는지.
이로써 문어 대가리를 살려줘야 할 마지막 이유까지 없어졌다. 어차피 살려줄 생각도 없었지만. 그래도 죽이기 전에 황혼교주의 정체나 알아내 보자.
“황혼교주가 누군지 아는가? 알려주면 살려주겠다.”
“교주는···”
뭔가 말하려던 크라켄은 입이 턱 막힌 채 한참을 우물댄다.
“다른 걸 물어봐라.”
“대충 알긴 아나보네?”
“알려줄 수 없다.”
“난 그것만 관심 있어. 황혼교주의 정체를 공개하면 주변에 어인이라도 잡아서 주둥이에 처넣어주마.”
당연히 거짓말이다.
알짜정보만 쏙 빼먹을 생각이다.
크라켄은 끝까지 비밀을 지켰다. 내 속셈을 눈치채서라기보다는, 교주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감이 있는 모양이었다.
“교주는 무서운 사람이다···그에게 잘못 걸리면 죽음조차 자유가 되지 못한다. 차라리 죽여라.”
서—걱!
희망대로 해주었다. 겨우 목숨을 연명하던 크라켄이 죽음을 맞이했다. 황혼의 칠대사도치고는 비참한 최후였다.
“뀨우!!”
달콤한 냄새를 맡은 코코가 아공간에서 뛰쳐나왔다. 그러고 보니 크라켄은 마물 중의 마물. 코코에게는 더없는 진수성찬이다.
“뀨뀨?”
“먹어도 되냐고? 마음대로 하렴.”
“뀨우우우!!!”
고맙다고 인사한 코코가 머리를 박고 문어를 먹어치웠다. 어찌나 식성이 좋은지 그 커다랗던 크라켄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문어숙회 먹는 기분이려나.’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크라켄 먹방을 끝낸 코코에게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설마?”
“뀨우!”
파지직!!
환한 청색 빛이 왕궁을 뒤덮었다. 미약한 전류가 빛 속에 섞여 있었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지금 코코는 성룡으로 진화 중이었다.
스팟!
빛이 가시고 나자 완벽한 자태의 성룡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내린 듯한 실버드래곤. 코코가 살짝씩 몸을 움직일 때마다 비늘에 반사된 빛이 반짝였다.
[코코 — 헤츨링 Ⅲ -> 성룡]
[진화율 — 0%]
[진화율이 100%가 되면 에인션트 드래곤으로 진화합니다.]
온기 어린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코코가 울부짖었다. 성룡이 되었으니 이제 크와앙 같은 맹수의 포효소리가···
“뀨우우우!!!”
“엥?”
“뀨우우!!!”
뭔가 이상한데? 성룡으로의 진화한 게 아니라 다시 헤츨링으로 퇴보했나? 그렇다기엔 시스템창에서는 성룡으로 되었다고 했는데?
당황한 나에게 코코가 싱긋 웃어 보였다.
“뭘 그런 눈으로 쳐다보냐뀨!”
“이제 말할 수 있어?”
“그렇다뀨!”
“말투가 아직 아이 같은데···”
“악마 많이 먹어서 급성장했다뀨! 그래도 아직 어린애다뀨!”
하긴 코코는 태어난 지 몇 년 되지도 않았으니까.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이제 아빠랑 말할 수 있어서 좋다뀨.”
“아···빠?”
“아빠 아니냐뀨? 나 키워줬다뀨!”
키워주긴 했다. 에그 속에 있을 때는 드래곤 하트랑 같이 아공간에 넣어주고. 끼니될 때마다 악마 꼬박꼬박 사냥해서 먹이로 주고.
곰곰히 따져보니 코코는 고급 입맛이었다. 고블린이나 오크 이런 건 북부에 있을 때 제외하고는 거의 입에도 안 댔다.
지금까지 먹은 메뉴를 보면 중급악마에, 저주의 마물에, 타락한 발키리에, 천년 묵은 크라켄에, 급성장할만한 이유가 있었다.
‘나, 의외로 능력 있는 아빠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