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장 혈통 : 끼어든 망나니
“현자님께서 조금만 도와주신다면 진실을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영감님은 나와 함께 해저도시를 탐험한 사이다. 내가 얼마나 괴이한 능력을 가졌는지 잘 알고 있다.
“솔직하게 말해서 두 가지 마음이 상충하고 있네.”
“어떤 마음입니까?”
“진실을 확인하고 싶은 호기심과 괜히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 이 두 가지일세.”
“그럴 때는 현자님 본연의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시죠. 당신께서 무엇을 더 진정으로 원하는지요.”
오르네오는 현자. 지식을 쌓아가고 이를 숙성시켜 지혜로 녹여내는 존재다. 결국 그는 진실을 추구하리라 짐작했고, 그가 내린 결정은 예상대로였다.
“아무래도 사건을 확인해야겠어.”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때였다.
바깥의 문이 벌컥 열렸다.
“현자님! 현자님!”
“중요한 만남 중이다. 노크 예절은 어디에 빼놓고 왔느냐?”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장난이 과하군.”
“사막왕 가젤이 십만 대군을 이끌고 국경을 넘어 북상 중입니다! 실제 상황입니다!”
농담이라기엔 표정이 너무 진지하다.
정말로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어째서 이런 무모한 짓을···이유는 뭐라던가?”
“선전포고문을 읽어보십시오. 저쪽에서 직접 작성한 문서입니다.”
선전포고문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나 사막왕 가젤은 최근에서야 진실에 눈을 떴다. 그동안 나는 장님이었다. 가족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한 바보 천치였다.
그러나 운이 좋아 눈을 떴고 추악한 진실을 목도했으니, 어둠 속에 숨었던 모략가는 사막의 분노를 마주할 시간이라.
이 자리에서 당당히 선언하건데, 내 사랑스러운 동생이자 칼론 제국의 황비였던 샌디 칼론을 시해한 자에게는 억겁의 고통과 처절한 복수가 뒤따를 것이다.
달아날 테면 달아나고 맞설 테면 맞서라.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막는 자는 부숴버리고 도망가는 자는 대륙 끝까지 쫓으리라.
두려움에 떨어라. 모래를 거두는 태양과 그림자를 먹는 달도 너를 보호해줄 수 없을 테니.
우리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네가 후회를 곱씹으며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포고문 전제에 사막왕의 분노가 절절히 녹아있다. 오르네오에게 듣기로는 사막왕은 세븐 스타의 초고수. 그런 자가 무슨 바람이 들었길래 세계 최강국을 상대로 칼을 들었을까.
시기도 참 공교롭다. 방금까지 현자님과 샌디 황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마침 황후의 친오라버니인 가젤이 전쟁을 일으켰단다.
이렇게 되면 십수년 전 샌디 황후 사건의 전말을 확인하는 일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어버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를 알아야 확실히 행동할 수 있을 테니.
“현자님, 샌디 황후의 거처를 안내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남의 나라 전쟁이라 여기면 안 된다. 제국이 무너지면 어떤 식으로든 엘든 왕국도 흔들린다.
스노우볼은 구르고 굴러 로이드 영지까지 당도한다. 자연스럽게 내 훈련과 황금가지 수색 계획도 영향을 받을 터. 하루라도 빨리 이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이유다.
또한 황금가지 시험에서 멀린이 방문했던 마지막 장소가 사막이었다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안 그래도 다음 수색지를 남부 사막으로 확정해두고 있던 참이었다. 이런 와중에 조사 예정지에서 전란이 일어났다니 더욱 신경이 쓰일 수밖에.
마지막으로 이번 전쟁은 뒷맛이 찝찝했다.
오르네오에게 듣기로 사막왕은 호쾌하고 사리분별이 뛰어난 사내였단다. 그런 자가 뜬금포로 전쟁광이 되었다고?
가젤이 미쳤을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 분명 도화선에 불을 붙인 계기가 있었겠지. 그 계기가 무엇인지 알아내야만 비로소 이번 사태의 진면목을 이해할 것 같았다.
“맡겨두게. 현자 이름값을 이때 안 쓰면 언제 쓰겠는가? 오랜만에 폐하께 문안을 드린다는 핑계로 자네도 같이 입궁시키겠네.”
* * *
그나마 다행인 점이 두 가지 있다.
첫번째는 전쟁의 발생 시기다.
내가 소드마스터로 오른 다음에 일어난 사건이다. 심지어 드루이드 등급은 최상급. 현재 마음만 먹으면 가젤과도 일대일이 가능하다. 물론 그런 일은 최대한 지양해야겠지만 말이다.
두번째는 주변 동료.
나에게는 오르네오라는 대륙 최고의 현자가 있다. 게다가 권력과 명성도 빵빵한 영감님이시다. 그래서 영감님 덕 좀 보고자 입궁할랬는데······
“황제폐하께서는 옥체가 불편하시어 현자님과의 만남을 거부하셨습니다.”
곧바로 문전박대. 황가에도 전쟁 소문이 돌았을 텐데. 이런 시기에 만남 거절이라니. 그냥 너 싫다는 소리다.
“현자님, 일전에 황가에 우대받는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거짓말이었습니까?”
“가만 있어보게. 뭔가 착오가 생겼을 거야. 다시 한 번 확인해주게.”
몇 번을 들여보내도 돌려오는 대답은 거절이었다. 오르네오가 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오랜만에 황궁을 좀 거닐고 싶네. 폐하는 못 뵌다 쳐도 이마저도 안 된다고 하진 않겠지.”
“그게···”
내가 볼 때 저 신하는 불허하고 싶었을 거다. 그런데 오르네오가 작정하고 째려보자 후폭풍이 신경 쓰였는지 우물쭈물했다. 노회한 영감님이 그 틈을 놓칠 리가 없다.
“들어가겠네.”
반쯤은 우격다짐으로 황궁에 들어섰다.
제국의 황궁은 과연이라는 말을 쓸만큼 엄청나게 넓었다. 예술성과 실용성 두 부분에서 만점을 받을만한 건축물이었다.
다양한 건축 양식이 섞인 석조 건물, 가장자리 뾰족하게 솟아있는 첨탑, 백색광을 무지개색으로 나눠주는 스테인드 글라스, 곳곳에 정취를 더해주는 정원과 제국의 위엄을 세워주는 철동상까지.
단 하나의 장식물도 이유 없이 놓여있는 법이 없었다. 포크레인 같은 중장비가 없는 대륙에서 인력으로만 이를 만들었다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오르네오 영감님은 소싯적에 황궁을 많이 방문한 사람답게 거침없이 넓은 궁을 헤집고 다녔다. 몇몇 귀족이 그를 발견하고 인사하려 했으나, 영감님 쪽에서 손을 내저었다.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일세. 게다가 지금 폐하도 못 뵈었는데 떨거지들을 만나서 뭐하겠나.”
황궁에서도 한참 구석진 곳으로 갔더니 목적지였다. 사람들이 자주 왕래하던 중심과 다르게 이곳은 방치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을씨년스러웠다.
“진짜 이곳이 샌디 황후의 거처입니까? 폐하께서 황후를 많이 아끼셨다매요?”
“글쎄, 세월에 장사 없는 법이지. 폐하 주변에 여자가 좀 많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하는군요.”
입구를 완전히 가로막는 담쟁이덩굴을 천마검으로 잘라냈다. 우선 침실로 가서 기억회상 스킬을 쓰기로 했다. 그곳에 가장 많은 기억이 남아있을 테니까.
안쪽으로 발을 뻗으려는 찰나,
“거기 뭣들 하고 있나!?”
짜증 섞인 호통이 나와 오르네오를 제지했다. 동시에 중갑주를 찬 여러 무인이 우르르 몰려들어 우리를 부채꼴로 포위했다.
어떤 미친놈이 감히 오르네오 영감님에게 이런 무례를 저지르나 봤더니 그럴 만한 놈이었다.
“알렉스 황자님이시군요.”
“황태자. 명칭을 제대로 하시지요.”
알렉스 폰 아울슐만츠 칼론. 과거 2황자였으나 자신을 믿던 황태자의 뒤통수를 친 배신자. 이를 위해서 황혼에 가입하고 나태의 손을 빌리기까지 했다.
현재는 새로운 탐욕의 자리에 올랐다고 들었는데···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녀석은 황가의 핏줄답게 하얀 피부에 눈부신 백발을 찰랑거리고 있었다. 역시나 흔치 않은 머리색이다.
“오랫동안 두문불출하셔서 건강이 문제가 생겼나 싶었습니다. 정정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이는군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 왕국이나 제국이나 겉치레뿐인 인사법은 매한가지다.
영감님은 잊혀진 1황후인 지지자고, 알렉스는 예전으로 치면 3황후의 소생. 서로의 죽음을 바랬으면 바랬지, 안부를 걱정할 사이가 아니다.
“자네도 그동안 많이 컸구먼.”
“키만 큰 게 아니죠.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누군가 골방에 처박혀서 늙어갈 동안 말이죠.”
싸가지는 똥간에 넣어두고 왔나. 황태자치고는 입이 상당히 걸다.
알렉스는 샌디 황후의 낡은 거처를 눈으로 대충 훑었다. 그리고는 한쪽 입꼬리를 삐쭉 끌어올렸다.
“혈통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무슨 말인가.”
“사막 말입니다. 결국 못 참고 전쟁을 일으켰잖습니까?”
“당최 그 사건하고 혈통하고 무슨 상관인지 이 늙은이는 모르겠네만.”
“여기서 죽은 까무잡잡한 년도 더러운 혈통이었지요. 계속 살아있었다면 폐하에 반기를 들었을 줄 누가 압니까?”
오르네오 현자가 샌디 황후의 열렬한 지지자임은 황궁에서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
이는 누가봐도 명백한 도발이었고, 워낙 샌디를 좋아했던 영감님은 순간 감정 조절을 못하고 기운을 풍겼다.
스르르릉
주변에 압박감이 내려앉자 황태자의 호위기사들이 검집에 손을 갖다 댔다. 반쯤 뽑힌 검날에서 서늘한 예기가 풍겼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순간. 알렉스 황태자가 과장된 포즈로 손사래를 쳤다.
“워우! 진정하세요. 장난입니다. 흐하하하.”
“장난이 좀 심하군. 황태자.”
“그래봐야 이미 죽은 여자입니다. 저희끼리 얼굴 붉힐 필요 있겠습니까? 너무 과민반응이시군요.”
“······”
지금 알렉스는 오르네오를 가지고 노는 걸 즐기고 있다.
추억으로 먹고사는 영감님에게 급격한 감정변화를 유도한 다음, 격렬한 반응을 이끌어낼 때마다 쾌감을 느끼는 거다.
원래는 제국 사람끼리의 해후라 웬만하면 안 나서려 했다. 하지만 저렇게까지 선을 넘는다면 어쩔 수 없지. 영감님을 조금 거들기로 마음먹었다.
“확실히 혈통이 중요하긴 하지요.”
내가 황태자와 제국 공작 사이의 대화에 끼어들자 알렉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쪽은?”
“인사가 늦었군요. 헤논 로이드입니다.”
“헤논!”
알렉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변의 호위무사들도 웅성댔다. 몇몇은 활활 타오르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며 호승심을 불태우기도 했다.
대략적인 반응만 봐도 현재 내가 아르니아 대륙에서 얼마나 뜨거운 감자인지 절로 체감되었다.
“이야기는 들었네. 차세대의 신성이라지? 솔직히 난 소문이 많이 과장되었다고 보네만.”
“무슨 소리인가? 로이드 백작은 이미 신성의 수준을 넘었어. 당당히 대륙의 여덟 번째 별임을 나 오르네오가 공식 인정했네.”
“글쎄요. 현자님의 명성과는 별개로 무력의 검증은 또다른 문제 아니겠습니까? 악마살해자라니, 황혼에게서 생존했다느니, 허무맹랑한 소문이 워낙 많아야지요.”
오르네오가 또 흥분하려 하길래 손을 잡아 살짝 제지했다.
“하하, 태자님의 말씀에 십분 공감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직접 본 것만 신뢰하는 존재니까요.”
“흐하핫! 젊어서 그런가? 누구와는 다르게 이해력이 빠르군. 영감님과 다니기에는 아까운 인재야.”
알렉스의 탐욕스러운 시선이 위아래로 꿈틀댔다. 이는 곧 품평의 시선. 내가 황혼교에 수차례 빅엿을 먹였음을 알면서도 부하로 삼으려 함이다.
어떤 의미로는 대단한 놈이다. 그러니까 이쪽에서도 답례로 확실한 거절 멘트를 날려준다.
“확실히 황가의 혈통이라 그런지 생각하는 게 다르시군요.”
“흐하하하! 맞는 말이야. 대 칼론 제국의 핏줄은 태어날 때부터 남들과는 다르지. 아주 우수하고 탁월해.”
“사실 저는 제국행이 처음이라 오기 전에 역사를 조금 공부했습니다. 알면 알수록 황가가 이룩한 영광에 감탄만 나오더군요.”
“크핫하하! 그럴만하지. 누구나 그래. 칼론 제국의 위대함은 온종일 찬양해도 부족할 수준이니.”
“맞습니다. 특히나 저는 친형을 죽이고 권좌에 오른 초대황제님이 인상 깊었습니다.”
존속살해 후 나라를 건국한 칼론 제국의 초대황제.
이는 제국의 건국사에서도 수치로 여겨지며 역사가들도 감히 내뱉지 않고 쉬쉬하는 부분이었다.
그런 아픈 약점을 제대로 쑤셔주자 분위기가 썰렁해지고 알렉스도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왜 하필 이야기해도 그런 쪽을 언급해?”
“그 부분이 제일 기억에 남으니까요. 제국을 처음 세운 사람이 가족을 죽인 자라···후손 중 누군가에게도 그 잔혹성과 비정함이 남아있지 않겠습니까?”
알렉스는 배다른 형제라지만 어쨌든 형을 죽이고 황태자 자리에 올랐다. 방금 발언에 말에 누구보다 심하게 내상을 입었을 터. 예상대로 그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감히···”
“태자님의 머리카락을 보니 정말 피를 진하게 물려받았군요. 혹시 모르죠. 태자님에게도 형을 밟고 올라서려는 마음이 잠재의식 속에 있을지도요.”
“네 이놈!!!!”
결국 알렉스의 참을성이 다했다. 그의 영입리스트에 헤논이란 두 글자가 지워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