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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171화 (171/200)

20장 혈통 : 돌파한 망나니

황제의 이야기는 다 들었다.

샌디 황후를 죽일 의도는 없었지만 제임스 공작의 꾀에 넘어가 세상에서 가장 자신을 사랑해주는 여인을 놓친 바보.

···이렇게 평가하면 되려나?

옆에 있던 오르네오 영감님을 슬쩍 봤는데 충격이 많이 크신 모양이다. 가면을 써서 얼굴은 안 보였지만 호흡이 거칠고 손끝을 가늘게 떨고 있다.

파헬이 검을 빼들었다. 눈에서 증오 섞인 광망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온다. 그는 처음부터 황제를 죽일 생각이었다.

“나는 당신이 스스로 피해자라 생각한다는 사실이 매우 짜증나.”

만인지상의 황제가 고개를 떨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파헬에게만큼은 유구무언이었기에.

“당신에게도 당신 나름의 사정이 있었겠지. 거기까지는 이해해. 하지만 너 때문에 지옥까지 갈뻔한 내 인생은?”

“미안하다.”

“같잖은 사과는 집어치우라니까? 당신은 이미 선택을 끝냈어. 이제 대가를 치를 차례다.”

파헬의 검이 번뜩였다.

이대로 가만히 놔두면 황제의 목이 날아간다. 파헬 입장에서 보면 죽어 마땅한 인간이나, 지금 그가 죽어버리면 상당히 곤란하다.

천마검을 움직여 파헬의 검을 막아섰다.

채앵!!

“무슨 짓이지?”

“이성적으로 판단해. 여기서 황제를 죽이면 어쩌자는 거냐?”

바깥에는 아직 한스 기사단장을 포함한 황실 호위기사들이 대기 중이다.

물론 무기를 압수하고 밧줄로 포박한 상태지만 한스 정도 되는 초고수면 우습게 풀고 나올 구속이다.

황제가 죽으면 이들과 교전을 벌여야 한다. 희생자가 발생할지도 모를 불필요한 교전이다. 여기에 소중한 동료를 갈아넣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황제는 아직 해줘야 할 일이 남았다. 이를 완수하기 전까지 죽이는 건 시기상조였다.

파헬에게 이 부분을 설명했다.

다행히도 그는 목적을 위해 감정을 조절할 줄 아는 사내였다. 과연 정보 길드의 부마스터답다고 해야 하나.

한바탕 긴장된 순간이 가셨다. 나는 황제 앞에 마주앉아 그와 눈을 마주쳤다.

“폐하, 후회하십니까?”

“그렇네.”

“파헬과 샌디 황후에게 지은 죄를 갚고 싶으싶니까?”

“당연히 그러고 싶지.”

“그를 위해 속죄할 길이 있다면 하시겠습니까?”

“방법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하겠네.”

황제가 주먹을 불끈 쥐며 굳게 다짐했다. 내 제안을 들어도 저 표정이 그대로 유지되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간단합니다. 알렉스 황태자를 폐하고 그 자리에 파헬을 세우십시오.”

“!!”

옆에 있던 오르네오가 펄쩍 뛰었다. 파헬도 고개를 돌려 내 쪽을 홱 쳐다봤다. 시선이 따갑길래 어깨를 으쓱여줬다.

“뭘 그렇게 놀라? 원래 황태자 자리는 파헬 네 자리잖아. 부당하게 빼앗긴 자리 돌려달라는 말인데, 무리한 부탁인가?”

“미안하지만 알렉스 또한 내 아들이네. 모두가 납득할만한 결격 사유도 없는데 나 혼자 황태자를 폐할 수는 없어.”

“만약에 결격 사유가 있다면요? 그것도 아주 치명적인 이유요.”

슬쩍 파헬을 바라보았다. 눈치 빠른 그가 내 의도를 파악하고 한발짝 앞으로 나섰다.

“당신이 아들이라 칭하는 알렉스 황태자는 형제인 전 레이놀드 황태자를 죽인 살인자다.”

황제의 몸이 휘청였다. 오늘 심장에 안 좋은 충격적인 소식이 너무나 많다. 이러다가 칼이 아니라 혀로 암살하겠다.

“그럴 리가···레이놀드는 사냥을 나섰다가 사고로 죽었어.”

“샌디 때와 똑같군요. 샌디 때는 산통이었고 이번엔 사고. 비슷한 그림 아닙니까?”

“황족이라서 암살 당했다는 생각은 편견이네. 이건 음모고 모함이야. 내가 샌디와 파헬에게 잘못한 건 맞지만 알렉스는 건들지 말게.”

“끝까지 믿지 않으시는군요. 어쩔 수 없죠.”

이번에도 증거를 들이미는 수밖에.

알렉스 이 멍청한 놈은 레이놀드 황태자를 암살할 때 황혼의 힘을 빌렸고, 그중에서도 가장 경계해야 할 나태와 파헬에게 도움을 받았다.

한마디로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

정보 길드인 흑야가 알렉스 황태자의 약점을 놓칠 리가 없다. 당연하게도 비밀리에 모든 증거를 수집, 보관하고 있었다.

나는 거사를 실행하기 전에 나태에게 미리 요청해서 해당 증거를 아공간에 넣어놓았다.

허공에서 등장한 수정구슬.

구슬에 비친 영상에는 나태의 집무실에서 은밀하게 대화를 나누는 알렉스의 모습이 생생하게 재생되었다.

음성까지 들렸는데, 어떤 식으로 레이놀드를 암살할 건지 모든 과정이 상세하게 흘러나왔다.

이밖에도 알렉스가 레이놀드를 없애기 위해 사전에 접촉했던 인물 리스트, 사건을 덮기 위해 지방의 실력자에게 썼던 비밀 편지(인장이 선명히 찍혀있는), 작전 가담자에게 은밀하게 전달했던 보상금 내역서가 줄줄히 튀어나왔다.

이 모든 증거를 확인하고도 사실 관계를 부정한다면 그냥 눈 뜬 장님이다.

“이럴 수가.”

황제는 말을 잇지 못했다. 십 년은 늙은 표정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첫째 아들은 본인 손으로 죽이려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아비에게 살의를 불태우고, 막내는 황태자 자리를 얻겠다고 둘째를 죽이다니.

정말이지 환상적인 자식 농사다.

“이제 좀 믿으시겠습니까?”

“아아···나는 여태껏 무엇을 위해···”

“저희는 이만 가보지요. 아무쪼록 현명한 판단을 내리길 바라겠습니다.”

샌디 황후 사건의 전말을 알아내고 레이놀드 사건에 대한 정보도 줬으니 초기 목표는 달성했다.

이제부터는 황제가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보면 된다.

인면수심하고 돌변하여 우리를 잡아들일 수도 있지만, 사막 왕국군의 북상으로 국가 재난을 겪는 상황에서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오히려 황제는 사막 왕국과 파탄난 관계를 해결하기 위해서 파헬이 필요할 거다.

“혹시라도 저희와 연락하고 싶으시다면 뒷골목 메리보 주점에 연통을 넣으시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동료들과 함께 온천을 떠났다. 호위병력이 추격하는지 여러 번 확인했지만 황제는 우리를 뒤쫓지 않았다. 예상대로였다.

* * *

사막 왕국의 북상은 파죽지세였다.

사막왕 가젤은 준마와 낙타를 이용하여 발빠른 기동전을 펼쳤고 이 작전은 제대로 먹혔다.

남부와 중남부까지 접수하고 어느새 수도인 오스딘 시티 턱밑까지 도달했다.

불안감이 팽배한 상황.

제국은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황제가 친정을 선언한 것이다.

황제의 깃발 아래 모여든 십만 대군이 평야에서 사막왕의 군대를 막아섰다.

여기에 제국의 권력자인 제임스 공작 또한 십만 대군을 이끌고 양방향으로 사막 왕국군을 조였다.

총 이십만 대군이 십만의 사막 왕국군을 포위한 형세. 넓은 평야에서 대치한 양국의 사이에는 살갗이 베일 듯한 긴장감이 흘렀다.

사막왕 가젤의 게르.

차가운 겨울 바람이 부는 바깥과 달리 이곳은 흥분한 전사들의 열기로 후끈했다.

“드디어 제국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나 봅니다!”

“인제 와서 군사를 모집하면 뭐하나, 이미 국토의 절반이 초토화 되었는걸.”

“숫자가 많아도 오합지졸입니다. 우리가 총공세를 몰아치면 혼비백산하여 흩어지겠지요.”

“전하, 이참에 제국을 멸망시키고 대륙의 새로운 주인이 되시지요. 저희가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사기가 하늘을 찌르는 전사와는 달리, 가젤은 조용히 앉아서 술만 목구멍으로 때려넣고 있었다.

그는 상황을 냉철하고 정확하게 판단할 줄 알았다.

‘지금이야 승리를 연거푸 거두었으니 다들 신났겠지. 허나 한 번이라도 패배하는 순간 끝장이다.’

이미 사막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적진이다. 뒤도 안 돌아보고 진격한 결과였다. 패배는 곧 사막 왕국의 멸망으로 직결된다.

반면에 전투에서 이겨도 왕국군은 제국을 집어삼키기 힘들다. 그만큼 제국은 방대했다. 평야에 몰린 수십만 병사를 해치운다 한들, 또다시 수십만 대군이 그들을 막아설 테다.

결국 무리한 정벌이었고 사막왕도 처음부터 이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군사를 일으키고 여기까지 온 이유는 단 하나. 샌디 황후 때문이었다.

‘여동생이 타국에서 고통받다 죽었다고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는다.’

가증스러운 황제는 샌디가 산통으로 죽었다며 대놓고 부정하고 있다. 그는 황제의 입에서 자백을 받아낼 때까지 진격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다시 한 번 술병을 집어들었을 때, 바깥에서 전사 하나가 다급하게 뛰어들어왔다.

“전하! 저언하!!”

“숨 좀 돌려라. 무슨 일이냐?”

“제국 측에서 사신을 보내왔습니다!”

“사신?”

예전에도 제국은 사신을 몇 번 보내왔다.

그들은 남부 쪽 영토 일부를 떼어줄 테니 군사를 물리고 화친하자며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애초에 황제의 인정과 사과를 바라던 가젤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였다. 그는 사신을 전부 돌려보냈다.

이후로도 제국은 다른 조건을 제시하며 꾸준히 사신을 보내왔고, 이를 귀찮게 여긴 가젤은 급기야 찾아온 사신을 죽여버렸다.

그 이후로 다시는 안 보낼 줄 알았건만···또 정신을 못 차리고 사신을 보내다니.

“가치도 없는 개소리를 지껄이는 벌레들이다. 죽이라고 일전에 명령을 내렸을 텐데?”

“그것이···조금 곤란합니다.”

“뭐가 곤란하다는 말이냐?”

“그것이···”

전사가 우물쭈물하는 동안, 바깥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멈춰라!”

“여기가 어디라고···크허억!”

“막아! 막으라고!”

동시에 게르 전체를 내리누르는 중압감. 사막왕의 근육질 몸이 순간적으로 굳을 만큼 강력한 기세였다.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지?”

“웬 미친 사신 둘이 전하를 뵙겠다며 이곳을 향해 돌진 중입니다.”

“단둘이 이곳을 향해 오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미친 짓이다. 이곳은 십만 대군이 포진한 진형. 우격다짐으로 들어올 곳이 아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지척에서 소란이 들릴까. 사막왕은 설마 하면서도 슬쩍 일어났다.

바로 그때였다.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입구 쪽에서 호위전사가 굴러들어왔다. 가젤이 다가가 부하의 모습을 살폈다. 보아하니 제대로 얻어맞고 기절한 상태다.

동시에 천막이 열리고 두 사내가 들어왔다.

뒤에 있는 한 명은 후드를 깊게 눌러써서 알아볼 수 없었지만 선두에서 걸어오는 사람은 당당히 얼굴을 드러냈다.

찰랑대는 흑발에 요요한 녹보석 눈동자.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장신에 전신에 빼곡히 들어찬 근육. 무엇보다 사방을 잠식하는 강대한 오오라.

나름 생존에 이골이 났다는 사막의 전사들마저 오싹함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한발 물러섰다.

‘「진짜」로군.’

그동안 제국과 전쟁하면서 이름값 높은 기사는 수없이 만났으나, 명성만큼의 실력을 발휘한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는 달랐다.

저 사내는 어떤 식으로 유명해지든 명성보다 더 높은 기량을 발휘할 진짜 실력자다. 가젤의 짐승 같은 본능이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십만 대군에 포위된 상태에서도 사내는 여유로웠다. 마음만 먹으면 이깟 군대는 언제든지 뚫고 나가겠다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산책을 나온 듯 천천히 걷던 사내가 마침내 사막왕 앞에 섰다.

“사막왕 전하를 뵙습니다. 과한 환영 인사에 감사를 표합니다.”

죽일 듯이 달려드는 십만 대군을 환영 인사로 탈바꿈한다라···가젤은 같은 전사로써 눈앞의 사내에게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너는 누구지?”

“엘든 왕국에서 온 헤논 로이드 백작입니다.”

“헤논? 설마 대륙의 여덟 번째 별을 주장한 애송이가 너냐?”

“그렇습니다만.”

최근 주술사에게서 어떤 건방진 놈의 소문을 들었다. 새파란 젊은이가 스스로를 대륙의 별이라 떠들었다고.

이십년 전 최후의 전투에 참가했던 가젤로서는 기도 안 차는 내용이었다. 그는 자신을 포함한 세븐 스타가 어느 정도 위치인지 알고 있다. 전원 인간의 탈을 한꺼풀 벗은 괴물이었다.

그때만 해도 허풍이라고 생각했다.

금세 헛소문으로 판명날 줄 알았다.

하지만 직접 마주하니 알겠다.

소문이 오히려 축소되었다는 것을.

“기개는 있는 놈이구나.”

사막왕 나름의 최고의 찬사였다.

“감사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잘못 찾아온 것 같군. 지금 제국과 사막 왕국은 전쟁 중이다. 왜 관련 없는 제삼자가 끼어들지?”

사막왕은 사내가 십만 대군을 뚫고 여기까지 온 이유가 궁금했다.

과연 어떤 대답을 내놓을까.

사막왕의 질문을 들은 사내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팔짱을 낀 그의 눈동자에 요요한 기운이 서렸다.

잘생겼다는 단어로는 정의하기 힘든, 사람을 끌리게 하는 매혹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인간이었다.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받으며, 사내는 담담히 읊조렸다.

“이 전쟁을 끝내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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