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173화 (173/200)

20장 혈통 : 설득한 망나니

피는 물보다 진하다. 결국 가족끼리는 서로를 알아보는 걸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파헬과 가젤은 별다른 대화 없이 강렬한 교감을 나누었다.

이후에는 훨씬 부드러운 분위기였다. 가젤에게서 호의가 묻어났다. 파헬도 가젤을 존중했다. 사막왕은 아까보다 훨씬 진지한 자세로 이야기를 경청했다.

“황제가 머리를 잘 썼군. 그런 황제에게 기회를 받아낸 게 대단하다. 그가 나라의 명운을 걸만큼 너희의 영향력이 상당했다는 의미겠지.”

“어디까지나 전하의 지원을 담보로 받아낸 발언입니다. 그만큼 제임스 공작은 제국의 실세이며 거느린 세력도 방대하니까요.”

사막왕이 여기까지 군사를 끌고 온 것도 황제의 마음에 불을 지핀 주요한 요인이었다.

만약 사막 왕국군이 자기네 나라에 머물러 있었다 가정해보자.

황제가 제임스 공작에게 칼을 뽑아들며 사막왕에게 도움을 청해도 여기까지 도달하는데 한세월이다.

그 전에 둘 간의 권력 싸움은 결판이 났겠지. 아마 황제의 패배로 끝날 확률이 칠 할 이상이다.

뒤늦게 등장한 병력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그때쯤이면 황제의 목은 교수대와 하나가 되어 있을 테니까.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샌디 황후 때문이라고는 하나, 사막왕은 군사를 이끌고 제국의 심장부까지 들이쳤다.

비록 타국의 군대라지만 즉시 휘두를 수 있는 강력한 무력. 이를 적극 활용하여 제임스 쪽으로 기울어진 시소를 뒤집겠다는 황제의 노림수였다.

사막왕 가젤은 대군세를 이끄는 총사령관답게 돌아가는 판을 단번에 이해했다. 다만 파헬을 지원하는데 있어서는 회의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사막의 전사는 전부 내 형제다. 의리 하나만으로 여기까지 와준 고마운 녀석들이지. 나는 소중한 형제들을 제국 돼지들의 체스말로 희생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다.”

가젤은 역으로 파헬에게 제안했다. 사막 왕국으로 귀향하지 않겠느냐고.

사막 왕국은 혈통보다 강함을 우선시한다. 비록 내 도움이 있었다지만 십만 대군을 뚫고 온 파헬이다. 그 정도 무력이면 충분히 후계자를 노릴 만하다는 게 가젤의 설명이었다.

그러나 파헬 또한 제국 뒷골목에서 태어나 여기까지 살아남은 독종이다.

이미 그는 대륙 최고 정보 길드인 흑야의 부마스터이며 나태의 후계자이기도 했다.

모든 인맥과 뿌리가 제국에서 비롯됐는데 오늘 처음 만난 삼촌 하나 믿고 머나먼 사막으로 가기엔 무리였다.

제국 권력 다툼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 가젤과 어떻게든 그를 등에 업고 살아남아야 하는 파헬.

상반된 입장에서 오는 견해차로 인해 지지부진한 대화만 이어졌다.

파헬의 정체를 확인했을 때 화르르 불타올랐던 불씨가 빛을 잃고 희미해졌다.

이대로라면 협상은 결렬이다. 어쩔 수 없지. 또다시 나서서 기름을 들이붓는 수밖에.

“가젤님께서는 세븐 스타가 맞으십니까?”

여태껏 한발 물러서서 파헬과 가젤의 이야기만 듣던 내가 끼어들자 이목이 집중되었다.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최후의 전투에도 참여했던 나다. 카일 용사님과 마왕 바알이 싸우는 광경을 코앞에서 봤지.”

“황혼교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바알이 봉인되고 나서 남은 떨거지가 만든 사이비 종교 말인가? 눈에 띄는 족족 처리해야 맞겠지.”

“잘됐군요. 마침 제가 아는 황혼교도 한 명이 있습니다. 죽이는데 힘을 보태주시지요.”

사막왕은 바보가 아니다. 맥락 없이 꺼낸 황혼교 이야기를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물론 놀란 표정을 짓긴 했다.

“설마 제임스 공작이 황혼교도란 말이냐?”

“평범한 황혼교도가 아닙니다. 무려 대간부라 불리는 칠대사도 중 하나인 오만이죠.”

오만과의 인연은 시온 라이크에 빙의된 이후부터 쭉 이어져 왔다.

가문 내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로이드 후작에게 첫 임무를 받았을 때 우연히 만났던 사령술사 라울.

무고한 마을 사람들을 구울로 만들어 가족을 잡아먹게 하고 시체를 이어붙여서 정체불명의 키메라를 만들었던 천인공노할 놈이 오만의 부하였다.

그뿐이랴.

레베카 왕녀의 부름을 받고 부마간택식에 참여했을 때.

힐튼 가문의 온갖 견제를 극복하고 성기사 요한까지 이겨가며 부마가 되었더니 오만은 자신의 수제자 우르카를 보냄으로써 축하해줬다.

우르카와의 결투는 지저분했다. 아직도 기억난다. 아무리 잘라도 되살아나는 뼈만 남은 리치의 몸뚱이가.

리치였던 놈은 자신의 라이프 베슬이 스승인 제임스 공작에게 있다며 시종일관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다.

불사를 씨부렁거리며 하도 건방을 떨길래 지속적인 고문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는 힐튼 가문을 꼭두각시 삼아 엘든 왕국을 쥐고 흔들려는 오만의 야욕을 막아낼 수 있었지만, 오만의 타겟이 되는 불상사를 맞이했다.

엘든 왕국을 정리하자마자 나태가 직접 나를 죽이러 온 데에는 오만의 입김도 어느 정도 작용한 게 분명하다.

따라서 나는 모험가 칸으로 위장하여 오랫동안 음지에서 힘을 키웠다.

결과적으로는 소드마스터가 되면서 더는 신분을 숨길 필요가 없어졌으나, 그렇다고 해서 오만과의 악연이 끝났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오히려 샌디 황후 암살 사건에 관여하게 되면서 오만과는 재차 대립각을 세우는 입장이 되었다.

여기서 의외인 점이 하나 있다.

오만과 나는 직접적으로 얼굴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사실상 초면인데 서로가 서로에게 빅엿을 주고받았던 관계. 만나면 현피각인 악플러마냥 내적 친밀감과 증오감이 천장을 뚫은지 오래다.

모르긴 몰라도 나를 생각하는 오만도 똑같을 거다.

이러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사막왕 가젤에게 친절히 풀어서 설명했다.

오만과 관련된 사연은 내가 남의 나랏일에 주책 맞게 끼어드는 오지랖 넓은 제삼자가 아님을 보여주는 동시에, 제임스 공작과 칠대사도 오만이 동일인물임을 입증하기도 했다.

“로이드 백작이라 하였나?”

“그렇습니다.”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세븐 스타인 나로서는 반드시 제임스 공작을 정리해야겠군.”

“어쩌면 황제가 일어선 지금이 유일한 기회겠지요.”

숨겨둔 패는 모두 내보였다.

결정은 사막왕의 몫이다.

사막왕은 고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부터는 신뢰와 직감의 문제다. 내가 황제와 결탁하고 헛소리를 지껄였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물론 내 이야기는 억지로 꾸며내려 해도 힘들다. 그래도 만에 하나 천에 하나라는 말이 있다. 수십만 목숨을 어깨에 짊어진 가젤은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고민되신다면 파헬을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을 떠올리십시오. 전하께서는 파헬을 처음 보자마자 무슨 느낌이 들었습니까?”

“내 혈육임이 확실했지. 뭐라 설명하긴 애매했지만.”

“바로 그겁니다. 제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어땠습니까? 가장 먼저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 생각, 찰나의 본능과 직감을 따라가십시오.”

가젤의 술병을 들고 입에 털어넣었다. 절반 이상 남아있던 독주가 순식간에 그의 위장에 스며들었다. 어떻게 된 신체인지 술을 마셨는데도 가젤의 눈동자는 더욱 또렷해졌다.

뎅그렁!

텅 빈 술병을 바닥에 던진 가젤이 몸을 일으켰다. 뒤돌아선 그의 등에는 성난 근육이 꿈틀댔다.

“베르누스 왕국에는 유명한 격언이 하나 있지. 『모래바람에 몸을 맡겨라. 사막의 신께서 너를 오아시스로 인도하리라.』”

“멋진 말이군요.”

“사막의 모래바람이 머나먼 제국까지 불어올 줄은 꿈에도 몰랐네.”

“제법 거칠고 혹독할 바람일 겁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여정의 끝이 오아시스라면, 나와 사막의 전사들은 능히 감내할 것이다.”

가젤이 결단을 내렸다.

사막의 비호가 함께하는 순간이었다.

* * *

“으음···거기보다 조금 밑에···아니야, 약간 위에···그렇지! 거기야!”

멜브스 대평원.

황제 진영.

넓디 넓은 군용 천막에는 한 남자가 중요 부위만 가린 채 마사지를 받고 있었다.

실내는 라즈베리 향으로 가득했다. 꽃향기가 너무 진해서 코가 맵고 정신이 몽롱해질 지경이었다.

매혹적인 미녀 둘이 남자의 주변을 맴돌며 꽃을 탐하는 벌처럼 연신 그의 몸을 주물렀다. 램프의 불빛에 비친 음영이 요염한 자태를 가감 없이 그려냈다.

‘이 맛에 권력을 놓을 수가 없다니까.’

마사지를 받는 알렉스 황태자의 생각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는 말했다. 야망이 없으면 사내가 아니라고. 알렉스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비록 둘째라지만 황좌를 포기한 적은 없었다. 첫째 레이놀드의 밑에서 의욕 없는 동생을 천연덕스럽게 연기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칼을 갈았다.

어차피 어머니가 다른 이복형이었다. 설사 동복형이었어도 알렉스는 레이놀드를 죽였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형이었던 레이놀드가 가족 간의 정이라는 허무맹랑한 이상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점이다.

황실에서 가족 간의 정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맹수 새끼는 어미의 젖을 차지하기 위해 태어나자마자 제 형제를 물어죽이다. 황실도 다를 바 없다. 멍청하게 당한 놈이 잘못한 거다.

레이놀드 ‘전’ 황태자를 사냥터로 유인하고 죽였을 때는 그야말로 짜릿했다. 배신감에 얼룩진 그 표정은 떠올릴 때마다 말초신경을 자극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혼자 힘으로는 부족해서 황혼교의 힘을 빌렸다.

황혼교주에게 라이프 베슬을 바치고 나서야 도움을 받았지만 어쩄든 그로 인해 황태자 자리에 올랐다.

당연히 신경 쓰였지만 만년 2인자로 평생 살 바에 목숨줄이 잡혀도 제국의 주인이 되는 게 백번 나은 선택이었고 후회는 없었다.

다만 레이놀드 암살에 직접적으로 관여했고 제국의 뒷골목을 불법 점거한 도둑 길드인 흑야만큼은 황제가 된 후 무슨 일이 있어도 쓸어버릴 계획이었다.

철그럭 철그럭 철그럭

불쾌한 쇳소리가 들리자 알렉스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천막이 열리며 풀 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한 거구의 중갑기사가 들어왔다.

기사는 실내에서도 바이저를 올리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멀리서 보기에는 철깡통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듯했다.

후덥지근했던 공기가 기사의 등장과 동시에 싸늘해졌다. 옆에 있던 시녀 둘이 겁을 집어먹고 입술이 새파래졌다.

“태자 저하,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철판을 긁는 듯한 목소리.

원래라면 저런 음침한 녀석에게 호위받을 이유가 없으나, 여기에는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다.

최근 자신을 호위하던 기사가 오르네오 영감과 동행한 헤논이란 외국 애송이에게 허무하게 패배했다.

나름 황실기사라 해서 옆에 뒀더니 밥벌레가 따로 없었다. 대로한 그는 황실 기사를 모조리 물갈이하려 했다. 질겁한 기사들이 전부 나서서 뜯어말렸다.

그때 알렉스를 탐욕의 자리에 추천한 오만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신이 보내준 기사를 호위로 쓰는 건 어떻겠냐고.

의심 많은 알렉스는 일단 한 명만 받아보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그 한 명이 자신의 호위기사를 전부 꺾었다. 그것도 일대일이 아닌 다대일로.

이후에 알렉스를 호위하는 기사들은 탐욕이 보내준 기사집단이 대신했다.

이들은 항상 온몸을 싸매고 다녀서 공포심을 자아냈는데, 알렉스는 오히려 이 점이 마음에 들었다.

“무슨 일이지?”

“모르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려라.”

옷을 갈아입은 알렉스가 황제의 천막으로 향했다. 그가 걷는 길을 따라 사람들이 파도처럼 갈라졌다. 뒤따르는 철갑기사에게 두려운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권력의 달콤함이 느껴졌다. 역시 황태자가 되길 잘했어. 의기양양한 마음으로 황제를 만났다.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황제의 시선이 알렉스 뒤에 있는 철갑기사에게 향했다.

“아, 저 기사는 개인 사정상 투구를 벗을 수 없습니다. 폐하께셔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뭐라?”

옆에 듣고 있던 한스 기사단장이 발끈해서 앞으로 나섰으나 황제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괜찮네. 그럴 수 있지.”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알렉스는 황제가 무슨 일로 자기를 불렀는지 예측했다.

예상으로는 사막 왕국과의 전면전에서 선봉에 서라고 명령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로서는 바라는 바다.

황태자로 오른 이후 딱히 보여준 성과가 없었다. 이번 기회에 사막의 야만인을 물리치고 자격을 증명하고 싶었다.

무력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황혼교의 대간부인 오만이자 제국의 기둥 제임스 공작이 보내준 정체불명의 기사집단 정도면 야만인은 벌레처럼 쓸어버릴 수 있으니.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알렉스에게 영 생뚱맞은 질문이 들어왔다.

“알렉스, 오늘은 레이놀드 이야기를 조금 하고 싶구나.”

늙은이가 약을 잘못 잡쉈나. 오늘 왜 이럴까.

레이놀드란 이름에서부터 거부감이 올라왔다. 그의 치부나 다름없는 화제였다.

하지만 알렉스도 황궁 생활이 벌써 이십년 째다.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며 자연스럽게 슬픈 표정을 지었다.

“형님께서는 현인이셨죠. 어진 심성과 올곧은 기개는 만인의 모범이었습니다. 하필 사냥터에서 불의의 사고만 당하지 않았어도 제국의 찬란함을 이끌어갈 성군이 되셨을 겁니다.”

틀에 박힌 모범 답안. 이 정도면 황제가 좋아하려나. 슬쩍 고개를 들고 반응을 살폈다.

황제는 줄곧 무표정이었다. 도무지 내심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뒤진 사람 이야기를 꺼내서 뭘 어쩌자는 거야?’

속으로 툴툴대던 알렉스에게 황제가 다시 한 번 질문했다.

“알렉스, 정말로 레이놀드는 사고로 죽은 게 맞느냐?”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으나, 형님께서는 몬스터에게 쫓기다가 절벽에서 말과 함께 떨어지셨습니다.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지요.”

“정말이냐?”

“맹세코 사실입니다. 제가 형님을 해쳤던 몬스터의 머리통도 가져오지 않았습니까? 궁중 의원도 전부 추락으로 인한 낙사였다 판단했고요.”

“···알았다.”

황제가 돌아섰다.

동시에 한스를 포함한 황실 기사단이 알렉스를 둥글게 둘러쌌다.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은 알렉스가 슬쩍 물러섰다.

“폐하, 저는 지금 다소 혼란스럽습니다.”

“헷갈릴 것 없다. 알렉스 폰 아울슐만츠 칼론, 너에게 주어진 칼론의 성을 박탈한다. 또한 황태자의 위(位)를 폐하노니, 전 레이놀드 황태자를 죽인 죗값을 치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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