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장 영웅 : 소집한 망나니
처음에는 쉬울 줄 알았다.
적은 고작 뇌 없는 언데드.
머리만 자르고 짓밟으면 허무하게 죽는 하찮은 피조물이다.
나름 제국에서 이름 좀 날리는 기사인 로키는 종횡무진 전장을 휘저었다.
“더러운 악의 종자들이여! 내 오늘 너희를 가만두지 않으리라!!”
몸에 엔돌핀이 돌았다.
심장이 쿵쿵 뛰며 검에 마나를 공급했다.
마나소드가 화려하게 그어질 때마다 구울, 좀비가 우수수 쓰러졌다.
이건 이미 이긴 전쟁이었다.
고작 중급 기사인 자신도 해볼만하다고 느끼는데, 중상급 이상 기사들은 어떻겠는가.
게다가 이 전쟁은 황제 폐하가 직접 참전한 친정이다.
이말인 즉슨, 그분의 그림자인 대륙제일검 한스 기사단장도 함께라는 뜻.
견습시절 겪었던 기사단장의 괴물 같은 무위는 아직도 로키의 기억 속에 생생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질 수가 없는 전쟁이다.
“으어어어···으어어어···”
뒤에서 또 역겨운 시체의 울부짖음이 들렸다.
바로 가서 단칼에 목을 날려야···
“패트릭?”
로키의 사고가 정지했다.
눈앞에 있는 기사.
비록 왼쪽 팔꿈치 아래가 휑하고 목은 괴상한 방향으로 꺾여 덜렁댔으나, 얼굴만큼은 확실했다.
고향에서 같이 상경해서 종자시절부터 쭉 함께해온 불알친구 패트릭.
낮은 신분도 극복해보겠다고 둘이 박박 기어서 결국 기사 서임을 받아내고 이 자리까지 왔다.
시간이 지나 나이가 들고 각자 직책도 달라져 젊었을 적처럼 매일 붙어다닐 순 없었지만, 이미 로키에게 패트릭은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패트릭의 결혼식 때 로키는 있는 힘껏 그를 안아주었고, 패트릭은 그런 로키에게 신부의 뱃속에 있던 아이의 대부가 되어달라 부탁했다.
로키는 그 부탁을 듣고 끝내 울음을 참지 못했다.
“로···키···너무···춥다···”
그런 패트릭이 어째서···
“패트릭?”
“으어어어···로키···”
“아니야. 이건 아니야···이러지 마···으아아악!!!”
절규하는 로키.
이미 그는 이성적인 판단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뒤에 다가오는 데스나이트를 인지하지 못했다.
푸욱!!
심장을 꿰뚫은 검.
뒤돌아본 로키의 눈에 들어온 건 데스나이트의 무기질적 눈빛이었다.
“하···하하!”
허무한 웃음 끝에 로키의 숨이 끊겼다.
털썩 쓰러진 로키.
그가 일어난 건 불과 일분 후였다.
심장에 휑한 구멍이 뚫린 채, 그는 자신과 같은 희생자를 찾아나갔다.
“으어어어···으어어···”
이와 비슷한 일이 전장 전역에서 벌어졌다.
훈련 끝나고 매일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동료. 아들이 아프다 하니 무심한 척 약값 챙겨주던 부대장. 손수 검을 가르쳤던 후배. 심지어 남들 몰래 사랑을 나눴던 여기사까지.
그들은 언데드가 되어버린 내 사람을 베어낼 수 없었고,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똑같은 신세가 되었다.
어디 제국만 이러할까.
사막 왕국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오히려 어렸을 적부터 생존을 위해 같이 싸워왔던 형제이기에 훨씬 더했다.
일반 병사든 팔라딘이든 매한가지.
피해는 점차 누적되었고 전세는 점점 불리해졌다.
“주저하지 마라! 망설이는 순간 죽는다. 마음을 굳게 먹고 전부 베어버려!!”
사막왕 가젤이 쉰 목소리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의 목소리는 한참 전부터 맛이 간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가젤은 성대가 찢어져라 외쳤다.
그만큼 멜브스 대평원에는 생자보다 망자가 많아지고 있었고, 전장에는 암운이 드리웠다.
“제길! 이대로라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옆에서 같이 싸우던 파헬이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찰랑거렸던 그의 백발은 언데드와 인간의 검붉은 피로 물들어서 원래의 색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인간 고기를 하도 많이 썰어서 검날이 무뎌지고 피에 섞인 기름 때문에 검자루가 자꾸만 손에서 미끄러졌다.
몇 번이나 칼을 버리고 새로운 검으로 교체했으나 적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늘어났다.
토 나온다.
현재 상황과 딱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적의 수장인 리치왕을 잡아야 합니다. 그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무슨 수로? 저 바글바글한 언데드의 물결을 뚫고 가겠나?”
“전하와 저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습니다.”
“설령 가능하다 해도 우리가 빠지면 형제들이 죽는 속도는 더욱 빨라질 테지. 우린 이미 딜레마에 빠진 셈이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된다.
답답한 마음만 점점 커진다.
그 와중에 언데드의 숫자는 점점 많아졌다.
이미 대평원의 절반이 망자로 채워진 듯했다.
“여기까진가···”
파헬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바로 그때, 머릿속에 문득 한 장면이 스쳤다.
드래곤을 타고 하늘을 활공하여 오만에게 돌격하던 한 사내.
뒷골목 시궁쥐 인생에 만족하던 자신에게 베일 속 진실을 보여준 그 사내.
헤논 로이드.
분명 인상적인 인물이지만, 이번만큼은 그도 별수 없을 거다.
상대는 수십만 언데드를 부리고 마법까지 뛰어난 리치왕이니까.
“그래도 가기 전에 조카 얼굴은 봐서 좋구만.”
가젤의 말.
파헬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저도 그렇습니다. 삼촌.”
넝마가 된 소매를 찢은 파헬이 검자루와 오른손을 칭칭 동여매어 한 데 묶었다.
잦은 칼질 때문에 찢어진 손바닥를 위한 임시방편이다.
그만큼 파헬은 체력적으로 한계였다.
가젤과 나태도 똑같은 상황.
파헬이 옆쪽에서 묵묵히 언데드를 죽이던 나태에게도 인사했다.
“마스터, 어린 저를 지금까지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죽어서도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무슨 소리지?”
“비록 당신이 다소 메마른 사고방식을 지녔다지만, 저에게 마스터는 어머니 같은 존재입니다. 죽기 전에 한번 말하고 싶었습니다.”
나태가 고개를 갸웃한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우리는 여기서 죽지 않는다.”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이미 언데드에게 포위되었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재미없는 농담이군. 내 ‘계산’에 따르면, 오늘 우리가 여기서 죽을 확률은 제로다.”
“마스터의 계산에 들어간 대입값은 무엇이길래 그리 자신하십니까?”
파헬의 물음을 받은 나태가 먼곳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위치한 방향은 적진 중앙, 아까 전 헤논 로이드가 달려간 곳이었다.
“설마 헤논을 믿습니까?”
“정확히는 내 계산을 믿는다. 너를 입양한 것도, 결혼하여 아이를 낳은 것도, 황혼교에 가입한 것도, 황혼을 배반하고 이곳에 서있는 것도, 전부 내 생존방정식에서 도출한 결과값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헤논이 이긴다. 그리고 우리는 생존한다.”
자신과 같은 뒷골목 출신.
빈손으로 시작해서 대륙 최고 암살자로 우뚝 서고 제국의 뒷골목을 점령한 여인.
감정을 거세하면서까지 이뤄낸 생존에 대한 맹목적인 갈구와 집착이 그녀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파헬은 그런 나태의 광신적인 태도에서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좋습니다. 어디 한 번 끝까지 해보지요.”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았다.
10분 정도 싸웠을까.
언데드 군단이 일제히 쓰러졌다.
수만 명의 언데드가 도미노처럼 무너지는 광경은 나름 장관이었다.
적의 군세가 사라지자 멀리까지 시야가 트였다.
그 끝에 걸린 건 다소 지친 기색으로 서 있는 한 사내.
헤논 로이드.
그가 기어이 오만을 물리치고 지옥 같은 전쟁을 마무리 지은 것이다.
“말했지. 내 생존식은 정확하다고.”
나태의 호언장담이 맞았고,
“카일의 후계자. 용사의 재림이로다.”
가젤의 말도 옳았다.
파헬도 순순히 인정했다.
그는 지금···이야기로만 전해 듣던 영웅을 보고 있었다.
* * *
“와아아아아아!!!”
멜브스 평원에 울린 힘찬 함성에는 승리에 대한 기쁨, 악의 세력을 물리쳤다는 희열, 생존에 대한 안도감까지 다양한 감정이 녹아있었다.
그들이 보내는 환호의 중심에는 내가 있었다.
죽음의 강에 머리까지 담갔던 그들에게 나는 살아 움직이는 구명보트였으니, 더욱 각별하게 고마움을 느끼는 듯했다.
“전설의 용기사를 보다니···”
“난 봤어. 저분이 그 무시무시한 언데드를 단칼에 베어내는 장면을!”
“저 사람 누구야?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헤논! 헤논 로이드란다! 대륙의 여덟 번째 별. 엘든 왕국의 신성!”
소문은 또 어찌나 빠른지.
어디선가 흘러나온 내 신상정보가 군영에 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저주에서 풀린 코코를 타고 곧장 사막 왕국군의 진영으로 향했다.
마침 사막왕 가젤이 파헬과 나태와 함께 나를 마중 나왔다. 그가 나를 대하는 태도는 이전과는 많이 달랐다.
“I see you.”
“예?”
“용사님을 뵙습니다.”
“전 용사가 아닙니다만.”
“전설 속 신수인 드래곤을 타고 리치왕을 단독으로 잡아 수십만 생명을 살려냈는데, 용사가 아니라면 누가 용사란 말인가?”
가젤은 이미 마음 속으로 내가 용사라 확정 지은 모양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가젤뿐만이 아니었다.
“황제 폐하 납시오!!”
둥!둥!둥!
북소리가 들리며 맞은편에서 제국군이 도착했다.
이들도 악전고투를 치르느라 거지꼴이 따로 없었다.
아무리 상황이 열악해도 두 지도자의 원한으로 인해 시작된 전쟁이다.
황제를 눈앞에 둔 사막왕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너···”
너라는 한마디에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
지친 와중에 사막 왕국군의 칼이 제국군을 향했고 제국군도 창을 들어 사막 왕국 측을 노렸다.
한스 기사단장이 자연스럽게 황제의 신변을 보호했다.
“괜찮네. 한스, 잠시 비켜주게나.”
황제가 말을 끌고 앞으로 나섰다.
“전하! 위험합니다!”
황제가 용기를 내자 가젤도 병사들에게 칼을 넣으라고 하고 앞으로 나섰다.
그런데 황제는 그런 가젤을 소 닭보듯 쌩 지나쳤다.
사막왕을 무시하고 그가 도착한 곳은 바로 내 앞이었다.
“오늘 전쟁은 자네 덕분에 승리했네. 수많은 목숨이 자네로 인해 구원받았어. 칼론을 대표하는 이로써 깊이 감사하네.”
만인지상의 황제가 나에게 짧게나마 고개를 숙였다.
“은혜는 반드시 갚겠네. 비록 자네가 온천에서 저지른 무례가 있지만 전부 없던 일로 하겠어. 혹시 받고 싶은 보상이 있나? 짐의 능력 내에서 내줄 수 있는 건 모든지 주겠네. 아, 혹시 제국의 공작위는 어떠한가? 마침 제임스가 죽었으니 자네가 뒤를 물려받으면 좋을 것 같네.”
감사한 말씀이지만 때와 장소가 극히 잘못되었다.
눈앞에서 개무시를 당한 사막왕이 가만히 있을리 없으니.
가젤이 콧김을 뿜으며 나와 황제 사이를 가로막았다.
“감히 누구한테 찝적대나? 용사님은 베르누스 왕국의 대은인이다. 그는 사막에서 비롯되진 않았으나 이미 사막의 형제다. 그러니 꺼져라.”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로이드 백작이 속한 엘든 왕국은 예전부터 칼론 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네. 친했으면 제국과 친했지, 사막과 친하다는 말은 조금 어폐가 있는 듯한데.”
“다분히 제국적인 사고방식이군. 대놓고 속국 취급이 네놈이 언급한 친함인가? 우리는 진심으로 로이드 백작을 용사로 모시며 엘든 왕국과도 대등하면서도 발전적인 관계를 이어나가려 한다.”
“어느 세월에? 남쪽 촌구석에 위치한 너희 나라가 로이드 백작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데? 반면에 우리는 능력이 차고 넘친다. 전쟁밖에 모르는 야만인과는 출발선이 달라.”
“지금 보이는 그 위선적인 가증스러움으로 내 여동생을 죽이고 친아들을 유기했나? 심지어 황혼교의 대간부를 공작이랍시고 세워놓다니. 눈이 옹이구멍이거나 머리가 돌아버린 건지 의심되는군.”
“그 이야기는 이미 끝난 걸로 아는데. 기왕 말이 나온 김에 나도 한마디 하지. 샌디가 사방에서 공격받고 폐위 이야기까지 나왔을 때 자네는 어디 있었는가? 오죽하면 그녀가 나에게 죽은 사람으로 위장하겠다 했을까. 남쪽에서 틀어박힌 방관자 주제에 혓바닥은 어찌 그리 긴지. 원래 사막 족속들은 다 그런가?”
“네 이노옴!!! 오냐! 오늘 아주 끝장을 보자꾸나!”
“바라던 바다.”
나는 이런 상황을 바라지 않았다.
황급히 나서서 양팔을 벌려 둘을 말렸다.
“모두 진정하십시오!!”
“용사여, 비키게나. 저들은 방금 해치운 악마와 다를 바 없는 놈들이네.”
“로이드 백작, 야만인과는 가까이해서 좋을 게 없네. 저들에게 신의란 믿음의 문제가 아닌 선택의 문제니까.”
황제군과 사막군이 다시금 서로를 향해 무기를 겨누었다.
아무래도 좋은 말로 해서는 안 될 상황.
조금 강하게 나가야겠다.
“그마아아안!!!”
뱃심으로 끌어올린 고함이 멜브스 대평원을 끝자락까지 도달하고 메아리로 되돌아왔다. 서로 들이받으려던 양측이 순간 멈칫한다.
“다들 제정신이십니까?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눈도 못 감고 죽은 수만 구의 시체. 피로 물든 대지. 어느새 몰려와 파티를 벌이는 까마귀. 썩어가는 살점과 이에 따른 악취.
“지금 서로의 입장이 다르다고 싸울 때가 아닙니다. 저 참혹한 현장을 보고도 싸울 생각을 하다니 정말로 놀랍군요.”
황제와 가젤에게 번갈아가며 눈을 맞췄다.
“오늘 승리했으니 악의 세력은 끝났다 생각하십니까? 천만의 말씀. 아직 황혼교주가 남았고 그는 오만보다도 강한 존재입니다. 이 와중에 우리끼리 싸운다? 그건 곧 공멸입니다.”
내 혀끝에서 나오는 단어 한마디 한마디가 일침이 되어 황제와 사막왕의 가슴을 후벼 팠다.
그제야 이들도 본인의 위치를 자각했는지 흥분을 다소 가라앉혔다.
“그렇다면 자네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는가? 이 모든 전쟁의 뒤처리 말일세. 자네는 우리 사정을 모두 알고 있으니 말한다면 귀 기울여 듣겠네.”
황제의 말에 잠시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사막왕 전하께서는 제가 용사 같으십니까?”
“물론이네.”
“황제 폐하께서도 이에 동의하십니까? 제가 카일님의 후계자 같습니까?”
“솔직히 아직 더 보여줘야겠지만, 현재로서는 용사에 가장 가까운 존재가 아닐까 생각하네. 어쨌든 짐은 자네가 원하는 건 웬만하면 다 들어줄 생각이야.”
“좋습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판을 크게 키워보자. 심호흡하고 속에 품은 생각을 천천히 입 밖으로 내뱉었다.
“용사의 자격으로 아르니아 대륙 회의를 열겠습니다. 세븐 스타를 포함, 각국의 수장들은 전원 모여주십시오.”
소집령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