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장 영웅 : 마주한 망나니
천년 전 대륙 최강이라 자신했던 멀린.
그는 지나가던 웬 늙은이 하나에게 호되게 당했다.
비록 늙은이를 검에 봉인하긴 했으나 자신의 영혼도 일곱 조각으로 나뉘어야만 했다.
기나긴 잠에서 깬 멀린은 아직도 그 날이 어제처럼 생생했다.
자연의 분노라 표현할 정도로 장엄한 자신의 공격을 고작 검 한자루로 막아내던 무인.
보기만 해도 증오심이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르는 검격.
그 검격을 자신과 같은 하프엘프이자 드루이드인 후배 놈이 쓰자 화가 나서 머리 뚜껑이 열릴 것만 같았다.
“감히!! 그 저주스러운 검을 사용해서 그따위 잔재주를 부려!!!”
쏟아지는 수정 운석과 스치면 살갗과 뼈가 동시에 베이는 날카로운 나무뿌리.
가끔씩 달려오는 골렘 자폭병과 목표물을 짓누르려는 거대 손바닥.
무엇보다 무한한 에너지를 공급하고 비상식적인 회복량을 지원하는 세계수 이그드라실.
지금까지의 상대는 멀린의 무지막지한 공격에 모두 속수무책 당해왔다.
하지만 저놈은 달랐다.
자신과 똑같은 드루이드에 열화판 스킬을 쓰면서도 그 간극을 검술로 메꾸었다.
에메랄드 오러가 번뜩일 때마다 그를 노리던 나무뿌리가 잘렸고.
바람을 타고 날아간 초승달 모양의 참격에 골렘이 두 동강 났다.
유려하고 자유자재로 검을 쓰는 모습에서 일천 년 전 괴물 늙은이가 연상된다.
심지어 쥐고 있는 검마저 자신의 심장을 찔렀던 그 더러운 검이니, 멀린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좋아, 어디 누가 먼저 쓰러지나 해보자꾸나. 끝까지 가보자.”
멀린은 상대를 확실히 끝장낼 만한 수단이 없음을 인정했다.
결국 선택한 건 장기전.
서로가 세계수의 오오라를 받는 상황.
싸움이 얼마나 길어질지는 멀린조차 예측할 수 없었다.
* * *
석양이 지고 밤이 왔다.
새벽이 끝나고 여명이 텄다.
중천에 뜬 해가 황혼이 되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짐작이 가지 않는다.
일주일은 확실히 넘었고, 보름이 지난 이후부터는 세는 걸 포기했다.
멀린의 공격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나는 오러 블레이드로 베고 자르고 찌르고 앞으로 진격했다.
이 과정은 마치 모래로 만들어진 에베레스트 산을 등정하는 듯했다.
걸을 때마다 발이 푹푹 빠지고 미끄러지고 산사태가 나면 모래 파도에 휩쓸려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그 정도로 멀린의 지근거리까지 다가가기는 어려웠다.
다른 쪽도 상황은 비슷했다.
세븐 스타들은 끊임없이 회복하는 거인족 분노를 상대로 무한 대전을 펼쳤다.
코코 또한 골렘 군단과 사투하느라 다른 쪽에 신경 쓸 여유는 없어 보였다.
[패시브 스킬]
[끈질긴 생명력 발동]
[체력회복량이 증가합니다.]
늘 든든한 보험이 되어주었던 패시브 스킬이 이번만큼은 장점이 되어주지 못했다.
상대도 똑같은 스킬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육체적 피로 대신 정신적 피로를 쌓아가며 몇 날 며칠을 싸워댔다.
다시 또 시간이 흘렀다.
낮과 밤이 여러 번 바뀌었다.
나는 누구지?
왜 싸우고 있는 거지?
무엇을 얻기 위해서?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쟁터를 눈앞에 두고 철학적 사고를 시작했다.
어째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기계적으로 검을 휘두르고 드루이드 스킬을 사용하다 보니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다.
갑자기 주변이 너무나 고요해졌다.
여전히 운석은 떨어지고 지면에서 산맥이 솟아나고 골렘이 활개치고 있다.
그런데도 고막에는 어떠한 데시벨의 소음도 걸리지 않았다.
시각에 걸리는 모든 행동이 느리게만 보였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전신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어떻게든 팔을 올리려고 했는데 이 간단한 동작마저 왜 이리 힘든지.
상대의 공격도 느리고 내 반응도 느리고.
마치 이 세상 전체가 최대 느린 배속으로 재생되는 느낌이었다.
‘여기서 나 혼자 빠르게 움직일 수 있을까.’
이를 악물고 힘을 줬다.
입술에 피가 나고 근육이 파열될 정도로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도 내 움직임은 거북이마냥 느리고 답답했다.
‘멀린이 저 앞에 있는데.’
지금처럼 슬로우 모드라면 빨리 다가가서 목을 칠 수 있건만, 도저히 몸이 따라주질 않는다.
어째서일까? 이유가 뭘까.
궁금증이 입안에서 맴돌 때.
다시금 세상이 빨라졌다.
기묘한 순간은 이후에도 여러 번 찾아왔다.
오히려 전보다 자주 찾아왔고 빈도수도 점점 늘었다.
처음에는 멀린을 잡으려고 기를 쓰던 내 사고회로도 점차 단순해졌다.
조금 더 직관적으로 세상을 투시했다.
목숨이 왔다갔다하고 생사가 넘나드는 긴박한 순간임은 중요치 않았다.
그저 이 순간에 집중하고 여유를 즐겼다.
무아지경(無我之境)
현재의 내 상태였다.
“······아!”
내려놓으니 비로소 보였다.
나는 멀린에게 닿지 못한 게 아니었다.
닿았음에도 인지하지 못했을 뿐.
내 신체는, 정확히 표현하자면 세상과 동화된 부분은 이미 멀린을 둘러싸고 있었다.
몸이 무거운 게 당연했다.
내가 움직인 건 단순한 팔이 아니라 세상의 일부분이었으니.
어느 순간부터 이미 나는 육체라는 껍질을 반쯤 벗어던지고 세상과 함께했던 셈이다.
그리고 내 신체와 연결되어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부분.
이것이 바로···영역(領域).
나는 영역의 진실에 도달했다.
‘이런 비밀이었구나.’
돈오(頓悟)가 찾아오면서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짜릿한 전격이 내리쳤다.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소름이 이내 팔뚝과 허벅지까지 퍼졌다.
[마나 각성도가 급상승합니다!!]
[혼합률이 폭증합니다!!]
[마나 각성도 현황.]
[혼합률 현황]
[초록마나 각성도 95%] [↑20.0%]
[푸른마나 각성도 95%] [↑20.0%]
[용혈 각성도 95%] [↑20.0%]
[혼합률 90%] [↑20.0%]
마침 시스템창이 시끄럽게 울리며 내 성장을 알렸다.
수치가 중요한 게 아니다.
단지 지금의 상태를 만끽하고 싶다.
멀리 있지만 가까이 있는 멀린.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이렇게밖에 설명이 안 된다.
영역을 천천히 전개한다.
손에 잡힐 듯 조심스럽게, 혹시나 무너질까 천천히.
어느새 영역 안에 멀린이 들어왔다.
지금 내 영역은 그를 죽이고자 하는 살의로 가득하다.
단번에 베어낸다.
“···공간참(空間斬).”
서걱!!!
허공에 투명한 빗금이 그어지고.
멀린의 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멀린을 죽이지 못했다.
목이 떨어진 멀린은 분신이었고, 이내 새로운 멀린이 나타났다.
아쉬운 실패였으나 괜찮았다.
수십일 동안 이어지던 균형이 처음으로 무너졌으니까.
분신이 사라진 멀린의 얼굴은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감히! 감히! 네놈이 감히! 그놈의 기술을 똑같이 따라해?”
다시금 쏟아지는 폭격.
아까 전엔 오러를 흩뿌리면서 피하기 급급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이미 영역은 넓게 퍼진 상태였다.
[천마검술]
[공간참]
서걱! 서걱! 서걱!!
드루이드가 강한 이유는 자연을 자기 마음대로 다뤄서다.
그 앞에서 검 한자루 든 검사는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모든 강줄기는 하나의 바다로 통한다고 했던가.
궁극에 오른 검사는 비록 극히 일부지만 세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이곳에서만큼은 드루이드보다 확실히 앞섰다.
검의 영역이 자연의 분노를 잠재우고 이도 모자라 멀린의 목을 다시금 떨궜다.
몸이 무너진 멀린이 분신체를 버리고 또 다른 분신으로 나섰다.
“흐흐흐, 얼마든지 베어라! 이그드라실의 가호가 나와 함께할지니! 내 분신은 무한이다!”
“상관 없어.”
“···뭐?”
“몇 번이고 재생해라. 무한이라도 괜찮다. 나는 네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계속해서 베어낼 테다.”
정신력 싸움? 인내심 대결?
녀석의 인생이 고달팠다지만 본질은 그 흔한 팔굽혀펴기 윗몸일으키기 한 번 안 해본 샌님.
저놈은 나와 달리 육체를 통해 정신을 단련해본 적이 없다.
“네 말대로 끝까지 가보자고.”
[천마검술]
[공간참]
[공간참]
[공간참]
[공간참]
[공간참]
[공간참]
멀린의 목이 몸에서 붙어있질 못했다.
침착하고 묵묵히 휘둘렀다.
발은 땅바닥에 붙어있었으나 영역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만 하루를 그렇게 반복했을 때, 사소한 변화를 눈치챘다.
“너···분신 소환이 좀 느려진 것 같은데?”
“멍청한 소리!!”
“두고 보면 알겠지.”
계속되는 반복작업.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았다.
분신 생산이 느려졌다.
아주 미세한 변화였지만 처음과 비교하면 뚜렷했다.
결국 멀린의 회복력이 내 공격력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젠장!!”
육두문자를 내뱉는 멀린.
이제 그는 분신소환에만 모든 여력을 집중했다.
하늘에서 떨어지던 운석도, 지형지물을 바꾸던 산맥도, 수천 기의 골렘도 자취를 감췄다.
세계수 이그드라실만이 위태롭게 버티고 있었으나 그것조차 이제는 한계가 임박했다.
서걱!!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이번이 마지막이고 지금 눈앞에 있는 녀석이 멀린의 본체임을.
이제 그는 더 이상 분신을 소환할 수 없다.
영역을 거두고 멀린의 앞에 섰다.
세계수에 상체를 기댄 채 쓰러진 멀린은 입가에 피를 흘리며 킬킬대고 있었다.
“키킥킥킥, 쿨럭! 쿨럭! 크크큭!”
“뭐가 그리 웃기지?”
“고작 후배 놈 따위에게 밀리려고 구질구질한 생을 연명했다니···”
“그렇게 말할 필요 없다. 내가 바라본 너의 인생은 충분히 가치 있었으니. 다만 네가 저지른 수많은 죄업은 죽어서도 갚아야겠지.”
“죄업? 죄업은 인간과 엘프 놈들이 치러야지. 나는 희생자고 피해자일 뿐이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나?”
멀린의 말에 이렇게 대답해줄 수밖에 없었다.
“혹시 일천 년 전에 네가 죽인 포목집 처자의 생김새가 기억나나?”
“뭐?”
“너무 옛날인가? 그러면 네가 풀어준 크라켄이 먹은 어인의 숫자가 몇 명인지는 아는가?”
“······”
“아니면 가장 최근, 네가 분노에게 명령해서 멸망한 브류나크 왕국 오십만 사망자 중에 기억나는 이름이 있으면 단 한 명이라도 말해봐라.”
멀린의 묵묵부답.
더는 논할 가치가 없다.
“잘 가라.”
서걱!
일천 년 전 멀린의 심장에 박혔던 천마검이 이번엔 그의 목을 베었다. 드디어 목적을 완수한 것이다.
멀린의 죽자 이그드라실의 가호도 사라졌다.
그 시점에서 승패가 나뉘었다
세븐 스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얼싸안고 환호성을 지르며 승리의 기쁨을 누렸다.
영원처럼 이어지던 악전고투는 대륙의 별이라는 그들에게도 평생 경험하기 힘든 고통이자 고역이었다.
“아직 기뻐하긴 이릅니다.”
들뜬 세븐스타를 진정시켰다.
아직 남은 잔당이 있다.
거인족 분노를 모두가 포위했다.
이그드라실의 회복력을 받지 못하는 거인은 독 안의 든 쥐 신세였다.
“······”
주변을 둘러본 거인 아담.
그가 결국 무릎을 꿇었다.
“항복한다.”
“확실합니까?”
“그래. 너는 은인처럼 어머니 나무의 선택을 받았다. 은인이 죽은 이상 나는 너의 선택을 존중한다.”
“그 뜻은?”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살겠다.”
옆에 있던 요한이 침을 튀기며 흥분했다.
“저놈은 대학살마요. 존재해서는 안 되는 괴물. 벨라누스님 또한 저 거인이 살아있길 원치 않으실 것이오. 당장 죽여버립시다.”
“나도 요한의 말에 동의하네. 저런 괴물이 돌아다녀 봐야 좋을 게 없어.”
“생사결에서 진 패자는 무조건 죽인다. 사막의 풍습이다.”
오르네오와 가젤도 요한의 편을 들었다.
나도 딱히 저 거인을 살려두고 싶진 않았다.
어디서 또 난리를 피울지 몰랐으니까.
그렇게 죽이려고 할 때,
[불쌍한 아이를 살려주세요.]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방금 누가 말했습니까? 살려주라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잘못 들었나?”
[아담을 살려주세요. 부탁드립니다.]
환청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의식을 통해 나에게 말을 걸고 있다.
“누구십니까?”
차분한 여성 목소리라 걸쭉한 천마 영감님 목소리와는 단번에 구분되었다.
[오른쪽을 봐주세요.]
고개를 돌렸으나 시선에 걸리는 게 없다.
드넓게 펼쳐진 황폐한 들판.
오직 세계수 이그드라실만이 고고하게 서 있었다.
설마···
[드루이드여, 당신은 나를 보고 있습니다.]
세계수 이그드라실.
그녀가 나를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