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186화 (186/200)

22장 결착 : 수락한 망나니

어렴풋이 짐작하긴 했었다.

세계수에게도 자아가 있지 않을까.

그도 그럴 것이, 단순히 신령한 영목이라 치부하기에는 세계수가 갖춘 능력이 너무나 뛰어났다.

스텟을 뻥튀기해주고 회복량, 흡혈량, 재생량을 극대화하는 광역 오오라.

기본적으로 탑재된 개사기급 능력을 제외하고서도 황금가지를 얻을 때마다 상승하는 내 성장력은 비상식적인 수준이었다.

무엇보다도 천하제일검 천마 영감님을 검 한 자루에 봉인하고 멀린의 기억을 4D 영화처럼 재생시켰으니.

이 정도로 복잡한 작업을 수행하는 나무라면 스스로 사고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담을 살려주세요. 부탁입니다.]

역시나 내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녀는 신목의 모습을 한 초고등영령체였다.

“어째서 내가 거인을 살려줘야 하죠?”

[불쌍한 아이입니다.]

“오십만 브류나크인을 학살한 살인마이기도 하죠. 그들의 목숨은 아깝지 않습니까?”

[······기억 하나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스팟!!

갑작스레 누군가의 인생이 눈앞에 펼쳐졌다.

황금가지 시험 당시 멀린의 몸속에 들어가서 경험했던 것과 동일한 형식이었다.

단지 이번에는 그 대상이 드루이드 멀린에서 거인족 아담으로 바뀌었다.

회상 속에 나타난 아담의 인생은 정말이지 놀라웠다.

태초부터 아르니아 대륙에 존재했던 인간이라니.

순례자 톰이 맨날 찾아다니던 아슬란 제국의 모습도 일부 담겨있었다.

“이건···”

세계수가 어째서 아담의 인생을 기구하다 했는지 이해했다.

아슬란 제국이 수십년 간 행했던 인체 실험 장면은 보는 내가 피폐해질 정도였으니까.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욕지기를 참고 그의 인생을 끝까지 체험했다.

[기억은 모두 회상하셨나요?]

“예.”

[아담에게 조금이라도 동정심이 생기셨다면,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이그드라실의 간곡한 부탁.

마음이 약해진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결정이 번복될 일은 없었다.

단지 살짝 더 그를 이해했을 뿐이다.

“죄송합니다.”

[······.]

내가 직접 처단해야 제일 깔끔하다.

천마검을 뽑고 아담의 목에 갖다 댔다.

오러 블레이드로 그의 숨통을 끊으려는 찰나.

다시금 세계수가 말을 걸어왔다.

[아담을 살려주신다면 지구 귀환에 대한 단서를 드리죠.]

검이 우뚝 멈추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멈출 수밖에 없었다.

여태껏 <시온 라이크>에 떨어져서 온갖 고난과 역경을 겪었다.

그럼에도 묵묵히 참으며 여기까지 온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아니었던가.

세계수는 내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정말입니까? 거짓말 아니고요?”

[저는 진실만을 말합니다. 김철수 씨.]

김철수.

이세계에 오기 전에 지구에서의 내 이름이다.

헤논이라고 불리다가 김철수라 불리니 왠지 낯간지럽고 어색했다.

어쨌든 세계수가 지구 쪽과 관련해서 무언가 알고 있는 건 확실해 보였다.

“아담.”

거인이 나를 바라본다.

그는 방금까지 죽일 기세였던 내가 칼을 멈추자 아리송한 기색이었다.

“말해라.”

“동부 대산림으로 가라.”

“동부대산림?”

“그래. 그곳에 엘프족이 산다. 사샤라는 소녀에게 내가 보냈다고 하면 알아들을 것이다.”

이게 제일 무난했다.

어차피 아담은 인간과 섞일 수 없다.

어딘가에 숨으라고 해도 언젠가는 인간에게 들키며 마찰이 일어날 것이다.

그럴 바에는 엘프족에게 맡기는 게 가장 나았다.

어차피 엘프도 인간을 배척하는 편.

게다가 아담과 엘프는 둘 다 세계수에 우호적이다.

여러모로 궁합이 잘 맞았다.

“거기서는 사고 치지 마라.”

“알고 있다. 헤논의 말 따르겠다.”

세계수가 보여준 기억에 따르면 적어도 이유 없는 학살을 저지르는 놈은 아니었으니.

엘프와 같이 살면서 소수민족인 그들을 지켜주는 수호자 역할도 해주면 서로 좋을 듯싶었다.

“그럼 가라.”

“알겠다.”

쿵쿵대는 걸음으로 아담이 사라졌다.

세븐스타들은 내 결정에도 딱히 토를 달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어째 다들 조용하십니까? 뭐라고 한마디 하실만한데요.”

오르네오의 대답.

“첫번째는 너를 믿으니까. 네가 그렇게 결정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두번째는 피곤해서. 지금 저것까지 생각하기엔 너무 지쳤네.”

다른 세븐 스타들도 이에 동조했다.

“맞아. 어서 빨리 뜨끈한 물에 목욕하고 사막전갈주나 마시고 싶군.”

“고든 선배, 눈이 감기는데 조금만 누워서 잘래요?”

“지금 여기서 드러누우면 최소 일주일이다. 맨땅에서 자면 입 돌아가.”

“나는 밥 좀 먹고 싶다. 배고파서 미칠 지경이야. 한 달 동안 물만 먹고 유적 탐사했을 때보다 더 힘들구먼.”

“벨라누스님께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승리는 당신의 축복 아래 이뤄진 영광이며······”

“황제 폐하께 이걸 어디까지 보고드려야 할지 난감하군.”

어르신들 고생했는데 더 붙잡는 것도 민폐다.

“전원 해산입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제가 나중에 찾아뵙지요.”

“헤논, 너는 어쩔 작정이냐?”

“저는 따로 할 일이 있습니다.”

세계수와 대화를 나눠봐야 한다.

“알았다. 몸조심하거라.”

세븐 스타들이 흩어지고.

나는 이그드라실 앞에 섰다.

압도적인 크기와 영험한 기운에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손을 들어 나무의 몸에 갖다댔다.

손바닥이 몸체에 닿는 순간, 눈부신 빛이 퍼지며 나를 집어삼켰다.

파앗!!

따뜻한 백색의 공간.

포근하면서도 청량한 기운 때문에 긴장이 풀리고 기분이 좋아졌다.

이그드라실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키가 크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는 아름답다라는 한 문장으로는 정의하기 어려운 미녀였다.

“오셨군요.”

“세계수를 뵙습니다.”

이그드라실은 나를 드루이드로서 성장시키고 여기까지 이끌어준 은인이다.

최대한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반가워요. 헤논. 아니면 김철수 씨라고 불러드릴까요?”

“편한대로 불러주시지요.”

“좋아요. 헤논.”

오래 전부터 이 순간을 고대했다.

그런데 막상 다가오니 무엇을 먼저 질문해야 할지 모르겠다.

마지막 황금가지 시험에 대해서 물어봐야 할까? 천마 영감님의 봉인은 풀렸나? 지구에서의 내 본명을 어찌 알았는지부터 물어봐?

“궁금한 게 많은 눈치군요. 전부 대답해드릴 테니 하나씩 물어보세요.”

“저는 황금가지를 전부 모은 겁니까?”

“그것부터인가요. 대답부터 말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이제 당신은 멀린의 뒤를 이어서 완전한 드루이드가 될 거예요.”

“시험은요?”

“마지막 시험은 없습니다. 원한다면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다음은 영감님에 대해서 질문했다.

“천마님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동방 대륙의 무사는 멀린의 영혼 조각과 제 신체 일부를 담보로 봉인하고 있었죠. 하지만 멀린이 소멸했고 흩어진 조각도 전부 모였으니 헤논이 원한다면 봉인에서 풀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천마가 잠에서 깨어난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다소 생경한 느낌.

그런데 천마가 빠져나가면 천마검은 어떻게 하지?

이 부분은 나중에 고민하기로 했다.

가장 중요한 질문이 남아있기에.

“저는 지구로 귀환할 수 있습니까?”

꿀꺽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속으로 제발을 연신 외쳤다.

인자한 미소로 나를 내려다보던 이그드라실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가능합니다. 당신이 원하기만 한다면요.”

전신에 퍼지는 희열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

모든 감정이 섞여 심장이 뭉클했다.

한편으로는 의문이 들었다.

“저는 당연히 돌아가길 원합니다.”

“정말입니까? 잘 생각해보세요. 본인이 진짜 돌아가길 원하는지.”

이그드라실의 의미심장한 어조.

이상하다.

지구 귀환은 게임 세계에 떨어졌을 때부터 간절히 바라던 일이었는데.

그리고 지구로 돌아가야만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서···

따끔

“크흑!!”

머리에 격통이 찾아왔다.

무언가를 기억하려고 했는데 떠오르질 않았다.

더럽게 아프기만 했다.

“전생의 기억을 억지로 떠올리시니 당연히 아플 겁니다. 영혼에 부담을 가하는 짓이니까요.”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나는 강제로 이세계에 납치된 게 아니었던가.

원치 않게 이곳에 와서 온갖 개고생을 했는데, 언제부터 지구에서의 삶이 전생이 되었지?

“저는 게임을 하다가 잠들었더니 이곳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예?”

“당신이 떠올리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고통스럽더라도 잘 생각해보세요.”

세계수의 말대로 다시금 기억을 되새겨보았다. 계속되는 격통에 뇌가 쪼개질 것 같았다.

“힘드시면 제가 조금 도와드리죠.”

이그드라실의 손이 내 머리에 살짝 얹혔다.

동시에 머릿속에 스파크가 튀면서 잠재의식 속에 숨어있던 오래된 기억이 튀어나왔다.

기억은 필름처럼 돌아가며 인생의 시작점부터 종착점까지 물 흐르듯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부모. 누군가에 손에 맡겨진 고아원. 지독히도 외롭고 고독했던 어린 시절. 일과 공부를 병행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던 청소년 시절. 성인이 되어 회사에 취업. 다람쥐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을 살다가······

끼이이익―쿵!!

트럭엔딩.

아, 맞다.

이게 내 인생이었지.

자랑할만한 구석은 하나도 없는.

누구보다 밋밋하고 특색 없는 나의 삶.

“당신은 게임을 했다가 잠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죠. 뇌가 충격적인 기억을 왜곡한 겁니다.”

“그렇다면 저는 죽은 다음에 이곳으로 영혼이 인도된 겁니까?”

“맞습니다. 제가 지구에 머물던 당신의 영혼을 빼 와서 마침 죽음을 맞이한 헤논의 몸에 넣었습니다.”

세계수.

그녀 덕분에 나는 제2의 삶을 살게 되었다.

원초적인 궁금증이 전신을 지배한다.

도대체 왜.

“도대체 왜 저를 고른 겁니까? 죽은 사람이 한둘도 아닐 텐데요.”

“그야 당신이 게임을 통해 이 세계를 가장 잘 파악하고 있었으니까요. 마침 헤논과 죽은 시기가 똑같기도 했고요.”

“게임···<시온 라이크>. 이 세계는 게임 세계가 맞습니까?”

“게임 세계라 생각하면 게임 세계고,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니겠지요.”

선문답이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지구의 창작자들은 참으로 오만하죠. 자신이 공상한 세계가 독창적이라 외치니까요. 그러나 그들이 만든 세계를 살펴보면, 우주에 존재하는 수많은 평행 세계 중 비슷한 세계가 반드시 하나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평행세계 사이에 작용하는 설명하기 어려운 무량대수의 힘이 지구에 사는 창작자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친 결과입니다. 창작자들은 이를 ‘영감’이라 표현하더군요.”

이 말인즉슨, 퇴근하고 가끔 플레이했던 시온 라이크라는 게임과 흡사한 ‘진짜 세계’가 평행세계 어딘가에 존재했다는 뜻.

지금 나는 그 세계에서 헤논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제 이해가 가시나요?”

“하나만 더 물어보겠습니다.”

“네.”

“왜 저를 선택했는지는 알겠는데, 어째서 저를 헤논의 몸에 넣었는지는 대답을 안 해주셨습니다.”

“그건 간단해요. 저는 이 세상이 멸망하길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멀린은 제 뜻에 정면으로 반대했죠.”

“그러면 멀린을 죽이면 되잖습니까? 보아하니 강력한 힘을 지니셨는데.”

“저는 여러 세계에 발을 걸친 존재. 특정 세계에 제 의지를 투영할 수 없습니다. 그건 관리자 ‘벨라누스’에게도 예의가 아니고요.”

이후 이그드라실은 인과율의 개념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모든 이론을 알아들은 건 아니었다.

다만 그녀가 아르니아 대륙에 간접적인 도움을 줄 순 있어도, 직접적인 개입은 불가하다는 사실은 확실히 깨달았다.

“당신께서는 제가 대륙의 멸망을 막아주길 원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여태껏 해오신 것처럼요.”

“만약 제가 포기하고 원래 세계로 돌아간다고 하면 보내주실 건가요?”

“매우 슬프겠지만···저는 드루이드의 선택을 최우선으로 존중합니다.”

[퀘스트 발동!]

[퀘스트 제목: 이그드라실의 소망]

[내용 ― 마왕 바알을 물리치고 아르니아 대륙을 구원하라.]

[보상 ― 이그드라실의 사랑과 애정. 제발 도와주세요 ㅜㅠㅠ]

“방금 띄워드린 퀘스트창을 보시다시피, 멀린은 죽었지만 멸망을 원하는 자는 아직 남아있습니다. 마계의 지배자 바알이지요. 저는 이곳이 그곳처럼 황폐하게 변하는 걸 원치 않습니다.”

퀘스트 보상이 애정과 사랑이라니.

이런 두서없는 퀘스트는 처음 보았다.

그만큼 이그드라실이 이 세계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도 느껴졌다.

의도가 순수하진 않았으나 어쨌든 그녀는 나를 도와주고 제2의 삶을 살게 해준 은인이다.

기왕이면 그녀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무엇보다 이곳이 게임 속 세상이 아니고 진짜 세상이라면 무조건 살려야 할 사람들이 많았다.

세븐 스타를 비롯해서 여행을 다니며 만났던 많은 사람들.

나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언제나 환영해주는 사람들.

이제는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시온, 코코, 캠벨까지.

차라리 죽더라도 싸우다 죽지, 그들을 버리고 비겁하게 도망치는 짓은 내 쪽에서 사양이다.

“좋습니다. 한 번 해보지요.”

“다행입니다. 저도 최대한 헤논을 도와드릴게요.”

[퀘스트를 수락하셨습니다.]

[마왕 바알의 부활까지 180일]

[카운트 다운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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