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장 결착 : 꿈꾸는 망나니
[세계수 이그드라실이 함께합니다.]
[일대에 자연의 오오라가 깃듭니다]
[아군의 모든 스텟이 300% 증가합니다]
[회복량, 흡혈량, 재생량이 max에 도달합니다]
잘 시간조차 아깝다.
육체적 피로는 세계수의 오오라로 즉시 회복했고, 정신적 피로를 풀기 위해서 일주일에 두 시간만 수면을 취했다.
천마 영감님은 그랜드 소드 마스터답게 상식을 초월한 강자였다.
그는 나와 동료들을 한꺼번에 상대했는데, 시온과 캠벨과 코코는 무기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쉴 새 없이 얻어맞았다.
그나마 소드마스터에 오르고 경지에 이른 나는 조금 버텼다.
하지만 버틴다 뿐이지, 공격은 언감생심 할 생각도 못했다.
소드마스터에 오르고 생사를 넘나들며 여러 경험을 쌓았는데도 천마의 강함이 객관적으로 파악되지 않았다.
영감님을 보면 마치 허공과 동화된 듯 무(無) 그 자체였다. 눈으로는 보이는데 그곳에 존재하는지는 의심이 가는 느낌이랄까.
천마 영감만 해도 이 정도인데 마왕은 얼마나 강할까. 바알과의 전투에서 승리는커녕 엇비슷하게라도 싸움을 이끌 수 있을까.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마왕 부활까지 [D-120]
*
세월이 유수와 같이 흐른다.
시간이 빠르다는 관용적 표현이지만 최근만큼은 이 표현에 공감하지 못했다.
눈을 깜빡였다 하면 일주일이 끝났고 검 좀 부딪쳤다 하면 한 달이 지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시간의 흐름을 물에 비유하는 건 사치였다. 체감 속도가 소리보다도 빠르고, 빛의 속도와 흡사했다.
[마나 각성도 현황.]
[혼합률 현황]
[초록마나 각성도 99%] [↑4.0%]
[푸른마나 각성도 99%] [↑4.0%]
[용혈 각성도 99%] [↑4.0%]
[혼합률 99%] [↑10.0%]
몇 달 간의 벼락치기가 헛되지 않았는지 마나 각성도 100% 고지가 코앞에 다가왔다.
삼원마나를 구성하는 초록마나와 파랑마나와 용혈이 전부 99%로 오른 것이다.
심지어 혼합률마저도 99%였다.
개성 뚜렷하고 성질 더러운 기운들이 제멋대로 날뛰며 충돌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정상을 앞두고 있으니 감개가 무량하다.
푸른마나의 구성물인 인어왕의 보주는 단전 속에서 모조리 녹여냈고 용혈의 구성물인 여의주도 마찬가지다.
초록마나 쪽도 마지막 황금가지를 얻음으로써 외부에서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은 전부 모았다.
마지막 1%는 내 스스로 해결할 문제다.
‘무언가 막힌 느낌인데.’
라면 다섯 봉지와 햄버거 열 개를 단숨에 먹다가 체하면 이런 기분일까.
가슴 속에 응어리진 답답함이 분명 존재하는데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대신에 이것만 뚫어내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 같다는 예감도 동시에 들었다.
원래라면 오랜 시간을 들여서 깨달음을 얻겠으나, 마왕 부활과 대륙의 멸망이 성큼 다가온 이 상황에서 여유를 부릴 틈이 없었다.
지금 시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더욱 격렬히 검을 휘두르는 일뿐. 애써 복잡한 머릿속을 털어내며 천마에게 달려들었다.
마왕 부활까지 [D-90]
*
쾅! 콰앙! 쾅!!
눈에 보이지도 않는 참격이 허공에서 굉음을 뿜었다.
황혼교주와의 전투 당시 영역을 이용한 전투법을 깨달았는데, 천마와 대련하면서 이 스킬을 훨씬 익숙하게 다루게 되었다.
지금도 나는 육체로는 검을 휘두르면서도 정신으로는 영역을 전개하는 멀티테스킹을 발휘하고 있었다.
천마는 나보다도 영역 전개가 자연스러웠다.
사실 저걸 영역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그는 마음만 먹으면 로이드 후작성 전체를 자신의 영역으로 만들 수 있었다.
나도 영감님을 따라하려고 영역 확장을 시도했는데, 일정 범위가 넘어가자 머리가 쪼개지는 고통이 몰려오며 집중력이 깨져버렸다.
“천마님, 어떻게 그렇게 영역을 잘 다루십니까?”
“그러는 너는 어떻게 숨 쉬냐?”
“네?”
“방금 네가 한 질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잘만 숨 쉬던 사람한테 어떻게 호흡하느냐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줘야 하느냐?”
내 얼굴에 온갖 걱정이 담겨 있어서일까. 천마가 어조를 누그러트리며 말했다.
“지금 네가 벽을 마주하고 있음을 안다. 허나 그 벽을 깨는 방법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라 본좌도 뭐라 해줄 말이 없구나.”
천마의 말이 맞다.
사람마다 고난을 이겨내는 방식은 다르다.
지금 가슴에 응어리진 채 답답함을 유발하는 체증이 육체적 문제인지 혹은 정신적 문제인지.
영역 전개에 한계를 보이는 이유가 중요한 개념을 놓쳐서인지, 만약 놓쳤다면 어떤 개념을 놓쳐서인지.
마나각성도 99%까지가 최고치일지 아니면 이를 넘어설 잠재력이 남아있을지.
머릿속이 어지럽다.
결전의 날까지 백 일도 안 남았건만.
왜 이리 제자리걸음일까.
“애송아, 검 내려라.”
“······”
“검 집어넣으라고!”
따악!!
내 이마에 천마가 알딱밤을 먹였다. 덕분에 눈앞에 별이 번쩍하며 제정신이 돌아왔다.
“으앗!”
“그만해라. 충분하다.”
난데없이 연무장 구석으로 간 영감님은 조경 용도로 키워놓은 대나무를 일정 길이로 싹둑 잘랐다.
그리곤 주머니에서 꺼낸 실을 대나무 몸통에 칭칭 동여맸고 그 끝에 물고기 모양의 작은 나무토막을 달았다.
“뭐하십니까?”
“보면 모르냐? 낚싯대 만든다. 읏차!!”
어깨에 낚싯대를 걸친 영감님은 출구로 향하다가 걸음을 멈칫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안 따라오느냐? 너도 하나 만들어서 와라.”
천마는 진짜로 연무장을 나가버렸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마왕 부활이 수십 일 남은 상황이다.
자는 시간까지 쪼개서 훈련해도 모자랄 판에 뭐하는 짓일까.
원래도 천마 영감님의 머릿속은 좀체 짐작하기 힘들었다.
이번에도 이상한 괴벽이 도졌겠지.
일단은 따라갔다.
굳이 낚싯대는 만들지 않았다.
내성문에 다다르자 문을 지키던 기사들이 부동자세로 나에게 경례했다.
“소영주님을 뵙습니다!!”
그러고 보니 후작성에 온 이래로 처음 외출이다. 도착하자마자 훈련장에 뛰어들어 내내 그곳에만 머물렀으니까.
영감님은 묵묵하게 걸어갔고 나도 딱히 별 말 않고 그를 뒤따랐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도착 장소는 후작성의 젖줄이자 랜드마크로 여겨지는 힌즈 호수.
호수의 경관은 기가 막혔다.
마침 오후 4시.
해가 서쪽으로 향할 때였다.
살짝 기울어진 햇빛이 호수면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금가루를 뿌렸다.
청량한 공기가 콧속을 시원하게 했고 살짝씩 밟히는 낙엽과 붉게 물든 단풍이 가을철 정취를 깊게 풍겼다.
환상적인 날씨에 경치까지 좋은데 사람이 붐비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호숫가를 따라 아이들이 해맑게 웃으며 뛰어갔고 일손이 남는 여인네들이 그런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저들끼리 수다를 떨었다.
호수 중앙에는 조각배 여러 대가 수면 위를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배 위에 앉아있는 젊은 남녀는 끓어오르는 에너지를 발산하기 위해 목청껏 떠들었고 때로는 말 한마디 없이 뜨거운 눈빛을 교환하기도 했다.
천마는 사람들이 발길이 잘 닿지 않는 호숫가 가장자리에 털썩 앉아서 낚싯대를 드리웠다.
나도 나란히 옆에 주저앉았다.
천마의 낚시 실력은 형편없었다.
30분이 지나도록 입질 하나 오지 않았고 바구니는 텅 비었다.
“이제 슬슬 돌아가시죠. 천마님이 없으면 대련 상대가 없어서 훈련 효율이 떨어집니다.”
내 말에 천마는 딴소리를 했다.
“애송아, 참으로 아름답지 않더냐? 이런 평화로운 광경은 내가 있던 대륙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
“그러니까 더욱 정진하여 평화를 지켜내야지요. 이대로 넋 놓고 있다가는 몇 달 후에 모두가 파멸할 테니까요.”
애가 탄 내 부탁에도 천마는 요지부동.
낚시대를 거두지 않았다.
그리고는 나지막이 운을 뗐다.
“애송아, 내가 너를 이곳으로 부른 이유는 더 이상의 훈련이 의미 없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이미 네 마음은 부담감과 긴장감에 먹혀 무뎌진 지 오래다. 그 상태에서 기계적으로 검을 휘둘러봐야 아무 소용도 없기에 끌고 나왔다.”
“제 상태는 멀쩡합니다.”
“스스로 인지하지 못할 뿐, 이미 네 심신은 크게 피로했다. 여태껏 신령한 나무로 버텼으나 한계가 찾아온 거겠지.”
확실히 급하긴 했다.
그렇다고 훈련을 그만둘 순 없었다.
마왕 부활이 코앞이니까.
다시금 가슴이 답답해질 찰나 들려온 천마의 목소리.
“그동안 너는 경천동지할 속도로 성장했다. 태어날 때부터 천재라 불리던 본좌조차도 너보다는 덜했다.”
“그렇습니까?”
“여러 방면으로 왜 그런지 따져봤더니, 아무래도 네가 드루이드라서가 아닌가 싶다.”
사람마다 검을 드는 이유는 다양하다.
나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 혹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 단순히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이유가 산재하지만 높은 경지에 오르면 도가의 개념이 깃들며 주변 환경과의 소통을 중시하게 된다.
심(心) 기(氣) 체(體)
체에만 집중되었던 검술로 어느새 기운을 조종하고 종국에 이르러서는 마음을 다스리게 되니, 심기체가 일치하는 순간 깨달음이 찾아온다.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 여기까지 도달하기는 너무나 지난한 일이다.
오감에 지배당하는 육체와 그런 육체에 지배당하는 영혼.
단순한 날붙이 하나로 어떻게 광활한 세상을 꿈꾸고 그 너머의 우주를 엿본단 말인가.
“대부분의 검사는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주저앉는다. 그러나 너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쉽게 고비를 넘겼다.”
“제가 드루이드 때문입니까?”
“그렇다. 큰 노력 없이 자연과 소통하는 검사라니. 모든 무사들의 이상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검을 쓰는 자가 태어날 때부터 자연과 함께 호흡하면 어떻게 될까.
세상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며 친화력이 급상승한다.
단순히 검만 잘 쓰는 게 아니라 의사소통과 조화를 중시하게 된다.
이 같은 요소가 차곡차곡 쌓여 영혼의 잠재력을 높여주고 다음 격으로 올라가기 위한 밑거름으로 쓰인다.
마침내 검의 경지가 상승하며 육체의 한계를 돌파하려 할 때, 신세계를 접한 다른 검사들은 갓 태어난 새끼사슴처럼 절뚝이지만, 이미 선행학습을 끝마친 나는 드넓은 초원을 자유롭게 질주한단 이야기다.
“이곳 용어로 소드마스터라 했나? 그 정도쯤 되면 성장세가 둔해질 만도 한데, 그 와중에 너는 미친 속도로 자라고 있다. 이미 대륙에서 나를 제외하고 너를 감당할 놈은 없다.”
천마의 호언장담이 잘 와닿지 않았다.
강함이란 늘 상대적이다.
훈련 때마다 영감님에게 후드려 맞다 보면 내가 강하다는 사실이 좀처럼 실감이 안 난다.
“어디까지나 본좌의 개인적인 추측이긴 하다만, 지금 시점에서 네 발전은 육체적인 부분보다 정신적인 부분이 좌우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낚시나 하자꾸나.”
장황하게 설명하더니 결론은 낚시였다.
“물고기나 잡으면 몰라. 계속 허탕인데 낚시는 뭔 낚시입니까?”
“크흠!!”
“그래도 하루 정도는 이렇게 쉬는 것도 나쁘지 않군요.”
검에 갇힌 천마가 아닌 인간 천마와 이렇게 태평하게 시간을 죽이는 것도 나름 괜찮은 기분이다.
한참 동안 호수의 전경을 바라보며 머릿속을 비워내고 있을 때, 멀리서 열두 살이나 될 법한 소녀가 다가왔다.
쭈뼛대는 걸음걸이와 배배꼬는 몸, 새빨개진 얼굴이 부끄럼을 많이 타는 아이였다.
“무슨 일이냐?”
“호, 혹시···용사님 맞으세요?”
“맞다.”
“!!!”
고개를 끄덕여 순순히 긍정하자 소녀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이내 함박웃음을 띄고 나를 와락 껴안았다.
“용사님! 사랑해요!”
정정.
이 소녀는 부끄럼쟁이가 아니었다.
인싸 중에 초인싸였다.
“하하, 그래.”
“어머니가 말해줬어요. 몇 년 전만 해도 로이드 영지민이라 하면 주위에서 불쌍하게 쳐다봤대요. 곧 있으면 망할 영지라면서요.”
“그런가.”
“그런데 지금은 안 그래요. 얼마 전에 방문한 상단에서 사귄 친구가 저보고 부럽다고 했어요! 용사님 고향에서 산다면서요!”
“아하.”
“아버지도 요즘 먹고살기 좋아졌다면서, 이게 다 용사님 덕분이라고 말씀하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배꼽인사를 꾸벅한 소녀가 다시 수줍음이 몰려왔는지 얼굴이 홍당무가 된 채 오도도 도망쳤다.
“클클클, 인기 많구나.”
격세지감이란 이럴 때 쓰이는 말일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후작가의 망나니라 불리며 모두에게 배척 당했는데.
어딜 가든 사람들이 질겁하며 거리를 두었고 내성에서조차 내 편은 단 한 명도 없었건만.
어느새 나는 용사라 불리며 모두의 추앙과 환호를 받는다.
기분이 안 좋다면 거짓말이지만 한편으로는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지금 느끼고 있는 이 행복감은 마왕 바알에게 패배하는 순간 흔적조차 없이 바스러질 휴짓조각이기에.
“천마님, 슬슬 가시죠.”
“조금만 더 있다 가자꾸나. 그래도 한 마리는 잡아야 체면이 살지 않겠느냐?”
“그러면 잠시 눈 좀 붙이고 있겠습니다. 가실 때 깨워주십시오.”
“그러마.”
옆에 있던 나무에 몸을 반쯤 기댔다.
슬슬 땅거미 질 무렵.
아직도 아이들은 정겹게 놀고 있었다.
느닷없이 나에게 사랑 고백했던 소녀도 그 사이에 끼어있었다.
소녀는 고개를 들어 내 쪽을 바라보더니 부끄러워하면서도 손을 흔들었다. 나도 마주 손을 흔들어주었다.
어른들은 슬슬 짐을 챙겨 귀가할 준비를 했고 호수 위에 조각배는 시간을 망각한 듯 여전히 수면 위를 유영했다.
‘평화롭다.’
처음에는 곤란했으나, 지금은 외출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가끔씩 여유를 가지고 나 자신을 돌아봐라.
천마의 조언에 공감이 갔다.
그렇게 행복한 장면을 눈에 가득 담던 순간, 갑작스레 몰려오는 수마가 내 의식을 어둠으로 덮어버렸다.
* * *
번쩍!
눈을 떴다.
나는 푹신한 침대보에 누워있었다.
하얀 실크 커튼 너머로 비친 내 방의 정경이 익숙하면서도 어색했다.
‘내가 잠든 바람에 천마님이 나를 방까지 옮겨준 건가?’
헛웃음이 나왔다.
그 정도로 내가 피곤했었나?
한편으로는 소드마스터에 오른 내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무방비였다는 사실도 의아했다.
“너무 오래 잤다. 어서 훈련장으로···컥!”
온몸에 납덩이를 단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그 바람에 그대로 침대에서 굴러떨어졌다. 바닥을 한참 구르던 나는 벽에 부딪친 뒤에야 멈추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몸을 일으켰다.
마침 벽에 매달려 있는 거울에 내 모습이 비쳐 보였다.
거울 너머로 보인 내 모습에 동상처럼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
여전히 외모는 똑같았다.
칠흑 같은 흑발에 요요한 녹안.
이지적인 외모에 하얀 피부.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몸에 근육이 하나도 없다.’
그동안 격한 단련으로 돌처럼 단단했던 전신 근육이 어디로 갔는지 전신이 구멍 뚫린 풍선처럼 홀쭉해졌다.
‘어째서?’
일단은 몸에 마나라도 돌려보자.
단전에서 삼원마나를 끌어올리려 했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마나도 없다.’
근육과 마나가 사라졌다.
이건 꿈인가?
하지만 꿈이라기엔 너무나 생생하다.
볼을 꼬집어 봤더니 짜릿한 통증이 뇌하수체를 타고 신경세포를 건드렸다.
일단 방문을 열고 나갔다.
나가서 무슨 상황인지 알아보기로 했다.
서둘러 복도를 걷는데 맞은편에서 하녀 둘이 다가왔다.
“혹시 내가 며칠이나 잤지?”
“꺄악!! 죄송합니다!!”
말만 걸었을 뿐인데 과민반응을 보이며 벌벌 떤다.
반응이 이상하다.
최근 들어 내성의 하녀들은 나를 만날 때마다 미소를 짓거나 얼굴을 붉혔다.
눈도 제대로 못 쳐다보면서 부끄러움을 감췄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그녀들의 몸짓에서 한시라도 빨리 이 순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의도가 훤히 읽혔다.
저 반응은 마치 예전의······
생각을 이어가기도 전에, 등 뒤에서 낯익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나이 먹고 아직도 하녀를 괴롭히다니 한심하구나. 언제까지 그렇게 망나니로 지낼 테냐?”
뒤를 돌아본 나는 숨을 헉 삼켰다.
그야말로 예상치도 못한 인물이었다.
비계가 잔뜩 껴있는 뚱뚱한 중년 여인.
필립의 친모이자 내 계모.
로잘린 로이드.
한참 전에 죽은 인물이 허리에 손을 짚은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