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장 결착 : 연설한 망나니
블랙캐슬로 향하는 길.
한스 기사단장은 화가 머리끝까지 뻗친 상태였다.
“다들 정신이 나가도 단단히 나갔지.”
현재 한스를 따라오는 병사의 수는 1만.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니었으나 마왕을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버려진 폐허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한스는 휴식을 취하기도 전에 마왕이 부활하리란 소문을 들었다.
평소라면 헛소리라고 치부하겠으나, 황혼교주를 물리친 헤논의 말이다.
여태까지 파악한 헤논의 인간 됨됨이를 바탕으로 따져보면, 그가 거짓말을 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렇다면 진짜 마왕이 부활한다는 뜻.
마왕 부활은 곧 대륙 멸망으로 귀결된다.
비록 이십년 전 최후의 전투에 참가하지는 않았으나 마왕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는 알고 있었다.
한스는 황제의 인가를 받고 전체 소집령을 내렸다.
제국 내 2급 이상 기사를 전원차출하고 영지 면적에 비례한 병사 징용을 실시했다.
심지어 제국뿐만 아니라 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나라에도 마찬가지 요청을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결과는 가히 충격이었다. 어느 영주도 순순히 병사를 내놓지 않은 것이다.
“현재 우리 영지는 일손이 부족한 상황이요. 죄송하다고 폐하께 전해주시오.”
“옆동네 영지와 영지전 중이라 조금 힘들 것 같군요.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차라리 돈을 지원하라면 하겠소. 하지만 내 영지민을 머나먼 타국까지 보낼 수는 없수다.”
한두 명이라면 윽박질러서라도 병사를 뽑겠는데, 여러 영주와 군주가 단합하여 거부하니 한스도 별수 없었다.
심지어 방금처럼 점잖게 거부하는 영주들은 양반이었다.
몇몇 영주들은 이번에 황태자가 된 파헬을 문제 삼으며 들고 일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갑니다. 파헬이 대체 누굽니까?”
“듣자하니 사막 출신이라던데, 혹시 외압에 굴복한 겁니까? 만약 그렇다면 대 제국의 수치요!!”
“지금 마왕이 문제입니까? 당장 제국의 정통성을 회복하고 위신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반란의 불씨를 잠재워야 해서 파헬은 마왕토벌전에 참여하지도 못했다.
결국 블랙캐슬에 오게된 건 한스와 급한 대로 모집한 병사 1만 명뿐이었다.
“인간의 멍청함과 이기심이 끝을 모르는구나.”
말을 타던 한스가 중얼거렸다.
더 괘씸한 건 징집을 거부하던 영주들이 사막 왕국의 침입 때는 냉큼 군사를 보내줬다는 점이다.
적 군대가 자기 영지 근처에 올 때는 군사를 보내고, 타국에서 벌어진 마왕 강림은 거리가 멀다고 모르쇠로 일관하는 태도.
어차피 마왕에게 지면 모두가 끝장이거늘.
이 와중에 자기 영지만을 챙기는 영주들의 모습에 한스는 신물이 났다.
“그나마 사막왕은 10만 군대를 고스란히 데리고 왔겠지. 그쪽 나라는 군주의 입김이 강하니까. 이를 다행이라 여겨야 하나.”
블랙캐슬에 입성한 한스는 또 한 번 충격에 휩싸여야 했다.
사막왕 가젤이 고작 3만 군사를 데리고 온 것이다.
제국에서의 회전 때보다 무려 7만이 줄어든 숫자다.
“북쪽의 극한 기온 때문에 쓰러진 병사가 속출했네. 전염병까지 돌아서 절반 이상을 뒤로 빼두었어.”
사막왕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한스는 눈앞이 아득해졌다.
실질적인 머릿수는 제국군과 사막군이 채워줘야 했는데, 두 나라가 전부 기대치의 절반도 못 미치는 숫자를 데려왔다.
심지어 다른 나라도 전부 징집을 거부한 상태니, 추가 지원군도 없이 이 병력만으로 마왕을 막아내야 했다.
블랙캐슬의 성벽 위에서 한스는 헤논과 반년 만에 재회했다.
상당히 짧은 기간이었는데도 헤논은 저번에 봤을 때와 확연히 달라졌다.
한때 대륙제일검이라 불렸던 한스는 헤논의 경지가 아예 보이지 않자 질겁했다.
“자네, 생각 이상으로 강해진 듯한데.”
“약간의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제는 자네의 성장세가 두려울 정도야.”
“마왕을 상대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도 그렇군.”
용사의 개인 무력이 상승했다는 건 좋은 소식이지만 여전히 머릿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면목없네. 이대로라면 마왕을 처치하기는커녕 공세를 막아내기도 힘들겠어.”
풀죽은 한스와 달리 헤논의 표정은 나름대로 여유로웠다.
“괜찮습니다. 지원군은 아직 한참 남았거든요.”
헤논의 말에 한스가 귀를 의심했다.
“제국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다른 나라들도 죄다 눈치를 보는 판국이네. 그들에게 마왕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이런 상황에서 누가 지원을 보낸단 말인가?”
흥분한 한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헤논이 손가락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 첫 번째 손님이 오는군요.”
하얀 눈을 밟고 오는 상당한 숫자의 무장 집단.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커먼 후드로 감싸서 신원을 가렸다.
군대는 열려있는 성문으로 당당히 입장했다. 맨 앞에 지휘관으로 보이는 여인이 모자를 뒤로 넘기고 정체를 드러냈다.
“밤거미. 당신이 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
한스가 경악했다.
제국 출신 기사인 그가 밤거미가 누군지 모를 리가 없다.
오스딘 시티의 뒷골목을 꽉 잡고 대륙의 모든 정보를 쥐락펴락하는 거물이니까.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베일에 싸여있던 흑야의 길드 마스터가 길드원을 끌고 용사 측에 합류하다니.
“무슨 계산을 했길래 여기까지 왔지?”
“계산이 의미가 있나? 패배 즉시 모든 결과값이 죽음으로 귀결하는데.”
“···하긴 그렇군. 블랙캐슬에 온 걸 환영한다.”
밤거미가 길드원을 데리고 사라지고.
한스가 황급히 헤논에게 물었다.
“밤거미와는 무슨 관계지?”
“그걸 대답하기 전에, 다음 손님을 맞아야겠군요.”
저 멀리 백색의 군대가 출현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백의 혹은 백갑을 입고 백기를 든 채 당당히 행진하는 대군.
선두에는 예쁘장한 소녀와 위압적인 덩치의 성기사가 나란히 오고 있었다.
“벨라누스 신성국!!”
한스는 벨라누스 신성국에도 지원을 요청했으나, 답장이 안 오길래 암묵적 거절로 여기고 있었다.
그랬던 신성국이 블랙캐슬에 도착했다.
뒤에 정렬한 군대는 딱봐도 핵심 정예병이었다.
“헤논님!!!”
말에서 내린 메리안이 오도도 뛰어서 헤논의 품에 안겼다.
이를 지켜본 한스의 눈이 휘둥그레진 건 당연했다.
성녀가 누구인가.
신성국의 간판이다.
심지어 교황이 없는 지금에는 지도자라 해도 무방하다.
한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지도자가 체면은 아랑곳하지 않고 헤논에게 안기다니.
둘 사이는 또 무슨 관계란 말인가.
“벨라누스님이 말해줬어요. 마왕이 부활할 테니 용사님을 도와주라고요. 제가 헤논님을 지켜드릴게요.”
“나는 걱정 말고 네 몸이나 잘 건사해라. 요한님, 메리를 잘 부탁합니다.”
“걱정 말게. 성녀의 안전은 내가 책임질 테니.”
신성국 병력이 성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도대체 신성국과는 어떤 인연인가?”
“저기 또 오는군요.”
휘이이익! 휘이익!!
휘파람 소리가 들리며 전방에 녹색 물결이 펼쳐졌다.
초록 로브를 입고 장궁을 옆구리에 낀 병사들이 오와 열을 가지런히 맞춰서 진군하고 있었다.
그들의 귀는 인간답지 않게 뾰족했다.
“······엘프?”
인간을 원수로 여기고 배척한다는 숲의 이종족이 군사를 이끌고 왔다.
한스는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서 혼란스러웠다.
쿵! 쿵! 쿵!
이게 끝이 아니었다.
엘프족 끝에는 전에 봤던 거인족 아담이 뒤따르고 있었다.
아담의 어깨에는 아담한 소녀가 앉아있었는데, 그녀는 헤논을 발견하더니 폴짝 뛰어서 달려왔다.
“아저씨!!!”
이번에도 헤논에게 안긴다.
옆에 있던 차가운 표정의 여자 엘프가 어린 엘프를 만류했다.
“사샤 족장님, 이곳은 적지이고 인간들이 보고 있습니다. 체통을 지키십시오.”
“하지만 아저씨를 너무 오랜만에 봤는걸? 자주 온다고 해놓고서 코빼기도 안 보이고 말이야. 나 삐졌어!”
“하하, 미안하구나. 다음엔 자주 찾아가마.”
헤논과 엘프 족장이 서로를 살갑게 대한다.
이를 눈앞에서 지켜본 한스는 넋이 나갔다.
“아담도 같이 왔구나.”
“아담은 착해! 이제 나쁜 짓 안 한대! 아담은 엘프의 친구야!”
“알았다.”
엘프족에 완전히 녹아든 태초의 거인은 콧김을 내뿜으며 마왕에 대한 투지를 불태웠다.
한스는 이제 더 놀랄 기력도 없었다.
흑야의 길드 마스터.
신성국 성녀.
엘프 족장.
하나하나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인맥이었다.
“설마 더 있는 건 아니겠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번엔 푸른 물결이 도래했다.
선두에 선 현자 오르네오가 반갑게 스태프를 흔들었고, 그 뒤에는 생전 처음 보는 종족이 보였다.
인간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크고 전신이 근육으로 빼곡 찼으며, 옆구리에 아가미가 달리고 귀에는 지느러미가 달린 종족.
“저들은 대체 누구인가?”
“해저도시에 사는 어인족입니다.”
어인족의 족장으로 보이는 여인이 헤논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다시 뵈어서 반갑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했어요.”
“은인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비하면 너무나 사소할 뿐입니다. 드디어 조금이나마 은인께 도움이 되겠군요.”
정중하게 인사하고 들어가는 어인족에게 한스를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인간족, 거인족, 엘프족, 어인족까지. 대륙에서 자네가 모르는 종족도 있는가?”
“하하하.”
한스의 물음에 헤논은 그저 웃기만 했다.
이 밖에도 강군으로 명성이 자자한 리앙 수호군 수만 명이 도착했고, 최근 대륙 제일 용병단으로 우뚝 선 푸른매 용병단도 군사를 보냈다.
수호군 지도자는 헤논을 총사령관이라 불렀고 푸른매 용병단장은 헤논을 주군이라 불렀으니, 호칭만으로 용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옛날부터 북부에서 근무하던 용맹한 레인저와 레베카 여왕의 명으로 파견된 엘든 왕국병까지 합세했다.
헤논은 북부 사령관 카리나의 피후견인이고 여왕 레베카의 남편이니 이들 사이의 관계는 더 따질 필요도 없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해볼만 하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머릿수가 몇 배나 늘어났다.
제일 중요한 점은 이들 전부가 헤논 한 사람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왔다는 점이다.
억지로 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
한스는 문득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만약 이번 마왕 사태가 큰 희생 없이 잘 마무리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이 많은 인원이 용사 하나만을 보고 뭉쳤는데 심지어 기적적인 승리까지 거둔다면?
향후 그들의 칼이 마왕이 아니라 다른 세력을 겨눈다면?
‘대륙의 세력 구도가 뒤바뀐다.’
한스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군주? 대영주? 기사?
전부 소용없다.
하물며 황제까지도.
‘헤논 로이드. 그가 아르니아 대륙의 지배자가 될 것이다.’
한스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왠지 모르게 헤논의 어깨가 넓어 보였다.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칼론 제국은 이미 지는 해임을.
제국을 대신할 새로운 태양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마왕 부활까지 [D-15]
* * *
마왕 부활 당일.
고무줄을 한계까지 늘린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북부 산맥을 뒤덮었다.
몇몇 책사가 블랙캐슬의 단단한 성벽을 지지대 삼아 농성하자는 의견을 냈다가 기각당했다.
좁은데 몰려있는 병력은 강력한 범위 공격 한 방에 박살 날 확률이 높아서다.
수많은 인원이 전원 블랙캐슬을 빠져나와 새하얀 설원에 넓게 산개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씨. 북부치고는 온화한 날씨였으나 그래서인지 고요한 정적이 폭풍전야를 연상케 했다.
현재시각 아침 7시 30분.
새벽의 여명이 어둠을 걷어낼 때쯤.
옆에는 시온과 캠벨이 대기했고, 코코는 아공간 주머니에 숨어있었다.
늘 무표정한 시온도, 활달한 캠벨도 오늘만큼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전방을 노려보았다.
두 녀석은 지난 6개월동안 한시도 쉬지 않고 달렸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 천마의 도움까지 받은 캠벨은 익스퍼트 끝자락에 도달하여 소드마스터를 엿보게 되었다.
가장 큰 발전을 이룬 건 시온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도움이 되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기어이 벽을 부수고 소드마스터의 경지를 이룩했다.
대륙의 아홉 번째 별.
든든한 아군이 하나 더 생긴 셈이다.
“부단장, 칼이 제법 어울리는데?”
무거운 분위기를 풀고자 캠벨이 말을 걸었다.
화제는 일주일 전 도착한 내 신검.
“몇 번 휘둘렀는데 제법 쓸만하다.”
톰에게 부탁했던 검은 아슬아슬하게 기한을 맞춰 도착했다.
처음 검을 볼 때 든 생각은 이러했다.
‘내 검이 맞다.’
단순한 외날 검으로 디자인 자체는 심플했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그 안에 들어간 장인의 정교한 솜씨와 악착같은 노력이 엿보였다.
날카로운 검날은 매끈하게 빠져서 유려한 곡선을 자랑했고, 백색 검신은 빛에 비칠 때마다 반짝이며 존재감을 풍겼다.
내구성 테스트를 했을 때 평범한 철검 따위는 무 썰듯이 절단냈고, 돌 위에 올려놓고 마나소드로 힘껏 내리쳤는데도 흠집조차 안 났다.
무엇보다 천마 영감님이 한 번 휘둘러보고 군침을 질질 흘렸으니, 품질 검사는 영감님 반응 하나만으로 검증 완료였다.
“검을 길들일 시간이 짧았어서 그게 걱정입니다.”
시온의 우려.
“괜찮다. 일주일이면 적응은 충분해.”
그랜드 소드 마스터로 오른 시점부터 검을 직접접으로 휘두를 일은 많이 없어졌다.
단단함과 내구성이 중요하지, 내가 손으로 쥐었을 때 익숙하냐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심상치 않구나.”
바짝 폼이 오늘 내 감각이 산맥 너머에서의 이상 징후를 포착했다.
저 너머에 굉장히 강력하고 불길한 기운이 일렁였다.
상당히 먼 거리였는데도 손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불쾌하고 축축한 기운이었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흑색 빛기둥이 하늘로 치솟았다.
드래곤 카일의 공들여서 만든 봉인진이 깨진 것이다.
끼에에에에엑!!!!
“으힉!!”
“아아아아···”
“으아악!”
저주 섞인 울음소리가 고막을 괴롭히자 패닉에 걸린 병사들이 귀를 막고 주저앉았다.
심지어 지휘관급 고수들도 낯빛이 창백하게 질린 채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이대로라면 기선을 빼앗긴다.
가슴이 튀어나오도록 숨을 깊게 들이쉬고 기합성을 내질렀다.
“갈(喝)!!!”
극성으로 끌어올린 삼원마나.
각성도 MAX를 찍은 마나가 오색빛을 띠며 설원을 퍼져 나갔다.
절망과 공포, 혼란으로 가득했던 분위기가 내 기운에 밀려나며 열정과 투지, 용기로 치환되었다.
여기서 한 발짝 더.
두 손에 쥔 검을 땅바닥에 강하게 내리찍었다.
쿵!
“모두 들어라!!!”
드넓은 설원에 마나 섞인 내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오늘 우리는 대륙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모였다.”
수십만 개의 눈동자가 주목한다.
나는 그들에게 희망을 부여할 의무가 있었다.
“두렵고 무섭겠지. 충분히 이해한다. 말로만 듣던, 혹은 악몽 같았던 최후의 전투를 다시 한 번 치르게 되는 거니까.”
말을 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사람들을 나를 쳐다보고 있다.
병사들과 한 명씩 눈을 맞췄다.
그들의 눈동자에 조금씩 튀는 불꽃을 발견하고 더욱 목에 힘을 줬다.
“길게 말하지 않겠다. 너 자신을 믿어라. 혹여나 믿지 못하겠다면 나를 믿어라. 나는 용사다. 이번에야말로 마왕을 처치하고 대륙에 평화를 가져다줄지니. 내가 너희를 신세계로 인도하겠다.”
뭔가 사이비 종교 교주 같은 말투지만 다들 이해했겠지.
역시나 연설의 효과는 굉장했다.
마왕의 부활할 때만 해도 썩은 동태눈깔이었던 병사들이 이제는 당장에라도 튀어 나갈 것처럼 날을 세웠다.
“와아아아아아!!!!!”
“용사! 용사! 용사!”
설원이 떠나가라 내지른 함성.
사기는 그야말로 최고조.
이 이상 달아오를 수 없다.
그리고 마침···
맞은편에서 한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춥지도 않은지 맨발로 눈을 밟는 사내.
꼬질꼬질한 흑색 장발머리가 움직일 때마다 좌우로 흔들렸다.
그의 입가에는 잔혹한 미소가 맺혀있었는데,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의 표정이었다.
누군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느껴졌다.
최종 보스, 마왕 바알의 등장이었다.
마왕 부활까지 [D-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