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194화 (194/200)

22장 결착 : 끝장낸 망나니

황혼교주 멀린과 싸우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드루이드는 불특정 다수를 제압하기에 최고의 직업이라는 점이다.

승급할 때마다 획득하는 스킬이 죄다 범위 스킬이다.

강력한 소수를 상대하기에는 애매해도 군단 단위의 전쟁에서 자연의 힘을 마음대로 휘두른다는 점은 지나치게 사기였으니.

마왕 바알과 대적하면서 일대일은 몰라도 전장에서의 영향력만큼은 바알을 넘어선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내 자신감이 현실화되어 나타나자 바알이 소환했던 거대 운석 못지않은 대재앙이 시작되었다.

쾅! 콰앙! 쾅!!

무려 수천 기의 골렘이다.

골렘 하나하나의 크기는 트롤에 필적하고 신체의 단단함은 오우거에도 밀리지 않는다.

그러한 골렘들이 거침없이 몬스터 군단을 휘저었다.

커다란 주먹이 휘둘러질 때마다 오크의 머리가 터졌고 경로에서 얼쩡대던 고블린과 랫맨은 밟히거나 튕겨 나갔다.

“와아아아아!!!!”

땅에서 솟아오른 기적을 경험한 인간 연합군이 목청이 터져라 함성을 질러댔다.

승리에 대한 갈망, 유리한 전세에서 오는 희열, 생존했다는 기쁨까지, 모든 감정이 뒤섞인 포효였다.

[제법 귀찮은 놈이구나.]

얼굴을 찌푸린 바알이 손을 다시금 휘저었다.

이번엔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연합군과 몬스터, 골렘까지 뒤섞인 상황에서 운석을 떨구기엔 애매하다.

아군과 적군이 함께 쓸려나가기에.

물론 마왕이라면 자기 부하쯤은 안중에도 없겠지만, 전쟁 자체를 오래 즐기고 싶은 녀석이 그런 선택을 할 것 같진 않았다.

쩌저적! 쩌저적!

불길한 균열음이 들린다.

공간 계열 스킬인가.

벽이 찢어지고 그 너머로 흑색 기운이 촉수처럼 일렁인다.

눈을 바짝 뜨고 그쪽을 응시했다.

“!!”

균열 사이에 나온 존재가 무엇인지 확인했다.

그 모습이 너무나 괴이하여 한 번 보면 절대 잊어버리지 못할 피조물.

바로 아귀였다.

아귀는 지난번에 본 적이 있다.

황혼교의 대간부 오만과의 전투에서 녀석은 정체불명의 작은 아귀를 소환했다.

시커먼 구체처럼 생겼던 아귀는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였고 당시에 녀석을 처리하느라 꽤 고생했다.

그때는 오만이 컨트롤하던 아티팩트를 뺏어서 문제를 해결했는데, 동일한 방법이 통할 것 같진 않았다.

마왕에게는 어떠한 아티팩트도 없었다.

그저 언령으로만 아귀를 조종했다.

생김새부터 크기까지 저번에 봤던 아귀와는 천지차이였다.

내가 봤던 건 아귀의 축소판이었다는 듯, 세상에서 제일 큰 생선 대가리가 균열 너머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놈의 주둥이 안쪽에 형성된 흑색 구체가 다시금 강력한 흡입력을 발생시켰다.

[골렘을 전부 먹어치워라.]

놀라운 일이다.

아귀라길래 사리분별 없이 모든 걸 먹어치울 줄 알았건만.

녀석은 마왕의 명령을 얼추 알아듣고 내가 소환한 골렘만 골라 먹었다.

여러모로 오만과는 급이 다를 정도의 조종 실력이다.

쿠콰콰콰콰!!!

그 많던 골렘이 정리된 건 한순간이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어차피 골렘이야 쿨타임이 지나면 또 소환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저 아귀가 과연 골렘만 먹어치우고 끝날까.

거기서부터가 문제였다.

[다음은 인간이다. 인간 놈들을 모조리 먹도록.]

콰아아아!!!

아귀의 흡입력이 연합군을 향했다.

치열하게 검격을 나누던 병사 한 명의 발이 지면에서 떨어졌다.

“어라??”

당황하던 병사는 땅이 점점 멀어지자 비명을 지르다가 아귀의 주둥이로 들어가 산 채로 갈렸다.

“끄아아악!!”

그게 시작이었다.

인간족, 엘프족, 어인족 전부 공중에 떴다.

몬스터와 싸우며 생사를 넘나들던 그들에게 하늘에 뜬 강력한 진공청소기는 절망을 알리는 진혼곡이었다.

“우워!!”

거인족 아담은 주먹을 땅에 박아넣고 견뎠다. 덩치가 큰 그는 흡입력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다.

하지만 어깨에 매달려 있던 엘프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몇몇 엘프가 아귀의 입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중에는 엘프 족장이자 주술사인 사샤도 포함이었다.

“꺄아아악!!”

“사샤님!”

아멜리아가 급하게 잡으려 했으나 한참 늦었다. 사샤를 뒷덜미를 잡아채려던 그녀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안 돼애애!!!”

아멜리아의 절규.

다행히도 그런 사샤를 아담이 남은 손을 사용해서 잡아주었다.

하마터면 엘프족의 지도자가 죽을 뻔했던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이런 일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성기사 요한이 성녀 메리안의 허리를 꼭 껴안았고, 로이드 후작은 의족을 땅에 박아서 몸이 끌려가지 않게 지탱했다.

현자 오르네오는 물을 조종하여 지면과 사람의 발을 얼음으로 고정시켰다.

땅과 딱 달라붙은 그들은 이전보다 잘 버티게 되었으나, 움직이지 못하여 몬스터의 먹잇감이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왕의 손짓 한 번에 전황이 심각하게 뒤집혔다.

치가 떨리도록 강한 놈이었다.

녀석은 일부러 나를 직시하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누가 봐도 비웃음이자 조소였다.

그 표정에는 ‘네가 이걸 어떻게 해결할지 볼까.’ -라는 심리가 잔뜩 녹아있었다.

옛날이었으면 어땠을까.

아마도 속수무책으로 당했겠지.

소드마스터였을 적에도 오만이 소환한 아귀에 쩔쩔 맸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많이 다르다.

나 자신을 완벽하게 정의하며 영혼의 격이 한 단계 올라섰고, 시공간에 대한 이해도도 저번과는 판이하게 다른 수준.

심지어 천하제일인 천마가 몇 달 동안 온종일 지도해줬으니 지금의 나는 무엇이든지 베어낼 수 있다.

설사 그 대상이 심연 속 존재인 아귀라도 말이다.

스르릉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검 끝이 마왕을 겨누었다.

“설마 나를 죽여서 아귀를 멈출 셈이냐? 어리석은 판단이다. 나를 해치우는 것도 불가능할뿐더러, 설사 가능하다고 해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그 사이에 네 동료와 부하는 모조리 죽을 것이다.”

마왕은 내가 헛짓거리를 한다고 생각했는지 입가에 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놈의 눈에는 내가 다 잡힌 닭처럼 보이겠지.

그러나 저 녀석은 모른다.

사람도 닭뼈를 잘못 삼키면 죽는다는 것을.

검자루에서 살포시 손을 뗐다.

흡입력 때문인지 검이 빙글빙글 회전하며 아귀의 주둥이로 날아갔다.

나는 끝까지 검을 주시했다.

결국 아귀의 입안까지 들어간 검.

바알이 승리감에 도취되어 말했다.

“결국 한다는 짓이 무기를 버리는 무의미한 행동이라니. 조금이라도 기발한 행동을 원했는데 다소 실망스럽구나. 역시 대륙에서 상대할만한 건 드래곤 하나였나···”

마왕의 중얼거림과 별개로 나는 초집중 중이었다.

단순히 검을 날려보낸 게 아니다.

그 검에는 검사의 상징인 오러 블레이드와 공간 자체를 휘저을 수 있는 공간력(空間力)이 이중삼중으로 덧씌워져 있었다.

내가 파악한 아귀는 강력한 흡입력으로 먹이를 끌어온 다음, 공간을 우그러트리고 압축하여 먹어치운다.

애초에 공간을 이용한 방식이기 때문에, 일단 끌려 들어가면 저항조차 못하고 온몸이 짜부라드는 끔찍한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

하지만 내 검은 공간력을 내포하고 있다. 그말인 즉슨, 아귀가 먹어치우는 힘에 저항할 수 있다는 뜻.

소화되지 않고 떠도는 음식은 어떻게 될까?

마치 생선 가시나 닭 뼈처럼 입 주변을 맴돌며 끊임없이 불편하게 한다.

게다가 그 가시를 원격으로 조종하게 된다면?

목구멍을 뚫고 나오게 할 수도 있겠지.

[천마검술]

[이기어검(以氣馭劍)]

허공에서 검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이기어검은 그랜드 소드 마스터로 오른 후에 얻은 스킬이었다.

공간과 영역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하면서 무작정 영역을 넓히는 게 능사가 아님을 깨닫고, 원거리와 국소 부위에 영역을 집중시키는 방법을 애용하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서 영역을 고정하는 중심축으로 내 주무기인 검이 활용된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콰지지직!!

아귀는 성대가 없기에 비명을 못 지른다.

그러나 화들짝 놀라서 꿈틀대는 폼이 방금의 공격이 제대로 먹혔음을 증명했다.

입을 다물었으나 이미 늦었다.

분노의 검격이 그의 입을 모조리 찢어발겼으니까.

쿠콰콰콰!!!

오랜만에 빛의 존재를 탐닉하던 아귀는 서둘러 자신이 비롯된 심연으로 물러났다.

마왕이 돌아오라고 명령을 내리긴 했으나 완벽한 주종 관계는 아니었던 듯 아귀는 듣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결국 균열이 닫혔고 중간계 연합군은 한숨 돌리고 다시금 몬스터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네놈···”

마왕의 목소리에 서서히 노기가 깃들었다.

긍정적인 현상이다.

녀석의 메테오를 내가 막았고 내 골렘 군단을 마왕이 아귀로 막았다.

장군멍군이 계속되는 상황.

“뭘 그렇게 화를 내? 설마 밑천 다 떨어졌어? 헌데 이걸 어쩌나. 아직도 나는 한참 남았는데.”

그랬다.

나에게는 아직 가장 강력한 한 수가 남아있다. 드루이드라면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할 스킬.

다른 스킬은 다 버려도 이 스킬만큼은 버릴 수 없다. 드루이드 자체를 정의하는 스킬이기에.

[라이프 컨트롤]

[세계수 소환]

[세계수 이그드라실이 함께합니다.]

[일대에 자연의 오오라가 깃듭니다]

[아군의 모든 스텟이 300% 증가합니다]

[회복량, 흡혈량, 재생량이 max에 도달합니다]

땅에서 치솟은 이그드라실이 장대한 위엄을 발휘했다.

동시에 신목에서 풍기는 영험한 오오라가 넓게 퍼지며 전장을 감쌌다.

“으아아아아!!!”

전신을 휩쓰는 에너지.

여기저기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전투 내내 부상당한 이들이 실시간으로 회복되었다.

이제 이들은 목이 잘리지 않는 이상 무지막지한 회복력으로 싸울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살아있는 언데드가 된 셈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그드라실에게는 주변의 동식물을 지휘하는 능력이 있다.

호랑이, 곰, 독수리 등 설원에 숨어있던 맹수들이 이때다 싶어 튀어나왔다.

그들은 연합군에 합세하여 몬스터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부리로 눈알을 쪼아댔다.

마족과 몬스터들은 인간 군대도 상대하기 버거운 마당에 웬 동물들이 나와서 귀찮게 하자 정신이 없는지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우왕좌왕하는 적들은 아군의 좋은 사냥감이었다.

서걱! 푹!!

전세가 완전히 기울었다.

이제 대설원의 2/3가 인간군대로 뒤덮였다.

몬스터를 미끼로 던지고 등을 돌린 마족들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이들은 바알이 처음 소환한 포탈로 몸을 던져서 마계롤 줄행랑쳤다.

나와 바알은 하늘에서 대치한 채 모든 광경을 눈에 담았다.

마왕의 얼굴에 아까 같은 미소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모아진 미간과 번들거리는 눈빛, 이마에 솟은 혈관의 그의 불편한 심기를 대변했다.

“그래. 확실히 저 나무는 위험하군. 없애야겠어.”

마왕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전쟁이 시작된 내내 관객 놀음을 하던 놈이 드디어 무대에 올라선 것이다.

나 또한 뜨거운 성원으로 그를 맞아주었다.

[윈드 컨트롤]

[헤이스트]

[순보]

내 신형도 마왕처럼 주륵 늘어났다.

첫 격돌은 세계수 앞이었다.

콰아아아앙!!!!!!!

세계수를 향해 팔을 뻗던 마왕의 일격이 내 손에 막혔다. 그의 주먹과 내 주먹에는 공간력이 담겨있었다.

지지지직!!!!

두 주먹 사이에 마찰이 일어나며 공간이 뒤흔들렸다.

방금 충돌로 발생한 파동이 퍼지면서 무기를 맞대고 싸우던 마계군과 중간계군이 우르르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났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되면서 진화한 오색마나를 극한까지 끌어올리며 힘싸움을 벌였다.

삼원마나였으면 진작에 밀렸겠으나, 오색마나는 마왕을 상대로도 어느 정도 대등한 균형을 유지했다.

“인간 놈이 어떻게 이렇게 강할 수 있단 말이냐? 혹시 너도 인간인 척하는 드래곤인가?”

“유감스럽게도 인간이다.”

“이해할 수 없군.”

“그걸 생각하기 전에, 뭔가 잊은 것 없나?”

친절하게 기억력을 되살려준다.

“잊다니 무엇을···!!”

마왕의 시선이 내 주먹에 꽂혔다.

나는 권사가 아니라 검사다.

그런데도 주먹으로 힘싸움을 하고 있다.

여기서 의문이 발생한다.

내 주무기인 검은 어디로 갔을까.

불길함을 느낀 바알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늦었다.

[천마검술]

[이기어검(以氣馭劍)]

하늘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검이 쏜살같이 마왕의 오른쪽을 가격했다.

공간력 가득 담긴 힘이 마왕을 떠밀었고, 나와 힘싸움을 하느라 이목이 팔려있던 그는 이 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콰직!!

옆구리를 제대로 얻어맞은 마왕이 마하의 속도로 날아가 버렸다.

수평으로 날아간 바알이 설원을 감싸던 설산을 연거푸 뚫어냈다.

쾅! 쾅! 쾅! 쾅! 쾅!

한 개, 두 개, 세 개, 네 개, 다섯 개.

바알은 설산을 무려 다섯 개나 뚫고서야 멈췄다.

그 충격으로 산사태가 크게 일어났고 뿌옇게 올라온 눈구름이 시야를 가렸다.

다행인 건 마왕이 멀리 날아가서 전장에는 영향을 안 끼쳤달까.

‘최대한 멀리서 싸워야 한다.’

나와 마왕 정도 레벨이면 전투를 벌이는 것만으로도 주위가 휩쓸린다.

마왕이야 자기 부하가 죽든 말든 신경도 안 쓰겠지만 난 그럴 수 없으니 방금의 일격으로 멀리 보낸 것이다.

눈안개가 자욱한 설원 위에서 마왕이 나오길 기다렸다.

이 정도 공격에 바알이 죽길 바라는 건 사치였고, 무엇보다 오감을 넘어선 육감이 그가 멀쩡하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푸확!!

무너진 산을 뚫고 나온 마왕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쌓인 눈을 털어냈다.

이제 바알의 눈알은 흰자 없이 어둠으로 완전히 물들었고 동공 속에 불가해한 광기가 일렁였다.

“죽여버리겠다!! 인간!!!”

빛처럼 쏘아진 마왕.

나는 침착하게 검을 휘둘러 받아쳤다.

[천마검술]

[공간참]

대각선으로 그어진 검격과 마왕의 주먹이 다시금 충돌했다.

이를 시작으로 나와 바알은 손발이 안 보일만큼 일격을 주고받았다.

놈이 날린 발차기에 맞은 내가 설산 세 개를 뚫으며 추락했고 다시 뛰쳐나온 내가 휘두른 검격에 마왕이 수백 미터 지하로 내리꽂혔다.

그럼에도 우리 둘은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다.

[패시브 스킬]

[끈질긴 생명력]

어인화 단약으로 단단해진 육체에 도토리로 강화된 드루이드 스킬 덕분에 반영구적으로 싸울 수 있었다.

마왕 또한 어찌된 신체인지 체력적인 부담은 전혀 없는 모양.

결국 우리는 의미없는 소모전만 펼치면서 주변을 초토화시켜 나갔다.

드높았던 산이 평지가 되었고 운석을 정통으로 맞은 듯한 커다란 구덩이가 사방에 만들어졌다.

땅바닥에는 빗나간 검격 때문에 깊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크레바스까지 생성되었다.

“이대로는 끝이 없군. 힘싸움으로 끝을 내지. 누군가는 먼저 무너질 테니.”

“바라던 바다.”

마왕과 내 생각이 처음으로 일치했다.

서로 온힘을 기울여 다시금 충돌했다.

콰아아앙!!

이번에는 이기어검을 써서 등 뒤를 노리는 변칙 수를 두진 않았다.

마왕 녀석에게 똑같은 수가 통할 가능성은 지극히 낮고, 괜히 힘을 분산시켰다가 정중앙에서 밀리면 답이 없기 때문이다.

고오오오······

마왕과 나의 격돌 구역에는 온갖 자연법칙이 어긋났다.

돌조각과 눈조각, 나뭇조각이 공중에 떴고 이내 우리를 중심으로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항성을 중심 삼아 공전하는 행성과 위성을 보는 듯했다.

아르니아 대륙에 작은 우주가 펼쳐진 것이다.

드드드드!!!

앙다문 입술에서 핏물이 터졌다.

마왕과 나의 기운은 백중세였다.

줄다리기가 도무지 한쪽으로 치우치질 않는다.

그러나 마왕은 미소 지으며 승리를 낙관했다.

“흐흐흐···네놈이 아무리 강해도 결국은 인간. 언젠가는 지치지 않겠느냐? 어디 한 번 끝까지 해보자꾸나.”

지구전을 선택한 마왕.

나와는 다른 선택지다.

애초에 나는 이런 무분별한 소모전을 할 계획이 없었다.

전쟁이란 누가 한층 더 치밀하고 주도면밀하게 준비했느냐가 승패를 결정한다.

그리고 나는 이런 면에서 방금 부활한 바알보다 확실히 앞섰다.

“이렇게 팽팽한 와중에 누군가 개입하면 승부가 나겠군.”

“질 것 같으니 도움을 원하는가? 헛된 희망은 집어넣어라. 너와 나는 싸우면서 전쟁터와는 한참 멀어졌다. 승부를 내기 전까지는 단둘뿐이라는 이야기다.”

“글쎄···과연 그럴까?”

의미심장한 내 물음에 마왕의 얼굴에 아주 잠깐이지만 당혹감이 스쳤다.

“너에게 소개하마. 오늘 이 순간을 손꼽아 기다렸던 존재를.”

덜그럭 덜그럭

허리춤에 매달린 아공간 호리병이 흔들렸다.

동시에 뽕! 하면서 마개가 뽑혀나가고 그 속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크기의 성룡.

햇빛에 비친 은색 비늘이 반짝였고 뿜어내는 콧김은 뜨거운 증기가 되어 공기 중에 흩어졌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던 코코의 시선이 마왕에게 못 박혔다.

이를 목격한 마왕의 눈동자가 전쟁을 시작한 이래 가장 크게 흔들렸다.

“너는···설마···도마뱀 새끼?”

“용케도 알아챘군.”

입을 쫙 벌린 코코의 입에서 뇌풍이 형성되었다.

힘의 응집체라 불리는 브레스가 천천히 발사될 준비를 마쳤다.

“자, 잠깐!!”

마왕이 급히 힘을 돌리려 했으나 어림도 없는 일.

더욱 거세게 밀어붙였다.

나는 그에게 양자택일을 요구했다.

정면으로 브레스를 맞을 텐가, 아니면 나와의 힘싸움에 밀려 치명적인 일격을 허용할 텐가.

“이런 치사한 놈!!!! 싸움 참 뭣같이 하네!”

“극찬 고맙다.”

“뀨우우우우우!!!!!”

쿠콰콰콰콰콰콰콰쾈!!!!

코앞에서 뿜어진 뇌전 브레스가 마왕을 덮쳤다.

급한 대로 배리어를 친 마왕이 처음에는 잠깐 브레스를 막는 듯했으나, 코코가 혼신의 힘을 다해 쏜 브레스는 급하게 만든 방어막을 금세 뚫어버렸다.

결국 브레스 샤워를 하게 된 마왕.

나와 힘싸움을 하면서 전신이 뇌전 폭풍에 휩싸인 바알이 고통에 몸부림쳤다.

“크아아아악!!!”

“포기해. 포기하면 편해.”

“헛소리 마라!!!”

육두문자가 난무했지만 어쩌겠나.

상황이 이런 것을.

결국 마왕은 브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힘을 옆으로 돌렸다.

브레스를 맞느니 내 일격을 허용하겠다는 심산. 그렇다면 보여줘야지. 코코의 공격은 내 일격에 비하면 장난이었다는 것을.

[천마검술]

[신검합일]

칼자루를 쥔 양손에 힘을 가득 쥐었다.

검날에 오색기운과 공간력을 극한으로 중첩했고.

심지어 고속회전까지 하는 극악무도한 드릴을 마왕의 명치에 먹여줬다.

그러자 비상식적으로 단단했던 마왕의 신체가 거칠게 흔들렸다.

“끄아아아악!!! 안 돼애애!!”

비명을 지르는 바알.

이미 검에 관통된 후였다.

복부에 난 구멍이 점점 커졌다.

“피카뀨우우우우!!!”

여기에 코코가 브레스 출력은 한층 더 높였다.

바알의 안색이 새하얘졌다.

“끝이다. 잘 가라.”

투쾅!!

[패시브 스킬]

[파마(波魔)의 힘]

마를 척결하는 드루이드의 정수.

복부에서 난 구멍이 점차 위로 올라가더니 심장을 향했다.

브레스에 얼굴이 반쯤 녹아버린 바알이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이미 승기가 기울었다.

그리고 마침내, 검이 심장에 도달했다.

콰직!!

마왕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던 블랙 하트에 금이 갔다.

이는 단지 시작일 뿐.

실금은 흰 종이에 떨어진 먹물처럼 심장 전체로 번졌다.

마왕이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고자 마기로 이루어진 실로 상처를 칭칭 동여맸지만, 심장까지 도달한 내 검은 어느 때보다도 냉혹하고 무정했다.

서걱!!

일도양단(一刀兩斷)

단숨에 심장을 양분했다.

동시에 마왕의 눈동자가 공허해졌다.

무한으로 뿜어내던 마기도 급격하게 쇠약해졌다.

바알의 신체가 말단부터 천천히 분해되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드래곤조차 뚫지 못했던 내 신체를 한낱 인간이 어떻게···믿을 수 없다.”

“죽는 와중에도 인간을 얕보는가. 너의 패배 원인은 마지막까지 방심하던 마음가짐 때문이다. 영혼마저 소멸해라. 악의 근원이여.”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진작에 먼지로 바스러져 무(無)로 환원했기에.

길었던 싸움의 끝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