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195화 (195/200)

22장 결착 : 전설된 망나니

시온의 삶은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 손에서 큰 그녀는 온갖 암살 기술을 배우고 죽음을 친숙하게 여겨야 했다.

동갑내기 하녀들이 마음에 드는 사내나 예쁜 찻집 이야기를 할 때, 그녀는 어떻게 하면 사람을 효과적이고 은밀하게 죽일지 고민했다.

그래서일까.

시온은 매력적인 외모와 독특한 머리색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사교적으로 굴 수 있었음에도 묘하게 겉돌았다.

그런 시온이 후작가에서도 망나니로 유명한 헤논의 전속하녀가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처음에 시온은 헤논을 동정했다.

담당 도련님께 충성하고 지지해주는 건 하녀의 당연한 의무라고 여기면서.

가문에 섞이지 못하는 모습이 자신과 비슷한 처지라서 더 이끌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잠깐의 동정은 누구보다 깊은 혐오로 변질되었다.

헤논의 행동 하나하나는 전부 실망스러웠고 인간 이하에 최저였다.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늘상 밑바닥을 보여주니 시온으로서도 반쯤 헤논을 놓아버렸다.

결국 헤논이 죽었다.

솔직히 말하면 잘 죽었다고 생각했다.

이쯤에서 사라져주는 게 가문을 위해서도, 그녀를 위해서도, 무엇보다 본인을 위해서도 이로운 일이었기에.

모두에게 편안한 길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랬어야 했는데.

이 질긴 망나니가 다시 돌아왔다.

흙투성이가 되어서 무덤에서 나왔다.

자기 주제도 모르고.

눈치라고는 전혀 없는 저 바보 천치가.

이때만 해도 시온은 몰랐다.

이날을 기점으로 그녀의 인생이 송두리째 뒤바뀌게 될 것이라고는.

“시온, 나를 따라와라.”

평소답지 않게 무게를 잡던 도련님.

신체 단련을 통해 엄청난 속도로 강해지셨다.

주변의 방해를 통쾌하게 물리치고 후작님의 임무도 완벽하게 수행하며 황혼이라는 대륙의 암조직까지 추적했다.

어느새 북부로 가서 레인저가 되고 요새 사령관 카리나를 등 뒤에 업었으며 명예롭게 제대했다.

누가 봐도 불가능했던 영지전을 번뜩이는 기지로 돌파하고 후작령에 닥친 위기를 단숨에 해결했다.

그 여정에서 시온은 늘 헤논과 함께였다.

그래서 더욱 절절히 체감했다.

헤논 도련님은 같은 인간인지가 의심될 정도로 출중한 인물이었다.

이후에도 헤논은 거침없이 나아갔다.

자유도시 리앙과 동부대산림의 엘프족을 구원했다.

왕국의 실질적 지배자가 되었고 신성국을 정상화했으며 그 와중에 황혼의 대간부를 처리했다.

전설 속에 존재하던 해저도시에 방문해서 폭정을 펼치는 지배자를 처치하고 도시 전체의 은인이 되었다.

종국에는 황혼교주를 해치우고 북부 대설원에서 마왕 바알과 교전을 벌이고 있다.

이게 한 인간이 해낼 만한 업적일까.

이쯤 되니 시온은 헤논이 인간을 넘어선 어떤 신적인 존재가 아닐까 의심될 정도였다.

물론 인외의 존재라도 시온은 괜찮았다.

헤논 덕분에 시온도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으니.

이미 그녀는 헤논의 진짜 정체가 무엇이든, 어디로 나아가든 함께하기로 맹세했다.

“정신 차려!!”

후웅!!

잠깐 한눈 판 사이에 상급 마족의 검이 아슬아슬하게 옆을 스쳤다. 반짝이는 보라색 머리카락 몇 가닥이 나풀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금 멍 때릴 때야? 천하태평이군.”

옆에서 캠벨이 볼멘소리로 투덜댔다.

현재 위치는 대설원.

생과 사가 오가는 전쟁이 한창이다.

[물도마뱀 발걸음]

[보호색]

이제는 수준급이다 못해 완벽한 솜씨의 암살 스킬을 시전하여 상급 마족의 목덜미를 단숨에 꿰뚫었다.

이후에 다가오는 몬스터도 캠벨과 합작하여 처리했다.

“휴···언제까지 해야 하려나.”

세계수의 등장으로 승기를 잡은 연합군은 마계군을 몰아붙였으나 어느덧 난관에 봉착했다.

남은 몬스터와 마족들은 바알에 대한 충성심이 뛰어났는지 죽기 살기로 싸웠고, 강렬한 저항에 맞부딪친 연합군 사상자도 급증하는 상황.

이 아비규환이 끝나기 위해서는 뭔가 결정적인 한 수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결정적인 한 수는 아무래도···

“조금만 기다리시죠. 도련님은 반드시 이기고 돌아오실 테니까요.”

바로 마왕과 일기토를 벌이러 어디론가 날아간 헤논의 귀환이었다.

“아무리 부단장이 대단하더라도 이번엔 조금 어렵지 않을까? 상대가 마왕이잖아.”

“캠벨답지 않은 발언이군요. 원래 도련님을 저보다 더 철석같이 믿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한데 이번엔 상황이 워낙 어려우니까. 마왕이 그냥 마왕이 아니잖아. 이 지옥도를 펼친 장본인인데.”

대화를 나누면서도 다가오는 오크의 목을 베고 비수를 던져 코볼트의 다리를 잘랐다.

“저는 도련님이 반드시 승리하고 돌아오리라 믿습니다.”

시온은 굳게 믿었다.

이번에도 헤논은 모두가 놀랄 결과를 들고 올 것을.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할 때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기적을 벌써 여러 번 목도했다.

이번에도 똑같다.

도련님은 분명히 해낼 것이다.

서걱! 서걱! 푹!

얼마나 싸웠을까.

온몸이 피로 찐득했다.

하얗던 피부가 피 칠갑이 되어 붉게 변했다.

피에 젖어서 미역 줄기처럼 늘어진 앞머리가 시야를 가렸다.

기존에 쓰던 무기는 전부 날이 나가거나 피에 묻은 기름 때문에 미끄러워서 버리고 시체에서 주운 무기를 썼다.

나중에는 나무 몽둥이 하나로만 몬스터를 박살 냈다.

세계수 버프로 인한 육체적인 회복력은 굉장했지만 정신적인 회복까지는 무리였다.

동료와 친우의 연이은 죽음을 코앞에서 목격한 인간들은 하나둘씩 미쳐갔다.

팔이 네 번이나 잘리고도 살아남은 병사는 다섯 번째 절단에는 결국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백치가 되었다.

시산혈해(屍山血海)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피가 강처럼 흐른다.

단 1초라도 눈을 뜨고 있으면 처참하고도 참혹한 광경이 시신경을 괴롭혔다.

“언제까지 이래야 해?”

“차라리 죽는 게 편한 길일 수도···”

“돌아버릴 것 같아.”

“더는 이렇게 못 싸워.”

군의 사기가 동요했다.

이대로라면 인간 진영이 먼저 무너진다.

결사항전하던 마계군은 이때다 싶어 치고 나오겠지.

이는 불안했던 균형의 붕괴로 이어지고 이후에 벌어질 일은 대량학살뿐이다.

사실 시온도 가쁜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소드 마스터인 그녀가 이 정도면 일반 병사는 말할 것도 없다.

“제발···”

시온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땅에 펼쳐진 지옥과 달리, 하늘은 빌어먹게도 맑았다.

오늘 전투에서 지면 다시는 못 볼 하늘이다.

인간은 마족의 노예 혹은 몬스터의 식량이 될 테고, 황폐해진 대지가 토해내는 썩은 마기가 하늘을 붉게 물들일 테니.

상상만 해도 끔찍한 세상.

만약 도련님이 마왕에게 패배한다면 현실에서 일어날 일이다.

“어? 저기 누군가 온다!!”

캠벨의 고함.

그의 목청이 워낙 우렁찬 탓에 싸움에 지친 병사들은 저도 모르게 미어캣처럼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만큼은 누군가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듯했다.

몬스터와 마족도 움직임을 멈춘 채 다가오는 자가 누군지 확인했다.

거기에는 시온도 포함이었다.

그녀도 목이 빠져라 하늘 저편을 주시했다.

그리고···

쿠워어어어!!!

늠름한 포효.

반짝이는 은빛.

넓게 펴진 날개.

보기만 해도 든든한 드래곤의 위용과 그 위에 탄 잘생긴 미남. 바람에 펄럭이는 흑발과 요요한 녹안이 전쟁터를 굽어살폈다.

“정말로···해냈어···”

캠벨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몇몇 병사는 긴장이 풀렸는지 그 자리에서 실신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반응은 광란의 함성이었다.

“와아아아아아!!!!!”

시온의 볼가에 맑은 눈물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던 헤논과 시선이 마주쳤다.

시온은 그가 먼 거리에서도 자신을 정확히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마음 속에 번진 안도감 때문일까. 믿음에 보답한 고마움 때문일까. 기적을 일으킨 영웅에 대한 존경심일까.

“고생하셨습니다. 도련님.”

시온이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를 있는 힘껏 끌어올렸다.

태어나서 처음 짓는 환한 미소였다.

* * *

마왕을 처치한 후.

잠시 동안 실감이 안 났다.

이 순간을 위해 얼마나 뛰어왔던가.

그동안의 노력이 파노라마처럼 흘렀다.

“뀨! 드디어 해냈다뀨!!”

코코가 내 목을 힘껏 껴안았다.

넓적한 혀가 내 볼을 핥는다.

온몸이 침 범벅이 되고서야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아직 안 끝났다.”

마왕이 죽었으니 마계로 통하는 포털은 닫혔을 것이다.

하지만 남은 잔당들이 여전히 아군을 죽이고 있을 터.

조금이라도 빨리 가야만 한 명의 생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다.

“코코, 부탁한다.”

“알았다. 뀨우!!”

마침내 전쟁터에 도착했다.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서 코코의 등에 탄 채로 아래를 굽어보았다.

하늘에 뜬 성룡의 거체는 그 자체만으로도 눈에 금방 띈다.

전쟁에 지친 아군들은 나와 코코를 보고 마왕이 최후를 맞이했음을 알게 되었다.

“와아아아아!!!!”

우레와 같은 함성.

사기가 미친 듯이 치솟았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란 말이 있다.

나도 이 기세를 타서 아낌없이 드루이드 스킬을 퍼부었다.

[크리스탈 메테오]

[강화된 바인드]

후방에서 대기 중이던 몬스터 군단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수정 운석에 순식간에 박살 났다.

날카로운 가시가 달린 나무뿌리가 뱀처럼 움직였고, 이들이 지나친 곳마다 마족의 시체가 널브러졌다.

무지막지한 공격이 가해지자 마계군은 공포와 혼란에 빠졌다.

“히익!! 도망쳐라!”

“말도 안 돼!! 바알님이 당했단 말인가?”

“미친 인간이다! 다 끝났어!”

바알을 믿고 끝까지 버티던 마족들이 제일 먼저 부하들을 내팽개치고 무리를 이탈했다.

나로서는 이들을 살려둘 이유가 없다.

[크리스탈 마운틴]

실드 계열에서 발전한 마운틴 스킬.

거대한 산이 즉석에서 만들어지며 놈들의 도주로를 완벽히 차단했다.

독 안에 든 생쥐 꼴이 된 이들은 세븐 스타에게 차례대로 목을 내주어야만 했다.

지휘관이 정리되자 몬스터도 끝이었다.

열 시간이 넘도록 진행됐던 전쟁은 마지막 남은 마족의 목이 잘리며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겼다···”

병사 하나가 피투성이가 된 채로 중얼거렸다. 지금 일어난 상황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흐르자 이내 현실감각이 돌아왔는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으아아아!! 이겼어! 이겼다고!!”

“살았다! 난 죽은 줄 알았어.”

“끄윽! 끄윽!!”

저마다 무기를 내려놓고 얼싸안으며 생존의 기쁨을 만끽했다.

몇 명은 죽은 동료의 시체 앞에서 고개를 떨구고 묵념을 취하기도 했다.

희로애락.

갖가지 감정이 사방에서 터져 나오며 승패가 나뉜 전쟁터에 절절히 녹아들었다.

그때였다.

병사 중 한 명이 뛰쳐나오더니 하늘에 떠있는 나에게 거수경례했다.

딱히 어떠한 감사의 말도 없었다.

그저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리며 손끝을 이마에 댔다.

그가 시작이었다.

다른 이들도 나를 향해서 하나둘씩 경례를 올렸다.

딱히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었다.

다들 경례를 취했다.

일반 병사도, 지휘관급 장교도, 세븐 스타급 장군도. 심지어 사샤나 메리안 같은 지도자까지.

불과 몇 초 전까지 시끌벅적했던 대평원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요해졌다.

모두가 나만 쳐다보고 있다.

무언가 한마디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

아래를 스윽 훑었다.

마침 시온과 캠벨이 보였다.

길었던 여행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함께해준 고마운 친구들.

그들을 그윽이 응시하며 입을 뗐다.

“집으로 돌아갑시다.”

* * *

전쟁이 마무리되었다.

병사들은 시신을 수습하고 장비를 챙긴 다음 철수했다.

대설원은 다시금 평화를 찾았다.

마왕도 없어졌고 몬스터도 씨가 말랐으니 이제 이곳은 평범한 설산이 되었다.

딱 하나만 빼고.

하늘에 떠있는 흑색 구체.

마계 대공 아스타로트와 천마 영감님이 싸우던 격리 공간이다.

한참 동안 소식이 없던 구체가 드디어 흔들리기 시작했다.

덜그럭 덜그럭

처음에는 미세한 진동으로 시작했지만 이내 격렬한 떨림으로 발전했다.

한동안 잘 버티던 구체는 안에서 밀어내는 강력한 힘에 좌우로 갈라지며 안에 있던 내용물을 뱉어냈다.

“후우, 더럽게 끈질긴 놈을 보았나!”

질린 표정의 천마가 나왔다.

그의 뒤로는 아스타로트가 천천히 소멸하고 있었다.

“별것도 아닌 게 도망만 쳐대고 있어.”

투덜거리던 천마가 문득 이상한 점을 느끼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

휑한 바람만 그의 수염을 어루만졌다.

“뭐야? 다 어디 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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