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196화 (196/200)

23장 외전 : 방문한 망나니

#1

마왕 바알의 출현이라는 역대급 분기점을 맞이했던 인류의 역사는 최후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멸망이 유보되었다.

결과가 좋은 건 천만다행이지만, 워낙 많은 희생이 치러졌기에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수많은 병사가 싸늘한 시체가 되어 설원에 묻혔고 지휘관도 세기 어려울 만큼 많이 죽었다.

세븐 스타 중에서도 사망자가 나왔는데, 한때 대륙제일인이라 불리던 한스 기사단장이었다.

현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고 제국의 검이라 불리던 한스 기사단장은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상급마족의 집중 견제를 받았다.

처음에는 뛰어난 개인 무력으로 버티는 듯 싶다가 결국 최후를 맞이한 한스 기사단장.

제국의 큰 별이 지는 순간이었다.

한스의 사망 소식은 대륙 전역에 알려졌고, 이 소식을 접한 이들 중에는 제국에 반기를 든 반란군 수괴도 있었다.

성에 버틴 채로 제국군과 맞서 싸우던 반란군은 이 소식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한스라도 죽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러게나 말입니다.”

반란군의 처음 기세는 들판에 번진 불처럼 거셌다.

그들에게는 명분이 있었다.

알렉스 황태자가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이함과 동시에 사막 왕국을 등에 업은 파헬 황태자의 갑작스러운 등장.

제국 순혈주의를 주창하던 그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많은 귀족의 지지를 받아 반란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승승장구했다.

제국의 북서부를 완전히 장악했다.

그때쯤이었다.

마왕 바알의 출현 소식을 접한 건.

“정말로 마왕이 등장했다니, 전 아직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저희의 이목을 분산시키려는 유언비어인 줄 알았는데요.”

“덕분에 우리 처지가 곤란해졌습니다. 저희를 따라나선 영주들도 동요하는 중입니다.”

헛소문으로 치부했던 마왕 출현이 진짜였다.

승리를 거둔 군대가 당당하게 복귀하면서 생존자의 증언이 사방으로 퍼졌다.

그제야 북부 대설원에서 아르니아의 운명을 결정할 뻔한 대전쟁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대륙인이 알게 되었다.

그곳에서 수많은 영웅이 탄생했단 사실까지도.

“여론이 뒤집혔소. 이제 우리는 제국의 정통성을 지키는 수호자에서 대륙의 멸망을 지켜본 방관자가 되었단 말이오.”

당연하게도 여기 모여있는 귀족 구성원은 전원 한스 기사단장의 마왕 원정대 소집을 거절했다.

“일단 황태자 측에서 제일 성가셨던 한스 기사단장이 죽었으니 계속해봅시다. 비대칭전력인 소드마스터가 없는 건 저쪽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니까.”

회의가 끝나고 모두가 분분히 일어날 때, 문이 벌컥 열리며 숨이 턱까지 차오른 병사가 급하게 들어왔다.

“영주님! 큰일 났습니다!!”

“이 무슨 무례냐? 예의를 갖춰서 다시 들어와라.”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성 밖에 엄청난···설명이 힘듭니다. 밖에 나와서 직접 보십시오!”

반란군 수뇌부는 너나 할 것 없이 전부 성벽에 서서 그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정체불명의 거대 골렘 수천 기가 성을 포위하고 있었다.

심지어 못 보던 복색의 병사들도 잔뜩 몰려왔는데, 그 숫자가 족히 수만은 될 법했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병사가···”

“용사랍니다. 마왕을 물리쳤던 용사가 이곳을 직접 단죄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뭐라? 용사라면···헤논 로이드?”

“그렇습니다!”

듣기는 들었다.

촌구석 소왕국 엘든 왕국에서 여덟 번째 별이 떴다고.

사생아 출신 헤논 로이드라고 듣기는 들었는데 워낙 먼 동네 이야기고 약관이라는 젊은 나이에 소드마스터에 올랐다는 게 원체 허무맹랑해서 헛소문으로 치부하던 차였다.

그랬던 헤논 로이드가 여기까지 왔다니, 반란을 주도했던 제국 출신 귀족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들어라!!!!”

쩌엉!!

맞은편에서 헤논의 말이 들렸다.

증폭된 목소리에 내포된 강력한 기세에 저절로 다리가 풀릴 지경이었다.

“우리는 마왕을 해치우고 대륙을 구원했다. 그동안 너희는 무엇을 했는가? 자신의 운명을 남에게 맡기고 제 잇속이나 챙기려 들었다. 도대체 무엇이 순혈이고 무엇이 정통성인가! 대륙이 멸망하고도 너희가 추구한 가치가 남아있을 것 같더냐?”

헤논의 말은 구구절절 틀린 게 없었다.

반란을 주도한 귀족들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치심을 느낀 병사들이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좋지 않은 분위기였다.

“지금이라도 기회를 주겠다. 백기를 들고 항복해라. 그리하면 적어도 목숨을 부지할 기회를 주겠다. 그렇지 않다면···대륙의 분노를 온몸으로 겪게 되리라.”

웅성대는 소리가 높아졌다.

귀족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었다.

다른 놈들은 몰라도 주동자인 자신은 항복하더라도 살아남을 수 없다.

이렇게 되느니 끝까지 항전해서 부하들을 미끼로 던진 다음 틈을 봐서 몇몇 귀족과 함께 탈출하는 게 최선책이었다.

“뱀의 혀에 속지 마라! 우리는 충분히 이길 수 있다. 칼론 제국 만세! 우리가 진짜 제국민이다···커허억!! 쿨럭! 쿨럭!”

부하들을 선동하던 귀족은 가슴에 불같은 통증을 느끼고 기침을 토했다.

피에 젖은 검날이 심장을 뚫고 삐쭉 튀어나왔다.

뒤를 돌아보니 장교 한 명이 침통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히···네놈이 날 배신해?”

“배신은 당신이 했지. 저걸 보고도 싸우자는 말이 나와? 너는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우리를 전부 죽이려고 했다.”

가슴에서 검을 뽑은 장교가 이번에는 목을 날렸다.

그게 시작이었다.

남은 수뇌부들도 부하들에게 차례대로 사냥당했다.

잠시 후.

성벽 위에는 반란 주동자의 목이 꿰인 창대가 줄줄이 세워졌고, 그 옆에 백기가 펄럭였다.

반란 종결이었다.

* * *

성문이 열리고 진압군이 입성했다.

제 손으로 지도자를 없앤 반란군은 제국의 새로운 태양을 향해 엎드렸다.

파헬 황태자는 심란한 표정으로 이들을 굽어보다가 옆에 있던 헤논에게 말을 걸었다.

“덕분에 수월하게 끝났습니다.”

싸우지도 않고 반란이 끝났다.

한스 기사단장이 살아있었어도 최소한의 전투는 치렀을 텐데.

이것이 용사가 지닌 힘이었다.

파헬도 속으로 인정해야 했다.

아직까지는 제국의 힘이 건재하지만, 마왕 사건을 기점으로 칼론 제국은 쇠하고 용사의 존재감이 더욱 커질 것이다.

“골렘 군단을 보고도 싸우겠다고 하면 그게 미친놈이지. 무기도 안 통하는 거인들이 단숨에 성벽을 부수고 안쪽을 유린할 텐데.”

옆에서 파헬을 지켜보던 밤거미의 말.

본래 제국 뒷골목의 지배자였던 그녀는 파헬이 황태자에 오르면서 덩달아 양지로 올라왔다.

지금은 태사(황제의 스승)라는 그럴듯한 직함을 얻고 백작 작위도 받은 채 파헬의 옆을 지키고 있다.

난데없이 나타나 요직을 꿰찬 그녀의 행보를 두고 여러 뒷말이 많았으나, 정치 방면으로 워낙 능동적이고 빠삭한 여자라 금세 황실을 장악할 수 있을 것이다.

“헤논, 이제 어쩔 거지?”

파헬과 밤거미의 시선이 전부 헤논을 향했다.

헤논이 생각에 잠겼다.

한스 기사단장을 포함한 제국군은 자기 집에 불이 났는데도 마왕을 해치우겠다고 지원군을 보냈다.

그 의지가 고마웠던 헤논도 이에 보답하고자 반란을 진압해줬다.

해줄만큼 충분히 해준 셈이다.

이제 남은 건······

“날 찾지 마라.”

“호오?”

“휴가라도 떠나는가?”

“그렇다.”

더 이상 제국의 상층부과 엮일 일은 없다.

나중에는 생길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지금 당장은 없다.

“밤거미, 평생 너를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이하동문이다. 용사가 나타난다면 그것은 곧 대륙이 난세에 빠졌다는 의미니까.”

파헬이 헤논의 손을 잡았다.

“저는 마스터와는 조금 의견이 다릅니다. 어쨌든 저를 황태자로 만들어준 사람은 당신입니다. 황궁에 언제든 찾아오십시오. 칼론 제국은 용사를 환영합니다.”

파헬의 저 웃음이 진정으로 헤논을 생각해주는 웃음일지, 대륙의 실력자에게 미리 선을 대는 웃음인지는 모른다.

어쨌든 헤논은 장차 대제국을 다스릴 사람의 호의를 얻었고, 당분간 이 평화는 계속 유지될 게 분명했다.

#2

『에리카 호프』

『마왕이 출현했던 북부 산맥! 그곳을 지키던 용사 헤논이 매일 마시던 벌꿀 맥주 그대로 대접해드립니다. 』

제국 광장에 위치한 주점 하나가 대박 났다.

엘든 왕국에서 왔다는 젊은 여사장의 이름은 에리카로, 제국에 오자마자 본인의 이름을 딴 주점을 열었다.

실제로 그녀는 북부 블랙캐슬에서 블랙허니라는 주점을 운영했고, 그녀가 운영하던 술집은 캐슬의 심장으로 불렸다.

기존에 제국에서 취급하던 부드러운 맥주와는 달리, 달달하면서도 거친 목 넘김에 반한 소비자들은 구름처럼 에리카 호프로 몰려들었다.

“여기 벌꿀 맥주 셋!!”

“어이 사장님, 이쪽도 맥주 두 잔 달라고.”

“오늘은 토마토 스튜가 당기는 걸?”

“간단하게 먹을만한 안주도 부탁드릴게요.”

입소문을 워낙 타서인지 거친 사내들 말고도 신분이 높은 귀족이나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도 맛을 보러 왔다.

에리카는 특유의 손맛과 술맛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손님들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돈도 잘 벌고 미모도 출중하며 나이도 어린 여사장.

당연히 여러 사내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고, 평민은 물론이거니와 부유한 상인의 자제나 남작 작위를 받은 귀족도 있었다.

하지만 에리카는 전부 거절했다.

거절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단지 그녀에게 남자 관련해서 깊은 상처가 있지 않을까 추측할 뿐.

그때부터 그녀에게는 꺾이지 않는 눈꽃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

오늘도 에리카는 정신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다가 잠시 손님이 뜸해지자 카운터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딸랑딸랑

문에 설치해둔 종이 울리면서 손님 셋이 들어왔다.

남자 둘에 여자 하나.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체격이나 풍기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았다.

“어서오세요.”

“벌꿀 맥주 셋.”

“네, 자리에 앉으세요.”

돌아서서 맥주를 따르려는 그녀를 손님이 붙잡았다.

“하나만 묻지.”

“말씀하세요.”

“여기가 정말로 용사 헤논이 방문했던 술집이 맞나?”

헤논의 이야기가 나오자 에리카의 얼굴이 급격하게 밝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에게 헤논은 인생을 바꿔준 은인이자 에리카 호프를 대박 나게 해준 마스코트 같은 존재였다.

만약 이 술집이 용사와 무관한 술집이었다면 절대 여기까지 성장하지도 못했을 거다.

이를 정확히 알고 있는 에리카는 헤논을 떠올리자마자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님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럼요!! 아직도 전 기억나요. 그때는 용사님께서 이 정도로 유명하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망나니로 지탄받으실 때였죠. 가문에서 버려져서 레인저 근무를 하시게 되었는데, 훈련이 끝나면 항상 블랙허니로 오셔서 제가 만든 맥주를 드셨어요.”

밝게 재잘대는 에리카를 보며 후드 아래로 하관만 드러난 남자의 입가에 얇은 미소가 맺혔다.

“좋은 이야기로군.”

“사실에 기반한 이야기니까요. 아무튼 앉으세요. 제가 헤논님이 드셨던 맥주랑 똑같은 맥주를 드릴게요.”

손님들이 자리에 앉고 에리카가 콧노래를 부르며 맥주를 만들기를 한참.

갑자기 문이 우지끈 부서지며 험상궂은 사내들이 몰려와 흙발을 들이밀었다.

“꺄아아악!!”

앉아있던 귀족 영애가 뾰족한 비명을 지르며 술집 바깥으로 줄행랑을 쳤고 나머지 손님들은 고개를 식탁에 처박은 채 힐끔힐끔 불청객을 쳐다보았다.

“누, 누구시죠.”

당황한 에리카.

대장으로 보이는 사내 하나가 그런 에리카를 바라보며 얼굴을 팍 구겼다.

“소문 들었다. 네년이 동네 술값을 독차지한다는 사기꾼이냐?”

“예? 도대체 무슨 소리세요?”

“내 말이 맞잖아. 네년 사실 북부는커녕 북쪽으로 오줌도 싼 적도 없으면서 북부에서 술집 했다고 거짓말 했잖아.”

불량한 자세를 취하며 건들거리는 사내를 보고 에리카는 말문이 턱 막혔다.

“그게···”

“아니야? 내 말이 틀렸어?”

“저는 정말로 북부에서 블랙허니라는 술집을 운영했어요.”

“하이고, 똥을 싸라 그냥. 너 같이 가녀린 계집이 마왕이 나왔던 북부에 있었다고? 얘들아,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아닙니다, 형님! 저년은 사기꾼이 분명합니다.”

“보나마나 용사에게 맥주를 대접했다는 것도 헛소문이겠지. 안 봐도 뻔하다.”

“진짜예요!”

얼굴이 붉어진 에리카가 소리를 빽 질렀다.

화가 머리끝까지 솟은 그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북부에서 술집 했다는 건 거짓말이라고 마음대로 생각해도 돼요. 하지만 용사님에 대한 발언은 취소해주세요. 이 술집은 그분과 그분을 모시던 시온이라는 제 친구와의 약속이니까요.”

에리카의 말을 들은 건달들은 서로를 마주 보더니 입술을 씰룩였다.

그리고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결국 박장대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크핫하하하하!!!”

“푸흡? 뭐? 약속?”

“인제 보니 이년 이거 완전히 망상증 환자였구먼.”

한참이나 에리카를 비웃은 사내는 성큼 걸어서 그녀와의 거리를 좁혔다.

덩치 큰 남자가 다가오자 본능적으로 위협감을 느낀 에리카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치다가 등이 벽에 닿았다.

그런 에리카에게 얼굴을 들이민 사내가 흉측하게 웃으며 말했다.

“좋아. 네년의 말이 사실이라 치자고. 누가 그걸 증명해주지? 응? 누가 네년이 만든 맥주가 용사가 마시던 맥주와 똑같다고 말해주냐고.”

“그건···”

“당장 내가 내일 너희 집 앞에 술집을 차려서 똑같이 말해줄까? 용사가 마셨던 맥주라고? 그러면 내 말은 누가 증명해주는데? 지나가던 똥개가 말해주나? 으핫하하하하!!!!”

술집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에리카는 분한 마음에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무례한 행동과 별개로 저 건달의 말은 일리가 있었기에.

“딱 일주일 준다. 알아서 눈치껏 장사 접고 빠져라. 만약 무시하면···어떻게 될지는 네가 더 잘 알겠지.”

어찌나 열이 받았는지 손을 부들부들 떠는 에리카를 내버려둔 채 사내가 등을 돌렸다.

주점 문을 열고 나가려던 찰나.

그의 귀에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사가 마시던 술과 똑같군.”

대장격인 사내가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뒤따라가던 건달들도 일제히 걸음을 멈추었다.

실내에 있던 손님들 포함, 에리카까지 방금 소리를 내뱉은 사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뭐라고?”

“귓구멍이 막혔나? 용사가 마시던 술과 완전히 똑같다고 말했다. 몇 년이 지나도 술맛은 그대로야.”

앉아있던 손님 중 몇 명이 ‘저런!’ 혀를 차며 탄식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방금 사내가 젊은 혈기를 못 이기고 실수했다고 여긴 탓이다.

그들이라고 왜 화나지 않겠는가.

맛있는 벌꿀 맥주를 즐기던 주점이 강제로 문을 닫게 생겼는데.

그럼에도 참았던 이유는 에리카의 딱한 사정에 동조해주기엔 본인의 안위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호오라, 여기 또 천지분간 못 하는 멍청한 망아지 한 마리가 등장하셨군.”

주먹을 꽉 쥔 건달이 팔자걸음으로 방금 망언을 내뱉은 사내에게 다가갔다.

“여기 점장년이 예쁘장하고 술맛도 좋으니까 막 나서고 싶었나? 우리 같은 놈들 앞에서 목소리 좀 크게 세우고 박수받고 싶었어? 그런데 이걸 어쩌나? 여기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곳이 아닌데.”

콰아아앙!!!

건달의 발차기 한 번에 식탁이 부서지고 위에 놓여있던 안주와 맥주잔이 바닥에 죄다 흩어졌다.

“딱 한 번 기회 줄게. 네놈의 발언을 증명해봐. 증명하면 깨끗이 물러나 주마. 하지만 증명하지 못한다면···”

스르릉

검집에서 검이 반쯤 뽑혀 나왔다.

“적어도 팔 하나는 잘라주마.”

숨 막히는 정적.

오죽하면 마른침을 꼴깍 넘기는 소리까지 들릴까.

문제를 일으킨 사내는 후드를 깊게 눌러 쓰고 있어서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최후통첩을 받은 사내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는 후드에 달린 모자를 벗었다.

모자가 벗겨지며 윤기 있는 흑발이 내려왔고 하얀 피부와 오뚝한 이목구비, 그리고 요요한 녹안이 모습을 보였다.

콰당!!

카운터 쪽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에리카가 너무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헤논님!!”

그녀가 부른 이름의 파장은 컸다.

술꾼들이 일제히 웅성댔다.

“헤논? 진짜 그 헤논이야?”

“용사라고? 저 사람이?”

“들은 적 있어. 흑발에 녹안. 일단 생김새는 똑같은데.”

“진짜 용사가 왜 이런 술집에 와.”

“못 들었어? 여기 사장님이 용사랑 친하대잖아.”

“그러면 저 젊은 여사장이 했던 말들이 전부 사실이란 말이야?”

헤논은 단지 시작일 뿐.

옆에 있던 사내와 여인도 각각 후드를 벗었다.

덩치 큰 캠벨과 보라머리 여인 시온이 모습을 드러내자 에리카는 주저 없이 시온에게 가서 안겼다.

“시온! 캠벨! 이게 얼마 만이야! 흐어엉엉엉.”

“에리카, 제국에 번듯한 주점을 연다고 하더니 정말로 약속을 지켰구나. 네가 자랑스러워.”

“흐어어어엉.”

세상이 꺼질 듯 우는 에리카와 눈물을 글썽이면서 그녀를 꼭 안아주는 시온.

뒤에서 조용히 눈을 비비는 캠벨까지.

갑자기 펼쳐진 상황에 당황한 건 건달들이었다.

“설마···아니지?”

“너희가 생각하는 그 설마다.”

“거짓말 마라!!!”

현실을 믿기 힘든 건달이 헤논을 향해 달려들다가 멈칫했다.

오색찬란한 기운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기에.

소드마스터의 상징.

오러 블레이드였다.

“오러 블레이드!!”

“진짜였어! 저 사람 진짜 용사야!”

“세상에, 내가 태어나서 용사를 실제로 보게 되다니!”

“와아아아아!!!!”

술꾼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환호했다.

몇 명은 탁자 위에 올라가서 술을 자기 머리에 붓기도 했다. (왜 그러는지 이유는 모르겠다.)

그야말로 광란.

상황이 잘못됐다고 판단한 건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용사님을 몰라뵈었습니다!!”

건달 대장이 식은땀을 흘리며 피가 나도록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무슨 짓이야. 주점 바닥이 더러워지잖아.”

“죄송합니다!!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저희는 그저 윗선의 명령을 받았을 뿐입니다!”

“윗선이 있었다라?”

“예!”

“그럼 한 명만 가서 너희 대가리 불러와. 못 불러오면 어떻게 될지 알겠지?”

왼손으로 가위 모양을 그리며 오른팔을 싹둑 대자 낯빛이 하얗게 질린 건달 대장이 부리나케 술집을 빠져나갔다.

이윽고 10분 후에 건달 대장이 심상찮은 분위기를 풍기는 상관을 데려왔다.

상관은 술집에 바깥에서부터 이미 투덜대고 있었다.

“어디서 말도 안 되는 구라를 쳐! 보나마나 용사 사칭범이겠지.”

“아닙니다! 오러 블레이드를 쓰는 진짜 용사였습니다!”

“오러 블레이드? 네가 오러 블레이드를 본 적은 있어?”

“아뇨.”

“모르면 닥치고 있어. 용사는 내가 실제로 본 적 있으니까 얼굴 보면 딱 나와. 헤논 그 빌어먹을 새끼가 내 주점을 박살 냈던 순간은 잊고 싶어도 잊히지가······”

술집에 들어온 상관이 헤논과 눈을 마주치고 딱 멈췄다.

그의 관자놀이에서 맑은 땀방울이 한줄기 떨어졌다.

“···용사님?”

“너였구나.”

상관은 헤논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흑야에 볼일이 있을 때 때 항상 가던 메리보 주점.

그곳의 점장이었으니까.

“너 나 기억하지? 이름이 뭐였더라?”

“옙! 전 올가입니다!”

“있는 술집이나 잘 경영하지, 왜 남의 술집을 건드려? 그것도 내 친구가 운영하는 술집을.”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시정할 필요는 없고. 안내나 해.”

헤논의 말에 올가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로 말입니까?”

“어디긴 메리보 주점이지.”

“제 주점에는 어째서···”

“내가 거길 왜 갈 것 같아?”

넌지시 물으며 악마 같은 미소를 짓는 헤논.

그제야 올가는 깨달았다.

이번에 또 자신의 술집은 헤논에게 박살이 날 것임을.

속으로 절규하던 그가 결국 체념하고 머리를 떨구었다.

“안내하겠습니다.”

그 날을 기점으로 메리보 주점은 간판만 남고 완파됐다.

에리카 호프에서 일어난 일은 호사가들의 입소문을 타고 일파만파 퍼졌다.

용사와 에리카의 숨은 친분이 밝혀지면서 그녀에게 치근덕대던 사내들은 싹 사라졌고, 안 그래도 호황이었던 장사는 대호황을 맞아 분점을 차리기에 이르렀다.

에리카.

그녀는 십 년 후 오스딘 시티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었다.

그리고 캠벨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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