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의무방어전-1화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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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화 〉 프롤로그­합궁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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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개의 민족.

인간을 포함한 4개의 종족.

그것들을 한데 아우르는 대국인 천제국.

천 개의 산과 백하고 여덟 개의 강. 30억 제국민들의 정점에 선자이자 30개의 민족 중에서도 가장 유서 깊은 한족의 황후에게서 난 적장자.

그게 바로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였다.

약관을 막 넘긴 나이에 황위에 오른 그가 가장 먼저한 것은 스물 여섯 명의 형제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그는 세력이 큰 형제는 죽이고, 노골적으로 황위를 노리는 형제는 본보기로 삼았으며, 자신에게 복종을 맹세한 형제는 곁에 두고 그 세력만을 잘라 내었다.

2년.

그가 이 모든 일을 끝내는 데 걸린 시간이 그 정도였으나 그것은 실상 모든 일의 끝이 아니고 오히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드디어 안밖에 문제를 정리하고 황위를 공고히 한 그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하는 황제의 업무는...

"본격적인 합궁의 순서는..."

바로 합궁. 즉 잠자리의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었다.

황제의 책무는 30개의 민족과 4개의 종족을 한데 아우르는 것에 있었으며, 그러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혼인을 통한 피로 이어진 혈맹이었다.

즉... 그는 30명 하고도 인간을 제외한 3명.

그들과 잠자리를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황제에겐 그야말로 끔찍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꼭... 해야 하는가?"

그래서일까? 그의 얼굴엔 벌써 싫은 기색이 역력했다.

"폐하. 벌써 폐하의 나이가 약관을 넘긴 지 2년이 지났습니다. 늦어도 한참 늦은 시기입니다. 선제께서 첫 합궁을 하신 시기가...."

'또 시작이군.'

황제는 옆에서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하는 재상을 보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여러 민족을 아우르며 황실의 피를 보전하는 것은 황제의 의무였고, 그것은 황제의 단순한 기호로 미룰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황권의 안정이라는 거대한 명분으로 미뤄왔던 의무를 수행하라는 재상의 요구를 거부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짐은 참으로 내키지가 않는구나."

황제의 입에서 약한 말이 튀어나왔다.

"폐하께서 여인을 멀리하시는 건 익히 알고 있사오나... 이것은 응당 해야 하는 일이며 사직을 위해서라도..."

"그만. 잘 알았으니 되었다. 그래서 결과는 어찌 되었는가."

매번 하는 천신에게 드리는 제사.

사직을 위해서라도 황후의 존재는 필수 불가결이었다. 지금까진 황태후께서 대신 수고해주셨으나 언제까지 그게 가능할 리 없었다.

그렇기에 황제는 체념한 얼굴로 순번을 물었다.

합궁에 어떤 민족이 먼저일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첫 장자를 낳은 여인이 바로 황후의 자리에 오른다.

그렇기에 그 기회를 가장 먼저 잡을 수 있는 첫 순번을 원하는 건 어느 가문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진륜족에서 먼저 여인을 보내기로 되어 있습니다."

진륜인가...

황제의 얼굴에 근심이 어렸다.

최근에 이 제국에 적을 두기로 한 일족이던가?

주술을 주로 사용하는 자들이기도 했다.

"진륜의 어느 가문의 여식인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나?"

"쿤룬 가문의 장녀로 알고 있습니다."

진륜족에서 가장 큰 명가에서 여인을 보낸다는 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은 내키지 않으니 미루는 것은..."

물론 이해했다고 당장 하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폐하! 미루다니요! 차라리 신을 죽여주시옵소서! 폐하를 바른길로 인도하지 못한 이 불충한 신하의 목을 베어 효수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다면 합궁 건에 대해서는 재상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겠네."

아예 머리까지 박으면서 읍소하는 재상의 모습에 기가 질려 버린 황제는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재상 정도의 충신의 충언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폐하!"

감격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저 나이 든 신하를 보면서 물러갈 것을 명한 황제는 이마를 감싸 쥐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혐오스럽군.'

아직도 황제의 눈엔 생생했다.

황태후의 명이라면서 내명부에서 궁녀들을 통해 가르친 여체는... 그 시절 어렸던 황제에게는 그저 혐오스러웠다.

다름에서 오는 혐오감.

자기 몸과 다른 인간의 몸을 본다는 것이 이리도 역겨운 것인지는 황제는 그때 처음 알았다.

어렸을 때의 끔찍했던 기억은 오래 간다고, 황제에게 그 교육의 내용보다는 여체에 대한 혐오감이 더욱 강하게 자리했다. 여전히 황제는 여성이 거북했다.

그래서 그런지 합궁이 황제에겐 매우 혐오스러웠다.

합궁을 한다는 것은 즉...

그걸 직접 두 눈으로 보고 만져야 한다는 이야기였으니.

'끔찍하군.'

황제가 심적인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을 때 집무실로 들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폐하."

"...진이더냐."

황제는 자기 앞에 선 남자를 보면서 조용히 그 이름을 불렀다.

9척에 가까운 거구.

남자답게 생긴 잘생긴 얼굴과 근육질의 몸이 돋보이는 이 남자가 바로 황제의 호위무사이자, 금군의 대장인 금위대장을 맡은자였다.

황제의 부름에 남자의 검은 눈동자가 황제를 향하더니 곧 부드럽게 휘어졌다.

"아직도 여자가 그리도 무섭습니까?"

"...베어 버리면 되니 무섭진 않구나."

오싹!

처음엔 그저 놀리려고 했던 진이었으나 황제의 대답에는 오한이 돋았다.

늘 이런 식이었다.

오래 알고 지낸 친우이자, 충성을 맹세한 주군이건만... 이따금 느껴지는 저 잔인한 성정은 두렵게만 느껴졌다.

"폐하..."

"농이었느니. 황후가 될지도 모를 여자를 베어버려선 아니되겠지. 네가 걱정하는 게 무엇인지는 잘 안다."

농이라니! 저 얼굴로 농이었다니!

진은 믿을 수 없었지만 어쩌겠는가. 지존께서 농이라 하시니 그렇다고 생각해야지. 진은 그런 생각하며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송구하옵니다."

"그래, 해야겠지. 황제가 되기로 한 이상. 이미 각오한 일이었다."

그랬을 텐데... 황제는 여전히 망설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필사적으로 혐오감을 억누른다.

그래, 형제들을 베어 버리며, 자신을 가로막는 이를 베어 버리며, 피로 손을 더럽히면서 이 자리를 유지했다.

심지어 그 모든 행동은 자신이 황제의 자리를 원해서 행한 것이 아니었고, 단지 맡은 일을 다하겠다는 책임감 때문에 벌인 일이었다.

혐오스러운 걸로 따지면 자신이 더한 존재가 아닌가.

그렇기에 황제는 자기혐오로 그 감정을 이겨 낼 수 있었다.

"그래... 혐오스러운 존재가 혐오스러운 존재를 안는 것이 도리에도 맞겠지."

"폐하..."

진은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보는 눈이 있어서 그런지 자중하는 듯 보였다.

그게 맞았다.

아무리 친우 사이라고 해도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하는 법이니...

"벌써 시각이 시각이구나. 따라오거라. 짐은 이제부터 훈련을 할 터이니."

집무실을 나서며 뒤따르는 내관들을 돌려보낸 황제는 연무장에 도착하기 무섭게 진에게 말을 걸었다.

"이번에도 도와주겠지. 짐은 그대를 믿고 있으니."

목검을 들면서 황제가 자신을 보자 진은 부담스러움을 느끼면서도 목검을 들었다.

늘 이런 식이었다.

황제의 대련에 어울려줄 수 있는 수준의 검사는 이 대륙에서도 손에 꼽았으며, 애석하게도 황실 소속 중에서는 진 단 한 명뿐이었다.

나머지에겐 미안 하지만 대련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럼 부담 없이 가겠습니다."

"그래야 할 거다."

간단한 말이었지만 진은 그가 무슨 의미로 저런 말을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못 버틸 거다. 그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겠지.

진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검을 배우며 수학하던 사이였기에 더욱.

휘익!

선공은 진이었다.

빠르게 접근한 진이 황제를 향해 목검을 휘둘렀다. 도저히 지적할 부분이 없을 정도로 깔끔한 내려치기!

그러나 황제는 그 목검을 어깨를 살짝 움직이는 것만으로 피해내고는 오히려 진의 복부를 목검의 손잡이 부분으로 가격했다.

우득!

"...장난하지 마라. 재미없으니."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저 멀리 날아간 진은 그 말에 바로 몸을 일으키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이지... 최선을 다한 건데요."

갈비뼈가 부러졌나? 진은 역시 황제와 대련은 힘들다고 생각하면서 차분하게 호흡을 골랐다.

부러진 뼈를 강제로 기를 운용해 맞추면서 단단히 고정시킨다.

전장에서나 쓰는 기술을 대련에 써야 한다는 사실에 진은 기뻐해야 하나 슬퍼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오거라."

이번에도 역시 선공을 허용한 황제는 진이 다시 한번 공격 후 나가떨어지자 이번엔 딱히 실망을 표현하지 않았다.

"일어나."

그저 명령할 뿐.

후들거리는 다리로 다시 일어선 진은 황제의 얼굴에서 느끼는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저건... 안타까움인가?

저 황제가 대체 무엇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다시 한번 가겠습니다."

진은 지금은 대련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안타깝군."

진과 대련 후에 개인 단련까지 마치고 난 후에야 궁으로 돌아온 황제는 탕에 몸을 담근 채 중얼거렸다.

덤덤하게 그런 황제의 입욕을 돕고 있던 궁녀들은 그 말이 안 들리는 듯 침묵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상황에서 섣부르게 입을 열면 그 혀가 잘릴지도 모른다는 걸 모르는 궁녀들은 감히 황제의 옆을 보필할 수도 없었으니.

'그리 약해진 건가?'

진과의 대련은 결과적으로 황제의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 녀석이 그 짧은 사이에 약해진 걸까? 황제는 슬프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너무나도 강해져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

'고독하구나.'

황제는 알 수 없는 고독함을 느끼면서도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진은 황제가 믿을 수 있는 부하였으며, 그의 검이었으니까.

검보다 주인이 강하다고 해서 그 검이 쓸모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 진륜족의 아이가 이미 도착해 있다고."

"네, 지금 침소에 들였습니다."

"...그래, 씻고 그쪽으로 가겠으니 그리 전하거라. 그리고 어의에게 당장 이곳으로 오라고 전하도록."

"네."

황제는 그리고 드디어 때가 찾아왔음을 느꼈다.

합궁.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여자를 안아야 하는 날이 찾아왔으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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