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의무방어전-7화 (7/235)

〈 7화 〉 실패한 합궁, 황제의 자비

* * *

"폐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재상은 당연하다는 듯이 집무실에서 황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합궁 일자가 잡혔다지."

황제는 그런 재상을 보며 자신의 자리에 앉고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두 번째 순서인 달막족에서 여인을 보내 왔습니다."

달막족.

꽤 오랜 세월 제국에 충성을 바쳐 온 민족이다. 그리고... 황제가 다른 형제들을 숙청을 할 때 가장 먼저 견제한 곳이기도 했다.

그들의 특징이라면 역시 창백한 느낌이 드는 흰 피부겠지.

"달막족의 어느 가문이지?"

물론 모든 달막족을 가혹하게 대한 것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미친왕의 뒤를 봐주던 가문의 장자가 선을 넘기에 제거했을 뿐이라.

"푸른 달 가문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

푸른 달 가문이라면 미친왕과... 황제는 생각을 정리하면서 재상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이 흐름은 황제의 예상을 현실로 만드는 흐름이었다.

"푸른 달 가문의 푸른 달 하늘이라는 여인입니다."

"흠..."

재상의 말에 황제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 들어도 달막족의 이름은 쉽게 적응되지 않았다.

푸른 달이 성이니까 이름은 하늘인가? 이름도 적응되지 않지만... 달막족에서 하필이면 푸른 달 부족에서 사람을 보낸 것도 마음에 걸렸다.

"...걸리는 게 있군."

황제는 그 이름을 듣고는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무슨 일입니까?"

"푸른 달 가문은 내가 알기로 미친왕과 혼약이 오고 가던 곳이 아니던가?"

물론 푸른 달 가문의 장남이 황권 강화를 위한 피의 숙청 때 목숨을 잃어 혼약이 취소되긴 했지만, 아무튼 황제는 미친왕이 그곳의 여자와 꽤 깊은 관계였다고 알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그때 미친왕과 꽤 깊은 관계였던 여식이 바로 지금 언급된 여인 같던데 말이야."

그리고 그 여자가 바로 지금, 이 푸른 달 하늘이라는 여자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런 여자를 황제에게 바친다? 아무리 생각해도 걸리는 게 많았다.

"왜 그런 인선일까? 재상은 뭔가 짐작 가는 게 있나?"

솔직히 말해서 황제는 그 의도가 좋아 보이진 않았다.

"흠... 좋은 의도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건 재상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혼약이 깨진 여인을 황제에게 보낸다니... 재상은 자기 실수를 인정했다. 좀 더 조사해보고 했어야 했는데 합궁을 서두르느라 정작 제대로 된 조사가 부족했다.

사실 달막족에서 푸른 달 가문이 선별되었을 때부터 경을 쳤어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일은 폐하께서 장남의 목숨으로 덮어두기로 했기에 폐하의 자비를 보일 겸 넘어간 건데...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재상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지금으로선 푸른 달 가문의 저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재상은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그런 결함이 있는 여인을 황제에게 보냈다는 것 자체가 불순한 의도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이게 다 소신이 부덕하여 급하게 합궁 일자를 잡은 탓입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당장 그 여자를 돌려보내고 소신 역시 그 자리에서 목을 매어 사죄를..."

재상이 당장에라도 목을 맬 기세이자 황제는 그런 그를 만류했다.

"그만, 재상의 잘못은 과인의 부덕함 탓이니 과인은 재상을 책망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재상의 죄는 더욱 성실하게 일하는 것으로 갚도록."

"폐하...!"

재상이 그 말에 감동한 듯 눈물을 글썽거리자 황제는 턱을 만지작거리면서 명령했다.

"마침 잘되었어. 확인해 볼게 있었으니 그 여자는 그대로 두게. 단 이번엔 호위무사들을 침소 곁에 두도록. 은밀하게."

"...알겠습니다."

은밀하게라는 말에 재상은 황제의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떤 상황인지 한번 보자꾸나.'

자신의 생각이 틀리기를 바라지만... 황제는 세상이 이미 자기 뜻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황제는 싸늘한 얼굴로 침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

"언제나 그런 생각을 했지. 어쩌면, 그 자리는 나한테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지 않았을까 하는..."

지금으로부터 일주일 전, 달막족의 수장이 기거하는 저택에 방문한 손님은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여자가 아닌가 의심스러운 곱상한 얼굴에 칠흑 같이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청년.

이 손님의 황금색 눈동자가 그의 신분이 범상치 않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미 지난 이야기지 않습니까."

그런 남자 앞에 있던 창백한 인상의 중년 남자는 차분한 어조로 대답하며 차를 마셨다.

"하늘이는 잘 있습니까?"

그런 중년 남자를 향해 청년이 느긋한 어조로 묻자 남자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전하께서 신경 쓸 일은 아닙니다. 그 아이의 앞날을 막아 버린 건 전하시지 않습니까."

남자는 약간 원망이 담긴 눈동자로 손님을 쳐다 보면서 대답했고 그 말에 청년은 난처한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하하... 그건."

확실히 혼약이 이미 한 번 깨진 처자는 다른 혼처를 구하기 힘드니... 앞길을 막았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그보다 이곳을 찾은 이유를 들어도 되겠습니까? 미친왕 전하께서 이곳을 찾은 걸 폐하께서 아시기라도 한다면 저희의 계획이 들킬까 우려됩니다."

계획.

그 말대로 청년.

아니 미친왕은 나름대로 계획이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아직까지도 이미 혼약이 취소된 이곳과 연을 이어오고 있었던 거니까.

"들킬 일은 없습니다. 형님은 저를 아주 신용하니까요."

미친왕은 자신감이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그에겐 황제가 자신을 깊이 신뢰하고 있으며, 그 신뢰가 황제의 눈을 가리고 있을 거란 믿음이 가득했다.

"...그 말만을 믿고 있습니다. 그 전제가 뒤틀린다면 계획은 참혹하게 실패할 터이니."

남자는 그 말에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 말대로였다.

남자와 미친왕의 계획은 모두 미친왕을 황제가 신뢰한다는 것에서 나오니까.

"하늘이가 잘해 주길 바라야겠지요. 실패하면 당신들에겐 다음은 없습니다."

물론 미친왕이 자신의 역할을 다해도 결국 최종적으로 그 계획을 실행해야 하는 건 하늘이였다. 그렇기에 미친왕은 진지한 얼굴로 경고했다.

"그렇게 남 일처럼 이야기해도 되는 겁니까? 우리가 실패하면 전하께서도 무사하지 못할 텐데 말입니다."

그 경고에 남자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답하며 미친왕을 노려보자 미친왕은 실실 웃었다.

"설마 형님이 사랑하는 동생을 증거도 없이 핍박하겠습니까? 그대들이 실패 후에 아무리 부르짖어봐야 형님은 제 말을 더 신뢰할 텐데 말입니다."

"..."

재수 없는 이야기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미친왕을 황제가 아끼는 것은 사실이었고, 이 계획이 들통난다면 미친왕이 개입했다고 주장해 봐야 죄인들의 중상모략으로밖엔 보이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도 남자는 미친왕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하늘이에게 황궁 안에서 '그것'을 들키지 않고 전달해 줄 수 있는 존재는 이 남자 뿐이었으니까.

"부디 잘 부탁합니다."

그렇기에 남자가 할 말은 이것뿐이었다.

그저 이 남자의 도움을 기대하며 머리를 숙이는 것.

'황제...'

미친왕을 향해 고개를 숙이면서도 남자는 황제에 대한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자기 아들이 무참하게 황제의 손에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비참하게 황제 앞에서 머리를 조아려야 했던 그 순간이.

아들의 행동은 일족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그 아이의 독단이었다고.

가문을 지키기 위해, 달막족을 지키기 위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무릎을 꿇어야 했던 그때가!

물론 그 아이의 죄는 죽어야 할 죄였다. 반란의 죄는 원래라면 일족을 멸하는 것이니 그 아이 하나로 끝내준 황제가 자비로웠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

허나 그 아이가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야 했는가?

아무리 죄를 지었다고 한들, 가마솥에 삶아져서 죽어야 할 이유가 있었나? 그토록 잔인하게 사람을 죽일 이유였는가?

그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말 자비를 베풀 생각이었다면... 적어도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게 해주었어야 한다고 남자는 생각했으니까.

'황제...! 황제...!'

가마솥에 들어가 삶아지는 아들을 지켜보면서... 남자는 속에 분노를 쌓아갔다.

언젠가 황제에게 복수할 날을 꿈꾸면서... 이 날만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 복수를 위한 순번을 받아 냈다.

그날은! 황제가 천국이 아닌 지옥으로 떨어져야 할 순간이었다.

­­

황제는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을 하던 뒤에 탈이 없으려면 깔끔하게 연루된 가문의 일족을 멸하는 것이 정답이라는 것을.

하지만 황제는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그야 그 편이 더 재미있으니까.

이 지긋지긋한 일상에 신선한 자극이 되니까.

반란 시도와 암살 미수는 황제에겐 그저 유희 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방치했다.

애초에 황제는 그들이 자신을 죽일 수 있을 거란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많은 자들이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언젠가 자신을 물어뜯을 비수를 품고 있다면 그것대로 재미있을 테니까.

황제는 그들이 굴욕도 참아내며 준비한 비수를 조롱하며, 그것을 짓밟아버리는 걸 좋아했다.

그것은 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저벅. 저벅.

침소로 걸음을 옮긴 황제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창백한 얼굴의 미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갈색 머리카락, 청초한 느낌이 드는 가녀린 인상의 여인은 그들의 분홍색 한복을 입고는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사옵니다. 폐하."

그 고운 입술이 열리면서 옥이 굴러가는 듯한 미성이 들려왔다.

"..."

황제는 덤덤하게 그녀를 살폈다.

객관적으로 보면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꽃엔 가시가 있는 법이고, 황제는 그녀가 품은 가시를 확인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었다.

"벗어라."

황제는 덤덤하게 명령했고, 그 명령에 잠시 몸을 움찔한 여자는 옷을 벗었다.

소담한 가슴과 분홍색 유두가 고스란히 드러났고, 가는 선에 고운 몸매가 등불 아래에서 반짝였다.

숱한 남자들이 침을 삼킬만한 모습이었지만 황제는 덤덤하게 그녀를 훑어볼 뿐이었다.

아니 덤덤하게는 아니였다.

구역질을 참아내면서 그녀의 몸을 살펴보았다.

'몸에 숨긴 건 아닌가?'

어떤 방법을 준비했을까?

과연 무엇을 준비했을까?

황제는 자신이 과민 반응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어느 정도 하고 있긴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분명 그녀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아니 숨기고 있어야 했다.

"저기... 소녀. 그렇게 쳐다보시면 부끄럽사옵니다. 감히 바라옵건데 등불을 꺼도 되겠습니까?"

"그래."

그녀의 제안에 황제는 순순히 등불을 껐다.

솔직히 더 이상 여체를 보기 거북했으니까.

'정말 아무것도 없나?'

그렇다면 이 여자를 안아야 하는데?

황제는 제발 뭐라도 있기를 바라면서 옷을 벗고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긴장으로 침을 삼키는 걸 느끼면서 황제는 덤덤하게 그녀에게 다가가서 가슴에 손을 얹었다.

"아..."

그녀가 부끄러운 듯 신음을 흘렸으나 황제는 놓치지 않았다.

그 순간 그녀에게서 보인 약간의 적의. 그리고...

푸욱.

"...모두 들어와라."

그녀의 손이 허벅지 아래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자신의 목을 찌르는 것까지 말이다.

황제는 자신을 침으로 찌르고 있는 여자의 손을 꽉 잡은 채 무사들을 호출했다.

그 순간 대기하고 있던 무사들이 순식간에 들이닥쳤고, 황제는 지금 상황을 그들에게 고스란히 보여 주며 말했다.

"증거는 이걸로 충분하겠지."

"어, 어째서 독이..."

여자는 당황한 얼굴로 황제를 쳐다보며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호랑이도 순식간에 절명시키는 맹독을 바른 침을 맞았는데도 멀쩡하다니?

모든 준비는 완벽했다.

사랑하는 그에게 받은 침으로 황제를 죽이고, 오라버니의 복수를 할 생각이었는데...

황제는 멀쩡했고, 자신을 보는 눈은 그저 길가에 돌멩이를 보는 것과 같이 아무런 감정도 담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이렇게 현장에서 잡혀 버렸다.

여자, 아니 푸른 달 하늘은 무사들에게 자기 알몸을 보이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릴 만큼 지금 상황에 충격을 받고 있었다.

"어찌할까요."

무사들이 하늘의 나신을 보고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한 채, 붉어진 얼굴로 황제에게 묻자 황제는 바로 옷을 입으면서 말했다.

"이 여자는 고문해서 정보를 캐내라, 형체를 유지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 말에 하늘은 몸을 떨었다.

형체를 유지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말은... 그 어떤 잔혹한 고문도 허가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당장 금위대를 보내서 푸른 달 가문의 모든 식솔들을 잡아 와라. 그쪽은 저항하면 사살해도 좋다. 그리고 달막족의 다른 가문 수장들도 함께. 그들은 비교적 정중히 모셔오도록. 지금 당장."

하늘은 황제의 말에 절망했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무사할지 모른다는 바보 같은 기대를 품었다.

바보같이...

"마지막으로 미친왕을 내 앞으로 끌고 와. 당장. 저항하면 팔 다리 정도는 잘라도 좋다."

"네."

이 괴물 같은 황제에게 들킨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 않았을 텐데...

하늘은 그제야 자신에 대한 고문은 그저 의례적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미 황제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계획도, 그리고 그 계획에...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

미친왕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도. 전부 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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