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 그걸 굳이 보여줘야 아십니까?
* * *
따사로운 햇살이 기분 좋은 오후 2시.
집무실에서 휴식을 즐기고 있던 황제는 내심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달막족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기에 다른 민족에도 대대적인 조사가 필요하다며 합궁이 무기한으로 미뤄졌기 때문이었다.
"무엇이 그리도 즐거우십니까?"
그런 황제의 기분을 읽었는지 앞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나르타가 의아한 얼굴로 물어왔다.
그녀는 마치 이 집무실이 자신의 집인 것 마냥 편하게 앉아서 차를 즐기고 있었다.
"그래 보이나?"
나르타의 질문에 황제는 모처럼 기분이 좋았기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해주었다.
"네, 그것도 아주."
나르타는 그 모습을 보면 꺼림칙하다는 듯이 몸을 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와의 합궁이 있었던 날도 어느새 10일전이었다.
황제는 그 합궁 이후로 단 한 번도 그녀를 안아본적은 없었지만, 이렇게 그녀가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왔기에 쉬는 시간은 자주 함께 보내고 있었다.
"황태후 폐하께서 옷을 사주신다고 내일 외출하자고 제안 하시더라고요. 너무나도 황송한 제안이라..."
"그렇군."
황제는 그런 나르타의 이야기에 대충 맞장구를 쳐주면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대는 이제 짐이 편한가? 자주 오는군."
차를 마시던 황제가 나르타를 보면서 솔직한 감상을 이야기했다.
이젠 아예 찬장에서 과자까지 꺼내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신기한 기분마저 들었다.
"음... 솔직히 조금 소문과 다르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요."
와작.
과자를 먹으면서 나르타는 황제의 볼을 쿡쿡 눌렀다.
이런 짓을 해도 가만히 있는 황제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솔직히 조금 귀엽다는 생각도 드네요."
자신보다 4살은 많은 사람인데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다란 늑대가 얌전히 있는 거 같은 느낌?
"..."
황제는 지존에게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이 여자를 어찌해야 할까 고민했지만 어차피 사석이니 내버려 두었다.
애초에 황제는 사적인 공간에서까지 권위적인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공적인 자리에서 이러면 그 손가락을 잘라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경고는 했다.
황제는 스스로가 사적인 장소와 공적인 장소에서 대응이 다르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네, 네. 저도 그 정도의 분별은 있답니다? 아무튼 그래서 황태후 폐하와 다녀오려고 하는데 주의해야 할 점이라도 있을까요?"
나르타가 웃는 얼굴로 질문하자 황제는 그런 나르타의 볼을 쫘악 늘리면서 대답했다.
이에는 이, 볼에는 볼이었다.
"억지로 비위 맞추려고 하지 마라. 가식을 싫어하시는 분이니 솔직하게 반응하면 좋아하실 거다."
"그렇군요. 그럼 지금처럼 하면 될까요?"
빨갛게 부어오른 뺨을 어루만지면서 나르타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하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짐한테도 이리 편하게 대하니 잘하겠지."
"그거 칭찬이죠?"
나르타가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면서 묻자 황제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대의 상상에 맡기지."
"...정말이지. 쌀쌀맞아요. 그러면 여자한테 인기 없다구요."
나르타가 그 대답이 마음에 안 드는지 투덜거렸다. 그러나 황제에겐 그건 정말 상관없는 일이었다.
"없어도 상관없는 입장이라."
그렇기에 황제가 그 말에 덤덤하게 대답하자 나르타는 심술이 난 얼굴로 황제의 볼을 쿡쿡 찔렀다.
"그거 정말 잘 나셨네요. 대단해."
찌르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 것을 느낀 황제는 참 유치한 여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딱히 그녀를 말리지는 않았다.
"황제니까 대단한 사람이 맞다만... 그보다 이제 그만 돌아가도록. 슬슬 정무를 봐야 하는 터라."
시계를 본 황제가 나르타에게 축객령을 내리자 나르타는 볼을 찌르던 손가락을 슬쩍 치우고는 작별 인사와 함께 사라졌다.
그걸 보면서 어이가 없어서 웃던 황제는 곧 누군가가 오는 것을 느끼고는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폐하! 오늘 처리할 안건을 가져 왔습니다!"
정확히 오후 4시가 되자 재상이 문을 열고는 웃는 얼굴로 안으로 들어왔다.
그걸 본 황제는 그가 가져온 안건을 읽어보면서 말했다.
"야만족들이 자신들의 새로운 우두머리의 목을 들고 항복을 선언했다고..."
"네! 그렇습니다. 폐하의 전언을 듣더니 제국을 침공하기 위해 전사들을 소집한 우두머리의 목을 직접 베어오는 것으로 항복 의사를 전했습니다."
황제는 그 말에 노골적으로 실망했다.
그들은 그때 제국을 향해 결사항전을 주장하며 싸우던 의지를 잃어 버린 것인가?
내 손에 죽어 나가면서도 최후의 최후까지. 돌을 잡을 수 있는 아이들이 살아 있는 한 결사항전하겠다고 주장하던 전사의 혼은 어디로 사라진 것이지?
황제는 전사들의 타락에 크게 상심했지만... 그들의 무조건적인 항복 선언이 제국에겐 긍정적인 이야기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 상심을 내색하지 않으면서 신난 재상의 보고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마침 잘되었습니다. 달막족이 합궁 기회를 잃었으니 이번에 야만족의 여인을 받아들이면 수가 딱 맞지요! 그들을 제국 안에 융화시킬 수 있으면 그야말로 역사에 남을 업적일 것입니다."
"..."
그러나 뒤에 이어진 재상의 말에 황제는 급속도로 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느꼈다.
기껏 합궁할 여인을 줄였다고 생각했는데...
그 어떤 황제도 굴복시키지 못했던 변방의 야만족들이 어처구니 없이 굴복함으로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으니까 말이다.
"이게 최선이다."
주전파를 숙청하고 크릴라이족을 이끄는 수장이 된 오고파이 칸은 진지한 얼굴로 백부장들에게 말했다.
"우린 그 괴물 같은 황제를 이길 수 없다."
오고파이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한참 내부 문제로 바쁜 제국을 약탈하기 위해 출정했던 전사들은 그 황제가 이끄는 금위군에게 대부분이 죽어 버렸다.
오죽하면 크릴라이족은 지금도 남자가 부족할 정도였으니 그 피해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알만했다.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제국의 울타리에 들어가는 것이 정답일 터."
그러니 그들은 이미 한계였다.
이미 크릴라이족은 제국과 대항할 동력을 잃어버렸고, 이대로 제국에 저항하고 있으면 기다리고 있는 것은 파멸 뿐이었다.
"허나 칸. 황제가 우리의 항복을 받아들일지 알 수 없습니다."
백부장들도 그 말에 공감을 했으나 그 잔인한 황제가 항복을 받아들일 거란 보장이 없었다.
굳이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자신들은 말라죽을테니까.
"받아들일 것이다. 황제가 왜 우리를 완전히 정리하지 못하고 급하게 다시 돌아갔는지 아느냐? 황제와 달리 우리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자들이 제국 내부에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오고파이는 제국이 항복을 받아들일 거라 확신했다.
크릴라이족은 말을 키우는 데 천부적이었고, 그들이 개량한 말은 제국에서도 귀하게 여겨졌다.
말을 개량하고 기르는 기술은 제국에서도 크릴라이족을 따라올 수가 없었다.
그런 크릴라이족의 기술을 얻기 위해서라도 제국에서 자신들을 받아들이자는 이야기가 나올 것이고, 여론이 그렇게 형성된다면 아무리 황제라도 여론의 손을 들어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확실히 우리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 이미 나는 각오를 했다."
오고파이는 그쪽의 재상이 보낸 서신을 그들에게 보이면서 말했다.
이미 제국에겐 긍정적인 답을 얻은 뒤였으니까.
"마침 그쪽에서 불미스러운 일로 어느 민족이 합궁의 기회를 잃었다고 한다. 그 기회를 받았으니 황제에게 내 딸을 보내마."
"칸! 진심이십니까?"
그 말에 백부장들이 충격을 받고는 칸을 보았다.
그들에게 자식을. 그것도 딸을 보낸다는 건 절대적인 복종을 의미했다.
즉, 오고파이는 그쪽의 재상에게 절대복종을 제안 받았고, 그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 얼마나 굴욕적인 조건을 받아들인 것인지...
백부장들은 칸의 진심을 깨닫고는 눈물까지 흘렸다.
"모두가 우리를 매국노라고 할지 모르지만... 역사는 결국 우리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할 것이다. 그러니 믿어 주게."
오고파이의 말에 여전히 완전히 제국의 아래로 들어가는 건 망설이던 백부장들은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저흰 칸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애초에 이전의 칸이던 우치 칸을 죽이고 그 목을 황제에게 보냈을 때부터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책임져줄 누군가의 존재였고, 오고파이는 그 역할을 자신이 감내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어떤 굴욕을 감내해서라도... 그는 지금의 황제를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재미없어. 진심으로 재미가 없다. 진. 이게 맞아? 야만의 전사들은 나름 명예와 긍지가 있다고 생각했던 건... 내 착각이었어?"
그날의 정무를 끝내고 집무실에서 늘어진 황제가 애처럼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평소의 황제가 보여주는 모습을 생각하면 상상도 못 할 모습이었지만 진에겐 생각보다 익숙한 모습이었다. 아니 사실 사석에선 이 모습이 훨씬 익숙했다.
"아니 네가 그렇게 죽여대니까 그런 거 아니야?"
진이 황제의 푸념에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따지자 황제는 더욱 투덜거렸다.
"많이... 죽이긴 했는데 그래도 그것도 각오하겠다는 의지 아니었나?"
결사항전이라고 말했으면 다 죽을 때까지 싸워야지 정말이지 실망스러운 결정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야만족의 절반이 넘는 인구가 죽어 나갔어. 그들 입장에서 넌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일 거다. 그보다 오늘도 비 전하가 다녀갔다면서?"
"...아주 편해져서 안하무인이더군."
황제는 그 말에 오늘 점심때 나르타를 떠올리고는 피식 웃었다.
마치 집무실을 제집처럼 여기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너처럼?"
"난 그래도 되는 사람인데? 황제거든."
황제가 그렇게 말하면서 그대로 의자에 늘어지자 진은 혀를 찼다.
저런 모습을 다른 녀석들도 알아야 하는데... 자신만 아는 것이 참으로 유감이었다.
"너무 편하게 있지 마라 누가 들어오면 난리나."
진이 슬쩍 눈치를 주자 황제는 여전히 의자에 늘어진 채 과자에 손을 뻗으며 대답했다.
"기를 확인하고 있으니까 그럴 일은 없다만..."
황제는 과자를 집어서 공중에 던지고는 그대로 받아먹었다.
그 모습을 기가 막히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던 진은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지 그녀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진에겐 황제의 모습이 더 가관이었다.
"그러시겠지. 그보다 민이 녀석 아주 난리더라. 친왕비한테 폭력까지 휘두른 모양이야."
진은 미친왕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 말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치료받고 별궁에서 깨어난 미친왕은 금세 폭력적으로 변했고, 그를 돌보기 위해서 들어오는 궁녀에게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더니 이젠 그를 돌보던 친왕비까지 폭행한 모양이었다.
황제는 그런 진의 말에 혀를 차더니 곧 명쾌하게 해답을 내놓았다.
"그러면 팔도 잘라야겠군.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팔 정도면 나름 저렴하네."
"...넌 참 세상을 쉽게 산다."
진은 황제의 해결책에 기가 찬듯 중얼거렸다.
황제는 '그게 뭐가 문제지?' 하는 얼굴로 진을 쳐다보더니 다시 과자를 먹었다.
"이렇게 너랑 같이 늘어져 있는 건 참으로 즐거운데... 이런 시각은 늘 짧더라."
한참 그렇게 여유를 즐기던 황제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중얼거리더니, 이내 자세를 고쳐잡았다.
"가자. 짐은 이제부터 황태후를 뵈러 가야 하니."
이젠 말투마저 변한 황제가 풀어진 얼굴이 아닌 무표정한 얼굴로 말하자 진은 고개를 숙였다.
"네, 폐하."
이제 사적인 시간은 끝났다. 그러니 다시 공적인 모습으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사적인 상황에선 허물없는 친구이자 형동생 사이였지만... 지금 상황에선 황제와 금위대장이었으니까.
"무슨 일로 부르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황제는 황태후가 기거하는 궁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불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예감이 좋지가 않구나."
왜 황태후께서는 하필 이 밤중에 자신을 부르는 걸까?
황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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