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 천황제를 열겠다
* * *
"벌써 여기저기가 난리네요. 저희 진륜족에서도 몇몇 젊은이들이 참가한다고 벼르고 있더라고요."
오늘도 어김없이 집무실을 찾아와 다과를 먹고 있던 나르타의 말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난리가 나라고 그런 조건을 걸었으니 황제 입장에선 좋은 소식이었다.
"그럴 테지. 그보다 그 젊은이 중 친한 자가 있는가?"
"흠, 별로요?"
나르타는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딱히 친한 사람은 없었다. 그 말에 황제는 덤덤하게 말했다.
"그대에겐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군."
"...죽이실 건가요?"
나르타의 질문에 황제는 수려한 솜씨로 글을 쓰던 붓을 내려놓고는 대답했다.
"상황에 따라 다르지."
그 말대로 상황에 따라 다르다. 아무리 황제가 피에 미쳤어도 아무나 죽이는 살인광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소신이 있는 살인광이라고 해야하나?
"예를 들면요?"
"그냥 호기심으로 참가한 사람은 굳이 죽일 필요는 없지. 그런 자들은 병장기만 베어내도 물러갈 것이다."
그 말대로 단순히 황제의 검을 보고 싶다거나 그걸 직접 경험해 보고 싶어서 참가한 사람을 벨 필요는 없다. 괜히 기분만 더러워지니까.
"운이 좋으면 황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참가한 자도 굳이 죽일 필요가 없다. 운에 기대는 녀석들은 백날천날 그런 생각만 하고 요행에만 기대는 무능한 놈들이니 딱히 신경 쓸 필요도 없으니."
그렇다면 대체 누가 죽어야 한다는 걸까?
나르타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고 황제는 자신이 쓴 글자를 재상에게 넘겨 주며 설명을 끝냈다.
"뭐, 보면 대충 어떤 기준인지 이해할 수 있을 거다."
황제는 더 설명하긴 귀찮았는지 그렇게 말하고는 재상에게 말했다.
"공방에 전하도록."
"확실히 전하겠습니다."
황제는 지금 천황제의 준비로 정신없이 바빴다.
오르테가는 그런 황제가 불만스러운 모습이었지만 그렇다고 황제가 오르테가를 위해서 일을 쉬엄쉬엄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심심해... 일이 그렇게 재미있어?"
꾸욱.
오르테가가 그 커다란 흉부를 황제의 머리 위에 얹으면서 묻자 황제는 귀찮다는 듯이 그 가슴을 밀어내고는 나르타에게 말했다.
"이 여자랑 대신 놀아 주도록. 뭐든 허가할테니."
"네?"
"오! 나랑 놀아 줄 거야? 놀자! 이 재미없는 녀석은 일이나 하라고 내버려 두고. 흥! 흥! 흥이다!"
당황하는 나르타에게 바로 달라붙은 오르테가가 애처럼 혀를 삐죽 내밀면서 황제를 노려보자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덩치만 컸지 여전히 애새끼 같으니."
"!"
나르타는 그 황제가 저속한 욕설을 내뱉었다는 사실에 놀랐으나 오르테가는 익숙한 듯 반응했다.
"애 아니거든? 이거 안 보여? 남자들은 이런 거 좋아한다던데."
당당하게 가슴을 내밀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오히려 나르타가 수치심을 느꼈는지 얼굴이 새빨개졌고, 황제는 그 가슴을 혐오스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아무튼 부탁하지. 저거를 좀 데리고 나가주게."
"네..."
나르타는 이젠 아예 저거가 되어 버린 오르테가를 데리고 집무실을 나섰다.
황제의 부탁을 무시하기도 힘들었고, 그 자리에 오르테가를 두었다간 그녀가 황제와 싸울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여간 여전히 재미없는 녀석! 그보다 우리 뭐 하고 놀까? 아! 시장을 둘러보는 건 어때?"
"그 함부로 황궁 밖을 나가도..."
물론 황제가 뭐든 허가하겠다고 했지만... 그게 황실 밖으로 나가도 된다는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나르타는 조심스러웠으나 오르테가는 막무가내였다.
"가자! 얼른!"
전혀 자기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오르테가를 보면서 나르타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새 나르타의 손을 잡은 오르테가는 신난 얼굴로 황궁 밖으로 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시장에... 말입니까?"
오르테가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입구를 지키고 있던 금위대의 병사는 그 말에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잠시 안으로 들어가더니 누군가와 같이 나왔다.
덩치는 무슨 곰 같았고, 얼굴은 산적이 생각나는 털북숭이의 남자는 나르타의 설명을 듣더니 호탕하게 웃었다.
"폐하께서 허락하셨다니 거절할 명분이 없군요. 크하하!"
이 거구의 남자가 바로 금위군의 백부장 중 한 명인 할바르 보칸.
카이아족 출신으로 황제가 친정했을 때 함께 선봉에 선 용맹한 장군이기도 했다.
"허나 호위도 없이는 조금 곤란합니다. 물론 오르테가 님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만..."
"그럼 할바르가 따라오면 되겠네. 어때?"
오르테가가 태연하게 제안하자 할바르의 눈이 커졌다.
"크하하하! 그것도 맞군요. 그럼 제가 동행하겠습니다."
꽤 웃음이 헤픈 사람이다.
나르타는 그리 생각하면서 일단 그와 함께 황궁을 나섰다.
확실히 할바르 정도의 무인이 동행해준다면 그녀도 안심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나르타는 안심하고 오르테가와 시장으로 나올 수 있었다.
"엄청 소란스럽네."
거리를 걷던 오르테가가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말하자 할바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황제로 시끄럽지요. 오르테가 님도 보실 겁니까?"
"당연히 봐야지 할바르도 볼 거잖아. 아니야?"
오르테가는 어느새 노점에서 꼬치를 사서 나르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그 말대로 당연히 봐야하는 축제였다.
그건 황제가 자신을 위해서 열어주는 축제니까.
물론 황제는 그런 의도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오르테가는 이 축제가 자신을 위한 축제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할바르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봐야지요. 아! 마음 같아선 제가 그 검에 맞아 죽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그건 좀 참아주세요."
오르테가가 준 꼬치를 먹고 있던 나르타는 그 말에 간절하게 빌었다.
그녀는 할바르 정도의 장군이 황제의 검에 맞아 비명횡사하는 모습은 정말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야지요. 아쉽지만 저한테는 사명이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할바르를 보면서 나르타는 이런 사람들을 매료하는 황제의 매력은 무엇일지 고민해 보았다.
황제에겐 정말 미안하지만...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얼굴 밖엔 생각나지 않았다.
"황상. 진심입니까?"
황제는 그녀들이 떠나기 무섭게 집무실을 찾아온 황태후를 보면서 생각했다.
오늘은 참 손님이 많은 날이라고 말이다.
"황위를 걸다니요! 아무리 그래도 그건..."
역시 황태후의 반대에 부딪칠 거란 예상은 했다. 그렇기에 황제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황태후께서 우려하시는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걱정할 건 없습니다."
"그야 황상께선 막히지 않을 자신이 있으시겠지요. 허나 괜한 짓입니다.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일에 구태여 매진하시는 이유가..."
"어머니."
황태후는 그가 황제가 되고 나서 처음으로 자신을 어머니로 불렀다는 사실에 놀랐다. 황제는 그런 황태후에게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한 짓이 아닙니다."
"...그래, 그렇겠지요. 황상은 다 뜻이 있겠지요. 허나 이 어미는 걱정이 됩니다. 혹여 다치기라도 하면..."
물론 황제는 공격만 하는 거니 다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보편적이지만.
황태후도 모르는 게 아니다.
방어하는 자가 반사 마법을 사용할 수 있고, 아니면 주술적인 무언가를 사용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공격만 하는 입장이라도 충분히 다칠 수도, 심하면 죽을 수도 있었다.
그게 황태후는 가장 걱정이었다.
"전 천황제를 열겁니다."
그러나 황제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황상!"
그 말에 황태후가 화를 냈다.
그녀는 왜 황상이 이런 무모한 일에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선제께서 말씀하셨지요."
황제는 자신을 억지로 황제의 자리에 앉히면서 선제께서 하신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전 하늘이 정한 황제라고요."
"그러셨지요... 이 어미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황태후도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의 황제는 본인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황제가 될 수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고.
선제께서는 그렇게 굳게 믿고 계셨으니까.
"그렇다면 어찌하여 그리 걱정하십니까? 하늘이 정했다면 전 무사할 텐데 말입니다."
황제는 단호하게 말했고, 황태후는 그 말을 반박할 말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 그건... 그래, 황상의 뜻이 그리도 완고하니 더는 말리지 않겠습니다."
황태후는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선제의 말까지 끌고오는 황제의 뜻에 굴복한 것이다.
"허나 부디 옥체를 보전하시길. 황상의 몸은 절대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황태후의 진심 어린 충고에 황제는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건 황제도 잘 알고 있었다.
자기 몸은 이제 혼자만의 것이 아닌 이 제국의 것이었으니 함부로 사용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 너도 원하는 모양이구나.'
그런데도 그가 이런 짓을 강행하는 이유는 생각 이상으로 간단했다.
피를 원했다.
그의 안에 잠들어 있는 괴물은.
혈육의 피를 먹고도 만족하지 못했는지 더 많은 피를 원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천황제라...'
하늘이 정한 황제를 뽑는 축제라고? 황제는 조소했다.
정말 좋은 허울이다.
현실은...
하늘이 뽑은 황제에게 피를 바치는 축제에 더 가까웠으니까.
황태후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야말로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수십만을 수용 가능한 투기장은 벌써 표가 매진이었고, 전국에서 몰려온 참가자들로 수도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찾아온 천황제의 당일.
천황제의 방식은 간단했다.
황제가 방어하는 참가자에게 일격을 가한다.
참가자의 방어를 피해서 공격하는 건 불가능.
사용하는 무기는 자유이나 없는 사람은 지급받은 무기로 한다.
일격을 막으면 그 순간 참가자의 승리. 못 막으면 황제의 승리인 간단한 방식이었다.
[첫 참가자는 앞으로 나오라.]
투기장의 중앙에 당당하게 선 황제는 재상에게 신호를 주었고, 재상은 신호를 받기 무섭게 확성기를 통해 첫 참가자를 호출했다.
"동북 지방에서 온 만석이올시다. 황제가 될 기회라기에 참가했소."
무척이나 오만하고 무례한 말이었으나 황제는 덤덤하게 소 같이 생긴 남자의 말을 듣고 있었다.
"자세를 잡아라."
'흥! 생긴 건 곱상하게 생겨선. 소문은 역시 헛것이었어.'
만석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자세를 잡으라고 말하는 황제를 보면서 괜히 긴장했다는 생각했다.
저런 곱상한 얼굴로 소문처럼 강할 리가 없다.
그런 생각하며 만석은 준비한 대방패를 치켜들었다.
쿠웅!
그가 치켜들었던 방패를 내려놓자 엄청난 소리와 함께 땅에 박혔다.
이 대방패는 무게는 신경 쓰지 않고 그저 단단하게 만든 특별 주문품으로, 만석은 그것을 땅에 세운 채 몸을 받히고 서선 황제의 일격을 막을 준비를 끝냈다.
그야말로 철옹성.
만석은 절대 이 방패가 베이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이걸 어떻게 베어. 이제부터 내가 황제다!'
만석은 속으로 실실 웃었다.
벌써 자기 황제가 된 모습이 그려지는 듯했다.
'저기 저 여자도 미인이고, 저 여자도... 크으... 벌써 아래가 불끈하는 구만.'
황제의 여인이라 알려진 저 붉은 머리의 여자도, 저 커다란 가슴의 용인도, 하나같이 미인들이었다.
저것들을 자기 아래에 깔릴 생각하면 만석은 아랫도리가 우뚝 솟았다.
푸아악!
그리고 그게 만석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황제가 검을 들었고, 그대로 내려친 순간 커다란 방패와 함께 만석의 거구가 반으로 갈라졌으니까.
덩치에 맞게 엄청난 양의 피가 뿜어져 나왔고, 사람들은 그 충격적인 모습에 모두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경악하고 있었다.
황제는...
"다음."
그 피를 정면으로 맞은 채 피에 젖은 모습으로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황제의 말에 뒤에서 나타난 무사들이 만석의 시체를 치웠다.
'딱 좋군.'
뜨거운 피가 몸을 데우는 게 느껴진다.
황제는 그 감각이 기분 좋다고 생각하면서 다음 상대를 기다렸다.
본격적인 천왕제의 시작을 알린 첫 희생자가 쏘아낸 피의 축포를 떠올리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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