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의무방어전-17화 (17/235)

〈 17화 〉 두 번째 합궁­오르테가

* * *

"...벌써 끝인가?"

천황제를 끝내고 황궁으로 돌아온 황제는 벌써 천황제가 끝났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역시 적당히 죽였어야 했나? 하지만 그렇게 노골적으로 더러운 욕망을 표출해내는 자들을 죽이지 않고 넘어가는 건 황제에게 너무 힘든 일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런 욕망을 드러내는 순간 자기 배다른 형제도 잔혹하게 죽였거늘, 아예 타인을 살려 두는 건 죽은 형제들에게도 미안한 짓이었으니까.

황제는 최소한의 양심은 존재했기에 자신의 손에 죽은 형제들을 생각해서라도 역심을 품은 이들을 다 죽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결과 포기자가 속출했고, 참가자가 없어졌기에 천황제는 이틀 만에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슬픈 일이다.

그 순간 천황제를 핑계로 미루고 있던 합궁을 해야했으니까.

그렇게 그는 투기장에선 무서울 게 없던 황제에서 순식간에 밤이 무서운 남자로 변모했다.

"...오늘인가?"

원래부터 진작에 해야할 걸 미루고 있던 것이니 더 이상 미뤄줄 이유는 없겠지.

그걸 알면서도 황제는 재상에게 질문했고, 재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미 오르테가 공주님께선 침소에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그 대답에 황제는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차라리 할당량을 정해 두고 질질 끌었어야 했나?'

스스로가 생각해도 너무 서둘렀다는 생각에 황제는 슬픔이 밀려왔지만 더 미룰 수는 없는 일.

차라리 얼른 합궁을 진행하고 치워 버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씻고 바로 가도록 하지."

황제는 옷에 묻은 피를 보면서 말했다.

지금은 혈향이 너무 짙어서 도저히 침소로 들어갈 상태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황제의 말에 재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궁녀들에게 준비해 두라 하였습니다."

"재상은... 과연 이 나라의 흥복일세."

일을 참 잘하는군.

굳이 잘할 필요도 없는 일까지.

목욕을 준비하는 동안의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원했던 황제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재상을 칭찬했다.

물론 말과 다르게 속은 타들어가고 있었지만 황제는 내색하지 않았다.

"과찬이십니다."

"..."

빈말에 진심으로 기뻐하는 재상을 보니 화낼 기력도 잃어버린 황제는 침묵했다.

아무튼 준비되었다니 일단 씻어야겠지. 황제는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상대가 그 오르테가라니... 친구를 안아야 한다는 사실에 괴로움을 느끼면서 황제는 탕에 몸을 담갔다.

탕에 들어갔음에도 황제는 전혀 피로가 풀리지 않는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힘들겠군.'

약이 좀 많이 필요할 거 같다. 황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찬물로 세수했다.

오늘 합궁은 정말 어려운 일이 될 거 같았다.

­­

복사꽃이 흩날리는 나무 아래서, 작은 소년은 언제나처럼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굉장히 귀여운 소년이었다.

윤기 넘치는 검은색 머리카락은 비단처럼 고왔고, 커다란 황금색 눈동자는 순박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소년은 벌써 2시간이 넘는 시각을 쉬지 않고 목검을 휘두르며 보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독종이 아닐 수 없었다.

"안 지루해?"

그런 소년을 향해 화사한 금발을 짧게 자른 소녀가 턱을 괸 채 물었다. 그런 소녀의 머리엔 작은 황금색 뿔이 앙증맞게 솟아 있어 소녀가 용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소녀의 질문에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열심히 목검을 휘두르던 소년은 그제야 소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안 지루해."

소년의 고집스러운 말에 소녀는 웃었다.

그는 이런 녀석이었다.

남들은 지루하다고 할 일도 쉬지 않고 해내는 사람. 소녀는 그런 소년을 보는 게 즐거웠다.

"그보다 이번엔 안 질 거다. 오르테가."

소년은 그런 소녀를 향해 경쟁심을 드러내면서 말했다.

그래 봐야 아직 근골도 제대로 발달하지 않은 소년이 용인인 자신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용인과 인간은 신체 능력에서부터 큰 차이가 있었으니까.

소녀, 아니 오르테가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걸 굳이 입 밖으로는 내지 않았다.

단지...

"어차피 넌 황제가 될 거잖아. 굳이 그렇게 검에 몰두할 이유가 있어?"

의문을 표시할 뿐.

솔직히 소년은 검을 단련할 필요가 없는 입장이었다.

이미 그의 앞에 보장된 것은 황위였다.

압도적인 정통성을 가진 태자에다가 심지어 황후의 가문도 한족에서도 손에 꼽히는 명문가인 그 남궁이니... 이 소년이 황제가 되는 건 이미 확정된 미래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도 왜 소년은 이렇게 몸을 단련하는데 열심인 걸까?

오르테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무예를 단련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제왕학을 더 공부하는 게 미래를 위해서도 나을 것이 자명했으니까.

"...내 꿈은 황제가 아니니까."

그런 오르테가의 의문에 소년은 단호한 얼굴로 대답했다.

소년은 그대로 검을 내려놓고는 수건으로 땀을 닦으면서 오르테가의 옆에 앉았다. 그 행동에 오르테가는 움찔했지만 금세 진정하고는 소년의 말을 기다렸다.

잠시 물을 마시던 소년은 복숭아나무를 보면서 동경으로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

"난 장군이 되고 싶어. 너도 들었지? 환운 장군의 무용담!"

이렇게 신난 얼굴로 떠드는 녀석의 모습에서 그제야 또래의 아이처럼 보이는 천진난만함이 엿보였다.

그게 오르테가는 솔직히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다.

"홀로 적진으로 돌진해 적장의 목을 베어오면서 이렇게 말하잖아."

"내 등을 맡길 형제가 있으니 이런 작은 전장에서 객장으로 죽을 수는 없다."

오르테가는 소년이 할 말을 대신 말해주었다. 이미 질리도록 들었던 이야기니까.

"맞아. 그랬지."

그때 환운 장군이 적장의 목을 베고 돌아와선 자신에게 전장을 맡긴 왕에게 이리 말했다고 한다.

얼핏 들으면 이해할 수 없는 그 말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그 배경을 이해해야 했는데...

때는 제국이 내전으로 크게 갈라져 각지의 제후들이 칭왕하며 군림하는 군웅할거 시대였다.

환운 장군은 그때 황제였던 진비의 의형제였는데 진비는 내시들의 난으로 병력을 잃고 환운과도 흩어지게 된 상태였다.

그때 한참 중원을 두고 주곡과 다투던 한무자는 진비를 찾아 방황하던 환운을 객장으로 받아들였는데 그때 환운은 충성을 바치라는 그에게 이리 말했다고 한다.

"내 충성심을 사려하지 마시오. 내 모든 것은 형제를 위해 있으니 그대의 호의에는 감사하는 바이나 언젠가 떠날 사람이오. 그대는 나를 품기엔 너무나도 작소."

그런 어찌 보면 건방진 발언에 한무자는 그렇게 오만하게 말할 근거를 제시하라고 했고, 거기서 환운은 주곡을 상대로 그런 짓을 벌인 것이다.

단기돌파로 주곡의 군을 이끄는 적장의 목을 베어오는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그러고 나서 이 전장 자체가 작다고 한 것은...

환운의 자신감이자, 그에게 큰 전장은 오로지 진비만을 위한 전장일 때 뿐이라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무위를 본 한무자와 그 부하들은 그런 환운의 오만한 발언에도 더는 아무런 지적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진비에게 항복했다고 전해진다.

단 한 명의 무장이 가진 일신의 무력이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던 세력마저도 굴복시킨 것이다.

소년은... 그런 환운을 동경했고, 그렇기에 황제가 아닌 환운 같은 장군이 되고 싶었다.

"환운에겐 믿을 수 있는 부하 두 명이 있었다고 해."

진비가 그의 의형제이자 충성을 바칠 주군이었다면, 전장에서 등을 맡길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수하가 환운에게 두 명 있었다.

활의 명수이자 기마궁술을 창시했다고 전해지는 야흘지와 경천동지의 괴력을 가진 거인이라 불리던 만인지적의 남자인 남궁극.

소년은 오르테가가 자신에게 그들과 같은 부하가 되어주길 바라고 있었다.

"난 네가 나한테 그런 부하가 되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널 이길 거다."

그렇기에 소년은 당당하게 오르테가에게 선언했고, 오르테가는 그 말에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하? 지금 날 부하로 삼겠다는 거야? 요거, 요거 아주 건방진데?"

오르테가는 그런 위 녀석의 머리를 엉망으로 만들면서 말했지만, 녀석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에 오히려 오르테가의 심장이 마구 요동치며 흔들렸다.

"그래, 오르테가. 내 것이 되어 줘."

두근.

이상한 일이다.

오르테가는 그게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네가 필요해. 난 네가 내 것이 되어 주면 좋겠어."

그 황금색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면서 날 원한다고 말할 때... 왜 이렇게 얼굴이 붉어지게 되는 걸까? 오르테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이상한 말하지마!"

녀석은 절대 그런 의도로 하는 말이 아닐 것이다. 분명 그럴 텐데...

왜 내 귀에는 저 말이 이상할 정도로 감미롭게 들리는 거까?

녀석은 그런 의도가 아닐 텐데... 왜 내 심장은 이리도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하는 걸까?

모르겠다.

오르테가는 도대체 자신이 왜 이러는 건지도 알지 못한 채, 자기 것이 되어달라는 이상한 말을 하는 친구를 또 때리고 말았다.

­­

"후..."

오르테가는 장미로 목욕까지 끝마치고는 긴장한 얼굴로 침소에서 녀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긴장되는지 그녀의 몸은 떨리고 있었고, 실제로 그녀는 지금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서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내, 냄새 나는 건 아니겠지?'

그녀는 몇 번이고 자신의 냄새를 확인하고, 심혈을 기울여서 고른 속옷을 점검했으며, 괜히 등불의 남은 기름 같은 걸 확인했다.

'그, 그 녀석은 대체 언제 오는 거야!'

미칠 듯이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애쓰면서, 오르테가는 괜히 위에게 불만을 터트렸다.

이게 다 녀석이 늦게 와서다.

오르테가는 그리 생각하면서 녀석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1초가 영겁처럼 느껴지는 기다림 끝에 마침내 침소의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오르테가는 알 수 없는 반가움마저 느끼면서 녀석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약간 물기에 젖은 머리로 안으로 들어온 황제는 그런 오르테가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제야 오르테가에게 시선을 주었다.

침대에 올라가 있는 오르테가를 보면서 황제의 황금색 눈동자가 커졌다.

그 모습을 본 오르테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후후! 내 매력에 눈을 못떼는 거구나?'

황제의 시선이 자신의 가슴 쪽에 머무는 걸 확인한 오르테가는 확신했다.

역시 남자는 가슴을 좋아하는 게 맞다고.

오르테가는 그렇게 확신하면서 미소를 지었고, 그 순간 황제의 입이 열렸다.

"뭐냐? 그 흉한 몰꼴은."

"..."

황제의 말에 오르테가는 기분이 순식간에 극도로 가라앉는 걸 느끼면서 싸늘한 눈으로 황제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둘의 합궁은 처음부터 어긋나며 시작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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