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의무방어전-20화 (20/235)

〈 20화 〉 세 번째 합궁­세헤라자드 아프람

* * *

"...아프람 가문인가."

아프람 가문은 투르크족에서도 역사상 가장 많은 술탄을 배출한 명문가다.

황제는 막 잠에서 깨자마자 올라온 그 여자의 신상정보를 확인하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 늙은이의 가문이군."

마치 자신이 과거의 술탄이라도 된 것처럼 권력을 행사하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았다.

결국 자신에게 굴복하였지만.

그렇기에 황제는 이미 그 노인의 반란 같은 건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진. 그대가 무얼 걱정하는지는 알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도록."

진에게서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하여 황제는 덤덤하게 말했다.

황제는 기운에 예민했고, 그건 인간의 감정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황제가 볼 때 노인은 이미 저항의 의지가 없었다.

그런데...

'결국 알아내지 못했군.'

그렇게 감정을 잘 알아차리는 황제는 정작 오르테가가 자신에게 품은 감정이 무엇인지는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그렇기에 황제는 오늘도 마치 일과라는 듯이 다과를 즐기고 있는 나르타에게 질문했다.

"그대는 짐에게 무슨 감정을 품고 있는 거지?"

"...네?"

나르타의 얼굴에 당황이 깃들었다.

그러나 황제 입장에선 어쩌면 당연한 질문이었다.

그녀는 오르테가와 같은 기운을 뿜어내는 여자.

그렇다면 분명 둘은 같은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인데... 황제는 그것이 궁금했으니까.

"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요. 그보다 폐하께서는 합궁 이후엔 딱히 관심을 안 가지시는 편인지요?"

"다음 합궁으로 바쁘니... 여력도 없거니와 딱히 그런 쪽엔 관심이 들지 않는구나."

역시 대답해주지 않는 건가?

황제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순순히 나르타의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지금 황제는 굳이 따로 시간을 내어서 여자를 안을 생각은 없었다.

"그러면 전 앞으로 평생 독수공방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거네요."

나르타가 그런 황제의 말에 장난스럽게 농을 건네자 황제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들키지만 않는다면 다른 남자를 들이는 것 정도는 괜찮을 거다. 짐이 딱히 문제 삼을 생각이..."

"네? 그게 지금... 무슨 소리시죠?"

나르타는 황제의 말에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진은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입을 꾹 다물었다.

황제는 그런 나르타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성욕이 문제라면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도 된다는 이야기다. 들켜서 문제만 되지 않는다면 문제 삼을 생각은 없으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시는 건가요?"

'왜지?'

자기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입술을 깨물면서 말하는 그녀를 보며, 황제는 의아함을 느꼈다.

왜 나르타에게서 슬픔의 감정이 느껴지는 거지? 황제는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황제가 생각할 때 자신의 말은 합리적이었다.

애초에 그녀와 자신은 사랑 따위 없는 그저 필요에 의해서 맺어진 관계. 그렇다면 필요에 따라서 새 남자를 들이라는 게 그리 문제가 되는 말이었나?

황제는 문제되는 말은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대를 생각해서 하는 조언이다. 짐은..."

짜악!

"!"

그 순간 나르타의 손이 황제의 뺨을 때렸다.

황제의 뺨을 때린 그녀의 손은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정말... 저를 생각한다면 그런 말을 하시면 안 되는 거잖아요."

나르타는 황제를 보며 그렇게 말하고는 그대로 집무실을 나가 버렸다.

진은 황제가 저 무례를 저지른 손을 잘라오라는 명령을 하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황제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생각도 못 한 말이었다.

"짐이... 잘못한 건가?"

"뭐... 굳이 따지자면 잘못하셨지요."

황제의 반응이 의외긴 했으나 솔직히 진은 이번 건은 폐하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했다.

진은 대충 알고 있었으니까.

어느새 황제에게 나르타 비가 어떤 감정을 품게 되었는지.

그렇기에 방금 황제의 말이 얼마나 잔인한 말이었는지도. 그래서 진은 잘못을 따지자면 황제가 잘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런가. 확실히 짐의 잘못일지도 모르겠어."

황제는 자신이 맞았던 뺨을 어루만지면서 생각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황제는 이번엔 확실히 자신 뭔가 크게 잘못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을 때리던 그녀는 분명...

울고 있었으니 말이다.

­­

'바보! 저질러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나르타는 자신이 큰일을 저질렀다는 생각에 속으로 스스로에게 욕을 내뱉고는, 그대로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당장에라도 주술로 과거의 자신을 저주하고 싶다.

그 제안이 폐하께선 나름 자신을 생각해서 한 제안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폐하께... 자신은 그저 해야 할 일을 한 대상일 뿐이고, 아무런 감정도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

멋대로 기대하고, 멋대로 화를 내고... 정말이지 꼴불견이었다.

'난 대체 뭘하는 걸까?'

당장 자신의 감정도 제대로 정의내리지 못해 놓고선... 정작 폐하께선 자신을 사랑해 주길 바라다니. 이기적이어도 이렇게 이기적일 수가 없었다.

나르타가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으로 괴로워하고 있을 때였다.

푹신.

그녀의 뒤통수에 푹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뭐 해?"

"오르테가..."

천친난만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오는 아름다운 여자.

오르테가를 보면서 나르타는 애써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예요. 그보다... 합궁는 잘 진행하셨나요?"

"모, 몰라!"

합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새빨개진 얼굴로 대답하는 그녀를 보면서 나르타는 생각했다.

참으로 밝은 사람이었다.

야망도, 사랑도 어중간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 하는 무능한 자신과 비교도 되지 않는 여자.

나르타는 알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여자라는 건 자신 같은 여자가 아니라 오르테가 같은 여자라는 것을.

"그보다 왜 이렇게 우울한 표정이야? 위. 그 녀석이 무슨 짓 했어?"

움찔.

나르타는 황제의 이름이 언급되자 몸을 움찔했고, 오르테가는 바로 황제와 관련되어 있다는 걸 알아채고는 바로 나르타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네가 이해해. 원래 조금... 둔한 녀석이라서."

다른 곳에선 눈치가 귀신 같은 녀석이 사랑에 대해선 이보다 더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무지했다.

게다가 그 녀석은 자의든 타의든 앞으로도 안을 여자가 늘어날 거다.

그런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는 건 정말이지... 오르테가는 힘든 일이라는 걸 이해하고 있었다.

"우리 둘 다 조금 귀찮은 남자를 사랑하게 된 거 같지?"

"..."

나르타는 오르테가의 말에 고민했다.

그녀는 왜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자신은...

"그러게요. 정말 귀찮은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아, 그렇구나.

난 역시 그분을 사랑하는 거였구나.

나르타는 왜 자신이 그때 화를 냈는지, 왜 눈물이 나왔는지 깨닫고는 오르테가를 보았다.

자신을 보면서 웃고 있는 얼굴.

그제야 나르타는 왜 오르테가가 선뜻 자기 감정을 이야기해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도 자신을 도와주기 위해서였겠지.

나르타는 그녀의 배려에 감사하면서 복잡하던 마음을 정리했다.

그녀는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처음엔 진짜 별로였거든? 그 조그마한 몸으로, 검을 쥐고, 상대도 안 되는데 계속 시비를 걸어오니까."

그런 나르타에게 오르테가는 옛날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그녀는 황제에게 검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작고 여린 체구, 곱상한 얼굴.

검보단 붓이 어울리고, 이마의 땀을 닦기보단 손에 먹을 닦아야 할 거 같은 소년이었다.

"그런데 녀석은 포기하지 않았어. 1년, 2년, 3년... 정말 지치지도 않는지 검을 휘둘렀지."

그런데도 녀석은 검을 고집했다.

그때만 해도 성과는 별로 보이지도 않았는데 황제는 검을 휘두르는 걸 멈추지 않았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태풍이 불어도, 몸이 아파도, 녀석은 한 번도 쉬지 않더라고. 그걸 보면서 알았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쉬지도, 변명하지도 않는 그 모습에...

오르테가는 어느새 매료되고 말았다.

포기하지 않는 그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눈을 가진 그가... 만들어 낸 검은 지독할 정도로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아름다웠어. 어쩌면 난 그때부터 그런 나쁜 남자한테 홀려 버린 건지도 몰라."

그렇게 말하며 오르테가는 웃었다.

나르타는 그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저는 말이죠... 사실 처음엔 폐하께 별 생각이 없었답니다."

처음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점점 이야기를 나눠보면 볼수록... 나르타는 이번 황제가 조금...

"그런데 보면 볼수록 전... 폐하가 외로워 보였어요."

"응?"

외로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이 넓은 황궁에서... 이 많은 사람이 있는데...

황제는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외로워보였다.

그렇게 외로운데... 정작 자신이 외로운 것조차 모르고 있는 가여운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르타는 그의 곁에 있어 주고 싶었다.

그 외로움을... 자신이 덜어 주고 싶었다.

그런 그를 사랑하게 되어버렸으니까.

"외롭다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오르테가는 그렇게 말하며 나르타를 향해 웃었고, 나르타 역시 그런 그녀를 향해 마주 웃었다.

확실히 이번 황제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 외로움을 덜어줄 필요가 있었다.

"그러면 우리가 외롭지 않게 해 줘야겠네."

"그럼요. 내일은 같이 찾아가 볼까요?"

어느새 의기투합한 둘은 웃는 얼굴로 함께 돌아갔다.

둘은 그대로 다과를 즐기면서 황제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서 할 예정이었다.

"...알다가도 모르겠군."

그런 둘을 몰래 지켜보고 있던 황제는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나르타를 찾아 이곳에 온 황제는 우연히 둘의 이야기를 조금 엿들었다.

'외로워 보인다...'

앞에서 둘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듣지 못했지만, 이거 하나만은 확실히 들었기에 황제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외롭다라... 정말 그런 걸까?

"진. 짐이 외로워 보이나?"

"흠, 외로우십니까?"

진의 반문에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구나."

모르겠다.

자신은 외로운 건가? 아무리 자문해 보아도 대답은 당연히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니 황제는 모르겠다는 대답 밖에 할 수 없었다.

"아무튼 기운을 차린 듯하니 다행이야."

오르테가가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잘 위로해준 모양이다.

황제는 그리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나르타를 찾으러 온 것은 어디까지나 이동하는 김에 한 것이라 그녀의 문제가 해결된 지금 다시 가던 곳으로 가야 했으니까.

"합궁 전에 보고 싶다고 하다니 의외군."

황제가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세헤라자드가 머무는 곳이었다.

그녀 쪽에서 면담을 요청했으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흔한 일은 아니지요."

진의 대답에 황제는 그녀의 이름을 곱씹어보았다.

세헤라자드... 세헤라자드...

"들어 본 듯하군. 금위대장은 기억나지 않나?"

들어본 거 같은 이름이었다. 그렇기에 황제가 질문하자 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네?"

'착각인가?'

진의 반응에 황제는 자신이 착각한 거로 생각했다.

그만큼 진과 함께 있는 시간이 길었으니까.

'그렇다면 흠...'

왜 자신을 보자고 한 걸까?

황제는 그런 의문을 품은 채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그녀와 만나 보면 그 의도를 알 수 있을 테니까.

­­

그날은 비가 오는 날이었다.

사막에서 비가 내리는 날은 아주 드물었기에 그곳의 사람들은 항아리를 꺼내두고는 물을 받아두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거리에서...

한 청년이 우산을 쓴 채 느긋하게 거리를 걷고 있었다.

"비가 오는구나."

그 청년은 하늘을 보면서 덤덤하게 말했다. 청년의 얼굴은 쓰고 있는 검은 후드로 인해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굵고, 듣기 좋았다.

"이곳 베르헴에선 5년만의 비라고 하는군요."

그런 청년의 뒤를 따르던 거구의 남자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대답했다.

"시기를 잘 맞췄구나. 사막의 비를 보는 것도 진귀한 일이지."

청년은 그렇게 말하고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그런 청년을 보면서 한숨을 쉬고는 그대로 뒤따랐다.

"골목도 깔끔하고, 사람들 얼굴엔 가난이 보이지 않는구나. 역시 죽이지 않길 잘했어. 무능한 자는 아닌 듯하니."

청년은 덤덤하게 말했지만, 그 내용은 조금 섬뜩했다.

그때였다.

"꺄아악!"

"...아니 역시 죽였어야 했나?"

청년은 멀리서 들리는 여자의 비명 소리에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남자에게 말했다.

"직접 봐야겠지."

청년은 비명이 들리는 곳에 도착해서는 상황을 파악했다.

가장 앞에 있는 여자는 옷이 찢어져 여기저기 살결이 보였다. 귀한 집 자제란 느낌이 드는 히잡을 쓴 여자는 그런 여자 뒤에 숨은 채 몸을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자들을 둘러싸고 남자들은 찢어진 옷 틈으로 보이는 살결을 음흉한 눈으로 쳐다보며 바지를 벗고 있었다.

"...보기 흉하군."

청년은 그런 남자들을 보면서 역겹다는 듯이 말했다.

"어이! 넌 뭐야!"

자신이 방해받았다는 사실에 화를 내던 무리의 우두머리 같은 대머리 남자는 벌컥 성질을 냈으나 뒤이어 따라들어온 거구의 남자를 보고는 몸을 움찔했다.

"호, 혹시 높으신 분입니까?"

확실히 거구의 남자는 높은 사람을 수행하는 사람 느낌이 강하게 났다. 그렇기에 대머리가 경계하자 청년은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흠, 이거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그 질문에 거구의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높으신 분은 맞지 않습니까?"

"아니, 그렇게 말하면..."

우드득!

어느새 남자들의 사이에 들어온 청년은 덤덤하게 남자 둘을 잡고 그대로 가볍게 꺾어 버리며 대답했다.

"저항도 안 하고 도망칠까 봐. 그러면 재미가 없지 않은가."

"히, 히익!"

대머리는 자기 부하 둘이 순식간에 당해 버리자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안 죽였다."

청년은 그런 대머리를 향해 덤덤하게 말했다.

조금 거칠게 하긴 했지만, 두 사람의 목숨에 지장은 없었다.

"사, 살려주십쇼!"

"...죽이지 않는다니까?"

청년은 조금 답답한 듯 중얼거리고는 우산으로 대머리를 후려쳤다.

빠각!

우산이 부러지면서 쓰러진 대머리의 머리에 피가 흘러나왔다.

이번에도 죽이진 않았다. 다만 크게 다쳤을 뿐.

"...병사들에게 잡아가도록 하면 되겠지."

고작 세 명인데 그마저도 수준이 형편없어서 몸 풀기도 되지 않았다.

청년은 그리 생각하면서 그제야 여자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무슨 일인지 들어도 되나?"

"아, 아가씨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찢어진 옷의 여인이 청년을 향해 감사를 표했다. 그걸 본 청년은 덤덤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대들은 여기서 무얼 하고 있었지?"

마치 자신이 듣고 싶은 건 감사 인사 따위가 아닌 상황 설명이라는 듯이 청년은 무뚝뚝하게 되물었다.

"그, 그것은..."

시녀로 보이는 여자가 눈치를 보면서 덜덜 떨자 청년은 한숨을 쉬고는 여전히 말이 없는 뒤에 있는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그대가 말해라."

"...비를 보고 싶어서."

그때 여인의 입이 열렸다.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상당히 듣기 좋은 미성이었다.

"아르바는 죄가 없사옵니다. 모든 것은 소녀의 고집으로 인한 일... 그, 그러니 모든 것이 소녀의 잘못이옵니다. 호위도 없이 이런 뒷골목으로 들어왔으니 화를 자초한 건 모두 소녀이옵니다. 그러니 아르바를 책망하지 마옵시고, 저를 책망하시옵소서."

이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여인은 목소리가 좀 떨리긴 했으나 훨씬 차분하게 사정을 말하고 있었다.

"세헤라자드 아가씨! 아닙니다. 제가 다 미숙한 탓에..."

'...촌극이군.'

청년은 그런 둘을 보면서 더 들을 필요도 없다고 여겼는지 그대로 후드를 벗었다.

그러고는 아르바란 여인에게 덮어 주며 말했다.

"일단 이걸 입고 돌아가도록. 그런 몰꼴로 돌아갔다간 난리가 나겠군."

둘이 서로를 아끼는 마음은 잘 알았지만, 그의 입장에선 별로 흥미가 생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요컨데 규중처녀가 비가 보고 싶다고 가출을 했고, 그 가출을 말리지 못한 시녀가 따라왔다가 무뢰배들에게 붙잡혀서 험한 꼴을 당할 뻔했다는. 시시하고 진부한 이야기였으니까.

"가, 감..."

멍...

후드를 벗자 드러난 청년의 얼굴을 본 아르바가 할 말도 잊고는 멍하니 그런 청년을 올려다보았다.

아르바가 아가씨라 부른 여인 역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청년을 보고 있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멍하니 청년을 보고 있었다.

"규중처녀라면 적어도 외출할 땐 호위를 대동하도록. 호위가 필요 없는 사람도 호위를 대동하고 다니거늘."

그런 그녀들의 시선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면서, 청년.

아니 황제는 진지한 얼굴로 충고했다.

당장 호위가 필요없는 자신도 이런 짐덩이를 달고 다니는데, 아무런 힘도 없는 여인이 호위를 대동하지 않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가 찼으니까.

그 말을 들은 진은 바로 투덜거렸다.

"아니! 그거 절 저격하시는 겁니까?"

"나보다 약한 녀석을 호위로 달고 다녀야 하니 참으로 피곤한 일이다. 그보다 이 아가씨들을 저택까지 데려다드려라. 나는 이 길로 돌아갈 테니."

"네? 자, 잠시!"

황제는 대답도 듣지 않고 그대로 가 버렸고, 진은 한숨을 푸욱 내쉬더니 그녀들에게 우산을 씌워주며 말했다.

"어디에 사십니까?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저분은...?"

그때 히잡을 쓴 여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진은 그 목소리가 참으로 곱다고 생각하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이미 얼굴을 보였으니 숨길 이유도 없겠지요. 폐하십니다."

"...!"

아르바가 놀란 표정으로 자신이 덮고 있는 후드를 쳐다보았다.

그렇다는 건 즉 이건 황제께서 친히 두르고 있던 후드였다는 이야기였으니까.

"폐하... 셨군요."

히잡을 쓴 여인은 한참을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곧 진에게 말했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겠사옵니다."

"...나쁜 의미로 만나지만 않았으면 좋겠군요."

진은 그런 그녀의 말에 그렇게 반응하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와 황제에게 이 만남은 그저 별것 아닌 만남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녀들에겐 그렇지가 않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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