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의무방어전-23화 (23/235)

〈 23화 〉 무인은 검으로 말한다

* * *

수도에 위치한 어느 한 저택.

그 안에 마련된 연무장에서 한 여인이 부지런히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검을 휘두를 때 걸리적거리지 않게 뒤로 묶은 검은 머리카락이 그녀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위아래로 흔들렸고, 땀에 젖은 옷이 착 달라붙어서 그녀의 근육으로 다부진 몸의 곡선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 검은 눈동자가 검을 보는 눈은 더없이 진지했으니... 그녀가 휘두르는 검은 깔끔하게 허수아비를 베어내고 있었다.

"후..."

"언제봐도 대단한 검이구나. 많이 늘었어."

그걸 보고 있던 남자가 박수를 치며 감탄했지만, 그녀는 마음에 차지 않았다.

안 그래도 가문에서 내린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애초에 그녀는 수도로 불려온 상황 자체가 불만스러웠다.

"전 저보다 강한 남자가 아니면 싫어요."

"...여화야."

그 말을 들은 남자는 표정을 구겼다.

이미 가문에서 정한 것을 이제 와서 무르겠다니.

남자는 그녀의 철없음에 머리가 아파왔다.

"폐하께선 이미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검사기도 하다."

게다가 강한 남자를 원한다면 황제만한 상대가 없지 않나? 그렇기에 그는 그녀의 반항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 거 소문이잖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요! 인간의 몸으로 만인지적이니 뭐니... 확실히 모용진이란 남자는 소문대로 강했지만... 황제가 그 남자보다 강할 거란 생각은 안 들어요."

여화의 대답에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천황제를 보았다면 그런 말을 하진 않았을 텐데."

남자는 천황제를 직접 보진 못했지만, 거기서 보인 황제의 무위에 대해서는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었다.

그렇기에 남자는 '그녀가 천황제를 봤다면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약골들을 마음대로 죽이려고 연 미친 행사를 말하는 거라면 전 못 들은 걸로 할래요."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애초에 어중이떠중이들이나 참가한 곳에서 학살을 저지른 것만 봐도 황제의 무위가 의심스러운 게 사실이다. 그녀는 천황제를 보진 않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황제가 강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말에 남자는 머리가 아파오는 걸 느꼈다.

당장 합궁 일자가 다가오고 있거늘, 딸의 태도가 완고하니... 결국 그가 한숨을 쉬며 물었다.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니?"

"그 황제가 소문대로 강하다면 절 쓰러트려보라고 하세요. 제가 진다면 순순히 황제의 여인이 될 테니까요."

"우리가 그런 걸 제안 할 입장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남자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리 봐도 갑의 위치에 있는 건 황제지 이쪽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오만한 제안해달라니! 남자는 머리가 아파왔으나 여화는 단호했다.

"황제가 정말 무인이라면, 거절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정말 황제가 소문대로 강한 사람이라면, 제대로 된 무인이라면, 이 제안을 거절하지 않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오히려 좋아할 수도 있었다.

"...그래, 일단 이야기는 해 보마."

결국 남자는 여화의 말을 전해 보기로 결심하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 목으로 끝나면 다행일 텐데...'

황제는 무서운 사람이다.

이런 건방진 제안을 그분께 하고 과연 살아 돌아올 수 있을까?

남자는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방법이 없구나.'

딸의 뜻이 저리도 완고하니 굽힐 수가 없었다. 당장 동아족에서 유력 가문들은 딸이 없었다.

유일하게 있는 게 저 말괄량이니... 그녀가 거절하는 순간 합궁에 보낼 여인이 없었다.

강제로 하자니 저 아이의 재능은 진짜.

그녀의 뜻을 굽힐 정도로 강한 자가 현재 동아족에서 존재하지 않으니 강제로 그녀를 보내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남자.

아니 환명호는 죽음을 각오하고는 황궁으로 향했다.

­­

"폐하... 그건 사랑이 아니라 동경이라는 다른 감정입니다."

진은 황제의 말에 한숨을 쉬고는 대답했다.

자신이 환운 공을 사랑하는 거 같다니. 정말 큰일 날 말이었으니까. 얼른 정정해 줘야함이 옳았다.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이지?"

황제의 질문에 진은 숨이 턱 막혔다. 사실 진도 잘 몰랐으니까.

"왜 갑자기 그것이 궁금해지셨습니까?"

"짐이 모르는 것이 생겼어. 그래서 그것을 알고 싶은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인가?"

"그건... 아니지요."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기에 진은 고민했다.

"언젠가 폐하께서 사랑을 하시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입니다. 조급할 이유는 없지요."

진은 결국 대답을 회피하는 걸 택했다.

황제는 진의 대답에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그대도 모르는 것 같군. 하긴 동정에겐 너무 어려운 질문이었나."

"...폐하, 동정의 검에 한 번 맞아보시렵니까?"

진이 귀기서린 눈으로 황제를 보며 말하자 황제는 기꺼운 듯 웃었다.

"그래 한번 해볼..."

휘익!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망치는 진을 보면서 황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자신이 먼저 화제를 꺼내놓고 도망이라니?

'...무료하구나.'

그러고 보니 최근엔 대련하지 못했다.

진 녀석이 갈비가 부러지고 나서는 좀처럼 어울려주지 않으니... 황제는 조금 섭섭하기도 했다.

"폐하. 동아족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그때 집무실을 찾아온 재상이 바로 안건을 들고 왔다.

"면담 요청인가?"

황제의 질문에 재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환 가문의 장이 폐하께 면담을..."

벌떡.

황제는 환 가문이 언급되기 무섭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환 가문 말인가?"

환 가문.

한족 다음으로 세력이 거대한 동아족의 최고 명문가이자, 그 환운 공을 시조로 둔 가문이었다.

당연히 환운 공을 동경하는 황제의 처지에선 가장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가문이었다. 무엇보다 그곳의 장은 대륙에서도 이름 높은 검사.

황제가 언젠가 꼭 만나 보고 싶다고 생각한 사람이기도 했다.

"당장 가지. 지금 있는가?"

완전히 몸이 달은 황제가 질문하자 재상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그렇습니다만."

'환운의 후예들이라.'

황제는 기대가 되었다.

환운의 후예이자 대륙에서도 5명밖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려진 검강 사용자인 환명호를 실제로 볼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

'긴장되는군.'

환 가문의 장인 환명호는 긴장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황제를 기다렸다.

이번 면담은 자신도 부끄러운 일을 고백하기 위함이었으니.

그 황제를 상대로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것 자체가 그에겐 부담 그 자체였다.

하지만...

'할 수밖에 없다.'

동아족의 사정상 다른 여자를 구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차례를 넘길 수도 없었다.

남은 건... 그 아이가 제시한 조건을 폐하께 간절히 요청하는 것뿐이었다.

끼익.

그때 문이 열리더니 황제가 안으로 들어왔다.

"존엄하신 폐하를 뵙습니다."

'소문은 보통 과장되기 마련이라 생각했거늘...'

인사를 건네면서 환명호는 황제의 얼굴을 보면서 작게 감탄했다.

최근 황제의 외모가 빼어나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저 소문이라 여겼는데... 실제로 보니 그야말로 천하의 절색이었다.

여인으로 태어났다면 가히 경국지색이라 칭해도 이상함이 없을 정도로.

"그래, 면담을 요청했다지.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황제는 자리에 앉으면서 환명호를 살펴보았다.

잘 정돈된 기, 그리고 단련된 신체.

과연 검강 사용자라 이건가?

황제는 벌써 그와 검을 섞어보고 싶어서 몸이 달았다.

"단련할 상대가 필요하다던가?"

"네?"

환명호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드는걸 보면서 황제는 아쉬워했다.

자신과 검을 나눠보고 싶어서 온 건 아닌 거 같았으니까.

"어찌 제가 감히 폐하와 검을 맞대겠습니까?"

"왜 안 된다고 생각하지? 그대의 실력은 이미 대륙에서도 정평이 나 있거늘."

용왕과 동수를 겨뤘다고 하는 그의 무예는 이미 유명하다.

당장 황제는 이딴 면담은 집어치우고 그와 검을 맞대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다.

그는 분명 환운 공의 검술을 이어받았을 테니까.

"과찬이십니다."

"...그렇군."

해주지 않을 생각이군.

황제는 노골적으로 아쉬워했지만, 환명호는 왜 황제가 아쉬워하는지는 알지 못한 채 슬슬 본론으로 들어갔다.

"소인이 폐하를 뵙기를 청한 것은 합궁 문제로 인해 요청할 일이 있어서입니다."

"...그놈의 합. 아니지 그래,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황제는 욕설을 내뱉을 뻔한 걸 참고는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대체 무슨 문제가 생긴 건지는 알아야 했으니까.

"이번엔 폐하의 합궁 상대로 뽑힌 것이 부족한 제 딸입니다만... 그 딸이 지금 문제가 좀 생겨서 말입니다."

환명호는 과연 이런걸 말하고도 자기 목을 부지할 수 있을지 걱정했지만... 지금은 이게 최선이었다.

"말해 보거라."

황제가 덤덤하게 어느새 상선이 내온 차를 마시면서 말하자 환명호는 잠시 심호흡하고는 말을 이어갔다.

"제 딸이 지금 합궁을 거부하는 터라. 그... 무례하게도 폐하께서 자신보다 강하지 않으면 합궁을 진행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처음엔 하기 싫으면 좋은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던 황제는 뒤에 이어진 말에 눈을 반짝였다.

"호오, 그 말은 짐과 검을 겨루고 싶다는 이야기인가?"

"소, 송구한 일입니다. 허나 제 딸의 뜻이 완고하여... 이런 말하긴 뭐 하지만 그, 폐하께서 그 아이의 검을 꺾어 주셨으면 합니다."

"그래, 그 아이도 무인이라면 검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겠지. 좋다."

"정말 죄송한... 네?"

황제가 흔쾌히 허락하자 환명호는 눈을 크게 떴다.

그야말로 무례하기 그지없는 요청이었거늘. 목 하나 정도는 날아갈 각오를 하고 한 말이었는데 황제는 오히려 즐거워 보였다.

"그 아이는 그래서 강한가?"

"주제넘은 표현일지 모르지만... 그 아이는 확실히 천재입니다. 이미 제 경지를 넘었으니 환운 공의 환생이라 부르는 이들도 있다더군요."

여화의 무위는 이미 그의 경지를 넘어선 지 오래.

확실히 세기의 재능이요, 하늘이 내린 기재였다.

그렇기에 환명호는 그 아이의 강함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호오!"

황제는 그야말로 깊은 흥미를 드러냈다.

환운 공의 환생이라 불리는 강한 여자? 당장에라도 불러서 검을 섞고 싶었다.

그렇기에 황제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 언제 하는 거지?"

"그, 그게 빠른 시기에... 원하신다면 오늘 밤에라도..."

"그래, 밤에 황실 연무장으로 데려오거라."

아니 이렇게 바로?

오히려 환명호가 당황할 정도로 황제는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원한다면. 그대도 함께 해도 좋네."

오히려 합공도 괜찮다는 황제의 말에 환명호는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그, 그러십니까? 아무튼 그 아이에게 오늘 밤 황실 연무장으로 가라고 전하겠습니다."

뭐지? 황제는 대체 무슨 의도지?

환명호는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잘 되었으니까. 얼른 그 아이에게 이 사실을 전할 생각이었다.

"그래, 기대하고 있지."

황제는 환명호를 보내고는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벌써부터 오늘 결투를 생각하며 몸이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진. 그 여자에 대해서 얼마나 아나?"

"환여화라는 여자일 겁니다. 그녀와는 전에 친선대결을 한 적이 있었지요."

진의 대답에 황제는 관심을 가졌다.

그런 여인이 있었단 말인가? 진과 겨룰 정도라면 확실히 기대해볼만 했다.

"결과는?"

"...제가 졌습니다."

진은 정말 말하기 싫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 대답이 황제의 기대감을 더욱 높혔다.

"그런데 지금 붙으면 제가...!"

"아, 그래, 그래. 그렇겠지."

황제는 이제 패배자한테는 관심 없다는 듯이 진의 변명을 깔끔하게 무시하고는 그녀의 검을 상상했다.

'중검? 아니 쾌검일까?'

환운 공 하면 떠오르는 묵직한 중검의 묘리를 담은 검술을 펼칠 수도 있고, 아니면 예상외로 극도로 빠른 일검을 휘두르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면 변화무쌍하게 상대를 공략하는 검술을 펼칠까?

"...만약 그 여자가 짐의 기대에 못 미친다면."

하지만... 정말 만약에...

그녀가 기대 이하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명호의 말은 그저 딸이라서 하는 말에 지나지 않았고, 그녀의 실력은 실제로는 진과 비슷한 정도에 불과했다면?

아니 지금은 진보다 진짜 더 약하다면?

"...짐은 몹시 화가 날 거 같군."

그러면 환운 공의 가문이라고 해도 화가 많이 날 거 같았다.

그 말에 진은 몸을 움찔했다. 황제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치가 않았으니까.

"그 여자는 분명 강하겠지?"

그래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런 오만한 말을 지껄일 자격이 없을 테니까.

그 오만함의 대가를 그녀뿐만이 아닌 그 가문, 아니 이 경우엔 그 민족 전체가 감당해야 할 테니까.

그러니까 황제는 부디 그 여자가 기대 이하의 검사가 아니기를 바랐다.

"짐은 환운 공의 피를 이 손으로 끊어 버리게 되는 일은 안 생겼으면 좋겠구나."

그 말은 즉, 그 여자가 그런 오만한 제안을 할 정도로 강하지 않다면...

그들을 전부 죽여 버리겠다는 의미로 들렸기에 진은 오한이 들었다.

황제는 빈말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 말 역시 진심일 것이다.

이 제국에서도 두 번째로 강성한 민족인 동아족을 멸족시키겠다는 말이 말이다.

그것이 더욱 진을 소름 돋게 만들었다.

실제로 이 황제는 그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일 힘과 능력이 있었으니 말이다.

"기대를 했을 때, 그 실망이 더욱 큰 법이니 말이야."

황제는 그만큼 그녀에게 기대를 하고 있었다.

환운의 환생이라 불릴 정도면 얼마나 강할까? 그녀의 검은 자신에게 닿을까?

자신은 그녀를 이길 수 있을까? 그녀는 자신을 이길 수 있을까? 벌써부터 기대에 미칠 거 같다.

황제는 기대감에 미칠 거 같다는 감정을 오늘 절실히 느꼈다.

얼른 밤이 왔으면 좋겠다.

황제는 처음으로...

밤이 기대가 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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