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전장에 대한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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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폐하께선 태자 시절 전장에 나서셨다고 들었는데... 그 소문들은 전부 사실인가요?"
대련이 끝난 후, 여화는 검을 내려놓고는 수건으로 땀을 닦으면서 물었다.
"사실이다. 모두의 반대를 뿌리치고 전장을 경험해 보고 싶어서 야만족들이 있는 최전방으로 향했지."
이미 황제가 되는 건 기정사실이던 시절.
다른 황자들이나 황녀들은 경쟁자조차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황제는 모두의 반대를 무시하고 최전방으로 향하는, 이른 바 가출을 감행했다.
"과연... 짐이 원하는 것은 전장에 있었어."
황제는 그때를 떠올렸다.
신분조차 숨기고 최전방으로 향한 황제는 일단 말단 병사부터 시작했다.
"거친 바람. 그리고 황야. 밤에는 자다가도 화살이 날아왔고, 이튿날 눈을 뜨면 같이 보초를 서던 전우가 죽어 있었지."
그곳은... 누군가에겐 끔찍한 곳일 수 있으나 황제에겐 그보다 더한 천국이 없을 정도였다.
"언제 죽을지 모를 거 같단 공포감이... 오히려 짐을 흡족하게 했단다. 어느 날은 자는 데 습격을 당해서 야만족의 칼이 목에 박힌 적도 있었지."
깨어나는 게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그때 죽었을 거다.
황제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 모습이 여화는 오싹하게 느껴졌다.
"재미있지 않나? 그때 짐은 그리 완벽하지 않았다. 칼도 멀쩡히 박히고, 독도 통하는 인간이었지."
그럼 지금은 칼도 안 박히고, 독도 안 통하는 괴물이라는 이야기 아닌가?
여화는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그걸 굳이 언급하는 우를 범하진 않았다.
"허나 짐은 그때가 훨씬 즐거웠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전장에서, 짐은 오히려 더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자신이 살아 있음이 오히려 더욱 실감이 났다.
야만족들은 치밀했다.
겉으로는 우호를 주장하면서도, 계속해서 습격해왔지.
최전방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평화의 시대.
전란의 시대에 비하면 분명 평화로울지 모르지만... 아직 야만족의 위협을 해결하지 못한 제국에게 평화의 시대는 그야말로 허울 뿐이 평화였다.
황제는 그곳에서 그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때 그가 그곳에서 본 것은... 평화와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잠시 눈을 감고 있던 내가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 그리고 증오스러운 야만족들의 천막이었다.
"오늘은 좀 얌전하면 좋겠다. 안 그래?"
그 천막을 응시하며, 보초 역할을 성실히 하고 있던 고참 병사의 말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한테는 얌전한 것보단 녀석들이 날뛰어주는 편이 더 좋았으니까.
"쌀쌀맞기는. 휘. 너 그런 식으로 굴면 나중에 결혼 못한다?"
내 가명을 말하며 결혼 걱정까지 해주는 고참의 배려를 모르는 것은 아니나 그건 정말 괜한 걱정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주술 도구로 변한 붉은 눈으로 여전히 적의 진지를 노려보면서 대답했다.
꽈악!
"당장 이렇게 보초를 서고 있는데도 화살이 날아오는 거지 같은 곳에서 쌀쌀맞지 않기는 힘들군요."
"...너, 진짜 저게 보였냐?"
고참은 날아온 화살 두 개를 손가락으로 잡아낸 나를 보면서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집중하면 보입니다."
나는 그 질문에 덤덤하게 대답하면서 뒤에 있던 창을 쥐었다.
저게 안 보이면 굳이 보고 있을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방금 공격을 실패한 순간, 저들은 이미 작전을 실패했다. 그러니 야만족 기마병의 돌격에도 나는 긴장하지 않았다.
처억.
"적습입니다. 얼른 북을!"
창을 가볍게 앞으로 세우며 내가 말하자 고참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날 보더니 바로 망루 위로 올라가 북을 치기 시작했다.
둥! 둥!
"적습! 적습이다!"
그야말로 신속하게 무장을 하고 튀어나오는 병사들. 역시 최전방에서도 손꼽히는 정예 중대다운 대처였다.
그리고 그들이 준비하는 동안 내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푸아아악!
선두에서 달려든 말의 다리를 잘라 돌진을 저지한 나는 낙마한 놈들의 생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죽거나, 어차피 싸우지도 못할 정도의 중상일 테니까.
"휘 녀석이 싸운다!"
"막내를 도와!"
곧이어 무장을 끝낸 병사들이 부랴부랴 뛰어나오면서 전투를 개시했다.
야만족들은 자신들의 기습이 실패했음을 깨달았으면서도 돌진을 멈추지 않았다.
원래 그들의 계획이었다면, 화살로 보초를 제거하고 자는 우리 중대를 급습할 예정이었겠지만... 내가 망쳤으니까.
"일단 저 새끼부터 죽여!"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야만족의 전사들이 눈을 부라리며 말을 몰고 나한테 쇄도했다.
푸욱!
달려드는 말의 목을 찌르고, 다리를 베며, 나는 나한테 달려드는 놈들을 전부 낙마시켰다.
늦게 합류한 병사들은 방진을 세우며 돌진을 버텼고, 어느새 쌓이는 것은 야만족의 시체였다.
"갑자기 시벌. 이게 뭔 날벼락이여. 막내야! 괜찮냐?"
그 중심에 있던 백부장은 욕설을 내뱉고는 내 몸을 살폈다.
"...괜찮습니다. 아무튼 이걸로 확실해진 게 있습니다."
나는 백부장의 질문에 야만족들의 시체를 살펴보며 말했다.
"으잉? 뭐가 말여?"
백부장이 고개를 갸웃하자 나는 적진을 노려보았다. 확실히 병력들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저흰 고립되었습니다. 본대는 아마도 저희 쪽으로 합류할 수 없는 상황이겠군요."
"뭐여?"
백부장은 그 말에 깜짝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나 내 생각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 본대는 오지 않을 거다. 이미 야만족들에게 패해 괴멸당했을 테니까.
이들은 그 소식을 듣고 잔당을 소탕하려고 하는 게 분명해보였다.
"저들의 갑작스러운 습격. 그리고 여전히 오지 않는 본대의 구원 병력."
야만족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우리는 이곳에 고립된 지 벌써 한 달째지만 구원 병력은 오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진지만 치고 더러운 암습이나 야습을 가하던 놈들이 오늘은 본격적인 습격을 해왔다.
그것도 모자라 습격이 실패하자 포위망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게 의미하는 건... 내가 볼 땐 명확했다.
"본대가 패배했다.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 저희는 완전히 고립되었습니다."
"막내야! 지금 우리 위대한 천제국의 본대가 패배했다? 야만족 따위한테? 그리 말하는 거냐?"
백부장은 그 절망적인 말에 화를 내며 물었다.
백 명이던 우리 중대는 이제 백부장을 포함해도 50명 남짓한 수가 되었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본대의 괴멸 가능성까지 거론되었으니 백부장 입장에선 화도 나고 억장이 무너져내릴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말은 저렇게 해도 백부장 역시 그 의견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면... 막내가 우리 중 가장 강하고, 똑똑하니 우리를 이끌어다오. 어쩌면 좋으냐?"
백부장은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바로 나한테 모든 것을 일임하는 것.
의외였다.
백전의 노장인 그가 자신에게 모든 걸 선뜻 맡기기로 결정했다는 것이 말이다.
"백부장님!"
병사들도 그 말에 크게 놀랐으나 백부장의 뜻은 확고했다.
"우리의 목숨은 너한테 달렸다. 이젠 어찌해야 하냐? 네 말이 사실이라면 우린 야만족들에게 포위당했고, 우리 중대는 전멸을 피할 수 없다."
실제로 벌써 야만족들은 포위망을 구축하며 돌격을 막기 위한 방책까지 세우고 있었다.
그걸 본 나는 덤덤하게 포위망을 살펴보면서 대답했다.
"군마는 몇필이 있습니까?"
"우리가 다 탈 정도는 있다. 왜 그러지?"
백부장의 질문에 나는 창을 굳게 쥐고는 내 말에 올라탔다.
녀석이 전투의 기운을 읽었는지 투레질을 하며 흥분하고 있었다.
"모두 말을 타고 일점 돌파로 뚫는다."
내가 내릴 명령은 하나였다. 바로 일점 돌파.
이대로 방진을 짜고 버티는 건 자살 행위.
차라리 포위망이 완전해지기 전에 한곳을 중점으로 뚫고 포위에서 벗어나야했다.
"...뭐? 막내야 그게 제정신이니?"
백부장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되물었으나 나는 단호했다.
"명령이다."
"...모두 말을 타라."
백부장은 내 짤막한 말에 다른 병사들에게 명령했고, 병사들은 전부 자기 말을 끌고 와서는 말에 올라탔다.
그 중에서 거대한 말을 타고 바로 내 뒤에 서며 백부장이 물었다.
"승산은 있냐?"
"내가 뚫으면 바로 따라 들어오면 된다. 절대 멈추지 마라. 멈추는 순간 죽을 거다."
내가 확신을 가지고 말하자 백부장은 크게 웃었다.
"널 보면 가끔 미친놈 같은데... 이상하게 든든하구나. 좋다! 막내가 길을 뚫는단다. 꽉 잡고 따라와라!"
백부장이 큰 소리로 외치자 병사들은 그 말에 크게 호응하고는 돌격을 준비했다.
"인사를 해야겠지."
나는 밀집해 있는 야만족의 병사들을 보며 가볍게 창을 휘둘렀다.
푸아아아아아악!
그러자 날아간 참격이 순식간에 백 명이 넘는 야만족의 몸을 갈라버렸다.
그 말도 안 되는 위력에 뒤따르던 백부장과 병사들이 눈을 크게 떴다.
"모두 돌격!"
나는 명령을 내리고는 힘차게 말을 몰았다.
당황한 아먄족이 날린 화살은 기막을 만들어서 전부 튕겨 내며 나는 돌진을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병사들은 이를 악물고 말을 몰아 내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서걱!
나무로 만들어진 방책을 베어내고, 창으로 만들어진 방진을 뚫어버리며 나는 돌파를 시작했다.
내 앞을 막는 것은 모두 벴다.
뒤에 따라오던 병사들은 혼란에 빠진 병사들을 베어내며 악착같이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얼마나 뚫었을까? 얼마나 베었을까?
말도, 자신도 완전히 피로 칠갑하고 나서야 우리는 포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망자는?"
이젠 적들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오고 나서야 나는 말을 멈추고는 백부장에게 물었다. 말들이 제법 지쳤는지 거칠게 투레질을 하고 있었다.
"...없어. 하하하! 없어! 없다고! 새끼들아. 우리 막내 봤지? 살았다! 우린 살았다고!"
병사들을 확인한 백부장이 나를 껴안으면서 신난 얼굴로 외쳤다.
그걸 본 병사들은 그제야 자신이 이번에도 살아남았음을 실감하고 있었다.
"자! 자! 일단 본대는 뒤졌을 거 같으니까 국경으로 가자. 아무리 미친 야만족이라고 해도 국경 수비대까지 뚫진 못했을 거 아니야."
백부장은 병사들을 독려하면서 일단 야영을 준비할 것을 지시했다.
물론 보급품 따윈 없으니까 전부 현지에서 조달해야 했다.
"막내야! 넌 보니까 대성할 팔자다. 출세하면 우리 꼭 데려가라."
백부장이 크게 웃으면서 땅을 파서 잘 곳을 만들고 있는 나한테 부탁했다.
"너무 높게 올라갈 텐데 괜찮습니까?"
그가 어디까지 상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미래는 그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하는 될 수 없는 운명이었기에 나는 진심으로 그를 걱정하며 질문했다.
"그럼 그만큼 높게 살면 되는 거 아니냐. 크하하!"
호탕하게 웃는 그를 보며 나는 잘 파둔 땅에 몸을 집어넣고는 흙으로 덮으면서 대답했다.
"그럼. 이름 기억해 두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십쇼."
"그래, 우리 전부 기억해 줘라. 알았지? 잘 자라! 우리 보물."
백부장은 그렇게 말하고는 내 옆에서 잠이 들었다.
'꽤 어려운 일정이 되겠어.'
나는 밤하늘을 올려다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본대가 무너졌다면... 국경 수비대도 병력을 뒤로 물렸을 텐데.'
이번 원정은 이쪽에서도 꽤 무리한 작전이었다.
그런데 본대가 무너졌다? 그렇다면 국경 수비대는 국경을 지키기보단 민간인들을 피난시키면서 전력을 보존하고 중앙에서 보낼 중앙군과 합류하는 방식으로 진행할 거다.
'즉, 국경으로 가도 우릴 반기는 건...'
야만족의 본대일 가능성이 높다.
이번 전투는 승리로 끝났지만, 본대와의 싸움은 다르다.
오십 대 십만의 싸움이 될 수도 있다. 아무리 나라도 그 정도의 숫자를 상대로 전투는 무모했다.
'어째야 하나...'
그렇기에 내 고민도 깊어졌다.
나 혼자만이라면 문제가 없지만... 이제 나한테는 딸린 녀석들이 생겼다.
이 녀석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뭔가 방법을 구상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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