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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의무방어전-29화 (29/235)

〈 29화 〉 다섯 번째 합궁­마리아 폰 쾨펜

* * *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탑은 겔만이 자랑하는 마탑.

현자가 산다고 전해지는 그 탑의 최상층에서 넓은 챙모자를 쓴 여인이 기다란 곰방대를 입에 문 채 앞에 있는 남자에게 보고를 듣고 있었다.

그런 그녀는 상당한 미인이었다.

수수한 로브를 입고 있음에도 그 굴곡이 야하게 느껴질 정도로 섹시한 몸매가 눈둘 곳을 못 찾게 만들었고, 신비한 자색 눈동자는 기묘한 매력을 뽐내고 있었으며, 새하얀 백발은 눈보다도 희고 고왔다.

"그래... 검토 중이라."

남자의 보고가 불만스러운지 그녀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의자 팔걸이를 곰방대로 툭툭 두드렸다.

그 움직임에 그녀의 기다란 흰색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찰랑였다.

"그 대답을 가져오려고 본녀를 이리 기다리게 했느냐?"

그녀의 눈동자가 남자를 집요하게 노려보기 시작하자 남자의 몸은 더욱 떨렸다.

"혀, 현자 님이 아무래도 그 위치가 위치다 보니 불안해 하는 거 같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바로 이 대륙 유일의 현자이자, 대륙 최고의 마법사.

마리아 폰 쾨펜이었으니까.

"호오, 본녀의 의도가 궁금하다? 뜻밖이로구나. 이번 황제는 그 정도로 나약한 자가 아니라 들었거늘."

여자가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그 미소가 남자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폐하께서는 우려하지 않으시겠지만... 그 대, 대관들은 다릅니다."

"아해야. 겔만족의 우두머리가 그리 유약해서 되겠느냐? 떨지 말고 말해보거라."

"스승님... 사실 저 역시 스승님의 선택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겔만족의 수장인 오토는 그 말에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그 말에 마리아는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하긴 본녀가 떠나는 것이 불안하겠구나."

제자가 스승을 떠나보내는 게 불안한 것도 당연하겠지. 어리광쟁이 같으니.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며 웃었으나 오토의 말뜻은 그게 아니었다.

"나이를 생각하셔야..."

"어허! 본녀는 언제나 마음은 20대니라."

설마 나이를 지적하다니! 화가 난 마리아는 조금 화난 목소리로 주장했다.

"솔직히 나이를 생각하면 폐하가 아까운 게 사실..."

따악!

바로 곰방대가 날아와 오토의 머리를 때렸지만 오토는 굽히지 않았다. 이미 저지른 거 끝까지 하자는 생각이었다.

"마음만 20대면 뭐 하십니까? 솔직히 회임은 할 수 있으십..."

따악! 따악! 따아악!

이번에 더욱 강하게 곰방대로 머리를 후려친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노화가 멈춘 몸이니라! 당연히 가능하거늘! 하여간 제자라고 있는 것이 이 모양이니 참으로 우려스럽구나."

노기로 붉어진 얼굴로 '나 삐졌어요!' 라고 주장하듯 그녀는 삐진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으나 오토는 굽힐 줄을 몰랐다.

"그리고 왜 하필 폐하십니까? 선제께서 고백하실 적엔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시더니 말입니다. 물론 그때도 이미 늙..."

따악!

다시 나이를 지적하는 오토의 머리를 이번엔 직접 일어나서 후려친 그녀는 본심을 말했다.

"아해야. 본녀는 후계자가 가지고 싶단다."

"네, 네... 늘 그리 말하셨지요."

오토는 혹이 잔뜩 난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대답했다.

그녀가 현자로 살아온 세월만 몇 년이지? 벌써 50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오토는 그녀가 자기 마법을 전부 물려받을 후계자를 예전부터 바라오고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내 눈에 차는 아이가 없던 때에...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더구나."

"무슨 쓰잘데 없... 아니 네,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오토가 급하게 본심을 숨기며 질문하자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마음에 차는 아이가 없다면 본녀가 낳으면 되는 문제가 아니냐. 그러기 위한 최고의 상대를 찾았을 뿐이야."

그녀는 자신의 모든 마법을 이을 후계자를 직접 만들기로 결심했다.

최강의 배우자를 찾아서 그 씨로 자신이 낳은 최고의 후계자를 말이다.

"그게... 지금의 폐하란 말씀이십니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확신이었다.

그토록 강한 남자의 씨라면 분명히... 자신에게 만족스러운 후계자를 낳게 해줄 거라고.

그렇기에 그녀는 이번 황제와 반드시 관계를 맺을 생각이었다.

"다시 보내줄 테니까 이번엔 반드시 긍정적인 대답을 듣고 오너라."

"자, 잠시 아직 이야기가 안..."

휘익!

그대로 오토를 전송시켜 버린 마리아는 창밖을 내다 보면서 중얼거렸다.

"과연 소문 그대로의 남자일까? 기대가 되는 구나."

황제의 소문대로의 남자라면 그야말로 그녀가 바라는 최고의 상대일테니까.

그 소문이 거짓된 소문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한참을 그렇게 오토가 긍정적인 대답을 가져오길 기다렸다.

­­

"이걸 이유라고 가져 왔나? 재상?"

황제는 겔만족의 수장이 말해 준 현자가 합궁 대상으로 선정된 이유가 적힌 회의 기록을 보면서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이게 정녕 이유라면 오랜 세월이 현자를 미치게 만들었나보구나."

그만큼 그 이유는 황당했으니까.

좋은 유전자를 위해서 합궁을 희망했다고?

그 마리아 폰 쾨펜.

10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온 현자가?

'하긴 나이가 나이니.'

뭐... 그 정도 살았으면 미칠 만도 하겠지. 황제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로 오래 살았으면 정신이 조금 이상해져도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딱히 상관없겠지."

무엇보다도 사실 그녀의 이유 따윈 크게 상관이 없었다.

제국에겐 어찌 되었든 볼모만 얻을 수 있으면 충분했으니까, 그녀에게 나쁜 뜻이 없다는 것만 확인된다면 오히려 꽤 괜찮은 합궁 상대라고도 볼 수 있었다.

겔만족의 자랑이자 전력의 절반을 담당한다고 알려진 그녀를 확보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테니까.

"싸워 보고 싶긴 한데..."

물론 그 정도의 괴물 같은 여인이라면 황제는 당장 싸워보고 싶은 호승심이 일었다.

"싸울 거면 침상에서 싸워주시길."

"..."

재상이 단호하게 대답하자 황제는 노골적으로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 짐은 종마처럼 허리나 흔들라 이 말이지?"

"네."

"..."

아니 이젠 부정도 안 하나? 황제는 그런 생각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딱히 재상을 처벌할 생각은 없었다. 이런걸 일일이 처벌했다간 조정에 일할 대관들이 남지 않을 테니까.

"그래, 그러면 짐은 일할 준비해야겠구나."

"준비하라 지시하겠습니다."

재상이 떠나자 황제는 뒤에서 얌전히 서 있던 진에게 말을 걸었다.

"어찌 생각하냐?"

"무얼 말입니까?"

진이 고개를 갸웃하자 황제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현자와 짐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침대에서 말입니까?"

따악!

헛소리를 지껄이는 진의 머리에 딱밤을 먹인 황제는 불쾌한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대한 내가 미련했구나."

황제는 걸음을 옮겼다.

모두가 자신과의 비교에서도 확답을 피할 정도인 최강의 마법사란 여자는 어떤 자일까?

황제는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판단할 생각이었다.

­­

"번거롭구나."

오토에게 허락이 떨어졌다는 말을 듣기 무섭게 마법으로 황궁까지 날아온 마리아는 궁녀들의 안내를 받아 치장을 끝내고는 침대에 앉아서 투덜거렸다.

그녀는 흰머리를 비녀로 깔끔하게 정리해 두었고, 늘 입던 수수한 로브가 아닌 검은색의 화려한 속옷을 입은 채 그 육감적인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그 나이가 믿어지지 않는 매혹적인 모습이었다.

'어떤 아해일꼬...'

매끄러운 다리를 쫙 뻗으면서 그녀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황제에 대한 소문은 가지각색이었다.

보는 순간 공포에 질릴 정도로 무서운 사람이라는 말이 있는가 하면, 보는 순간 사람을 홀릴 거 같은 미인이라는 말도 있었다.

드륵.

"...둘 다였던 모양이구나."

그리고 그녀가 본 황제는 그 둘 다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

꽤 긴 인생을 살아온 그녀가 봐도 황제 같은 잘생긴 남자는 처음 보았으나, 마찬가지로 보기만 해도 공포를 안겨 주는 무서운 기운을 뿜어내는 남자도 처음이었으니까.

'놀랍구나...'

그녀는 황제를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대단하군,'

한편 황제도 그녀를 보면서 속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에는 소름이 끼쳤고, 그녀의 외형은 그녀가 100살이 넘은 노인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하얀 머리는 여전히 윤기가 넘쳐흘렀고, 몸매는 전혀 쇠하지 않았으며, 탄력적이었으니까, 적당히 잡힌 살집은 오히려 매력 요소로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황제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런 그녀의 외형적인 것이 아니었다.

'강하겠어.'

그녀의 강함이었다.

그녀는 강했다. 당장 황제가 본 그 어떤 존재보다도.

그렇기에 황제는 당장에라도 칼이 있으면 뽑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면서 의자에 앉았다.

"그대는 짐을 이길 자신이 있냐?"

"침대에서 말이냐? 본녀는 해 보지 않고는 모르겠구나."

"..."

황제는 그 대답에 침묵했다.

설마 다 짜고 치는 건가? 왜 다 비슷한 대답을 하는 거지?

황제는 그런 생각을 잠깐 했지만... 일단은 다시 질문했다.

"생사결 말이다."

"본녀가 지겠지."

뜻밖에도 명쾌하게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걸 들은 황제는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의외군."

그녀 정도의 강자가 싸워보지도 않고 패배를 인정하다니? 의외였으니까. 그러나 그녀 입장에선 당연한 것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자신의 상대로 황제를 고른 것은 그가 자신보다 강할 거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니까.

"그 정도 되는 남자기에 본녀가 고른 것이 아니더냐. 후후."

그녀의 말을 황제는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 누구도 그녀에게 합궁을 권유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니 이건 본인의 선택이라고 보는 것이 옳았다.

당장 황제의 아버지인 선제 폐하께서 그녀에게 구애했다가 장렬하게 차인 이야기는 유명했으니...

스륵.

어느새 다가온 그녀의 새하얀 손이 황제의 가슴을 훑었고, 황제는 그런 그녀를 무덤덤하게 쳐다보았다.

"반응이 무슨 목석 같구나."

"그래서 불만인가?"

황제의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녀의 눈엔 흥미가 가득했다.

"아니 오히려 더욱 흥미롭구나. 과연... 기대 이상의 남자야. 후후, 너무나도 마음에 드는구나."

그녀는 지금 황제가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잘난 얼굴도, 잘 단련된 육체도, 자신조차도 그 크기를 헤아릴 수 없는 거대한 마력까지!

모든 게 그녀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으니까.

'본녀가 마력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상대는 처음이구나.'

이렇게 완벽한 상대가 있다니... 마리아는 어쩌면 지금까지 자신이 혼자였던 건 이 황제를 만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경험이 없나?"

황제는 서툰 솜씨로 옷을 벗기려는 걸 실수하는 그녀를 보면서 덤덤하게 말했고, 그 순간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보, 본녀가 모자라서 그런 게 아니라 본녀의 마음에 차는 상대가 없어서 그런 것이다. 에잇! 얼른 옷이나 벗거라."

그 말에 부끄러운지 잔뜩 붉어진 얼굴로 성질을 부리면서 억지로 옷을 잡아 뜯으려는 그녀를 보며, 한숨을 쉰 황제는 순순히 옷을 벗었다.

움찔!

남자의 성기는 처음 보는 것인지 그녀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무섭나?"

"그, 그럴 리가 없지 않냐. 자 이렇게 하면 되는 거겠지? 어, 어라?"

엉성하게 가슴으로 애무를 시도하다가 실패한 그녀를 보면서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지 현자란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귀찮은 여자 같았으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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