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황태후의 사소한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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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황궁에서 가장 높은 신분을 가진 자라면 역시 황제겠지만... 가장 웃어른이 누구냐고 하면 모두가 황태후라 말할 것이다.
황태후.
황제의 어머니이자 상황이 없을 때엔 황실의 웃어른으로 황제조차도 존중을 표해야 하는 존재.
그녀의 하루는 늘 빨랐다.
새벽 닭이 울기 전에 일어난 황태후는 늘 그랬듯이 우선 목욕재계로 하루를 시작했다.
이제 막 불혹에 가까워진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여전히 무너지지 않은 아름다운 몸매를 유지하고 있는 그녀는 이젠 젊은 시절보단 조금 윤기 없는 피부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나이는 못 속이는 모양이구나."
그녀의 외모는 아직도 20대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젊었으나 그녀에 눈엔 그리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늙어가는 걸 실감할 때마다 한숨이 깊어져만 갔다.
"황상이 이 어미가 없이도 잘해낼 수 있을지..."
바로 자신이 없으면 이 황궁에 사실상 홀로 남게 될 황상 때문이었다.
모두가 그 아이를 괴물이라고 두려워했지만, 그녀의 눈엔 그저 관심과 애정이 필요한 가여운 아이일 뿐이었다.
그 아이가 친동생의 배신으로 얼마나 마음에 상처를 받았을지 생각하면... 지금도 눈앞이 깜깜해지는 듯했다.
'민이 녀석... 이 어미와 황상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구나.'
처음에 그 아이가 황상을 배신한 걸 가벼운 처벌로 용서하고자 했을 때, 그녀는 절대 용서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감히 친형을 배신하고 독살을 주도하다니! 그녀도 어미인지라 차마 그 아이를 죽여야 한다고는 말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유배 정도는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황상은 그런 그 아이를 용서해주었다.
2개월의 근신과 반성문 100장을 작성하는 것으로 말이다.
그것이 황태후는 불안의 씨앗이라고 생각했다.
고작 그런 처벌로 미친왕이 정신을 차릴 지 우려되었으니까.
실제로 미친왕은 다시 한번 황상을 암살하려고 했고, 황상은 그런데도 아우를 죽이지 못했다.
참으로 착하고 가여운 아이였다.
모든 형제들의 공공의 적이 되어선... 모두가 그 아이를 괴물처럼 생각하는 이 삭막한 곳에서... 그 아이는 얼마나 외롭고, 또 고독했을까?
'합궁이 황상을 바꾸어 주길 기대했지만...'
황태후는 한숨을 쉬었다.
합궁을 통해 여인들과 정을 통하다 보면... 황상의 그런 고독이 메워질까 기대했다.
누군가의 온기가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황태후는 여인들의 온기가 황상의 위로가 되길 기대했다.
하지만... 합궁은 황상에겐 그저 의무이자 부담이었고, 족쇄였다는 걸 그녀는 최근에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이 황태후의 마음에 짐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황태후 폐하. 기침하셨는지요."
무거운 마음으로 옷을 정갈하게 갈아입고는 황궁을 돌아다니며 궁녀들을 교육하던 황태후는 자신에게 다가와 공손하게 인사하는 붉은 머리의 여인을 보고는 눈을 반짝였다.
"나르타 비는 늘 부지런하구나. 그 모습이 참으로 보기가 좋아."
황태후는 이번 비중에선 나르타에게 가장 마음이 갔다.
참하고, 총기가 있으며, 성실하고 부지런하였으니 황상을 잘 보좌해 줄 듯했으니까.
"마침 좋은 차가 들어왔는데 혹시 점심때 시간이 있니?"
황태후의 권유에 나르타는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귄유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때는 시간이 널널하니 언제든 불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후후, 다른 비들도 시간이 난다면 대신 권유해주지 않으련? 그 아이들하고도 한 번 대화를 나눠보고 싶구나."
"네, 물어보겠습니다."
나르타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고는 종종 걸음으로 사라지자 황태후는 그 모습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저 아이가 황후가 되어 준다면 참으로 기쁠 텐데..."
그녀의 주술 재능 같은 건 황태후는 잘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그녀가 진륜족이라는 것도 황태후에겐 관련이 없었다.
황태후는 그저 황상과 가장 잘 어울리는 여인이 황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녀가 볼 때 나르타는 꽤 잘 어울리는 아이였다.
'세헤라자드 그 아이도 괜찮고, 설화는 조금 둔해서 도움이 되지 못할 듯해 걱정이구나... 여화는 황상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가 없어 보이고... 오르테가... 그 아이는..."
다른 후보들을 점검해보던 황태후는 오르테가를 생각하자 조금 머리가 아파 왔다.
그 아이는 대체 어디서부터 가르쳐야 할까?
아직 예절을 전혀 모르는 그 아이를 볼 때마다 황태후는 마치 물가에 자식을 내놓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보다... 어디서 차를 마시면 좋을까?'
그러나 그 생각은 이제 그만하기로 한 황태후는 아이들을 데리고 어디서 차를 마시면 좋을 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처소에서 마셔도 되겠지만... 모처럼 좋은 차를 구했으니 경치가 좋은 곳에서 마시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래, 황상이 아끼던 정자가 있으니 그리로 가면 좋겠구나.'
황태후는 마침 생각난 곳이 있어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연못이 보이는 아름다운 정자는 황상이 얼마나 아끼는지 자주 그곳에서 식사할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최근엔 같이 식사를 못 했구나...'
황상도 바쁘고, 그녀 역시 궁녀들을 가르치느라 바빠서 도통 함께 식사하지 못했다.
오늘 저녁이라도 같이 하자고 권유해볼까? 주책이라 생각하면 어쩌지?
그런 고민을 하며 정자에 도착한 황태후는 이미 선객이 있는 걸 확인하고는 깜짝 놀라 일단 몸을 숨겼다.
황태후를 뒤따르던 궁녀들도 그런 황태후의 행동에 눈치껏 몸을 숨기고 있었다.
'황상?'
황태후는 정자에서 오르테가의 무릎을 베고는 곤히 잠들어 있는 황상을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렇게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다니... 어릴 때 이후로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후후, 아무래도 괜한 걱정이었던 것 같구나."
황상은 이미 저렇게 편안한 얼굴로 자신의 몸을 맡길 수 있는 상대가 있었는데...
정말이지 괜한 걱정하고 있었다.
황태후는 스스로의 한심함을 꾸짖으며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아무래도 오르테가 비 하고는 따로 시간을 가져 봐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황태후는 새로운 과제를 얻고는 슬쩍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녀가 정말 황상의 옆에 설 황후가 될 여인이라면... 역시 어느 정도 교육이 필요했으니까.
"뭔가 오랜만인 거 같습니다."
황제는 눈앞에서 식사하고 있는 황태후를 보면서 덤덤하게 말했다.
깨우기로 한 오르테가 녀석이 같이 잠들어 버리는 바람에 3시에 일어나 급하게 정무를 보던 황제는 황태후의 식사 제안을 받고는 그 날 저녁에 그녀의 침소로 온 상태였다.
그녀는 늘 식사를 침소에서 해결했으니까.
실제로 그녀의 침소에 마련된 식탁에 차려진 밥상은... 황제에겐 꽤 낯익은 것이었다.
어릴 적 황제가 좋아하던 반찬들이 즐비했으니까.
특히 저 산적은 어릴 적엔 질릴 정도로 먹었던 기억이 있을 정도였다.
"서로가 바빠서 이런 시간을 도통 가지지 못했지요. 그래서 한 번 마련해 보았습니다."
황태후의 말에 황제는 그녀가 어째서 최근 들어 자신과 식사 시간을 함께 하지 못했는지 알아차리고는 바로 사과했다.
"제가 불민하여 아직도 황후를 얻지 못해 죄송스러운 마음뿐입니다."
황제는 그녀의 바쁘다는 말을 이해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합궁 자체를 태자 시절부터 진행했어야 하는데... 황제는 그것을 필사적으로 거부해왔고, 그 결과가 황제가 된 지 2년이 넘었음에도 황후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 황후가 해야 할 일들은 고스란히 황태후에게 넘어갔고, 결국 황후의 일은 그녀가 전부 대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편히 쉬어야 할 분에게 일을 떠넘긴 것과 다름이 없어 황제는 늘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아닙니다. 황상에겐 황상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겠지요. 게다가 어미한테 그런 걸로 미안할 이유는 없으니 황상께서 사과할 이유는 없습니다."
부드럽게 웃으며 그 사과를 받아들인 황태후는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보다 이 어미는... 사석에선 예전처럼 편히 대화를 했으면 하는데... 너무 곤란한 일일까?"
격식을 차려야 하는 신분이라는 건 그녀도 이해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이런 식사 자리에서 만큼은 예전처럼 편하게 서로를 대하고 싶었던 그녀의 부탁을 들은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어머니. 편히 말하셔도 됩니다."
황제의 말에 그제야 안도한 표정을 지은 황태후는 미소를 지으며 '그럼, 그러도록 하마.' 라고 대답하고는 웃는 얼굴로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나쁘진 않구나.'
사실 황제도 이런 시간 자체가 너무 오랜 만이라... 조금 낯설긴 했지만, 싫진 않았다.
"이런 시간도 나쁘진 않군요."
"후후, 그렇다면 기쁜 일이구나. 식사는 마음에 드니? 꽤 신경 써서 준비하라 지시하였는데..."
황태후가 식사를 하는 황제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보며 묻자 황제는 산적을 먹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습니다. 이렇게 같이 식사를 하다보면... 옛 생각이 나는군요. 이렇게 다같이 둘러앉아선, 함께 식사를 했지요. 그땐 미친왕이 제 옆에 앉아 있었는데..."
황제는 옛날을 생각하며 웃었다.
선제께선 자주 참석하지 못하셨지만, 이렇게 황제는 어머니와 친동생과 함께 자주 식사를 하고는 했었다.
"갑자기 코에서 피가 나고 몸에선 열이 나기에 나중에 알아보니 녀석이 제 잔에 독을 탄 거였죠. 리아 누님에게 받은 독을 말입니다. 생각해 보니 그때 이후로 미친왕은 제 옆에 앉은 적이 없군요."
"..."
황태후는 그 말에 표정이 살짝 굳었으나 황제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덤덤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생각해보면 제겐 가족의 애정을 느낄 만한 일이 그리 없었던 거 같습니다."
"그렇구나..."
황태후는 대체 어떤 말을 해야 이 아이를 위로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았지만... 도무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렇기에 우울한 표정으로 식사를 하고 있자니 황제가 갑자기 감사를 표했다.
"그래서 어머님껜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런 비정한 현실 속에서도 황제에게 가족의 정이라는 걸 느끼게 해준 사람은 어머니와 황제가 잊을 만하면 비난하는 아버지 뿐이었다.
아직도 황제의 기억에 생생했다.
독에 중독되어 침상에 누워 골골대던 어린 자신의 옆을 밤새 지키며 기도하던 어머니의 모습과, 모든 정무도 미뤄두고는 그런 어머니의 옆에서 훌쩍이고 있던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해 보면 황제는 비록 형제들의 사랑은 받지 못했지만 부모의 사랑은 많이 받았던 거 같았다.
"아니다. 이 어미는..."
"맛있군요."
여전히 죄책감이 가득한 얼굴로 말하려던 황태후는 황제가 어느새 웃으면서 식사하는 걸 보고는 자신도 웃어 버렸다.
그래, 이 아이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지.
황태후는 그런 황제를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고는 말했다.
"사직이 있기 전에 10명은 안아야 할 거 같더구나."
"...네."
합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황제의 표정이 빠르게 식어갔다.
그럼에도 황태후는 할 말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사직이 2주 정도 남았나?
준비 기간까지 생각하면 꽤 촉박했으니까.
사직은 천신께 그 해의 농작물을 바치는 중요한 행사.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해야 할 중요한 종교적 행사였다. 그 준비를 위해선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걸 위해서라도 이제 슬슬 황후 대리를 정해야 하지 않겠느냐? 대리가 될 아이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할 터인데..."
그것은 바로 황후의 역할을 대신할 여인을 고르는 것.
황후가 없는 지금, 비 중에서 얼른 황후의 역할을 맡아줄 여인을 뽑아서는 사직을 준비하게 해야 했다.
"그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황제는 솔직하게 말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황제는 아직도 황후의 역할을 대신할 비를 고르지 못했다. 아직도 머리가 어지러워서 누구를 골라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으니까.
"이럴 땐 역시 연장자인 마리..."
결국 연장자가 제일 이야기가 적게 나오겠지.
황제가 그런 생각에 결정을 내리려고 할 때 황태후가 빠르게 그 말을 잘랐다.
"그 여자 이야긴 꺼내지 말거라."
"?"
황제는 바로 마리아의 이야기는 듣기도 싫다는 듯이 자르는 황태후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도 연장..."
"그 간사한 늙은 여우 같은 여자에게 현혹되지 말거라."
"..."
다시 이어진 단호한 대답.
황제는 그제야 왜 어머니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했다.
마리아에게 젊은 시절 아버지가 구애했다는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
즉...
'어머니한테는 연적이었다는 거군.'
어머니한테는 아버지의 사랑을 빼앗은 연적이었다는 이야기였으니까. 어머니가 그녀를 싫어하는 이유로는 충분해보였다.
"아무튼 그 늙은 여우 이야기는 그만하고 비들 중에서 마음에 품은 아이가 있느냐? 이 어미는 그것이 궁금하구나."
황태후의 말에 황제는 고민했다.
마음에 품은 사람이라...
"없습니다."
없었다.
그렇기에 황제는 덤덤하게 대답했고, 황태후는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당장 오늘 점심에...
"오, 오르테가 그 아이는?"
오르테가와 그리 오붓한 한 때를 보내고 있지 않았던가? 황태후는 혼란스러웠다.
"그 녀석 말입니까? 믿을 수 있는 친우로는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왜 갑자기 오르테가 이야기가 나오는 거지?
황제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고, 황태후는 그 모습에 속에서 올라온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하아... 아직 너한테 사랑은 이른 모양이구나."
황태후는 안타까운 얼굴로 중얼거리고는 고민에 빠진 얼굴로 식사를 계속했다.
그런 그녀의 고민을... 황제는 이해하지 못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