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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의무방어전-39화 (39/235)

〈 39화 〉 황제의 선택

* * *

모두에게 처음은 중요하다.

황제에게도 그러했다.

당장 지금 황제가 찾아온 것은 황제의 첫 상대였던 나르타였으니까.

"어머? 그 눈..."

늘 그랬듯이 오늘도 자신의 처소에서 다른 비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던 나르타는 생각조차 못한 손님을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이런 모임을 자주 가졌지만, 이 모임에 황제가 직접 행차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나르타는 황제의 검은 눈을 보고는 놀란 표정으로 말했고, 여화는 그 말에 황제의 눈에 시선을 주고는 깨달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사직이 다가오고 있네요."

바로 알아차리지 못한 나르타와 달리 여화는 황제의 눈을 보고는 사직이 다가오고 있음을 바로 알아차렸다.

하긴 동아족은 한족 다음으로 황후를 많이 배출한 민족이다. 황실의 핏줄과도 관련된 사직에 대해선 당연히 알고 있겠지.

그렇기에 황제는 여화가 그 사실을 빨리 눈치챈 것이 그리 놀랍게 여겨지진 않았다.

"신기해라. 사람은 눈색만으로도 분위기가 달라지는군요."

황제를 보면서 나르타는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 말대로 지금의 황제는 평소의 황제와 풍기는 분위기가 달랐다.

늘 위압감을 뿌리고 다니는 그에게 금색의 눈동자가 신비로운 느낌을 줬다면... 지금의 검은 눈동자는 차분한 느낌을 주었다.

그래, 차분했다.

수많은 여인을 앞에 두고도, 생각해 보면 황제는 얼굴을 붉히며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나르타는 한 번 정도는... 그런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홀린 듯이 황제의 얼굴을 구경했다.

그건 나르타만의 생각이 아닌지 이곳에 있는 비 모두가 황제의 얼굴을 신기하다는 듯이 구경하고 있었다.

"인간은 사소한 거로도 달라지니까. 예를 들면 극독 한 잔만 마셔도 산자가 죽은 자가 되지 않나."

졸지에 구경거리가 된 황제가 덤덤하게 말하자 모두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

여전히 참 살벌한 비유다.

나르타는 그리 생각하면서 당황한 표정을 지우고는 애써 웃어 보였다.

"그보다 짐이 방해가 되었나?"

전혀 그런 걸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황제는 의례적으로 물었다.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그 누가 폐하를 방해라 생각하겠사옵니까."

세헤라자드가 바로 수줍게 대답하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황제는 딱히 허락을 구하지 않고는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그걸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황제란 그런 자리였으니까.

"거의 다 모여 있으니까 이야기하기 편하군. 오르테가는?"

빈과 멋대로 돌아다니는 마리아를 제외하고는 전부 모여있었는데... 이런 자리라면 안 빠질 거 같은 녀석이 정작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의 의문을 가지고 황제가 질문하자 나르타가 대답했다.

"황태후 폐하께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 말에 황제는 작게 묵념했다.

'그러게 조심 좀 하지.'

너무 걸리는 게 많아서 어떤 이유로 데려갔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이 황궁에서 황제가 유일하게 제지하지 못 하는 사람에게 붙잡혔으니 어쩔 수 없는 일.

딱히 오르테가가 있다고 달라질 이야기도 아니었기에 황제는 슬슬 이곳에 온 목적을 이야기했다.

"이번 사직에서 황후 대리는 나르타 비가 맡아주면 좋겠군."

"...네?"

별 다른 생각 없이 차를 마시고 있던 나르타는 생각도 못 한 말에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세헤라자드는 아쉬워했고, 여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며, 그 자리가 어떤 것인지 잘 모르는 쌍둥이는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황후 대리?

자신이...? 나르타는 머리가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어, 어째서?'

물론 나르타도 그 자리를 원하긴 했다.

황후가 되길 원하는 그녀에겐 미리 그 일을 경험해볼 수 있는 귀중한 기회였으며, 지금 상황에서 황후 대리가 되어 사직을 맡는다는 것은 사실상 황제가 가장 총애하는 애첩이라고 세상에 공표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싫은가?"

"그, 그건 아니지만..."

나르타는 우물쭈물거렸다.

세헤라자드의 부러워하는 시선과 여화의 신기하다는 듯한 시선, 아직 뭘 모르는 쌍둥이들의 의아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르타는 그런 것들보다는 왜 하필 자신인지가 가장 신경이 쓰였다.

그녀라면 황제가 분명 오르테가를 고를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왜 저인지 이유를 들어봐도 될까요?"

그렇기에 나르타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황제는 그런 그녀의 질문에 가볍게 대답해주었다.

"그대가 처음으로 짐이 얻은 비기에 그대에게 제안한 것인데... 불만스러운가?"

"그, 그런 건 아닙니다. 저를 선택해주셔서 정말이지 감사합니다. 폐하."

그렇구나. 그런 이유였구나.

나르타는 묘한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이유건 자신이 뽑혔다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었으니까.

"부족한 저를 뽑아주신 만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이번에 보여주자 자신이 얼마나 황후에 적합한 여인인지를!

나르타는 열의를 불태우며 대답했고, 황제는 그 대답에 흡족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지. 앞으로 바쁠 거다."

황제는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상선에게 손짓했고, 그러자 상선은 잠시 밖으로 나가더니 서류를 들고와서는 식탁 위에 올려두기 시작했다.

터억.

황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르타 앞에 올려지는 서류가 무엇인지를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이건..."

"이건 그날 사직에 참석하는 민족들 중에서도 신경 써야 할 가문들의 명단. 그리고 이건... 그날 그대가 관리해야 할 궁녀들의 명단. 그리고 이건 사직 때 사용할 물품을 구매할 상단 책임자와 맺은 계약서. 그리고 이건 그날 식단과 귀빈들의 자리표..."

"저, 저기..."

나르타는 황제의 설명과 상선이 가져오면서 점점 늘어나는 서류들을 보면서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일단 이 정도는 전부 숙지하고, 황후로서 책무를 다하면 된다네. 할 수 있겠나?"

저, 전부?

나르타는 이 많은 분량을 전부 외워야한다는 사실에 머리가 아파왔다.

"이, 이걸 전부 말입니까?"

나르타는 갑자기 거절하고 싶은 마음도 잠깐은 들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오늘은 잠을 못 자겠군요."

"걱정하지 마라. 오늘만 못 자는 건 아닐 테니."

"..."

황제의 대답에 나르타는 더욱 걱정이 늘었다.

아무래도 자신은... 엄청나게 힘든 일을 맡게 된 모양이었으니까.

­­

"결국, 나르타 비구나."

황제는 재상에게 자신의 선택을 알리고는 바로 황태후께 보고하러 갔다.

그의 보고를 들은 황태후는 예상 범위였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하긴 모든 남자에게 첫 여자는 그만큼 의미가 있는 법이니."

황태후는 이해했다는 듯이 중얼거리면서도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고, 황제는 그런 그녀의 뒤에 있는 침대에 누워선 곤히 자는 오르테가가 몹시 신경 쓰였다.

어머니에게 불려갔다던 녀석이 왜 여기서 퍼질러 자고 있는지 황제는 이해할 수가 없었으니까.

"어머나, 아들아. 오르테가 비가 신경 쓰이니?"

그 시선을 눈치챈 황태후가 호들갑을 떨며 묻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고 있길래... 저 친구에겐 무슨 볼일이십니까?"

황제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저 모습이 신경이 안 쓰인다면 거짓말이겠지.

황태후의 거처에서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자고 있는 비라니! 유례가 없을 일이었다.

"기본적인 예법이라도 가르치려고 불렀단다. 다른 비들에 비하면 그런 게 조금 부족한 아이가 아니니. 후후, 교육을 끝내고 나니 피곤해보이기에 오늘은 이곳에서 자고 가라고 했단다."

황태후의 대답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에게 그런 게 부족한 건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자고 가란다고 진짜 자는 놈이 있을 줄이야.

황제는 정말이지 녀석의 넉살에는 감탄만이 나왔다.

"헤헤... 나 열심히 해써..."

해맑게 웃으면서 잠꼬대를 하는 오르테가를 보면서 황제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저런 모자란 면이 귀엽긴 하군요."

일견 모자라보이는 저런 모습이 녀석의 매력이라면 매력이었다.

"그러니? 그럼 조금은 느슨하게 가르쳐도 괜찮겠구나."

황제의 말에 황태후는 진지하게 반응했다.

그 말에 웃던 황제는 오르테가에게 살짝 다가가 그녀의 눈앞에 손을 흔들어보았다.

"업어가도 모르겠군요."

반응조차 없는 그녀를 보면서 황제가 덤덤하게 말하자 황태후가 웃는 낯으로 물었다.

"왜 업어 가려고?"

"...그러면 제가 피곤해질 거 같으니 사양하겠습니다."

황태후의 질문에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이 녀석을 데리고 갔다간 녀석이 깨어나기 무섭게 잡아먹힐 테니까.

그런 상황은 사양하고 싶었던 황제는 한참 자는 얼굴을 구경하다가 그녀의 볼을 잡고는 쭈욱 당겼다.

"으으..."

오르테가의 표정이 바로 일그러졌으나 잠에서 깨진 않았다.

황제는 그 모습을 보면서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 녀석을 보면 적어도 질리지는 않는군요."

참 재미있는 녀석이다.

적어도 보는 데 질리진 않는 녀석이었다.

"귀엽지? 이 어미도 가르치면서 질리지는 않더구나."

그 말에 황태후도 공감했다.

참으로 나이에 맞지 않게 순수하고 귀여운 아이였다. 황제도 그 의견 자체는 동의했다.

순수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녀석을 잘 부탁드립니다."

황제는 그렇게 말하고는 슬슬 나갈 채비를 했고, 그 모습을 보면서 황태후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훌륭한 황후 후보로 만들어놓으마."

아니 그렇게까진...

황제는 그 말에 오르테가가 황후가 된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솔직히 조금 끔찍할 거 같았다.

"그럼 이 아들은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래, 내일부터는 나르타 그 아이도 여기로 오라고 하거라. 황후가 사직에서 해야 할 일을 제대로 가르쳐 줘야겠어."

황태후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준 황제는 그대로 그녀의 처소에서 나왔다.

"달이 아름답사옵니다."

그 순간 마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하는 듯이 문 앞에 서 있던 세헤라자드가 말을 걸어왔다.

그런 그녀는 하늘에 뜬 달을 보면서 요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대도 아름답다고 해주는 게 운치 있는 말이려나."

황제는 그런 그녀의 옆에 서선 덤덤하게 말했다. 세헤라자드는 그 말에 그럴 필요는 없다고 답하면서 부드럽게 웃었다.

"일단 걷지."

여기서 계속 이야기하고 있을 이유는 없었기에 황제는 앞서 걸으며 말했고, 세헤라자드는 그런 황제를 얌전히 뒤따랐다.

그녀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무엇일까?

황제는 대충 짐작이 갔지만 굳이 언급하진 않았다. 어차피 곧 그녀가 말할 듯 하였으니까.

"폐하의 선택이 소첩이 되지 못한 건 참으로 유감스럽사옵니다만..."

그 예상대로 조금 있다가 세헤라자드가 아쉬워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역시 황제가 예상했던 이유로 찾아온 모양이었다.

"미안하구나."

황제는 그 말에 솔직하게 사과했다.

그녀는 일단 자신에게 사랑한다 말해 준 여인이 아닌가. 그런 그녀를 선택해주지 않은 것에 황제는 조금 미안 함을 느꼈다.

"정말 미안하시다면... 오늘 밤 소첩이 바라는 걸 들어주실 수 있사옵니까?"

"...?"

황제는 고개를 갸웃했으나 세헤라자드는 얌전히 황제의 답을 기다리며 몸을 기대왔다.

그 모습에 황제는 가볍게 그녀를 살펴보았다.

생각해 보니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꽤 화려했다. 합궁 이후로는 입지도 않던 화려한 무희 복에... 그 사이로 보이는 속옷도 야하기 그지없는 물건이었다.

거의 끈이 아닌가? 저게 속옷의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의문스러울 정도의 의문의 붉은 끈만이 안에 있었으니까.

그런 그녀의 모습은 마치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 같았다.

"이런 야심한 밤에 남녀가 만났사온데... 여인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녕 감이 오지 않으시는지요."

"..."

황제는 그런 그녀의 말에 그제야 깨달았다.

그녀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말이다.

"...따라오거라."

그래 삐진 비를 달래는 것도 황제의 의무겠지.

황제는 그렇게 각오를 다지고는 그녀와 함께 자기 처소로 향했다.

오늘 밤은 아무래도... 그녀를 달래주기 위한 밤이 될 거 같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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