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 여덟 번째 합궁미르예프 크푸스
* * *
"...전부 당했나?"
새머리 남자는 자신들의 군세를 만들기 위한 실험체로 사용했던 짐승들이 전부 당한 것을 깨닫고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 무슨 강함이지?
자신들이 군세를 보충하기 위해 망가트린 짐승들은 거대해지고 흉포해졌으며 피를 갈구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동물 치고는 무서울 정도로 뛰어난 지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런 짐승 군단을 밤사이에 전멸시키다니?
"뭐 이딴 괴물이..."
소머리 거한도 그것을 느꼈는지 질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괴물이었다.
황제는 과연 인간이 맞긴 한 걸까?
새머리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자신들보단 차라리 황제가 더 요괴에 가까워보였으니까.
"큰 암초를 만난 기분이군."
새머리 남자는 작게 중얼거렸다.
고작 한 명 때문에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짜증이 나는 일이다.
새머리 남자는 그리 생각하면서 이마를 감싸 쥐고는 말했다.
"...막내에게 연락해야겠다. 돌아오라고."
결국 새머리 남자는 막내의 복귀를 결정했다.
황제의 조사는 이제 필요 없다.
그런 것도 필요 없을 정도로... 황제의 강함은 여기서 생생하게 느꼈으니까.
"보면 볼 수록 신기하구나. 그대는 정녕 인간이 맞는가?"
짐승들의 고기로 축제가 벌어진 글투족을 보면서 곰방대를 입에 물고 있던 마리아가 황제에게 질문했다.
그녀는 여전히 잠옷 차림이었지만, 이 추운 설원에서도 전혀 추워 보이지 않았다.
"...그래 일단 이곳에 오고 나서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고."
황제는 그런 마리아의 질문을 깔끔하게 무시하며 계속 모용진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네, 그나마 이곳을 찾은 게 성과라면 성과지만..."
"그래, 이곳을 조사하다 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지원이 필요하느냐?"
모용진은 고개를 저었고,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테지.
황제는 그 이상 추가 지원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느낌이... 좋지 않구나."
황제는 이곳에 오고 나서 알 수 없는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짐의 눈길이 닿지 않은 곳은 많다. 그러니 이런 일이 벌어져도 모를 수 있겠지."
꽤 깊게 생각하는 듯하던 황제는 고기를 먹고 있는 글투족을 보면서 말했다.
"그래도 해결할 수 있는 만큼은 해결하는 것이 짐의 일이겠지."
꾸욱.
그때 마리아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황제의 볼을 꾹꾹 눌렀다.
그 모습이 우스워서 모용진은 순간 웃을 뻔한 걸 간신히 참아내었다.
"세르나."
황제는 여전히 마리아를 철저하게 무시했고, 결국 마리아는 잔뜩 화난 얼굴로 저 멀리 가버렸다.
"네, 냅!"
모용진은 완전히 얼어서는 각 잡힌 경례까지 하는 세르나를 기가 막힌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자신한테는 그렇게 편하게 굴면서 폐하 앞에선 아무것도 못하다니. 그 모습이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금위대장을 잘 보좌하도록."
"넵!"
기합이 제대로 들어간 세르나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여 준 황제는 모용진에게 말했다.
"참으로 척박하고 볼품없는 땅이다. 이곳에 굳이 사람이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느냐?"
"머물 땅이 없으니까요. 저희는 소수 민족입니다. 제국의 울타리 안에 받아들여지지 못했기에 이런 척박한 땅에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지요.
그 질문에 대답한 것은 모용진이 아니었다.
글투족 최고 사냥꾼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
베르프사 크푸스였다.
"그렇다면 떠날 수 있다면 떠날 수 있나?"
"...저희를 받아주실 겁니까? 저희는 이미 제국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선제 폐하께 거부당했습니다."
베르프사의 반문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제께선 왜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일을 처리했는지는 모르겠다만...
황제는 여기에 사람이 남아 있어봐야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렇다고 황제는 그들에게 비옥한 옥토를 보장해줄 수는 없었다.
"그리 살기 좋은 곳은 아니다. 하지만 이곳보다야... 사람이 훨씬 살만하겠지. 관북에 머물 생각이 있다면 그대들의 거주지를 마련해 줄 수 있다."
아무런 가치도 없는 동토.
자원이 잠들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당장은 쓸모가 없는 이런 땅에 사람을 체류시켜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무엇일까?
모피? 그런 건 관북 지방에서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즉 굳이 이들을 이곳에서 체류시킬 이유가 없었다.
차라리 안 그래도 사람이 부족한 관북 지방에 이 소수 민족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나은 선택지가 될 것이다.
적어도 황제는 그리 생각했다.
"관북으로 가겠습니다."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그를 보면서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이 황제를 참으로 흡족하게 하였으니까.
"모용진은 잠시 임무를 중단하고 이들을 데리고 관북의 철곡으로 가라."
"...철곡 말입니까?"
모용진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철곡은 늑대가 많아서 사람들이 머물기 싫어하기에 원래는 범죄자들을 유배 보내는 데 이용하던 곳이었으나 최근에는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종극에는 방치해 두고 있던 땅이었다.
"아직 건물도 남아 있을 테니 이들이 고쳐 쓰면 되겠지. 날씨는 이곳보단 따스하고. 늑대는 사냥하면 되는 문제가 아닌가?"
어차피 이런 험한 곳에서 살던 이들이니 그들에겐 철곡이 오히려 나으리라.
"그냥 늑대라면 저희 사냥꾼이 충분히 사냥할 수 있습니다!"
베르프사가 호언장담하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한 지원은 조만간 그쪽으로 사람을 보낼 테니 그쪽과 이야기를 나누거라."
"가, 감사합니다."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며 황제는 잘된 일이라 여겼다.
황제에겐 인구 공백이 심각한 지역인 철곡에 사람을 채워 넣을 수 있으니 이득이었고, 저들에겐 이런 춥고 위험한 곳보단 덜 춥고, 덜 위험한 곳에 지원까지 받으면서 정착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득이었다.
게다가 철곡은 매장된 철이 많아. 제국 입장에서도 마냥 이대로 방치해둘 수는 없는 곳이었으나 기피 현상이 심해 방도를 찾지 못하는 곳이었다.
오죽하면 지금도 관도에선 철곡을 포함한 관북 지방에 이주를 결심한 이들에게 많은 지원을 해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고자 하는 사람이 없어서 관북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다.
그러다 보니 관북에 있는 사람들은 주로 하층민들.
관도나 다른 지역에선 도저히 버티지 못하고 밀려난, 사회에서 소외받는 이들이다.
"짐은 선제가 참으로 무능하다 여겼다."
저 멀리 가버린 베르프사를 보면서 황제는 말했다.
황제는 그를 아버지로서는 좋아했지만... 단 한 번도 선제가 뛰어난 황제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선제께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지. 서쪽의 반란도, 야만족의 침략도, 지금 보니 철곡 지방의 공백을 해결할 수 있는 소수 민족을 받아들이는 것조차도 못했구나."
"..."
모용진은 묵묵히 그 말을 듣고 있었다.
대놓고 선제를 까내리는 그 행태를 지적할 사람도 있을 테지만... 그런 사람도 적어도 이 황제 앞에서는 침묵을 지킬 테니까.
그리고 솔직히 선제께서 정무를 대충 보신 건 사실이니 뭐라 할 말이 없는 것도 맞았다.
애초에 선제께선 지금의 황제보다 힘이 없기도 했고...
"선제께선 늘 사람들에게 기대기만 했지. 짐은 그것이 참으로... 나약하게 보였어."
눈물도 많고, 약하면서, 스스로 뭔가 해 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황제는 그런 아버지가 한심했고, 자신은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막연히... 짐이 황제가 된다면 그렇게는 되고 싶지 않다 생각했는데... 아직 부족하구나. 짐 역시 이 문제를 바로 해결하지 못했으니."
"폐하, 폐하께서 모든 걸 알고 바로 대응할 수는 없습니다."
모용진의 걱정스러운 말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그런데 왜 그리 자책하십니까?"
모용진의 걱정이 가득 담긴 질문에 황제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짐이 황제가 되기 싫었다는 건 알고 있겠지."
"...네, 그렇습니다."
왜 갑자기 이 이야기를 하시지? 모용진은 그리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어요?"
얌전히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세르나가 그 순간 놀란 얼굴로 물었으나 황제는 깔끔하게 무시했고, 모용진은 그런 세르나의 머리에 꿀밤을 먹여주었다.
세르나는 맞은 머리를 부여 잡고는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짐은 여전히 셈은 서투르다."
황제는 덤덤하게 말했다.
"짐은 즉위하자마자 짐이 흔들릴 경우 죽을 목숨과 짐이 흔들리지 않고 잔인해지면 죽을 목숨을 가늠해 보았지."
혈족과 귀족들의 목숨과 내전으로 개죽임을 당할 병사들의 목숨에 황제는 경중을 두지 않았다.
황제는 여전히 셈에 서툴러서 목숨의 무게를 나누는 법을 알아내지 못했으니까.
사실 황제는 그 셈에 익숙해질 생각도 없었다.
그러니 아마 평생 이런 마음가짐으로 선택할 테지.
"짐이 즉위를 하고 나니 이 황제라는 자리가 그야말로 허울 뿐인 자리더구나."
황제는 그때를 회상했다.
즉위를 하고 보니 황제란 자리는 그야말로 허울 뿐이었다.
대부분의 권력은 선제의 형제들이 나눠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은 각자 다른 후계자를 지지하며 내전이라도 벌일 기세로 군세를 모으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황제에게 남은 것은 태자 시절부터 그를 지지하던 일부 명문가와 한족, 그리고 금위대 뿐이었다.
"짐이 그들과 내전을 벌이고 전부 죽이는 것이 많이 죽을까? 아니면 짐이 사전에 잔인하게 혈족들을 죽여서라도 공포로 내전을 방지하는 것이 많이 죽을까?"
"..."
계산해 보니 간단했다.
그들을 죽이는 게 나았다.
황제는 바로 가장 위협적인 군세를 가진 숙부의 요새로 단신으로 쳐들어가 그 식솔들을 전부 죽이고, 그 목을 문에 내다 걸았다.
그러자 그들은 적어도 내전이란 선택지는 황제의 손에 죽는 그 순간까지도 생각해내지 못했다.
"짐이 공포로 군림하는 것이 그 상황에서 최선이라 믿었으니까. 짐은 늘 최선을 다해서 판단을 하고 있지만... 그 판단이 늘 옳았다고는 말하지 못하겠구나."
황제는 자신의 선택이 늘 최선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더 희생을 줄일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조금 더 평화적인 방법을 고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좀 더 빠르고 좋은 방법을 택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황제는 그때 그 선택이 최선이라 믿으며 선택을 했고, 그 선택은 이젠 되돌릴 수도 없었다.
선택이란 그런 것이었다.
뭔가를 선택하면, 그 순간 돌이킬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무게는 책임지는 목숨이 많을 수록 더욱 무거워졌다.
"지금 느끼는 감정이 그러하다. 그러니 걱정할 성질의 것은 아니지."
그제야 모용진은 황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즉 어떤 선택을 하던 황제는 후회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 이렇게 문제를 해결했음에도, 속으로는 더 좋은 방법이 있진 않았을지 후회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건 당연한 것이며, 걱정할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책임지는 자리란 게 이런 것이다. 지존의 선택은 무겁고, 그렇기에 후회가 남는 것이지."
황제는 덤덤하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황제는 자신을 죽이려던 이들을 죽인 것까지 후회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저 자신의 선택으로 목숨을 잃은 것들은 이야기가 달랐다.
그 목숨의 무게를 확실히 황제는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 무게를... 모용진은 자신이 덜어 주고 싶었다.
"그 무게를 저한테 덜으셔도 됩니다. 그러라고..."
제가 있습니다.
모용진이 그런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후후, 이미 그러고 있구나. 그대가 있어서 참으로 든든하다."
황제는 웃으면서 그리 말하고는 조금은 편해진 얼굴로 모용진에게 부탁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부탁하마."
"...네."
모용진은 그런 황제를 보면서 몹시 당황하고 있었다.
'달라졌구나.'
원래라면 황제는 저렇게 솔직한 말은 하지 않았을 거다.
단둘이 있는 자리도 아니고 이곳엔 세르나도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저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된 건...
'확실히 달라지셨어.'
폐하께서 확실히 좋은 방향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모용진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 미소를 비 전하들에게 좀 보여주면 어떠십니까?"
모용진이 가볍게 농을 건네자 황제는 피식 웃었다.
"그건 비들이 노력할 일이 아니냐."
"하하! 뻔뻔하시긴."
모용진은 황제의 뻔뻔한 대답에 웃었고, 황제도 그 말에 웃었다.
'그래, 후회는 의미가 없지.'
황제는 활기를 되찾은 글투족의 미소를 보면서 웃었다.
아직도 황제는 왜 자신이 선택 받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이 황제가 되었다면 더 좋았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황제는 자신이 황제가 되었기에 저들을 지켰고, 저들의 미소를 지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자신이 황제가 되었기에 구원 받은 이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황제는 후회를 지우고 내일을 볼 수 있었다.
"황제의 역할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옥좌에 앉아 있던 황제는 덤덤한 얼굴로 물었다.
일단 장남이 태자로 정해지긴 했지만, 황제는 이번 문답을 통해 사실상 진짜 후계자를 정할 생각이었다.
이왕 후계자를 정한다면, 가장 뛰어나고 우수한 자식을 후계자로 정하고 싶은 것은 당연한 것이니까.
곱상한 얼굴, 아직은 소년처럼 보이는 동안의 얼굴은 아무리 봐도 그가 이미 이립을 넘은 나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창백한 피부와 가느다란 팔은 그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보여주고 있었으며, 반짝이는 황금색 눈동자는 그나마 그에게 확실한 위엄을 선사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은 앞에 있는 26명의 아이들에게 향하고 있었다.
"군림하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대답한 것은 싱그러운 금발을 길게 기른 아름다운 소녀였다.
이름은 진리아.
신하들의 말로는 눈여겨볼 아이라고 해서 황제는 나름 기대를 했는데...
'실망스럽군.'
너무 원론적이라서 뭐라 평가할 여지조차 없었다.
"다른 대답은 없는가?"
"지배하고, 다스리는 자입니다."
그 다음에 대답한 것은 곱상하게 생긴 검은 머리의 소년이었다. 황후의 아들인 진민이었다.
눈치는 기가 막히게 본다더니 지금도 계속해서 주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황제는 그 대답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충 리아의 대답을 듣고는 조금 말만 다르게 한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다른 대답은."
"..."
지루한 눈으로 그들을 둘러보며 황제가 묻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황제는 가장 앞에 앉아서 마치 목석처럼 가만히 있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잘생긴 검은 머리의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자신의 앞에서 말할 배짱도 없는 아이들의 이야기는 들을 가치조차 없었지만.
그래도 황제는 태자의 이야기 정도는 들어볼 생각이었으니까.
"그럼 태자가 말해 보거라."
모두 하나같이 잘난 외모였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소년.
많은 형제들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기에 가장 많은 견제를 받은 장남을 보며 황제는 조용히 태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없습니다."
"...없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태자의 대답에 황제가 호기심을 가지고 되묻자 태자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네, 황제의 역할 같은 건 없습니다. 황제는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 말은 황제는 한 가지 역할에 구애 되어선 안 되는 자리라는 의미였고, 그 대답은 황제를 아주 흡족하게 만들었다.
"대단하구나."
황제는 태자가 이렇게 속 시원하게 자신을 만족시킬 대답해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과연 태자였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보고 싶구나. 태자가 황제가 된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냐?"
황제는 묘한 기대감을 가지고 태자를 보고 있었고, 태자는 그 시선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면서 대답했다.
"정말 되고 싶지 않지만... 만약 제가 황제가 된다면, 제가 황제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는 것을 하겠지요."
"크하하하! 황제가 된다면 너의 의지 같은 건 상관없단 말이냐? 그저, 황제로서, 이 제국을 위해서 살겠다. 그리 말하는 것이냐?"
그 대답을 들은 황제는 정말이지 유쾌한 대답을 들었다는 듯이 웃었고, 태자는 여전히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바보 같구나.'
황제는 그 말을 들으면서 생각했다.
태자는 황제가 되고 싶지 않다면 절대 저런 대답을 해서는 안 되었다.
저런 든든한 대답을 해주고는 황제가 되지 않기를 바라다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닌가?
황제는 그때부터 이미 태자 이외에 다른 자식들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다음 황제는 사실 그 순간 결정이 나버렸으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