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아홉 번째 합궁케르 바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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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상 김명한.
동아족 출신의 그는 그리 뛰어난 명문가의 사람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명실상부한 황제의 뒤를 이은 2인자이자, 제국에 소속된 모든 관료들의 우두머리였다.
그의 하루는 언제나 새벽 4시부터 시작이었다.
자연스럽게 4시가 되면 눈을 뜨는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서 찌뿌둥한 몸을 풀면서 가볍게 세안을 하고는 관복을 깔끔하게 다렸다.
이 모든 과정을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손수 끝마치고는 정갈하게 관복으로 갈아입고 나면 곧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가 딱 새벽 5시였다.
"아버님. 기침하셨습니까."
"그래, 수고했다."
언제나처럼 장남이 와서 문안 인사하면 재상은 그 문안 인사를 받아주고는 바로 죽으로 가볍게 식사했다.
식사가 끝나면 먹은 것을 주방으로 가져가 직접 먹은 것을 치우고는 제국의 2인자인 재상의 집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소박한 크기의 초가집을 나와서 황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재상의 업무는 시작되었다.
재상은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늘 그랬듯이 출입명부를 점검하고는 수상한 자의 출입이 없었는지 확인하고는, 할바르 백부장에게 야간 경비 내용을 보고 받았다.
그 뒤에는 바로 내명부로 향해 궁녀들에게 질문했다.
"어제는 폐하의 처소에 누가 들어갔느냐?"
"나르타 비와 마리아 비께서 들어가셨습니다."
궁녀의 대답에 재상은 그날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악하고는 그에 따른 명령을 내렸다.
최근 비들이 자주 방문하는 것이 부부 관계는 양호한 듯 했다.
"그럼 폐하께서 피곤하시겠구나. 어의한테 일러 원기 회복에 좋은 탕약을 지으라 전하거라."
그날 밤 상대가 누군지에 따라 폐하의 피로도가 달라지기에 재상은 그 부분은 꽤 신경 쓰고 있었다.
'이걸 보고 해야 할까...'
그런 재상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모용 가문의 움직임이었다.
모용 가문의 사람이 최근 미친왕이 유폐된 별궁에 방문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이건...
'좋지 않군.'
좋지 않았다.
물론 재상은 솔직히 폐하가 걱정되지 않았다.
누가 하늘이 무너질 것을 걱정할까?
재상에게 황제가 그러했다.
걱정되는 것은... 바로 다시 황궁에서 피바람이 부는 것이었다.
황제의 광증은 지금은 잠잠한 듯 보이나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은 것이었다.
'모처럼 잠잠해졌거늘.'
재상은 혀를 찼다.
지금 모용 가문은 그 폭탄에 횃불을 들고 뛰어들고 있었으니까.
모용철 그자는 예전부터 늘 그랬다.
자신이 대단한 인물인 양. 전시(??) 성적도 좋지 못한 녀석이 그저 가문의 힘만 믿고 설치는 무뢰배 같은 자였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그와 재상은 같이 전시를 본 동기인데, 그 녀석은 당당하게 가문의 이름을 팔며 재상에게 답안을 보여 달라는 부정을 요구했다.
물론 재상은 그 제안을 거절했고, 그 일로 인해 모용철의 눈 밖에 난 그는 한족의 압력으로 한동안 제대로 된 벼슬에도 오르지 못하고 한직을 전전해야 했다.
그런 그를 재상으로 만들어 준 것이 지금의 황제였으니 재상에게 지금의 황제는 은인이기도 했다.
'어찌 그런 무뢰배한테 금위대장 같은 반듯한 아들이 나왔을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재상은 그리 생각하면서 황제를 기다렸다.
"...그대는 참으로 부지런하구나."
아니나 다를까 완전히 눈이 죽어 있는 황제를 보면서 재상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폐하. 기침..."
재상이 바로 문안 인사를 올리려고 했으나 황제는 가볍게 잘랐다.
"인사는 되었다. 짐에게 할 말이 있으니 이리 이른 아침에 찾아온 것일 테지."
황제는 궁녀가 재상의 명으로 어의에게 받아온 탕약을 마셨다.
"좋은 탕약이구나. 재상이 시킨 것인가?"
탕약을 다 마신 황제가 그릇을 궁녀에게 넘겨주며 묻자 재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비 전하가 밤에 처소에 들어갔다고 하기에..."
"잘했다. 요새 밤에 찾아오는 비가 많으니 짐은 이런 생각 마저 들더구나."
사정이 생겨서 늦어지는 9번째 합궁 상대로 인해서 합궁이 지체되자 황제에게 닥쳐 온 것은 다름 아닌 비들의 습격이었다.
그것도 순서라도 정한 것처럼 매일 다른 비들이 두 명씩 짝을 지어 오고 있었다.
"비들이 짐의 처소에 들이닥치는 순서라도 정한 게 아닌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재상의 말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순번까지 정하고 찾아올까? 다 착각이겠지.
황제는 그리 생각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렇겠지. 아무튼 무슨 일이기에 이른 아침부터 찾아왔느냐?"
황제가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면서 묻자 재상은 머뭇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그게... 모용 가에서."
"아, 그건 되었다. 이미 알고 있으니까."
황제는 재상의 말을 자르면서 느긋하게 하품했다.
그 느긋한 모습에선 절대자의 여유가 느껴졌다.
"내버려 두거라. 뭘 할지 궁금하구나."
"...폐하, 주제넘은 발언인지는 알고 있습니다만... 그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그래, 그건 그렇구나. 그럼 짐의 식사를 기미하던 상궁들에게 오늘부터는 하지 말라 이르거라."
재상의 걱정이 가득한 충언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명했다.
"폐하!"
그 말에 재상은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재상은 상궁을 걱정한 것이 아니라 황제의 안위를 걱정한 것이었으니까.
"귀가 울린다. 짐은 이미 독이 안 드는 몸이거늘 무슨 독을 걱정한단 말이냐. 짐을 걱정하기보단 괜히 휘말릴지 모를 궁녀나 걱정하거라."
그런 재상을 보며 귀찮다는 듯이 대답한 황제는 아무튼 앞으로 자신이 먹을 음식은 기미하지 말 것을 지시하고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런 황제를 따라 조정에 출근한 재상은 이미 출근해 있는 대관들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이곳에서 온전히 폐하의 사람인 자가 몇이나 될까?
대장군? 그 외에는 전부 한족의 입김이 들어간 자들이다. 그리고 한족은 사실 모용 가문이 실권을 잡고 있는 민족이었다.
즉 모용 가문을 적으로 돌린다는 것은 한족을 적으로 돌린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재상은 황제가 한족과 척을 질 것을, 한족이 황제와 척을 질 것을 각오했다는 걸 알게 되니까 이 자리가 마치 가시방석처럼 느껴졌다.
"금일 회의를 시작하겠다."
그러나 황제는 그저 덤덤하게 회의를 진행할 뿐이었다.
마치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듯한 황제의 모습에... 오히려 재상은 황제에게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날 회의는 별다른 일이 없었지만... 재상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 모든 건... 폭풍이 오기 전에 고요함이라는 것을 말이다.
"우욱! 마차는 토가 나올 것 같다냐..."
관도의 시작을 알리는 거대한 문, 대관문을 보면서 마차에서 내린 여인은 헛구역질을 했다.
메스꺼움을 느끼고 입을 틀어 막은 여인은 뒤에 달린 부드러운 꼬리를 살랑거리며 중얼거렸다.
"추, 추태를 보일 거 같다냐."
그녀의 머리 위에는 검은 고양이 귀가 쫑긋거리고 있었고, 머리카락의 색은 특이하게도 흰색과 검은색이 섞여 있었다.
"어,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거냐?"
단발머리가 인상적인 이 여인은 그 초록색 고양이 눈으로 마부를 보면서 물었다.
그녀는 체구가 작지만 몸은 유연해 보였고, 가슴은 작았지만 골반은 확실히 성인 여성의 그것이었다.
그녀의 뒤에는 검은색 꼬리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예쁘다보단 귀엽다는 느낌이 더 강한 여인이라고 볼 수 있었다.
"좀 시간이 걸릴 겁니다."
"...냐냥."
끔찍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그녀가 눈에 띄게 절망하자 마부는 그녀에게 재촉했다.
"그보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이미 합궁 일자가..."
"흑!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간다고 하지 말 걸 그랬다냐..."
마부의 재촉에 울먹이면서도 순순히 다시 마차에 탄 그녀는 창문을 열고는 결국 속에 있는 걸 게워내고 말았다.
"우에에엑!"
'큰일이군.'
그 모습을 보며 마부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멀미가 심할 줄이야... 마부는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천천히 마차를 몰았다.
하는 짓은 가볍기 그지없어도 지금 마차에 타고 있는 사람은 그 묘왕 무카의 막내딸이자 황제의 황후 후보인... 합궁 상대였으니까.
마부의 입장에선 부디 별 다른 문제 없이 이 여행이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케르 바카라?"
회의를 끝내고 집무실로 돌아온 황제는 다음 합궁 상대의 이름을 듣고는 크게 놀랐다.
다름 아닌...
"묘왕 무카의 막내딸인가?"
묘왕 무카 바카라의 막내딸이었으니까.
묘인.
고양이의 특징을 가진 인간으로, 사람의 귀와 눈 대신 고양이의 귀와 눈을 지녔으며, 신체적으로 유연한 전투 종족이었다.
그중 묘왕 무카는 제국 격투계에서는 살아 있는 전설로 추앙받는 대륙 최고의 격투가였다.
맨손 격투에 있어선 확실히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괴물.
언젠가 황제가 한 번 겨뤄보고 싶은 인물이기도 했다.
"네, 다만 개인 사정으로 늦어지는 모양입니다."
원래라면 진작에 도착했어야 한다며 재상은 아쉬워했다.
재상의 보고가 늦은 것은 생각 이상으로 그녀의 방문이 늦어졌기 때문이었다.
원래라면 보통 합궁 상대가 도착하면 바로 확인하고 황제에게 설명했으니까. 이렇게 도착이 늦어지는 건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마법 부대가 있었다면 당장에라도 데려올 텐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그건 원래 합궁 상대를 데려오던 크라이스의 마법 부대가 지금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원래는 이런 문제가 생기면 마법 부대가 직접 합궁 상대를 데리고 왔었으니까.
"...어쩔 수 없지."
황제는 그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대답 밖에 할 수 없었다.
마법 부대는 지금 전부 임무로 나가 있었고, 그들을 보낸 건 황제였으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적어도 크라이스 정도는 남겨둘 걸 그랬나?
황제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이미 지나간 일에 미련을 두지 않기로 했다.
"그러면 언제 오는 거지?"
"아마도 사흘 안에 도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 안에 오면 좋겠는데."
황제는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요새 합궁이 지연된다고 매일 밤 비들이 찾아오고 있었다.
솔직히... 매일 두 명의 여인을 안고 있는데. 애석하게도 황제의 몸은 하나였고, 정력도 한계가 있었다.
심지어 오늘은 황제가 잠정적으로 확신하고 있는 순번으로 보면 오르테가와 여화의 차례였다.
여화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오르테가는... 그 성욕 괴물의 앞에 놓이게 될 걸 생각하면 황제는 벌써부터 아찔해지는 기분이었다.
"회임 소식은 없고, 언제 끝날지 기약도 없구나."
밤이 무서운 황제의 푸념에 재상은 그런 황제가 딱해 보였다.
하긴 그 많은 비를 전부 상대해주고 있으니 아무리 절륜한 사람이라도 힘이 들 테지.
그러나 황제에겐 참 유감스러운 소식이 있었으니.
"폐하, 모든 합궁이 끝난다고 밤일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폐하께서 비들을 만족시키는 것도 의무라 생각하신다면... 말입니다."
"..."
재상의 말에 황제는 직시하고 싶지 않았던 진실을 직시하고는 침묵했다.
사실 합궁을 진행하면서, 황제는 이미 느끼고 있었다.
모든 합궁이 끝나면... 그때가 진정한 지옥의 시작이라는 것을 말이다.
다만 의식하고 싶지 않았을 뿐.
이미 황제의 미래는 어두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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