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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의무방어전-49화 (49/235)

〈 49화 〉 아홉 번째 합궁­케르 바카라

* * *

"...그래서 언제 온다고 하던가?"

다음날.

더욱 수척해진 황제가 탕약을 마시면서 묻자 재상은 안타까운 얼굴로 황제를 보고는 말했다.

"오늘입니다."

재상은 그래도 황제에게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드디어..."

황제는 드디어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합궁은 한 명만 안으면 되니까.

매일 두 명을 상대하는 지금보단 훨씬 나은 상황이었다.

살다 살다 합궁이 더 나아질 줄이야.

황제는 이것을 기뻐해야 하나 슬퍼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이미 도착해 있는데 만나 보시겠습니까?"

"아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

황제는 눈을 감고는 그대로 의자에 등을 기댔다.

"조금 피곤하구나."

그리 말하는 황제는 확실히 피곤해보였기에 재상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네, 그럼 소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피로를 풀어야 할 사람은 비 후보만은 아니구나.'

피로를 풀 사람은 아마도 이번에 찾아온 새로운 비 후보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멀미로 고생한 그녀보다 더 수척해 보이는 황제의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봐준 재상은 순순히 물러났다.

그때였다.

재상이 나가기 무섭게 황제의 집무실에 누군가가 바람처럼 들어왔다.

재상은 그걸 보고는 다급하게 다시 황제의 집무실로 돌아왔다.

"냐냥! 황제가 이곳에 있는 거다냐?"

"...?"

눈을 감고 있던 황제는 갑자기 들리는 여인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그러자 황제의 눈에는 자기 코앞에 얼굴을 들이대며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는 묘인 여성이 보였다.

하얀색과 검은색이 적당히 섞여 있는 신비로운 단발머리.

소녀처럼 순진무구해 보이는 초록색 눈동자는 고양이의 그것이었고, 뒤에 달린 검은색 꼬리는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무엇보다 황제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신기한 귀구나."

"흐냣!"

바로 시종일관 쫑긋거리고 있는 저 고양이 귀였다.

황제는 신기하다는 듯이 그녀의 귀를 만졌고, 그 행동에 그녀는 얼굴까지 붉히며 당황한 표정으로 비명을 질렀다.

"가, 갑자기 만지지 말아 달라냐!"

"묘인은 참 위아래가 없구나. 예전부터 그러했지."

태연하게 반말하는 묘인을 보면서 황제는 덤덤하게 말했다.

하긴 묘왕 무카도 반말을 일삼았으니. 애초에 묘인에겐 누군가에게 존대를 사용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다.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천신에게도 존대를 하지 않는 그 기질 때문에 이 제국에서는 유일하게 황제에게도 반말이 허용된 종족이었으니까.

그 자유분방함도 고양이와 같아서 귀엽다나?

그 기질을 인정해준 천무제가 남긴 말을 떠올리면서 황제는 생각했다.

확실히...

'조금 귀엽긴 하구나.'

고양이와 닮은 점이 제법 귀엽긴 했다.

쫑긋거리는 귀와 마치 장갑을 낀 것 같은 고양이 손을 보며 황제는 그녀의 손에 있는 볼록살을 꾹꾹 눌렀다.

참으로 부드러운 것이 피로가 싹 풀리는 기분이었다.

"부드럽군."

"냐냥! 하, 하지 말라냥!"

그 행동에 경기를 일으키는 그녀를 보며 손을 놓아준 황제는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묘인을 보며 말했다.

"묘인은 참 신기하군."

"그렇습니다. 선제께선 그리 사이가 좋지 않으셨습니다만..."

재상의 말대로 선제의 묘인 비는 딱 합궁만 하고는 어딘가로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당연한 일이다냐. 묘인은 기본적으로 약한 자를 주인으로 두지 않는다냐!"

주인이라, 묘인은 남자중심의 사회였던가?

강한 묘인 남성이 여성을 거의 독식하는 구조라고 들었는데... 아마도 강한 묘인에게 복종하고, 그 아래로 들어가는 게 묘인의 결혼 방식인듯 보였다.

그런 점에서 합궁에 어울려주는 모양새라도 취하는 것이 묘인이 제국에 우호적이라는 증거인 셈인가?

황제는 그리 생각하면서 그녀의 말을 대충 정리했다.

"...흠, 요컨대 선제께서 약해서 떠났다. 그 이야기인가?"

황제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참 재미있는 종족이다.

황제는 왜 천무제께서 묘인을 특별 취급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나냥! 그렇다냐. 그리고 그 사람이 바로 내 스승님이다냐!"

자부심이 가득한 얼굴로 가슴을 펴며 자랑하는 그녀를 보면서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곳에 온 이유는?"

그래서 왜 여기로 온 거지? 황제가 의문을 품자 그녀는 당당하게 선언했다.

"당연한 거 아니다냐? 황제가 내 주인이 될 자격이 있는지 확인하러 왔다냐!"

풉!

황제는 그 말에 결국 웃음이 터져 버렸다.

물론 묘인이 대륙에서도 유명한 전투 종족이라는 건 이해하고 있다.

저 여자도 보기와 다르게 상당히 강할 테지.

하지만... 솔직히 황제는 굳이 붙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녀와 자신은 힘 차이가 난다는 걸 인식하고 있었다.

조금 냉정하게 말해서 황제가 눈을 감고 싸워도 그녀를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짐에게 도전하기에 10년은 이른 거 같은데..."

그렇기에 황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리자 그녀가 바로 화를 냈다.

"으으! 지금 무시했다냐!"

터억!

"!"

황제는 분노한 그녀가 휘두른 손을 손쉽게 잡아냈다.

보통 사람은 보지도 못할 빠른 일격이었지만 황제에게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렸으니까.

"무시한 게 아니라 사실을 이야기한 것뿐이다만... 뭐, 나쁘지 않지."

그래도 기본은 되어 있는 거 같군.

황제는 방금 그 일격을 보고 그녀와 겨뤄볼 마음이 생겼다.

제법 실력은 있는 것 같으니 이 기회에 묘인의 격투 기술을 견식해볼 생각이었다.

"냐냥..."

설마 자기 공격이 그렇게 쉽게 잡힐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지 그녀의 눈은 그야말로 휘둥그레해졌다.

"따라와라."

"흐냐?"

여전히 당황한 그녀의 목덜미를 잡아챈 황제는 그런 그녀를 들고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 그게... 이미 진 거 같... 흐냐!"

가지 않으려는 듯이 발버둥 치는 그녀를 황제가 그대로 연무장으로 던지자 그녀는 깔끔하게 착지했다.

과연 묘인다운 균형 감각이었다.

"뭐 하는 거냐옹!"

격렬하게 반응하는 그녀를 보면서 황제는 곤룡포를 벗고는 가볍게 몸을 풀었다.

새하얀 백의 차림이 된 황제를 보면서 케르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한눈에 봐도 잘 단련된 것이 강자의 기운이 느껴졌으니까.

"편하게 공격해 보거라."

빠직!

"후, 후회하지 말라냐!"

여유롭게 뒷짐을 진 채 황제가 말하자 케르는 자신이 단단히 무시당했다는 사실에 눈이 뒤집혀서는 그대로 달려들었다.

휘익.

'빠르군.'

상당한 속도다.

확실히 평범한 사람은 대처조차 못하고 저 발톱에 몸을 내줘야 했으리라.

황제는 자신의 몸통을 노리고 휘둘러지는 발톱을 가볍게 몸을 돌리는 것으로 피하고는 그대로 그녀의 복부를 걷어찼다.

빠각!

"흐냐!"

그대로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케르는 비명을 지르며 저 멀리 날아갔다.

"가볍게 찼으니까 엄살 부리지 말고 일어나거라."

황제는 덤덤하게 말했다.

나름 조절해서 찼으니 소리와 달리 실제로 뼈가 부러지진...

"뼈, 뼈가. 부러졌다냐!"

부러지는 건가? 묘인의 뼈는 생각보다 약하군.

황제는 그리 생각하면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

만져본 결과 확실히 뼈가 부러졌다.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푸욱 쉰 황제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던 재상에게 말했다.

"...의원을 데려오거라."

"네, 바로 데려오겠습니다."

황제는 울먹이는 그녀를 보면서 부러진 뼈를 맞춰주고는 상비되어 있던 물약을 먹였다.

물론 이건 뼈를 붙이는 약이라서 혹 부러진 뼈로 인해 내장이 상했다면 그에 따른 다른 약을 처방 받아야 했다.

"그걸로 부러질 줄이야..."

"주, 주인이 너무 강한 거다냐."

억울한 얼굴로 항변하면서도 그녀는 어느새 묘인이 강자에게 하는 복종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요컨대 벌러덩 누워서 배를 보여주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여인이 배를 드러내며 누워있는데 그 모습이 야하긴커녕 그저 귀엽게만 보였다.

"...풉!"

황제는 그 모습을 보고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묘인이 강자에게 복종하는 본능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노골적일 줄이야.

황제는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으면서 그녀의 배를 만져 주었다.

"다행히 뼈는 붙었구나."

일단 뼈는 붙었고, 만져보면서 기로 상태를 점검해본 결과 내장도 크게 상하지 않은 듯 보였다.

고로롱.

케르는 그런 황제의 손길을 받아들이면서 편안한 얼굴로 고롱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진짜 고양이 같아서 황제는 웃음이 나왔다.

'이게 인간인지 고양이인지.'

얼굴은 전체적으로 인간과 유사한데. 귀는 고양이고, 눈도 고양이다.

손은 고양이의 그것인데 또 몸은 인간의 그것이니... 참으로 신기한 종족이었다.

'진짜 고양이와 놀아주는 기분이구나.'

고양이와 놀아주는 기분이다.

황제는 그런 생각하며 의원이 올 때까지 그녀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건 비보단... 좀 큰 고양이를 하나 새로 받아들인 기분이었다.

­­

"나가! 당장 나가!"

미친왕은 덜덜 떨면서 발악하듯 외쳤다.

그걸 본 모용 가문의 전령은 한숨을 쉬었다.

'어쩌다가...'

그토록 자신감이 넘치던 사람이... 지금은 얼굴엔 공포가 가득했고, 황제의 자비로 다시 되찾은 눈은 불안을 가득 담은 채 흔들렸다.

잘렸던 혀도 어의와 마법사들의 극진한 치료를 받고 돌아왔건만...

미친왕은 이제 더 이상 황제에게 저항할 의지조차 잃은 듯했다.

하긴 그 일이 있은 후에 친왕비를 때렸다고 황제가 그의 팔을 잘랐다가 붙였으니 사람이 미칠 만도 하겠지.

"이것도 형님은 알고 있을 것이다! 당장 꺼져! 죽을 거면 혼자 죽으라고 이 멍청한 새끼들아!"

아예 입에 거품을 물고 외치는 미친왕을 보면서 모용 가문의 전령은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지만...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겁니다. 누구의 편에..."

쩽그랑!

미친왕은 그대로 잔을 모용 가문의 전령에게 던졌다.

잔이 깨지며 조각이 떨어졌고, 잔을 머리에 제대로 맞은 그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주르륵.

전령은 머리에서 흐르는 피를 닦으며 화를 꾹 눌렀으나 미친왕의 화는 누를 수 없었다.

"미친 새끼들. 자살할 거면 혼자서 하란 말이다! 여봐라! 당장 저 새끼를 내쫓아! 두들겨 패서라도 쫓아내란 말이다!"

화난 얼굴로 발악하듯 외치는 그를 보면서 전령은 식은땀을 흘렸다.

'어렵겠어.'

미친왕이 발작을 시작하자 주변을 순찰하던 무사들이 달려오기 시작했고 모용 가문의 전령은 급하게 별궁을 떠났다.

미친왕의 황제에 대한 공포가 상당하여 좀처럼 회유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황제를 갈아치우는 작업이니 명분이 필요한 일인데... 미친왕이 저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곤란했다.

'다른 황족을 찾아봐야 하나?'

전령은 그런 생각도 했지만, 한족의 피를 이은 다른 황족은 없어서 더 문제였다.

'일단 가주님께 보고하자.'

모용 가문의 전령은 한숨을 내쉬고는 서둘러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아무래도 생각보다 준비하는 데 시간이 걸릴 듯했다.

­­

"그래서 이렇게 붙어 있는 건가요?"

그날 저녁을 같이 하자며 찾아온 나르타는 황제의 옆에 꼭 붙어선 생선을 먹고 있는 케르를 귀엽다는 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냐... 냐냣."

나르타가 손을 뻗자 움찔한 케르가 바로 황제의 뒤에 숨었다.

그걸 본 황제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쁜 사람이 아니다."

"시,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다냐. 안 쫄았다냐!"

누가 봐도 겁을 먹은 거 같았는데...

강한 척을 하는 케르를 보면서 황제는 그리 생각했으나 굳이 그 생각을 언급하진 않았다.

"묘인은 참 귀엽네요."

나르타는 그런 모습도 귀엽게 보이는지 그저 흐뭇하게 케르를 보고 있었다.

"고양이를 좋아하나?"

그 모습에 황제가 케르에게 생선에 뼈를 발라주며 묻자 나르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본가에서는 고양이를 키웠답니다. 딱 저런 점박이 고양이였어요."

나르타는 웃는 얼굴로 케르를 보면서 말했다.

그녀는 본가에 있을 때 고양이를 키웠는데 딱 저 케르와 비슷한 느낌의 고양이었다.

낯을 많이 가리고 주인한테는 애교가 많아서... 그 모습이 참 귀여웠다고 나르타는 설명했다.

"냐! 나는 고양이가 아니다냐!"

눈을 반짝이며 황제가 살을 발라준 생선을 먹던 케르는 그 말에 발작을 했으나 나르타는 그 모습도 그저 흐뭇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귀여워라. 한 번 쓰다듬어보고 싶은데."

"냐! 주인! 저 여자 싫다냐!"

그런 나르타의 반응에 케르는 황제에게 매달리며 외쳤고, 나르타는 그런 그녀를 한 번이라도 쓰다듬으려고 자꾸만 손을 뻗었다.

케르는 그 손을 필사적으로 피하며 다시 황제의 뒤로 숨어버렸다.

'참 시끄럽구나.'

식사를 하면서 이렇게 소란스러웠던 적이 있던가?

적어도 황제의 인생에선 없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 시끌벅적한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런 식사 시간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황제는 묘하게 마음이 따스해졌으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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