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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의무방어전-52화 (52/235)

〈 52화 〉 짐을 적으로 돌린다는 것은

* * *

"...가엽기도 하지."

자신의 침소에서 어느 때처럼 오르테가의 교육을 진행하고 있던 황태후는 궁녀들의 보고를 들으면서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단체 사직 상소 건과, 그 뒤에 모용가가 있다는 것은 황태후의 가슴에 그야말로 비수를 박아 넣었다.

그만큼 가슴이 아픈 일이었다.

이번에도 황상은... 또 배신을 당하는 거였으니까.

그것도 가족한테.

황태후는 마음 같아선 자신이 직접 오라버니의 그 얼굴을 갈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눌러 참으려고 애써야 했다.

배신을 당한 것도 황상이니, 그 문제를 처리하는 것도 황상의 몫이어야 했으니까.

"황태후 폐하! 성공했어요!"

그때 신난 얼굴로 젓가락으로 콩 옮기기를 끝낸 오르테가가 보고하자 황태후는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밝은 아이다.

저 밝음이 황상도 치료해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황태후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칭찬해달라는 듯이 다가온 오르테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확실히 실력이 느는 게 보여서 뿌듯하구나. 그럼 다음엔 차를 우리는 법을 배우도록 할까?"

반짝이는 샛노란 눈동자가 참으로 아름답고, 그 미소는 참으로 밝았다.

나르타 같은 현숙함은 없지만, 그녀에게는 티 없는 아이 같은 순수함이 있었으니까.

황태후는 그녀가 황후가 되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네! 맡겨 주세요! 저 잘할 수 있어요!"

그녀가 가슴을 쫙 펴자 그 커다란 가슴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물론 언젠가 좀 더 어른이 되어야겠지만...'

그게 지금일 필요는 없겠지.

황태후는 굳이 이 아이가 지금 황실에서 벌어지는 일은 알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오늘 밤은 여기서 자도록 하거라."

괜히 밖으로 나갔다가 지금 황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황태후는 그녀에게 자고 갈 것을 명했다.

"그럴까요?"

그 명령에 다구를 꺼내며 환하게 웃는 그녀를 보면서 황태후는 자기 욕심인 줄 알면서도 그녀는 이 황실에서도 저 순수함을 유지해주었으면 한다는 생각했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혈족조차도 배신할 수 있는 이 지저분한 황실에서.

마치 더러운 진흙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순수한 존재로 남아주기를 말이다.

­­

"...이거 보통 일이 아니네요."

나르타는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황제와 한족의 다툼이라니...

얼마나 많은 피가 흐를까?

그녀는 황제를 걱정하지 않았다.

다른 비들도 그랬듯이 황제를 가까이에서 본 사람은 절대 그를 걱정하진 않을 것이다.

이 세상 전부를 적으로 돌려도 절대 죽을 일은 없을 것같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도 나르타가 걱정하는 건 다른 부분이었다.

바로 황제의 마음이었다.

물론 황제는 잘 벼려진 명검과도 같은 남자였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검이라도 피를 묻히고, 닦아내지 않으면 녹이 쓰는 법이다.

지금 황제에게 그 묻은 피를 닦아줄 사람이 있었을까...?

어쩌면... 지금, 이미 그의 마음은 잔뜩 녹이 슬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게 나르타는 걱정되었다.

이미 녹이 제대로 슬어서 언제 망가질지 모를 상태가 된 건 아닌지 말이다.

­­

박 가문의 수장 박노식은 재상의 뒤를 따르면서도 왜 자신을 폐하께서 직접 보고자 하는지 그 이유를 짐작하려 애썼다.

'역시 그 일 때문인가...'

모용가에서 압력이 있었다.

이번 합궁 상대를 한족에선 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나 박노식은 자기 딸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아예 합궁 상대를 보내지 않는다는 건 한족이 지금의 황제와 완전히 척을 지겠다는 선전포고. 박노식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너무 위험한 결정이라 생각했다.

설령 모용가와 척을 지게 되더라도... 그는 황제의 눈 밖에 나는 것이, 모용가와 척을 지는 것보다 두려웠으니까.

"폐하. 데려왔습니다."

재상이 문 앞에서 보고하자 바로 황제의 허락이 떨어졌다.

"안으로 들여보내거라."

허락을 받고 안으로 들어간 박노식은 안의 풍경을 보고는 잠깐 놀랐다.

그가 불려온 곳은 다름 아닌 황실의 욕탕이었다.

욕탕 안에는 증기가 가득했고, 궁녀들은 황제의 몸을 정성껏 닦고 있었으며, 그런 욕탕에선... 정말이지 끔찍할 정도로 비린 피 냄새가 진동했다.

욕탕에 몸을 담근 채 피를 씻어내고 있던 황제는 덤덤하게 말했다.

"미안하군 피를 뒤집어쓴터라."

황제가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사과하자 박노식은 덜덜 떨면서 대답했다.

"개의치 않습니다. 외려 감히 페하의 옥체를 이 두 눈에 담아도 될지..."

조심스러운 박노식의 반응에 황제는 웃었다.

"짐이 그대를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대의 의도를 확인하고 싶었다네."

'올 게 온 건가?'

황제의 말에 박노식은 각오를 다졌다.

무슨 질문을 하던... 성실하게 대답할 각오하면서 박노식은 황제의 말을 기다렸다.

"이번 합궁 상대를 정한 것은 그대의 뜻인가? 아니면 한족의 뜻인가?"

"...제 독단이었습니다."

박노식의 대답에 황제는 궁녀들을 뒤로 물리고는 물었다.

"어째서? 그대가 독단으로 상대를 정할 수 있었다는 것은... 아마 모용가에선 합궁 상대를 아예 보내지 않을 생각이었던 모양인데... 그대는 모용가가 두렵지 않은가?"

진지한 얼굴로 황제가 질문했다.

황제의 외척에, 한족에서도 유서 깊은 모용가의 뜻을 거역할 수 있는 가문은 황제가 알고 있기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결정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황제는 이 남자를 확인해 보고 싶었다.

"폐하께서는... 모용가가 두려우십니까?"

그 대답은 전혀 생각도 못 한 것이었다.

박노식이 해온 반문은 그 조심스러운 태도와 달리 대담했다.

"짐이 두려워하는 것으로 보이나?"

"그렇다면 어찌하여 제가 모용가를 두려워해야 합니까. 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폐하지 모용가가 아닙니다."

"하하! 대답이 걸작이구나."

황제는 그 시원한 대답에 웃었다. 그리고는 그를 가만히 살펴보았다.

붓 이외에 무거운 건 들어본 적이 없을 거 같은 왜소한 몸.

그러나 생각 이상으로 배포도 있고, 대답도 마음에 들었다.

"흠... 좋아. 이부 상서 자리는 그대에게 맡기지."

"...네?"

박노식은 깜짝 놀라서 몸을 움찔했고, 황제는 그 반응에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이부 상서. 이부의 장관 자리를 그대에게 맡긴다고. 마침 오늘 전임 이부 상서가 명을 달리했거든."

덤덤하게 말하는 황제를 보면서 박노식은 몸을 떨었다.

"그, 그런 중책을 제가 감히..."

박노식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6부 중에서도 가장 으뜸이라 평가 받는 이부.

그곳의 장관인 이부 상서의 자리는 명실상부한 문관의 2인자라고 볼 수 있었다.

이부는 관리들의 임용과 훈봉을 결정하는 부서로, 즉 이부 상서는 관리의 임명이나, 파견을 결정하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 자리였다.

다른 부서의 장관 역시 이부 상서가 임명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영향력은 어쩔 땐 재상을 뛰어넘기도 했다.

"...소신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처음엔 그 무거운 자리를 한사코 사양하려던 박노식은 황제가 그 뜻을 굽힐 생각이 전혀 보이지 않자 결국 고개를 숙였다.

"마침 잘되었군. 곧 재미있는 걸 보러 갈 텐데. 같이 갈텐가?"

그때 황제가 탕에서 나와 옷을 입으며 묻자 박노식은 당황했다.

재미있는 것이라니?

"아주 재미있는 것이라네. 그대가 피한 미래거든."

황제는 그리 말하며 웃었고, 박노식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박노식은 그제야 알았다.

방금 대답으로 인해 자신이 죽을 위기를 넘겼다는 것을 말이다.

­­

"놔라! 놔라! 이놈들! 내가 누군지 알고!"

무사들에게 포박 되어 끌려오는 모용철은 발버둥을 치면서 소리를 쳤다.

"황태후! 황태후 폐하를 뵈어야겠다!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런 짓을! 놔라!"

모용철은 화를 내면서 자신을 잡아 끄는 무사들에게 발길질을 날렸다.

무사들은 그 발길질을 감내하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일단 포박해서 데려오긴 했지만, 그는 명색이 황제의 외숙부였다.

게다가 황태후의 친오빠이기까지 하니...

일개 무사가 쉬이 건드릴 수 없는 존재였다.

서걱!

"뭐 해? 다리가 말썽인데 자르지 않고."

그런 무사들을 보면서 할바르는 망설임 없이 모용철의 발을 자르고는 비명을 지르는 그를 걷어차서 강제로 꿇어앉히고 다른 사람들을 그 뒤에 앉혔다.

"얌전히 있어라. 황제 폐하의 명이다. 그 어떤 신분도 폐하의 명 앞에서는 평등하다."

덤덤한 할바르의 말에 고통에 몸부림치던 모용철이 살기를 담아서 그를 노려보며 외쳤다.

"할바르 너 이 새끼가! 넌 내가 반드시 죽일 거다! 사람 구실도 못하게..."

"시끄럽구나."

멈칫!

그 순간 들리는 낮은 목소리에 모용철은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순식간에 이곳이 조용해졌다.

이 넓은 곳이 가득 찰 정도로 많은 유력 가문의 한족들은 황제의 등장에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떨고 있었다.

"다 아는 얼굴들도 보이는군. 모용진의 생모도 있고, 참 보는 맛은 있구나."

황제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말했다.

아는 얼굴들이 다수 있어서 조금 반가운 마음도 들 정도였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으면 덕담을 나눴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불효막심한 놈! 지금, 이건 천륜을 저버리는 짓이다!"

정신을 차린 모용철이 악을 쓰자 황제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듣기 거슬리는 소음이 있구나."

우득!

황제는 친히 다가가서 모용철의 턱을 으깨주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제 좀 조용해졌구나."

황제는 덤덤하게 기절한 모용철을 보며 치료 후 깨울 것을 지시하고는 다시 운을 뗐다.

"그대들을 이렇게 잡아 온 건 다름이 아니야. 그저 장부만 넘겼으면 이리 잡혀 오진 않았겠지. 실제로 장가는 이곳에 없지 않나?"

형부의 장관을 두고 있던 장가에선 순순히 장부를 넘겨 주었는지 잡혀 온 이가 없었다.

"주 가문도 보이지 않는다고? 아, 그쪽은 역모 발언을 하여 짐이 직접 일족을 멸해주었다네. 걱정하지 말게. 그대들은 장부만 넘겨 준다면 무사히 풀려나서 관직은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면 되네."

주 가문에 대해 물어보는 이가 있기에 그 이유를 설명해준 황제는 겁에 질린 그들에게 선언했다.

움찔!

황제의 선언에 앞에 있던 전직 장관들이 움찔했다.

그들은 장부를 가져가면서 황제가 설마 자신들을 전부 그대로 자를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렇게 대담하게 대규모 사직 상소를 올린 것이니까.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지면 대부분 황제는 문관들에게 굴복하였지, 그대로 장부를 빼앗고 관리를 새로 뽑지 않았다.

그만큼 인수인계는 어려운 일이고, 관직을 가진 자들의 영향력이 강했으니까.

"장부는 저희들의 목숨과도 같은 것입니다!"

서걱!

간신히 용기를 내서 주장한 호부의 장관이던 호부 상서 모용진수의 목이 황제의 손짓에 그대로 하늘을 날았다.

푸아악!

"그럼 장부가 짐의 것이니 그대의 목숨도 짐의 것이구나."

데구르르.

바닥을 구르는 모용진수의 머리를 보면서 사람들은 공포에 몸을 떨었다.

"짐의 것을 짐이 가져간다고 하는데 뭐라 할 사람이 더 있나?"

황제의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들은 알아버렸으니까.

황제를 적으로 돌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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