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 황제의 기억(1)아버지와 아들
* * *
화사한 꽃들이 화원을 가득 채운 어느 봄날의 일이었다.
창백한 얼굴에 작은 체구, 아직은 소년처럼 느껴지는 동안의 남자는 눈을 감고 느긋하게 앉아서는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음, 향이 좋구나."
남자의 눈이 떠지자 신비로운 금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저 병약한 미소년으로 보이던 남자는 눈을 뜨자 묘한 위엄이 느껴지는 성인 남자처럼 보였다.
"흰머리가 느셨습니다."
그런 남자의 앞에 앉아 있던 무표정한 얼굴의 귀여운 소년이 덤덤하게 말하자 남자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럼 안 되는데? 벌써 흰머리가 늘면..."
"후후, 그 검은 머리가 전부 흰머리가 되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폐하. 태자도 그만 놀리거라."
그런 둘 사이에서 느긋하게 난을 치고 있던 여인은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황후도 그쯤 하라니까 그만하거라 이 얄미운 녀석아."
그 말에 기세등등해진 남자가 웃는 얼굴로 말하자 소년은 당당하게 충언을 아끼지 않았다.
"어른이 되십쇼. 언제까지 아이처럼 살 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남자의 말에도 전혀 질 생각하지 않는 소년.
아니 태자를 보면서 남자.
아니 이 거대한 제국의 황제는 슬픈 척했다.
"이 아비는 슬프구나. 흑흑, 태자의 말이 비수처럼 박혀서 슬퍼."
"..."
그 모습에 더 들어 주기도 싫다는 듯이 태자가 고개를 돌려 버리자 황제는 진심으로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그... 태자? 나 일단 황제이기 이전에 태자의 아버지거든?"
"그래서요?"
싸늘한 태자의 반응에 더욱 움츠러둔 황제는 조심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그보다 오르테가 이야기는 들었다. 드디어 이겼다지?"
황제의 질문에 태자가 그제야 그 나이 또래의 아이의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드디어 이겼습니다. 다음부턴 절대 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아, 아니... 그럴 필요는..."
태자는 잔뜩 신이 나서는 그때의 결투 내용과 자신이 어떻게 이길 수 있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훈련 계획과 전술 선택의 이유 등을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고, 황제는 그런 태자를 보면서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솔직히 황제는 그저 아들의 관심을 끌만한 화제를 던지고 싶었을 뿐 검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말인데요. 수비할 때는 이 자세도 뜻밖에 좋은 것 같습니다. 얼핏 보기엔 무방비해 보이지만 상대가 돌진해 올 때 이렇게 들어 올리면..."
"그, 그래. 그렇구나. 그거 대단하네."
전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황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열심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도와줘! 여보!'
황제는 맞장구를 쳐주면서도 계속해서 황후한테 눈빛으로 구조 신호를 보냈고, 황후는 그제야 난을 치는 걸 멈추고는 태자에게 말했다.
"태자. 더욱 배우려는 자세가 아주 마음에 드는군요. 내일부턴 이 어미한테 배우도록 할까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처음으로 태자가 아이와 같이 눈을 반짝이면서 물었다.
그 모습이 참 귀엽다고 생각하며 황후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물론이지요. 이 어미의 모든 기술을 전수해주겠습니다. 그러니까 내일부터는 진이랑 같이 오도록 하세요."
"형도 같이 와도 됩니까? 진짜요?"
그의 사촌형인 모용진이 언급되자 태자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그 나이 또래의 아이처럼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니까.
하여간 사촌형을 참으로 좋아하는 아이다.
하긴... 태자가 친하다고 볼 만한 형제가 사촌형인 모용진 뿐이었으니...
오히려 태자에게 다른 형제들은 적이었다.
그나마 친동생은 믿고 있었던 모양이지만... 그 태자의 친동생은 태자의 식사에 독을 타는 것으로 그 믿음에 보답했다.
그 뒤로 태자는 한동안 진민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게 황후는 가슴이 아팠다.
이 어린 나이에 숱하게 독살 위협에 시달리는 것이, 그럼에도 내색하지 않는 그 모습이 기특하면서도 가여웠다.
황제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최근 태자를 챙기는 일이 더 많아졌다
물론 그럴 때마다 암살 시도는 더욱 심해졌지만.
그야말로 악순환이었다.
"그보다 이 아비한테 상담할 게 있다고 하지 않았니?"
황제가 생각났다는 듯이 묻자 태자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폐하께 상담할 일이 있습니다."
태자의 진지한 대답에 황제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아빠."
"폐하."
"아.버.지."
"...아버지. 상담할 일이 있습니다."
집요한 황제의 모습에 결국 태자가 굴복했고, 그 말을 들은 황제는 기쁜 듯이 웃으면서 물었다.
"그래 사랑하는 내 아들아. 무엇이 고민이니?"
"그..."
선뜻 대답하리라고 생각했던 태자가 그 순간 대답을 망설였다.
"?"
황제는 태자가 눈치를 본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가 아는 태자는 그 누구에게도 눈치 보지 않고 할 말은 하는 녀석이었으니까.
오죽하면 자기 동생이자 녀석에겐 숙부인 재상 앞에서도 당당하게 '방금 일을 폐하의 동의도 없이 처리한 것은 명백한 월권이자 역모의 죄이니 목을 쳐야 합니다.' 라고 주장하는 파격을 보이기도 했다.
당장 재상에겐 황제도 찍소리도 못 하는 데 말이다.
재상은 그 말에 길길이 날뛰었으나 명분은 태자에게 있는 게 사실이었기에 이렇다 할 처벌은 못하고 태자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그냥 꿀밤을 몇 대 맞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 후 태자가 황제에게 했던 말은 아직도 황제에겐 생생했다.
[힘이 없는 황제가 이리도 한심한 줄은 몰랐습니다. 전 만약 황제가 된다면... 아버지처럼 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 말이... 황제의 가슴을 아프게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자신은 그저 허수아비일 뿐.
실권은 형제들이 쥐고 있다는 걸 모를 정도로 황제는 무능할지언정 멍청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게 황제의 처세술이었다.
다른 형제에 비해 자신이 가진 것은 그저 장자라는 정통성 뿐, 그 정통성이 압도적이라 황제에 올랐지만.
황제는 실권 하나 없는 반쪽 자리 황제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최대한 굽히고, 최소한의 존중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고 살아왔다. 그것 만으로도 나쁘지 않은 삶을 보장 받았으니까.
하지만...
그래서일까?
자신에게 없는 것이 있는 태자가... 황제는 부러우면서도 더욱 눈길이 가고는 했다.
"그, 황후 폐하께선 잠시 자리를 물러주셨으면 합니다. 아무래도 폐하와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인지라."
"어머나..."
태자의 요구에 황후는 섭섭한 표정을 지었지만 황제는 바로 반색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황후. 잠시만 물러나주게."
무려 태자가 자신에게만 의존해 주다니!
황제는 기뻐서 날아갈 거만 같았기에 황후를 물리고는 아예 주변의 사람들까지 전부 물렸다.
"자, 이제 나와 단둘이다. 얼마든지 이 아빠한테 기대거라."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황제가 말하자 태자는 잠시 고민하더니 진지한 얼굴로 물어왔다.
"어제 황후 페하께서 저에게 여체에 대해서 가르쳐 주었습니다."
"응? 아아, 궁녀들 몇을 데리고 그러했다고 들었다. 어떠냐? 마음에 들었느냐?"
황제는 스스로 이런 말하긴 뭐 했지만 여인을 좋아했다.
여인의 몸이 가져다주는 쾌락은 그 어떤 것보다도 환성적이었으니까.
"그... 솔직히 조금 징그러웠습니다. 가슴도 이상하게 튀어나왔고, 아래도 흉측했습니다."
그러나 태자의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아... 태자는 아직 여체의 매력을 알기엔 너무 어렸나?
황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태자를 보았다.
하긴 태자가 어른스러워 보이긴 하지만 아직 어렸다.
그러니 여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거부감이 들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나중에 가면 좋아질 거다. 확실히 넣으면 기분이 좋거든."
"?"
황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는 태자에게 말했다.
"설마 그게 상담 내용이니?"
"네... 그래도 황후 폐하께서 배려해주신 일인데 앞에서 거북했다 말하기엔 조금..."
하여간... 보기와 달리 참으로 생각이 깊고 착한 아이다.
황제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겠지. 그래서 여체가 거북해지지 않는 방법을 배우고 싶은 거니?"
"네, 그렇습니다."
황제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잘 찾아온 거다.
황제는 여체의 전문가였으니까.
"그렇다면 잘 찾아왔단다. 확실히 익숙해지는 방법이 뭔지 아느냐?"
"모릅니다."
황제는 그 말에 웃으면서 말했다.
"뭐든 경험을 하다 보면 익숙해지는 법이지. 검도 그렇듯이 여체도 마찬가지다. 많이 보면 볼 수록, 만지면 만질 수록 좋아질 거야."
"..."
태자는 그 조언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고, 황제는 예상 못 한 반응에 당황했다.
당연히 좋은 조언해준 자신을 존경할 거로 생각했는데...
황제가 당황하고 있을 때 태자의 입이 열렸다.
"...알겠습니다. 이젠 다시 아버지한테 기대 안 할 겁니다."
쿠쿵!
그야말로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 거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 황제는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아, 아들아? 나, 나는 최선을 다해서."
"그럼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폐. 하."
아... 망했다.
모처럼 자신을 아버지라고 불러 주었는데.
다시 폐하로 호칭이 돌아간 태자를 보면서 황제는 절망하며 태자를 잡으려고 했으나 태자는 그대로 빠른 걸음으로 저 멀리 가 버리고 말았다.
"아아... 아들아."
흑흑, 이게 아닌데...
황제는 속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뻗었던 손을 거두었다.
아무래도 태자와의 관계 개선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거 같았다.
"어머나. 무슨 이야기를 나눴기에 그렇게 풀이 죽었나요?"
추욱 늘어진 황제를 보고 어느새 돌아온 황후가 묻자 황제는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태자한테 조언해줬는데 앞으로 나한테 기대를 안 하겠다네..."
"저런, 가엾게도. 정 기운이 안 나면 제 가슴이라도 만지실래요?"
황후가 딱하다는 듯이 황제를 보며 묻자 황제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만질래. 하... 치유된다. 역시 황후가 최고야."
부드럽고 탄력적인 그녀의 가슴을 만지작거리면서 황제는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지 몇 번을 만져도 질리지 않는 가슴이었다.
"어머나. 후후."
그 모습을 보며 웃던 황후는 그런 황제의 머리를 애정을 담아서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태자가 이 좋은 걸 모르는 게 불쌍하구나.'
황제는 태자를 동정하면서도 해결책을 고민해 보고 있었다.
물론 대답은 나오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들! 아빠랑 사냥 갈래?"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검을 휘두르고 있던 태자는 갑자기 불쑥 찾아와서는 사냥을 권유하는 황제에게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조정에 있을 시간이 아닙니까?"
지금은 아직 한참 조정에서 회의 중일 시간인데?
태자가 그런 의문을 품고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수건으로 닦으며 묻자 황제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응? 내가 거기 있어 봐야 병풍이지 않느냐. 차라리 태자와 우애를 다지는 편이 낫겠지. 어때? 나와 같이 사냥 갈래?"
"...싫습니다."
"짐이랑 사냥을 가자. 명령이다."
"..."
자신의 거절에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어 명령을 사용하는 황제는 정말 유치해 보였다.
태자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채비하고 바로 가겠습니다."
"그래, 이 아빠는 사냥터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으마."
신난 얼굴로 떠나는 황제를 보면서 태자는 한숨을 쉬었다.
사냥? 황제가 사냥이라...
뭐, 폐하께서 조정에 출근하기 싫은 것은 이해했다.
황제는 사실상 병풍이고 모든 안건은 재상이 정하고, 그에 따른 판단도 재상이 하고, 모든 걸 재상이 처리했으니까.
태자는 자신이 황제일 때 재상이 저런 월권을 태연하게 했다면 목을 잘라서 저잣거리에 효수해줄 의사가 충만했다.
아니 사실 자신이 진짜 황제가 되면 재상을 가장 먼저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이미 태자의 살생부 앞자리에 재상이 이름이 또렷하게 적혀 있었으니까.
아무튼 황제가 사냥이라니?
'활을 쏘려다가 다치지나 않으면 좋을 텐데...'
태자는 진지하게 황제가 활은 쏠 수 있을지 걱정하면서 옷을 갈아입으려 욕탕으로 향했다.
그는 일단 땀을 씻어내고는 옷을 갈아입을 생각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