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황제의 기억(1)아버지와 아들
* * *
"거리는 언제봐도 좋단 말이지."
미복을 입은 채 거리를 거닐며, 신난 얼굴로 말하는 황제를 보면서 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습니다."
태자도 거리를 구경하는 건 좋아했다.
사람들을 구경하며, 그들의 삶을 엿보는 것은 색다른 자극이 되었으니까.
"자, 그럼 움직이자."
황제의 말에 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자의 허리에는 검이 없었다.
무기로 쓸 만한 거라고는 손에 든 우산이 전부.
황제는 무기는 보이지 않았지만 태자가 분명 무기를 소지하고 있으리라 믿었다.
'우산 손잡이를 뽑으면 검이 나온다던가?'
황제는 어느새 태자가 어떻게 대처할지 기대하고 있었다.
분명 자신이 있다고 했으니 뭔가 굉장한 걸 준비했을 것이다. 그만큼 황제에게 태자는 완벽한 존재였다.
'이쯤일 텐데...'
인적이 드문 거리로 들어선 황제는 이곳의 공기가 다른 것을 느끼고는 슬슬 뭔가 일어날 조짐을 느꼈다.
황제는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주변의 변화를 파악하는 데 능숙했다.
당장 바닥은 누군가가 정리한 흔적이 있었고, 벽에도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것이 느껴졌다.
'함정인가?'
황제는 태자를 보았다.
태자는 알고 있을까? 함정을?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다.
황제는 자신도 알아챈 함정을 태자가 모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저길 밟으면 저쪽에서 화살이 날아오려나?'
황제는 함정을 알았지만 태자에게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말했다가는 모처럼 태자가 자신을 배려해준 것이 물거품이 될 텐데...
애초에 태자가 모를 일도 없다. 그러니까 가만히 있자.
그때였다.
태자가 태연하게 그 함정을 밟았다.
쇄액!
터억.
눈 깜짝할 사이에 화살이 날아왔으나 태자는 방향도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화살을 잡아서는 어딘가로 던졌다.
푸욱!
"살기도 제대로 못 숨기는 암살자라니... 형편없군."
순식간에 숨어 있던 암살자 한 명을 제거한 태자는 우산을 든 채 황제에게 말했다.
"금방 끝납니다."
"그... 아들아. 무기는?"
어느새 사방을 포위한 암살자들을 보면서 황제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태자의 손에 들린 것은 여전히 우산 하나였다.
"없습니다."
태자는 당당하게 말했다.
손에 쥔 우산은 그냥 우산이었다.
거기엔 숨겨진 검이라던가 그런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오늘 비가 올 수도 있다고 해서 챙겨온 것일 뿐.
"그, 그러니?"
황제는 달려드는 암살자를 보고 비명을 질렀고, 태자는 차분하게 몸을 틀어 검을 피하고는 우산으로 머리를 후려쳤다.
퍼엉!
그대로 암살자의 머리가 터졌다.
우산으로 때렸는데 머리가 터진다니!
황제는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으나 태자는 덤덤하게 피를 뒤집어쓰고는 이어지는 공격을 피했다.
우드득!
찔러오는 검을 피하는 동시에 발차기를 꽂아 넣은 태자는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날아간 암살자에겐 따로 눈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 와중에 깔끔한 솜씨로 암살자의 검을 빼내선 자신이 쥐었다.
'죽었군.'
황제는 발차기에 날아간 암살자를 보며 생각했다.
발차기 한 번에 암살자가 절명했다.
아니 이게 12살 소년의 전투력이라고?
황제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태자는 차분하게 달려드는 암살자들을 베어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움직임이었다. 황제는 보면서도 사람의 검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잉!
"검기인가..."
황제는 앞에 두 암살자가 검기를 쓰는 것을 보고 놀랐다.
조금 흐릿하긴 했지만 확실히 검기였다.
그 광경을 본 태자도 처음으로 표정이 변했다.
"조금 재미있겠어."
저건 대체...
그동안 무표정하던 태자의 얼굴에서 웃음이 피어났다.
검기를 쓰는 검사 둘을 앞에 두고도 저런 자세라니! 황제는 태자의 자신감에 감탄만 나왔다.
"이길 수 있겠느냐?"
황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자 태자는 조금 땀을 흘리면서 대답했다.
"...어렵겠지요."
뜻밖에도 태자의 대답은 그리 자신감이 넘치진 않았다.
"그런데 왜 웃고 있느냐."
황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렵다면, 죽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런데도 웃을 수 있다니. 황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강자와 싸우다가 죽는다면 그것만 한 호사가 없겠죠. 하지만..."
태자는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죽을 전장은 이곳이 아닙니다."
카앙!
그 순간 황제는 보았다.
달려든 남자의 검기를 막는 태자의 검에 선명한 검기가.
강물처럼, 고고하게 흐르는 푸른 검기를 보면서 황제는 멍한 표정으로 홀린 듯이 태자의 검을 보았다.
두 명의 협공에도 불구하고 태자는 전혀 밀리지 않았다.
태자의 아래를 노리고 휘둘러진 검을 태자는 발을 들어 밟는 것으로 가볍게 막아내고는 그대로 암살자의 팔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검을 빼내려던 암살자는 그것이 여의치 않자 검을 망설임 없이 놓고는 뒤로 물러났다.
카앙!
그 순간 태자가 빠르게 검을 회수하더니 몸을 돌려서 뒤를 노리고 휘둘러진 검을 막아내었다.
그 사이 다시 검을 되찾은 암살자가 태자의 뒤를 과감하게 노렸다.
터억!
그러자 가볍게 다른 암살자를 밀어 찬 태자는 다시 몸을 돌려서는 자신의 뒤를 노리던 검을 쳐냈다. 힘에서 밀린 암살자는 비틀거렸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태자의 검이 암살자를 크게 베었다.
이런 강함이라니... 황제는 태자가 둘을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고, 오히려 우위를 점하는 모습에 그저 감탄만 나왔다.
주륵.
물론 그렇다고 태자의 몸에 상처가 없는 건 아니었다.
싸움이 길어질수록 태자의 몸엔 점점 상처가 늘어갔다.
뺨에는 기다란 검상이 생겼고, 오른쪽 어깨는 뼈가 드러날 정도로 베였으며, 복부에도 피가 흘렀다.
그러나 상대는 더 처참했다.
암살자 중 한 명은 이미 두 다리가 잘려서 전투 능력을 상실했고, 다른 한 명은 지금...
푸욱!
심장에 칼을 허용하고는 목숨을 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황제는 정신없이 태자에게 다가갔다.
"태자! 태자! 괜찮으냐?"
피를 철철 흘리는 태자를 보면서 황제는 얼굴이 창백해질 정도로 놀랐다.
엄청난 중상이다.
황제는 태자의 상태를 보려 했으나 태자는 덤덤하게 걸어서는 두 다리를 잃은 암살자에게 다가 갔다.
"재상이 보냈겠지."
"..."
유일하게 살아남은 두 다리를 잃은 암살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두 눈을 크게 뜨고 있을 뿐이었다.
"재상은 내가 황제가 되면 자신이 죽을 것이 두려웠겠지. 맞아. 내가 만약 황제가 된다면... 가장 먼저 재상을 죽일 것이다. 그러니까 재상에게 전해라."
암살자는 공포에 떨었고, 태자는 그런 암살자를 덤덤하게 내려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발버둥 쳐보라고, 날 죽이려고 얼마든지 노력해 봐라."
태자는 덤덤하게 말했고, 황제는 그 말에 충격을 받은 것처럼 굳어 버렸다.
"난 절대 죽지 않을 테니까. 그 의미 없는 발악을 계속해 보라고 전해라."
자신은 절대로 하지 못할 말. 가질 수 없는 자신감.
하지만... 저 아이에겐 너무나도 당연한 자신감.
자신의 강함이 가져다주는 절대적인 자신감이 태자에게 있었다. 자신은 가질 수 없는... 그것이.
황제는 부러웠다.
"그 발악이 거칠 수록, 재상의 최후도 거칠어질 것이라고. 그렇게 전하도록."
그 재상에게도 저렇게 당당하게 선전포고를 할 수 있는 자기 아들이... 참 대단하게 느껴졌다.
자신은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자기 아들은 쉽게 해 버렸으니까.
그제야 알았다.
황제는... 자신이 지금 태자를 동경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참으로 우습지만, 지금 느끼는 황제의 감정이 그러했다.
"대단하구나..."
황제가 감탄하고 있을 때 뺨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던 태자가 덤덤하게 말했다.
"아직 하늘은 절 데려갈 생각이 없는 모양이군요."
태자는 자기 몸을 점검해 보더니 갑자기 쓰러졌다.
쿠웅.
"위? 위야!"
"그래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어서 다행..."
태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눈을 감았고, 황제는 당황한 얼굴로 태자를 안아 들었다.
팔이 후들거리고, 다리가 떨렸지만 황제는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고 달렸다.
당장 아들이 죽어 가는데 그런 걸 신경 쓸 부모가 어디 있을까?
적어도 황제는 당장 태자를 치료한다는 생각밖에 머리에 들어 있지 않았다.
"폐, 폐하!"
당황한 금위대장의 얼굴이 보이고, 황제는 다급하게 말했다.
"태자가 습격 당했다. 의원! 의원을."
"제가 태자를 모시겠습니다."
그때였다.
오싹!
황제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어느새 다가온 재상이, 자신에게 태자의 신변을 요구하고 있었다.
"...재상."
심장이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황제는 공포에 머리가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얼른 치료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제가 바로 태자를 치료하러 데려가겠습니다. 태자의 신병을 맡겨 주시지요."
"..."
덜덜.
황제는 재상의 요구에 태자를 안은 손이 덜덜 떨렸다.
알고 있었다.
여기서 태자를 재상에게 맡긴다면...
태자는 죽는다.
하지만 거절하면? 확실하게 재상을 적으로 돌리는 셈이었다. 황제는 그건 정말 두려웠다.
어느 쪽이지? 어떻게 해야 하지?
황제의 생각은 그리 길진 않았다.
"개소리 말고. 의원을 데려와."
당장 태자의 목숨이 위태로운데.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있을 리가! 황제는 처음으로 재상에게 험한 말까지 내뱉으며 의원을 요구했다.
"폐하...!"
재상은 설마 황제가 자신에게 이토록 험한 말을 할 줄은 몰랐기에 경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당장! 의원을 데려오라고."
"아, 알겠습니다. 바로 의원을 데려오겠습니다."
황제가 화난 얼굴로 명령하자 금위대장은 다급하게 의원을 데리러 사라졌고, 금위대장이 사라지기 무섭게 재상은 황제를 노려보았다.
"이게 대답입니까?"
"그래, 이게 짐의 대답이다."
황제는 처음으로 재상 앞에서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두려움은 없었다.
황제의 머리엔 오로지 태자의 안전 뿐이었으니까.
'부디... 무사하길.'
왜 몰랐지?
아무리 어른스러워도, 강해도... 아직은 보호가 필요한 아이일진대...
이토록... 가볍고 여린 아이였는데.
황제는 자신의 나약함에 화가 났다.
왜 자신은 이리도 약할까.
왜 자신은 무능할까?
"...폐하께서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구나. 당장 태자를 이쪽으로 데려와라."
황제란 남자는... 이 무능한 아비는...
이렇게 다친 아들 하나를 지킬 수 없을 정도로 무능하고 힘이 없었다. 그것이 황제를 너무나도 슬프게 만들었다.
재상은 아무래도 강행하기로 했는지 금위대장이 의원을 부르러 사라진 틈을 타서 무사들에게 명령했다.
"짐의 말이 들리지 않는가! 태자는 넘겨 주지 않는데도!"
멈칫.
황실의 무사들은 그 말에 잠시 움찔했으나 재상의 눈에서 불똥이 튀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폐하."
무사들은 재상의 말을 듣기로 결정했다.
실권 하나 없는 황제, 사실상 전권을 위임 받은 재상.
무사들이 누구의 말을 들을지는 명확했다.
"저리 물러가라! 짐의 말이 말 같지 않으냐!"
황제는 쓰러진 태자를 꼬옥 끌어안고는 발악하듯 외쳤다. 이대로 태자를 보낼 수는 없었다.
재상의 손에 들어가면 무방비한 태자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었으니까.
그런 황제의 행동에 무사들은 난색을 표하긴 했으나 애초에 허약한 황제한테서 아이를 빼앗는 건 손쉬운 일이었다.
재상도 금방 무사들이 황제를 제압하고 태자를 데려올 거라 믿었다.
이곳의 소란을 듣고, 그녀가 오기 전까지는.
콰직!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간단하게 설명해줄 자가 있을까요?"
황제에게서 태자를 빼앗으려던 무사는 바로 앞에서 떨어진 대도를 보고는 몸을 떨었다.
성인 남자도 쉬이 들지 못할 정도의 거대한 도는 정확히 무사의 앞에 떨어져서는 그 흉흉한 예기를 뽐내고 있었다.
"재상. 이 황후가 묻고 있지 않나요? 동아족에선 위아래를 그리 가르치던가요?"
그곳에 등장한 것은 다름 아닌 황후였다.
검 하나로 이 숱한 암살 시도를 물리치고, 황후의 자리를 유지한 철혈의 여인.
이 대륙에서도 단 둘만 존재하는 검강 사용자.
황후. 모용지희.
아무리 재상이라고 해도 쉽게 대할 수 있는 상대가 절대 아니었다.
"아, 아닙니다. 황후 폐하. 그저 태자를... 치료하려고 하하, 오해입니다. 오해지요. 폐하께서 분명 오해를 하신 겁니다."
재상은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뒷걸음질 쳤고, 황후는 창백한 황제의 얼굴과, 상처투성이인 태자를 보고는 악귀와 같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오해라."
그 말에 재상은 식은땀을 흘렸다.
나약한 황제는 무섭지 않았지만 당장 칼을 뽑아도 이상하지 않은 황후는 무서웠다.
당연한 일이다.
자신이 가진 권력이 당장 눈앞에 들이닥친 황후의 검까지 막아주는 건 아니었으니까.
"재상... 저는 정치 같은 것은 모릅니다. 관심도 없지요."
그때 황후가 수라와 같은 얼굴로 재상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 말대로다.
사실 황후가 그런 쪽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재상이 이리 설칠 수는 없었을 테니까.
"허나 거슬리는 걸 치울 정도의 재주는 있답니다. 그걸 명심하세요."
그러나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거슬리는 걸 치우지 못할 정도로 무능한 여인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황실에서 가장 무언가를 치우는 것에는 익숙한 여인이었다.
그런 황후의 뼈가 실린 말에 재상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
"물, 물론이지요. 황후 폐하의 조언은 새겨듣겠습니다. 그, 그럼 이만."
공포로 창백해진 얼굴로 재상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순순히 물러났고, 무사들은 망설이더니 그대로 머리를 조아렸다.
"그래서 이건 무슨 일인가요? 왜 태자가... 또 이리 되었단 말입니까."
황후는 신경질적으로 그 무사들을 걷어차서 기절시키고는 대도를 땅에 박아 넣으며 황제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이 아이가 또 이리도 다쳤단 말인가.
당장이라도 그 주모자의 사지를 베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황후에겐 가득했다.
"암살자가... 그래서 난... 아무것도..."
황후의 등장으로 안심해버린 황제는 울먹이면서 상황을 설명했고, 황후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 이야기를 들었다.
"잘하셨습니다. 폐하가 용기를 내준 덕분에 제가 올 시간을 벌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울먹이면서도 태자를 꼭 끌어안고 있는 황제를 보면서... 황후는 그런 황제를 위로해주었다.
"그렇지 않느냐?"
그러고는 누워 있는 태자에게 물었다.
황제는 기절한 태자에게 물어봐야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습니다. 조금 의외였습니다."
놀랍게도 태자는 의식을 찾았는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모습에 황제가 마치 귀신을 본 것처럼 놀랐다.
"어, 언제부터..."
"황궁에 도착할 때부터 이미 의식은 있었습니다."
황제의 질문에 태자는 덤덤하게 말하면서도 차분하게 몸 상태를 점검했다.
출혈로 인한 빈혈 증상이 조금 있지만, 그래도 죽을 정도의 몸 상태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건 황후도 이곳에 오면서 바로 알아보았다.
"재상이 운이 좋군요."
태자는 덤덤하게 말했다.
그는 황제가 재상에게 자신을 순순히 넘겨 주면 재상이 무슨 짓을 하려는 순간 목을 날릴 생각이었다.
뭐, 예상했던 것처럼 되지 않은 건 의외였지만... 황제의 반응은 솔직히 태자에게도 꽤나 의외였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재상에게 맞서는 모습은 솔직히 태자에게도 조금...
"그, 그게.... 조금은 멋있었습니다. 아버지."
멋있었다.
태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부끄러운 듯이 시선을 피했다.
그런 태자의 얼굴은 마치 홍당무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허허..."
황제는 처음으로 보는 태자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멋있었다.
그 추하고도, 별 볼 일 없는 남자의 모습이... 이 아이에겐 멋있게 보였던 건가?
"무사해서 다행이다."
황제는 그런 태자를 꼬옥 껴안아주며 말했다.
지금은 그런 건 상관없었다.
그런 사소한 것보단...
황제는 태자가 무사하다는 사실이 더 기뻤으니까.
그 뒤로 재상은 그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게 황제는 놀라웠다.
당장 무슨 움직임을 보일 줄 알았는데... 지나칠 정도로 조용했다.
황제는 그 침묵이 신기하다 생각하면서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재상의 얼굴을 더욱 수척해졌고, 알 수 없는 공포에 질려갔다.
나중에 알았다.
재상은 그 뒤로도 계속 태자를 암살하려 시도했고, 전부 실패하면서 공포에 말라 죽어 가고 있었다는 것을.
"...아들아."
황제는 그런 재상만큼이나 말라버리고 수척해진 자기 병든 몸을 보며 말했다.
이 몸에 한계가 왔음을 이미 느끼고 있었으니까.
"네, 아버지."
태자는 덤덤하게 그런 황제를 보고 있었다.
이제 막 약관의 나이가 된 태자는 몰라보게 장성하여 황제가 보기에도 심히 든든해 보였다. 외모는 어릴 때도 빛이 나던 것이 더욱 두드러졌다.
궁녀들이 태자와의 신분 차이를 초월한 연애를 꿈꾸며 잠 못 이룬다는 것은 그리 놀랍지도 않을 정도였다.
"그래... 마지막은 아버지라고 불러주는구나."
그런 태자의 호칭이... 황제는 참으로 기꺼웠다.
"...이걸 바라셨을 거 같기에."
태자의 대답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자신이 그저 무능한 황제로만 기억되어도 좋으니까... 적어도 자기 아들에게 만큼은 편하게 욕할 수 있는 친근한 아버지로 남길 바랐다. '아, 아버지가 이런 짓도 했었지. 쓸모없게.' 라던가. '아버지가 이런 실수를 했었지. 망할 아버지.' 같은 조금은 무엄한 생각이라도 좋으니 자신을 친근하게 기억해주었으면 했다.
그런 점에서... 조금은 성공한 것일지도 모른다.
"짐의 치세는... 실패투성이었지."
황제는 수척해진 얼굴로 덤덤하게 말했다.
외척들에게 휘둘리고, 형제들에게 휘둘리며, 태자를 지켜 주지도 못했고, 그저 태자가 다칠 때마다 두려워서 숨기만 하는 겁쟁이였다.
그때도 그랬다.
태자가 위독하긴 했어도, 태자의 말대로 그때 진격했다면 야만족들은 분명 굴복했을 거다.
그만큼 태자가 그들에게 남긴 상처는 컸으니까.
하지만 황제는 우선 태자를 치료하는 걸 택했다.
진군을 택한다면... 태자가 제 몸을 챙기지 않고 망설임 없이 다시 전장에 서리란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태자는 자기 몸을 챙길 줄을 몰랐다.
그게 참으로 불안하면서도, 위태로워 보여서...
황제는 늘 걱정이었다.
그리고 그게 자신의 약점이라는 걸 황제는 알았다.
제국을 생각한다면 그런 걱정에 사로잡혀서 태자의 안위나 신경 쓸 게 아니었는데... 정작 다친 당사자는 강인했으나, 황제는 그러지 못했다.
늘 과감하지 못했고, 누군가를 쳐 내는 것도 못 해서... 늘 휘둘리기만 했다.
그런데도 황제는 자신이 딱 하나 잘한 게 있다고 생각했다.
"허나 짐의 유일한 성공이 있으니 그게 너다. 태자."
바로 이 아이를 태자로 삼은 것.
황제는 그게 자신의 치욕스러운 치세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아버지."
"그래... 아들아. 그리고 이건... 내가 아버지로서 너에게 해 줄 말이다."
방금 전 말이 황제인 자신이 하는 말이라면 지금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해주는 말이었다.
"...제국 그딴 건 신경 쓸 필요 없다. 행복해져라."
마지막까지 못난 황제다운 말이지만.
황제는 진심이었다.
이 제국이 이 아이에게 족쇄가 된다면, 내 마지막 말이 녀석에게 굴레가 된다면.
황제의 책임감 따윈 다 필요 없었다.
아버지로서 황제가 느낀 마지막 감정은... 이 아이가 책임감에 고통 받을 거라면... 그 모든 걸 버리고 도망쳐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아이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황제는 태자가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는 선택을 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게 아버지인... 내가 하는 말이다. 짐이 아니라. 내가."
황제는 강조하듯이 말하고는 그대로 숨을 거두었고, 태자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되겠습니다. 제가, 폐하께서 주신 굴레와 족쇄를 묵묵히 짊어지고 가겠습니다."
그러나 황제가 모른 것이 있다면...
그 말이 오히려 태자에게 더욱 책임감을 안겨 주었다는 것이었다.
태자는 스스로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자신에게 이토록 애정을 준 아버지가 망쳐둔 제국을 버리고 도망치는 길을 선택할 수 없었다.
제국은 엉망이었다.
황제가 쓰러지자 권력을 잡은 이들이 서로 황제의 위를 노리고 세력을 불리고 있었고, 황실 안에서는 대놓고 기 싸움이 벌어졌다.
지방으로 들어가면 제국의 통제력이 약해져서 각 지방에 자신을 왕처럼 여기는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몇몇 민족들은 독립을 위한 움직임까지 보였다.
이대로 두었다간 제국이 갈기갈기 찢겨져 군웅할거 시대가 열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지금의 제국은 최악의 상태를 구가하고 있었다.
이 엉망진창이 된 제국을 물려받게 된 태자는 그런 아버지의 유산을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자신이 태자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황위를 받아들인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어쩔 수 없는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준비는 끝났나?"
선제와의 추억을 회상하던 황제는 눈을 뜨고는 재상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 재상의 뒤에는 확실히 마리아와 달리아가 서 있었다.
"그대는 정녕 본녀가 이동 수단으로 보이느냐? 라고... 말하고 싶다만 이번엔 본녀도 흥미가 있구나."
마리아는 투덜거리던 걸 멈추고는 흥미로 눈을 반짝였다.
그녀도 이번 일엔 꽤나 관심이 많아 보였다.
"용이요? 진짜 용인가요?"
달리아는 완전 흥분한 얼굴로 황제의 몸을 마구 흔들었다.
"그래."
"아! 아버지한테도 말해야. 아니 하지만 내가 가서 잡으면... 아! 어쩌지? 활하고, 화살은 챙겼는데, 투창용 창이 좀 부족할 수도..."
호들갑을 떠는 달리아를 보면서 한숨을 내쉰 황제는 다시 눈을 감았다.
이따금 눈을 감고 있다 보면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르고는 했다.
참 진중하지 못하고, 약하고, 무능한 사람.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던 남자를 생각하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고는 했다.
바보 같고, 우둔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은 황실에서 있던 시간 중에 몇 안 되는 좋은 추억 중 하나였다.
사냥도... 조금 우습지만 재미있었고, 거리를 돌아보던 것도 즐거웠었다.
"재상."
"네?"
"이곳을 잘 부탁하지."
황제는 재상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떠날 채비를 했다.
언젠간... 자신도 그와 같은 아버지가 되겠지만, 솔직히 황제는 그 사람 같은 아버지가 될 자신은 없었다.
그런 점에서 다시 실감한다.
황제는 그 사람처럼 될 수 없었고, 그 사람은 자신처럼 될 수 없었다는 것을.
선제께서 자신을 왜 그렇게 높게 평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황제는 사실 그가 부러웠다.
자신에게 없는 그 자상함을 사랑했고, 밝음을 동경했으며, 그 약함을 지켜주고 싶었다.
그러나... 황제 스스로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선제처럼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그런 약함이, 그런 밝음이, 그런 자상함이...
나약함이 되어 제국을 망가트렸으니까.
"가자."
그렇기에 황제는 잔혹해졌다.
선제가 자상함이었다면, 황제는 스스로가 비정함이 되고자 했다.
그것이... 제국을 위한 길이었으니까.
제국에 불필요한 것을 잘라 내는 비정한 검.
그것이 지금의 황제가 해야 할 역할이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황제는 그 비정함을 다시 한번 보여주기 위해 다시 한번 몸을 움직였다.
제국의 불필요한 것을 잘라 내는 검이 되어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