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 열두 번째 합궁마리프 아사노프
* * *
아산족에 대한 정보는 사실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인간의 침입을 거절하는 듯한 고산 지대에 자리를 잡은 그들이 어느 날 갑자기 제국의 발 아래로 들어오기를 자청했을 땐, 그들을 받아들인 진문제는 그리 말했다고 한다.
[그 높은 곳에도 사람이 살다니 참으로 인간의 신비함이구나.]
아무튼, 그런 말이 들릴 정도로 높은 지대에서 사는 인간이 아래로 내려온다는 것은 황제에게도 조금 신기한 기분이었다.
그들이 왜 제국의 속하기로 결정했는지는 아직까지도 딱히 밝혀진 게 없을 정도로, 그들은 제국의 입장에서 조금 신비한 존재들이었으니까.
'왜 이리도 피곤한 건지...'
아산족에 대한 생각을 하며 옷을 벗은 황제는 탕에 몸을 담근 채 눈을 감았다.
알 수 없는 피로가 황제의 몸을 묵직하게 만들었다.
'오늘 합궁은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이구나.'
어째서 이렇게 피곤한 걸까?
용을 잡았기 때문인가?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지칠 정도로 황제는 스스로가 나약해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정신적으로... 지친 걸지도 모르지.'
한참을 고민하던 황제는 대충 짐작 가는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오늘은 생각이 너무 많았다.
사실 지금도 황제는 망설이고 있었으니까.
정말 그 사건을 전부 용의 짓이라고 단정 짓고 끝내도 되는 걸까?
어쩌면... 자신은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황제를 괴롭혔다.
그만큼 지존의 결정은 무겁고, 중요하였기에.
작은 오판이 얼마나 큰 문제가 될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황제는 아직도 고민하고 있었다.
'그렇군.'
너무 생각이 많아서 피곤한 거였군.
황제는 일단 걱정을 그만하기로 했다.
이미 결정한 것에 더 체력을 써봐야 무의미했으니까.
이미 정해진 것을, 이제 와서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다.
"상선. 내가 그대와 알고 지낸 게 얼마나 되었지?"
상념을 끝낸 황제의 말에 뒤에서 조용히 있던 상선은 조금 놀랐다.
설마 자신에게 폐하께서 사적인 이야기를 건네올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짐이 아닌 나라는 호칭을 쓴 것 자체가 황제의 지금 질문은 지극히 개인적인 질문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올해로 벌써 15년째입니다."
그러나 그 당황도 잠시 금방 평정을 되찾은 상선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원래는 태자의 전속 내시이던 그는 태자가 황제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상선의 자리에 올랐다.
그가 상선으로 일한 것은 이제 2년이지만, 황제와 함께한 세월은 벌써 15년 가까이 되었다.
"참으로 길었구나."
황제는 새삼 오랜 인연이다 생각하며 상선에게 말했다.
생각해보면 자신을 늘 그림자처럼 따르면서 많은 것을 해준 상선이니, 황제는 뭔가 그에게 보답을 해주고 싶어졌다.
"그대의 노고는 익히 알고 있으니, 포상을 해야겠지. 원하는 것이라도 있는가?"
모처럼이니 선심을 쓰기로 한 황제의 말에 상선은 묵묵히 말했다.
"신이 원하는 것은 폐하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보필하는 것입니다."
그런 상선의 대답이 황제는 조금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런가..."
참으로 답답한 사내다. 금은보화를 달라하면 줄 거고,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달라해도 줄 텐데.
고작 곁에 좀 더 오래 일할 수 있게 해 달라니...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뭐, 싫다는 데 억지로 보상을 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중에 따로 금은보화라도 하사할 생각을 하며 탕에서 일어났다.
"짐의 곁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남아 있었구나."
늘 주변에 믿을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가까운 곳에 이토록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있었다.
'생각보다 내가 인복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군.'
황제는 그리 생각하면서 작게 웃었다.
조금...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대장은 폐하와 엄청 오래 알고 지낸 사이죠?"
사냥해온 늑대를 손질하고 있던 모용진은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던 세르나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 확실히 그런 사이긴 했다.
"그렇지."
황제가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했을 때부터 곁에 있었으니 20년은 되는 관계였다.
그래서 그런지 모용진에게 황제는 단순한 주군이 아니었다.
모용진에겐 목숨을 걸 수 있는 존재이자, 어쩌면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한 동생이었다.
"어릴 때 폐하는 어땠나요?"
세르나가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으로 모용진을 보며 묻자 모용진은 그때를 떠올려 보았다.
"음... 그때도 꽤 어른스러운 아이였지. 어릴 때부터 독살 위협에 시달려서 그런지 빨리 어른이 되었거든."
황제가 처음으로 독을 마셨을 때가 5살 때였나?
모용진이 빠르게 알아차리고 그 독을 급하게 몰아내지 않았다면 황제는 그때 죽었을 것이다.
가족조차 의심해야 하는 환경, 자는 중에서 암살자가 찾아오는 살벌한 환경. 그 환경이 황제를 너무나도 일찍 어른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우와... 황실도 지독하네요."
세르나는 그 말에 질린 표정으로 말했고 모용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독하지. 기미하는 상궁을 매수하는 방법도 자주 사용하고, 기미가 끝난 식사에 몰래 다시 타는 방법을 쓰기도 했어. 궁녀를 매수해 자는 사이에 습격이 있기도 했지."
나중에 가니까 황제는 독이 아예 안 드는 체질이 되어 버렸다.
그 체질이 모용진은 굉장하다 생각하면서도 측은하게 느껴졌다.
얼마나 많은 독살 시도를 경험했으면, 전설에나 나올 만독불침의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인지...
"황제가 믿을 수 있는 가족은 나하고, 황태후 폐하, 그리고 선제 폐하 밖에 없을 정도였으니. 그 정도가 아주 심했지."
모용진의 말에 세르나는 완전히 기가 질려 버렸다.
"엑... 끔찍하다. 가족도 못 믿는단 말이예요?"
모용진은 그 반응에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슬프게도 오히려 황제한테는 가족이 더 못 믿을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이 녀석과 같은 타인에게 더 마음을 열었던 걸지도 모르지.
태자란 신분을 잊고, 말단 병사로 생활했던 그 짧은 시간이... 지금의 황제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저 녀석은 알까? 말하는 걸 보니 잘 모르는 거 같았다.
"난 오히려 폐하께서 군인으로 있던 시절이 더 궁금한데."
오히려 모용진이 궁금한 것 그것이었다.
황제가 태자이던 시절 가출해서 병사가 되었을 때 일들, 그것이 더욱 궁금했으니까.
"아! 막내 시절 말이죠? 이상하게 의지가 되는 막내였죠. 보초도 잘 서고, 늘 선두에 서서 공도 가장 많이 세우고, 할바르 백부장이 그래서 그런지 많이 의존했어요."
"...폐하답네."
모용진은 그 말이 참 폐하답다고 생각하면서 웃었다.
어느 자리에 있어도 폐하는 변하지 않았을 거 같았다.
"막내가.... 아, 아니지 폐하께서 유독 잘 따르는 병사가 있었는데... 그 누구였지? 아! 빈손 오빠. 우리 부대에선 할바르 백부장을 빼고는 제일 고참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맨날 자기 보고 형이라고 부르라고 하고. 좀 별난 사람이었죠."
빈손?
모용진은 황제가 기분이 좋지 않을 때마다 찾는 사람의 무덤을 떠올리고는 숙연해졌다.
그렇군...
그 무덤의 주인은 모용진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폐하에게 큰 존재였던 모양이었다.
그제야 모용진은 황제의 야만족을 향한 이유를 알 수 없는 강한 증오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전쟁에서 이미 싸움을 포기한 자들도 전부 죽이던 황제의 잔혹함은 비정상적이었지만...
그 잔혹한 학살이 그토록 믿고 의지하던 이를 잃은 갈 곳 없는 분노를 표출한 것이었다면... 모용진은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던 황제의 행동을 이젠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목숨의 가치는 같다고 자주 말하던 황제에게... 그런 자신의 생각을 부정하게 만들 정도로, 빈손이라는 자는 황제에게 큰 존재였다는 이야기니까.
"저희... 이번에도 살아 돌아갈 수 있겠죠? 우리?"
세르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녀도 알고 있는 듯 했다.
이번 조사는... 확실히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를 조사였다.
다른 것도 아니고 요괴가 개입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돌아가야지."
모용진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반드시 살아 돌아가야 했다.
자신의 죽음이... 폐하를 슬프게 할 것을 알기에.
모용진은 절대 죽을 생각이 없었다.
"불침번은 내가 먼저 설 테니까 먼저 자라."
"...네."
모용진은 천막 안으로 세르나를 집어넣고는 자신도 천막 안에 들어가서는 그대로 앉아서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으으 추워. 대장은 안 추워요?"
침낭 안으로 들어가며 세르나가 덜덜 떨면서 묻자 모용진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안 추워."
"...부럽다."
침낭 안으로 들어간 세르나가 헛소리를 하는 것을 무시하면서 모용진은 내일 할 일을 생각했다.
앞으로 더 깊이 들어가야 할 테니까...
살아 돌아가기 위해선 끊임없이 내일을 대비해야 했다.
'여기가 황궁...'
황제의 침소에서 얌전히 앉아 있던 여인은 주변을 둘러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작고 마른 체구.
특이한 하늘색 머리카락은 길게 늘어트리고, 커다란 푸른 눈동자는 호기심을 가득 담고는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녀가 바로 황제의 열두 번째 합궁 상대인 마리프 아사노프.
전체적으로 귀여운 소녀 느낌이 물씬 나는 여인은 보기엔 이래도 이미 약관을 훌쩍 넘긴 완숙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궁녀가 입힌 화려한 한복을 입은 채 다소곳하게 앉아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신기하네요오."
길게 늘어지는 말투로 중얼거린 그녀는 곧 느긋하게 황제를 기다렸다.
그녀가 살던 곳에 비하면 이곳은 공기도 풍부하고, 자원도 풍부했으며, 밤에도 반짝반짝 거렸다.
'앞으로 여기서 살아가야 하는 거군요오.'
그녀는 이제부터 자신이 이곳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실감하며 눈을 잠시 감았다.
[그곳에서도 행복하렴, 너라면 잘 적응할 수 있을 거다.]
아버지의 말을 떠올리면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어색하긴 하지만 그녀는 확실히 이곳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끼이익.
그때였다.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폐하... 일까요오?'
그녀는 안으로 들어온 남자를 가만히 살펴보았다.
칠흑처럼 검고 고운 검은 머리카락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고, 그다음엔 신비하게 반짝이는 아름다운 금안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큰 키, 다부진 체격.
남자의 외모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온 그녀가 봐도 감탄이 나오는 외모의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훑어보고 있었다.
"마리프 아사노프인가."
"그렇사옵니다아. 폐하신지요오?"
느릿한 그녀의 말투를 들으면서 황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음..."
"?"
고개를 갸웃하는 그녀를 보면서 황제는 생각했다.
혹시 합궁 상대를 정하는 데 여인의 개성 같은 것도 보는 건가?
그만큼 이 여자도... 황제가 보기엔 조금 별난 여자 같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