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 각자의 밤
* * *
"호오 온천 말이냐?"
한참 서재에서 책에 파묻혀 있던 마리아는 나르타의 제안에 눈을 반짝였다.
얼마나 이곳에서 오래 있었는지 그녀의 눈밑은 검게 죽어 있었고, 로브는 흘러내려서 그녀의 하얀 속살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었다.
온천이라...
그녀는 그제야 흘러내리는 로브를 정리하고는 나르타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이곳에 올 때 보였던 그 온천이냐?"
"네, 저희 가문의 온천을 이용해 보자고요. 여기까지 왔는데 그 유명한 온천을 안 가보는 건 아쉽지 않나요?"
나르타가 웃으면서 말하자 서재에서 돗자리를 펴고 요가를 하고 있던 세헤라자드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저는 관심이 있사옵니다."
얇은 옷을 입고 유연하게 몸을 꺾는 그녀의 모습은 참으로 야릇해보여서 나르타는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본녀 역시 그러하다. 온천이라... 그래 한 번 가 보자꾸나. 어디로 가면 되느니?"
마리아가 당장에라도 갈 기세로 묻자 나르타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따라오세요. 이미 준비해 두었으니까요."
나르타는 둘을 데리고 이동하면서도... 오르테가도 이곳에 있었으면 좋았을 거 같단 생각했다.
그녀도 있었으면 더 재미있었을 텐데.
[온천? 나도! 나도!]
나르타는 오르테가의 반응을 상상하면서 작게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생각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오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이건 확실히 잘 만들었다. 역시 환가의 무구들은 수준이 높아."
레오니는 여화가 가져온 대도를 만져 보며 감탄했다.
이쪽의 날 처리도 훌륭했고, 무게 중심도 잘 잡혀 있어서 휘두르기도 편했다.
무게도 충분해서 베는 힘도 충분히 있는 거 같았다.
"이 랜스야말로 굉장한걸? 역시 이런 쪽의 기술은 비렌체 가문을 따라올 수가 없네."
여화는 레오니가 보여준 랜스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 단단함.
확실히 뭐든 뚫어버릴 거 같은 묵직함이 느껴지는 렌스를 만지작거리면서 여화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다음엔 갑옷을 보여줄게. 사실 우리 가문이 있는 라하마는 중갑옷 기술이 더 발전한 곳이라서."
"그러면 난 다음엔 월도를! 환운 공이 직접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보물이거든. 보면 레오니도 깜짝 놀랄 걸?"
한참 병장기 이야기로 즐겁게 담소를 나누는 둘을 보면서 달리아는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녀는 저런 무기엔 별로 관심이 없었고, 애초에 왜 저 둘이 자신의 처소에 와서 이러고 있는지 그 이유도 잘 몰랐으니까.
"달리아 씨는 그 유명한 사냥 부족 출신이죠? 대단한 사냥꾼이라면서요?"
그때 여화가 멍하니 앉아 있는 달리아에게 말을 걸어왔다.
"응? 그렇지이...? 아, 반말하면 안 되나?"
자신도 모르게 반말을 하던 달리아가 당황한 얼굴로 되묻자 여화는 고개를 저었다.
"편하게 말하셔도 괜찮아요. 어차피 우리 셋만 있는 공간인데요."
"그럼 사양 안 하지! 너희도 편하게 말해도 괜찮아. 나이 차이 나 봐야 얼마나 난다고."
"그럼... 그러지 뭐."
여화는 그녀의 제안을 사양하지 않았고, 레오니도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는 뛰어난 사냥꾼이지?"
"어? 당연하지. 근데 왜?"
여화는 달리아의 대답에 눈을 반짝이면서 말했다.
"조만간 레오니랑 같이 사냥가려고 하는데 이런 건 역시 경력자가 있으면 좋잖아. 어때? 같이 갈래?"
"갈래!"
달리아는 사냥이라는 말에 바로 대답했고, 여화는 그 말에 웃었다.
"다행이다. 레오니! 언니도 간데."
"그거 다행이네."
레오니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고, 달리아는 신나서 자신이 생각한 사냥 명소를 쫘악 읊기 시작했다.
"나베크 산도 괜찮아. 거기에 회색곰이 많다고 들었거든, 아니면 조금 무난하게 아랑가티 초원? 거긴 지금 봄일 텐데 이때 동물들이 한참 왕성하게 활동하거든. 아! 맞아 디베라도 괜찮아. 거긴 내 고향이기도 하니까 좀 더 자세하게 알려줄 수 있어."
"어디로 갈까?"
"정글은 좀... 벌레도 많고, 역시 아랑가티가 나을 거 같은데?"
여화의 질문에 레오니는 일단 디베라는 배제했다.
정글은 벌레가 많아서 그녀는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마침 봄이라는 아랑가티 쪽이 그녀는 확실히 끌렸다.
"아랑가티? 좀 머네. 폐하께서 허락해주시려나?"
여화는 지도를 보며 작게 중얼거리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해주겠지?"
"난 몰라."
여화의 애매한 물음에 레오니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애초에 그녀는 황제와는 별로 오래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니라서... 잘 몰랐으니까.
"그런 쪽으로는 굉장히 자유롭게 두는 사람 같던데. 허락해주지 않을까?"
둘의 걱정스러운 얼굴에 달리아는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녀가 볼 때 황제는 자신들이 무얼 하든 기본적으로 방임하는 느낌이 강했으니까. 좀 먼 곳으로 여행을 간다고 해서 말릴 거 같지 않았다.
"한 번 물어보지 뭐. 내가 언니니까 대표로 물어보고 올게."
오르테가와 나갔다고 했는데 지금쯤이면 돌아오지 않았을까? 달리아는 그런 생각하면서 모두의 기대를 받고 황제를 찾아 떠났다.
'어디 계시려나?'
집무실에도 없었고, 황제의 처소에도 아무도 없었다.
오르테가의 처소에 있나 해서 그쪽으로 가 봤는데도 없자 달리아는 아직 폐하께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밖에서 자고 오시려나?'
그럼 내일 아침에 물어보지 뭐.
달리아는 그런 생각하면서 여화와 레오니가 기다리고 있을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흥미롭네요. 관측 마법으로는 이런 것도 알 수 있는 겁니까?"
리사의 감정 결과에 미령은 흥미를 숨기지 않았다.
미령이 가져온 책은 어떤 시기에 쓰여졌는지도 알려지지 않은 고서였는데... 그녀들은 명확하게 그 시기를 밝혀냈으니까.
"물론이죠. 관측 마법은 대상에게서 정보를 관측하는 마법. 마법사의 역량에 따라 많은 것을 알려 준답니다."
그녀가 좋은 보석을 구분하는 것도, 역사적인 물건을 잘 알아보는 것도, 그녀의 특기 마법인 관측 마법의 힘이었다.
"다른 종류면 몰라도 이 마법은 대륙 최고라고요. 우리 둘은."
관측 마법에 있어서는 그 대마법사도 한 수를 접어 준다는 쌍둥이.
대마법사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고서의 작성 시기를 알아낼 정도면 그 말은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리라.
미령은 그녀들의 능력에 주목해서 이렇게 매번 제작 시기가 밝혀지지 않은 유물들을 들고 와선 그 시기를 측정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에 적힌 요괴에 대한 내용은..."
"전부 사실일 거 같은데요. 그렇지?"
"제가 볼 때도 그런 거 같아요."
니사는 낯가림이 심한 편이지만 매번 이렇게 자신들을 찾아와 이것저것 물어보는 미령은 친근한지 제법 편하게 말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 여기 있는 사람들과는 이미 니사도 제법 친해진 상태였다.
"차를 타왔으니까 같이 마셔요. 과자도 있어요!"
그때 쟁반에 차와 다과를 챙겨 온 설화가 해맑게 웃으면서 제안했다.
"고마워요. 언니!"
"잘 먹겠습니다아."
리사가 그런 설화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있을 때, 어느새 자리 잡은 마리프가 느긋한 말투로 찻잔을 받아들였다.
"일어났어요?"
"네에... 흐아암. 덕분에 잘 잤답니다아."
느긋하게 하품을 하며 마리프가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자 리사는 웃었다.
정말이지... 저 언니는 너무 느긋해서, 자신까지 풀어질 거 같은 기분이었다.
"냥! 먹을 거냐?"
그 순간 고양이 모습으로 구석에서 자고 있던 케르가 냄새를 맡고는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 일단 옷을 입어요! 옷을!"
그런 그녀의 모습에 니사는 다급하게 다가가선 케르에게 옷을 입혔다.
고양이 모습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면 당연히 알몸이지만... 그녀는 수치심도 없는지 태연하게 저 모습으로 방안을 활보하고는 했다.
"흐냐."
그런 니사의 손에 편한 셔츠 차림이 된 케르는 조금 억울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달리아도 거의 헐벗고 다니는데냐..."
"그 사람은 그게 문화잖아요. 그리고 가릴 건 제대로 가리고 있고요."
니사는 그런 케르를 혼내면서도 자연스럽게 그녀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하긴 리사도 저 귀는 만지다 보면 계속 만지게 되니까 그녀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너무 만지지는 말라냥."
"하아... 치유되는 기분."
그런 그녀의 행동이 익숙한지 케르는 덤덤하게 말했고, 니사는 잔뜩 풀어진 얼굴로 한참을 귀를 만지작거렸다.
"냐. 이 손으로는 집을 수 없다냐...'
케르는 과자를 먹으려다가 고양이 손으로는 도저히 집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뭐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변해라냐."
그러자 그녀의 손이 멀쩡한 인간의 손으로 변했다.
"어라라?"
그걸 본 마리프가 느긋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자 케르는 과자를 먹으면서 말했다.
"우물! 둔갑이다냐."
"많이 있으니까 천천히 드세요. 부족하면 제가 더 해 오면 되니까요."
그런 그들을 보면서 뒤늦게 들어온 미르예프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 과자 전부 언니가 만든 건가요?"
리사가 과자를 한 입 먹고 놀란 얼굴로 묻자 미르예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부족하지만 주방을 잠시 빌려서... 혹시 입맛에 안 맞으시나요?"
"아뇨! 엄청 맛있어요. 요리 잘하시네요?"
"아, 아뇨 요리는 잘한다까지는... 그저 마리프 비께서 가르쳐준대로 했을 뿐인 걸요."
"전 그저 하는 법만 몇 번 보여줬을 뿐이랍니다아. 이건 다 미르예프 씨의 솜씨인 걸요오."
느긋한 말투로 말한 마리프는 과자를 우물거리면서 말했다.
"좀 있다가 케이크를 만들어 볼까 하는데 혹시 먹을 사람이 있나요오?"
마리프의 말에 케르는 바로 손을 들었고, 대부분이 손을 들었지만 유일하게 미령만이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전 이만 가 봐야겠네요. 내일 조정에 출근해야 하는 터라..."
"저런... 아쉽네요오."
그런 미령의 대답에 마리프는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그녀를 딱히 잡지 않았다.
"그, 그런데 밤에 너무 많이 먹으면 살이 찌지 않나요?"
니사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하자 마리프가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괜찮답니다아. 맛있으면 0칼로리인걸요오."
그런가...?
그녀들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 케르가 바로 동조했다.
"그렇다냐!"
"그, 그렇군요."
니사는 그 박력에 압도 되어서는 고개를 끄덕인 뒤 과자를 집어서 가볍게 우물거렸다.
"맛있어..."
"맛있지? 많이 먹어."
리사는 맛에 감탄하는 니사에게 과자를 좀 더 챙겨 주고는 차를 마셨다.
설화는 마리프와 미르예프와 함께 무슨 케이크를 만들지 의논 중이었고, 케르는 과자를 하나라도 더 먹겠다고 버둥거리고 있었으며, 니사는 과자를 먹으면서 분주하게 상단의 회계 자료를 검토하고 있었다.
그녀는 리페이아 가문에서 운영하는 상단의 회계도 담당하고 있었기에 이곳에 모였던 사람들 중에선 미령 만큼이나 바쁜 편이었다.
'나야 뭐... 딱히 할 게 없지만.'
그런 동생과 달리 딱히 하는 일이 없는 리사는 그저 마음 편하게 과자를 먹으면서 내일 뭘 할지를 고민했다.
'옷을 좀 살까?'
마리프 언니나 설화 언니, 미르예프 언니는 맨날 같은 옷만 입는 거 같은데 이 기회에 같이 나가서 옷이나 사야겠다.
리사는 그런 생각하면서 웃었다.
이곳에서 얻은 인연은... 생각보다 훨씬 그녀의 마음에 들었으니까.
"...춥네."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폭설에 산에서 내려오는 걸 포기하고 전망대 근처에 만들어둔 산장에 머물기로 한 오르테가는 덜덜 떨면서 난로에 장작을 넣었다.
"그냥 주술로 날씨를..."
"괜히 문제 생길 짓 하지 말고 오늘은 여기서 자라."
그런 오르테가를 제지한 진위는 난처한 얼굴로 난로를 보고 있었다.
황제가 미복잠행 중에 외박이라니?
그런 적이 없던 것은 아니나... 확실히 드물었다.
무엇보다도...
'이 녀석이랑 있으면...'
진위는 슬쩍 몸을 떨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녀석과 같이 하룻밤을 보낸다면...
"아, 춥다. 추워. 추울 땐 사람의 체온이 딱이라는데..."
힐끔.
아니나 다를까 자꾸만 자신을 힐끔 쳐다 보면서 그 음흉한 시선을 보내는 저 녀석이 문제다.
진위는 그녀의 눈을 보고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오늘 자신은...
"하... 역시 이걸로는 안 되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해야지 알아듣지? 너?"
어느새 자신에게 다가와 자신을 벽에 몰아 세운 오르테가를 보면서 진위는 몸을 떨었다.
오늘 자신은... 여기서...
"야. 벗어."
이 녀석에게 잡아먹힌다.
진위는 이게 부질없는 발버둥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에게 말했다.
"여기서... 할셈이냐?"
"다 큰 남녀가 밤에 한 방에 있는데 할 게 이거 말고 더 있어? 엄살 그만 부리고 얼른 벗어라? 아니면 내가 벗겨줘?"
오르테가의 강압적인 말에 진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사실 그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이 산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자신은 오늘 여기서... 이 성욕 괴물에게 잡아먹힐 운명이라는 것을 말이다.
* * *